수행기

그 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 왔다, 재가안거 63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1. 11:21

그 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 왔다, 재가안거 63일차
 
 
한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 같다.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 소리가 아쉬웠다. 더 달릴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더 달려도 지금 이 상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좌선은 대체로 성공적이다.
 
오늘 재가안거 63일째이다. 평화로운 백권당의 일요일 아침이다. 벌써 몇 번째 맞는 일요일지 모른다. 안거를 시작한 이래 여러 번 맞이 했다. 지금은 카운트 하는 것이 의미 없을 것 같다.
 
오늘 아침은 쌀쌀 했다. 아침 6시 반에 집에서 나왔을 때 온도는 15도 이하였다. 점퍼 입기를 잘 했다. 긴 팔 티 입기를 잘 했다.
 

 
배낭에 먹을 것을 쌌다. 아침에 먹을 것이다. 오늘은 고구마 두 개와 계란을 준비 했다.
 
오늘은 추석 연휴의 연장이다. 그리고 10월 1일이다. 오늘 국군의 날이다. 대규모 퍼레이드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관심 없다.
 
일체 TV를 보지 않는다. 뉴스가 보기 싫어 보지 않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뉴스는 보지 않을 권리도 있다. 인터넷 뉴스도 보지 않는다. 보는 것은 오로지 유튜브와 페이스북과 카톡이다.
 
정보를 접하는 것이 단순해졌다. 정보는 선택적으로 취한다. 유튜브에서는 선택적으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어쩌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보기 싫은 것은 보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을지 모른다.
 
지나치게 이념투쟁 하는 사람들이 있다. 카톡방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일년 365일 이념에 대한 것만 올린다. 정서적인 것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런 경우 패스 한다. 그렇다고 카톡방을 나오지는 않는다.
 
페이스북에서 이념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도 모르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 차단한다. 마치 자신의 스트레스를 배설하는 창구로서 페이스북을 활용하는 것 같다.
 
뉴스를 보지 않으니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집에서도 사무실에서도 뉴스를 보지 않는다. 식당에도 뉴스가 틀어져 있으면 들어가지 않는다.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어떤 식당 주인은 예능 프로 채널만 틀어 놓는 것 같다.
 
아침에는 어떤 정보도 접하지 않는다. 죄선에 방해 되기 때문이다. 한번 뉴스를 접해서 마음에 동요가 일어나면 앉아 있기 힘들다.
 
메일도 열어 보지 않는다. 업무용 메일을 열었는데 품질사고라도 났다면 그 것을 해결하기 전에는 앉아 있지 못할 것이다.
 
오전은 명상과 관련된 것만 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정보의 차단이다. 아침에는 말도 하지 않는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는다. 당연히 카톡이나 페이스북도 열어 보지 않는다. 명상이 끝나고 후기를 작성한 후에 열어 본다.
 
오늘 아침 좌선은 8시 30분에 시작 했다. 좌선에 앞서 사무실 정리를 했다. 화분에 물을 준 것이다. 난을 포함하여 30개가 넘는 화분이 있는데 일주일에 한번 물을 준다.
 
명상을 시작할 때는 가능한 편안하게 입는다. 양복 바지 대신에 추리닝 바지로 갈아 입는다. 좌선할 때 편하다. 화장실도 미리 가 둔다. 고구마와 계란, 치즈를 곁들인 샌드위치 한쪽으로 식사를 한다. 커피를 마신 후에 좌선에 들어간다.
 
좌선할 때 졸릴 수가 있다. 혼침이 되면 좌선을 할 수 없다. 미리 예방해야 한다. 커피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앉아 있다 보니 깜박 잠이 들었다. 이런 잠은 최상의 잠이다.
 
지게꾼의 행복이 있다. 지게꾼이 산에서 나무를 한 짐 했다. 그늘에서 쉬고자 했다. 오후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 잠 잤다. 한 잠 자고 나서 생각하니 세상에 이런 행복이 없었던 것이다.
 
지게꾼은 자신의 행복을 알리고 싶었다. 왕에게 알리고 싶었다. 왕도 부럽지 않은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 숨 자는 것이다.
 
왕은 지게꾼의 행복을 일축했다. 왕은 왕 나름대로 행복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부자는 부자의 행복이 있고 가난한 자는 가난한 행복이 있음을 말한다. 처지는 다르지만 각자 즐길거리가 있음을 말한다.
 
