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초자아는 있는 것일까? 재가안거 60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28. 12:28

초자아는 있는 것일까? 재가안거 60일차
 
 
몸과 마음이 펀안하다. 일년에 이런 날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좌선에서는 지극한 편안함을 느꼈다. 일시적으로 배의 부품과 꺼짐도 사라졌다. 감은 눈에 오로지 평안함만 느껴졌다. 이런 상태가 계속 되기를 바랬다.
 
오늘은 재가안거 60일째이다. 드디어 6자를 찍었다. 재가안거라고 스스로 이름 붙여 안거에 들어간 이래 두 달이 되었다. 안거는 언제 끝나는 것일까?
 
담마와나선원 밴드에 공지가 떴다. 10월 22일(일)에 탁발법회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담마와나선원 운영위원장 짠디 회장에 따르면, 우안거 해제가 다가옴에 따라 빤냐와로 스님을 비롯하여 9분의 상가 스님을 초청하여 탁발법회를 열 것이라고 했다.
 
우안거 해제는 언제일까? 달력을 보니 10월 29일이다. 이 날은 음력으로 9월 보름날이다. 탁발법회를 하는 것은 일주일 앞당겨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재가안거는 10월 29일까지 가야 한다.
 
오늘 컨디션은 좋았다. 잠을 많이 잔 것이다. 그렇다고 아주 늦게까지 잔 것은 아니다. 아침 7시 가까이 되어서 일어났기 때문에 평소보다 많이 잔 것이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꿈도 많이 꾸었다. 늦게 자리에 일어 났을 때 컨디션이 좋았다. 오랜만에 잠다운 잠을 잔 것이다. 욕실에서 거울을 보니 인격이 달라 보였다!
 
잠을 잘 자야 한다. 잠을 잘 자지 못하면 건강도 좋지 못하다. 잠을 잘 자야 면력이 생긴다. 잠을 잘 자지 못하면 면역력이 약화되어서 질병에 걸리기 쉽다.
 
잠을 잘 잔 날과 잠을 못 잔 날의 구별이 있다. 그것은 거울을 보면 알 수 있다. 잠을 잔 날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이 안정적이다. 그러나 잠을 잘 못 잤을 때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 없다.
 
항상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은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다른 것은 다 될지 몰라도 잠만은 욕망대로 되지 않는다. 잠은 잠이 와야 잠을 자는 것이다. 깨달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잠과 깨달음은 유사성이 있는 것 같다. 잠은 잠이 와야 자듯이, 깨달음 역시 깨달음이 와야 깨닫는다. 깨닫겠다고 욕심 낸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깨닫겠다는 마음을 내려 놓았을 때 깨닫게 되지 않을까? 좌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좌선을 할 때 잘 하고자 한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오늘은 한 개도 놓치지 않으리라.”라고 마음 먹는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컨디션이 엉망일 때 좌선을 하면 고행이 되기 쉽다.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에 한시간을 억지로 앉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앉으면 짧은 시간 안에 집중이 되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좌선은 8시 46분에 시작되었다.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 좌선에 들어갔기 때문에 평소와는 달랐다. 좌선을 시작한지 20분이 되었을 때 평안함이 찾아 온 것이다.
 
좌선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알 수 있는가? 이는 사무실 명상공간이 철로 변에 있기 때문이다. 전철 1호선 철로 변에는 철공소가 연달아 있는데 라디오에서 시보를 알리는 음악소리가 있기 때문이다.
 
최상의 컨디션에서 최상의 좌선이 되었다. 매일 오늘 같은 날만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평안한 마음이 계속 유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눈을 감고 꼼짝 앉고 앉아 있는다. 오로지 마음의 문만 열어 놓았다. 또 하나는 청각의 문이다. 귀로 들려 오는 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건물전체에서 나는 저주파의 기계음은 피할 수 없다.
 
안거 처음에는 소리에 민감했다.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우뢰와 같이 들렸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기계음도 거슬렸다. 그래서 귀마개를 하고 명상하고자 했다. 그러나 시중에서 구입한 귀마개는 무용지물이었다. 구멍이 뚫려 있어서 완벽하게 차단되지 않았다.
 
가장 이상적인 명상공간은 빈 집일 것이다. 숲속에 빈 집이나 흙집 같은 것이다. 동굴도 좋을 것 같다. 돈황이나 투루판에 가면 수많은 동굴이 있는데 명상하기 최적의 장소라고 본다.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생업을 가진 자가 생업을 포기하고 멀리 가서 앉아 있을 수 없다. 주어진 현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귀가 거슬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배에 집중하면 저감 되는 것 같다.
 
순간적으로 평안함이 찾아 왔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감지 되지 않았다. 몸의 감각은 느낄 수 없었다. 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가 되었다.
 
몸이 나른해짐과 함께 눈 앞에 지극한 평안이 찾아 왔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었다. 그러나 제행무상이다. 마치 날씨가 변화무쌍하듯이, 평온도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 부품과 꺼짐을 감지하게 되었다.
 
부품과 꺼짐은 분명했다. 이는 새김이 분명한 것과 같다. 집중이 된 상태에서 새김은 저절로 되는 것 같다.
 
집중이 된 상태는 새김이 있는 상태와 같다. 이럴 때는 번뇌와 망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자각만 있게 된다. 이 자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언젠가 혜민스님 글을 보았다. 스님은 글에서 지켜보는 자에 대하여 썼다. 명상을 했을 때 전체적으로 지켜 보는 자가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한 비판 글을 쓴 바 있다. 어떤 내용인가?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깨달음이란?) 
 
 
깨닫는다는 것은 
깨달음이 뭐냐고 묻는 그 놈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로 알아채는 그 주인공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글씨를 보는 그 놈을 역으로 반조해서 보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눈 뒤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눈뒤는 무형상이라서 컴퓨터 모니터보듯 볼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떨어져 나가면 그것을 확인할수는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이 떨어져 나가 마음이 고요하고 비여