낮잠 자는 것도 행복이다. 잠이 들락말락 할 때 행복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이를 나무꾼의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나무꾼은 행복하다고 했을까? 아마 그것은 잠이 들락말락 할 때, 그리고 잠 들었을 때, 그리고 잠에서 깨었을 때 자신을 잊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무아의 상태가 되면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을 잊어 버렸을 때 최상의 행복이 된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고 했다.
 
열반은 명색이 소멸된 상태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를 말한다. 무아의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가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다.
 
열반의 상태는 무아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빠라마수카라하여 궁극의 행복이리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무아인자가 행복을 느낄까?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는 “벗이여, 바로 거기에 느낌이 없는 것이 행복입니다.”(A9.34)라고 말했다.
 
불교에서는 역설적으로 이처럼 행복한 느낌이 없는 상태가 궁극적 행복이라고 했다. 최상의 행복은 느낌이 없어서 최상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열반이 궁극적인 행복인 것은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열반의 상태가 되면 지각과 느낌이 소멸될 뿐만 아니라 의식까지 소멸된다. 적멸의 상태가 되었을 때 느낌이 있을 수 없다.
 
행복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다. 감각적 행복에서부터 선정의 행복, 열반의 행복이 있다. 모두 행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열반의 행복을 제외하고 모두 느낌이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감각적 행복을 추구한다. 시각, 청각 등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말한다. 대표적으로 먹는 것이다. 요즘 TV나 유튜브에서 먹방이 유행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먹는 것은 오욕락을 대표한다. 먹는 것 하나에 시각적 즐거움, 청각적 즐거움, 후각적 즐거움, 미각적 즐거움, 촉각적 즐거움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한 상 거하게 차려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은 그림의 떡이다. 사진에 산해진미가 있어도 시각적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을 올려 놓은 사람은 오감으로 먹을 것이다.
 
선정의 즐거움이 있다. 그런데 선정의 즐거움은 감각적 즐거움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아난다여, 만약 어떤 사람이 ‘그것이 뭇삶이 체험하는 최상의 즐거움과 기분 좋음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난다여, 그 즐거움보다 훨씬 아름답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난다여, 어떠한 것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아름답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인가? 아난다여, 세상에서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사유를 갖추고 숙고를 갖추어,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으로 가득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다. 아난다여, 이것이 그 즐거움보다 훨씬 훌륭하고 탁월한 다른 즐거움이다.”(M59)
 
 
부처님은 선정의 즐거움에 대하여 탁월하다고 했다. 감각적 욕망의 행복이 아무리 강렬해도 선정의 즐거움에 비하면 십육분의 일도 되지 않음을 말한다. 여기서 즐거움이라는 말은 행복과 동의어이다.
 
부처님 말씀은 역설적이다. 선정의 행복이 감각적 행복보다 탁월한 것에 대하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복을 추구한다. 지금 행복한 자는 이 행복이 계속 되기를 바라고, 지금 괴로운 자는 이 괴로움이 한시바삐 끝나서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사람들 대부분이 추구하는 행복은 감각적 행복이라는 것이다.
 
감각적 행복과 감각을 여의는 행복이 있다. 선정의 행복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내려 놓음으로써 이루어진다. 만일 앉아 있는 자가 감각적 욕망에 가득 차 있다면 5분도 앉아 있기 힘들 것이다.
 
오늘 재가안거 63일째를 맞이하여 한시간 앉아 있었다. 거의 한시간 내내 행복한 상태였다. 그렇다고 이런 상태가 선정 상태인지 알 수 없다. 까시나 수행 등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좌선을 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한다. 앉자마자 주관찰 대상을 복부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예비수행이 잘 되어 있으면 앉자마자 평온이 찾아 올 수 있다.
 
오늘 좌선은 앉아 있은지 몇 분도 되지 않아 편안해졌다. 그렇다고 한시간 내내 평온이 유지 된 것은 아니다. 마음은 늘 가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좌선을 할 때는 늘 복부의 움짐임에 가 있어야 한다. 마음이 주관찰 대상에 가 있지 않으면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기 쉽다. 그런데 주관찰 대상에 대한 새김이 있을 때 망념이 치고 들어오더라도 금방 제압된다. 망상이 집을 짓지 못하는 것이다.
 
주관찰 대상에 집중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기 때문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묶어 두었을 때 마음은 편안해진다. 이런 것이 아마도 선정의 행복일 것이다.
 
선정의 행복은 미세한 것이다. 눈을 감고 가만 앉아서 주관찰 대상에 마음을 두었을 때 잔잔한 행복을 맛 볼 수 있다. 이런 행복은 감각적으로 느끼는 거친 행복과 비교 되지 않는다.
 
감각적 행복은 강렬하다. 그런데 강렬한 만큼 허무하다는 것이다. 마치 TV에서 허무개그를 보는 것 같다.
 
사람은 먹을 때 행복을 느낀다. 맛 있는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 갈 때 행복을 만끽한다. 그러나 무한정 먹을 수 없다. 어느 정도 먹으면 더 이상 먹을 수 없다.
 
먹는 것은 한계가 있다. 감각적으로 즐기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말한다. 또한 허무하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나면 남는 것은 텅 비고 아무 것도 없는 상태와 같다. 마치 텅 빈 객석을 보는 것 같다.
 
감각을 즐기는 사람들은 더욱더 자극적인 감각을 즐기고자 한다. 감각적 욕망은 아무리 해도 만족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박을 하고 마약을 한다.
 
도박은 해도 해도 지치는 것이 없다. 먹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도박은 한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도박도 시들해질 때가 있을 것이다. 다음 단계는 마약이다.
 
부자들은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재난이 있을 수 있다. 감각을 즐기는데 있어서 비용에 한계가 없는 부자들은 최상의 감각을 즐기고자 한다. 밥을 열 끼, 백 끼 먹는 것과 같은 즐거움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약이다.
 
감각적 즐거움은 끝판왕은 마약이라고 볼 수 있다. 감각만 즐기는 삶을 사는 자들이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마약이다. 마약을 하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는 것과 같다. 밥을 백 끼, 천 끼 먹는 것과 같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감각적 즐거움은 허무한 것이다. 욕망을 추구하면 할수록 비례하여 허와 무도 커진다. 그러나 선정의 즐거움은 이와 다르다.
 
선정의 즐거움은 역설적으로 감각의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에서 온다. 그래서 초선정의 조건을 보면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는 것(vivicceva kāmehi vivicca akusalehi dhammehi)”(S45.8)이라고 했다.
 
한시간 동안 대체로 집중은 잘 되었다. 이는 한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상태가 선정 상태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주관찰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을 새겼다.
 
마음은 늘 주관찰대상에 가 있어야 한다. 마음이 평온할 때, 눈을 감은 눈 앞에 환함을 느낄 때 부품과 꺼짐이 단계적임을 알 수 있다. 마치 행선할 때 육단계로 새기는 것과 같다.
 
마음이 평안해지면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도 분명해지는 것 같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새기는 것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한번 숨을 쉴 때마다 부풀어오는 여러 움직임들의 모임이 여러 단계로 많이 생겨나면서 분명하다.”(2권, 260쪽)라고 했다.
 
동작 하나에도 여러 단계가 있다. 걸을 때도 여러 단계가 있다. 이는 행선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팔을 뻗을 때도 여러 단계가 있다. 앉을 때도 여러 단계가 있다. 이 모든 단계는 조건적으로 발생했다가 사라진다. 다음 동작과 섞이지 않는다.
 
요즘 걸을 때는 마음이 경쾌하다. 가능하면 새기며 걸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걸을 때는 행선할 때처럼 육단계로 할 수 없다. 단지 “왼발, 오른발”하며 걷는 것이다. 오늘 아침 백권당으로 향했을 때 그랬다.
 
식사할 때 아무 생각 없이 먹어서는 안된다. 가능하면 새기며 먹어야 한다. 오늘 아침 백권당에서 고구마, 계란, 샌드위치를 먹을 때 그랬다.
 
일상에서 새기며 살아가고자 한다. 전에 없던 일이다. 전에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많았다. 잘못하면 넘어질 수 있다. 그런데 재가안거를 하고 나서부터는 의도적으로 새기고자 한다. 알아차림을 유지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 새김을 하고자 하다 보니 무엇이든지 천천히 하게 된다. 발을 움직이는 것도 천천히 한다. 누군가 이런 장면을 본다면 태평스럽게 걷는다고 말할 것이다.
 
모든 것을 천천히 하고자 한다. 일없이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것이 수행인지 모른다.
 
그 동안 너무 바쁘게 살아 왔다. 이렇게 천천히 걷고 천천히 먹으니 마음도 느긋해지는 것 같다.
 
 
2023-10-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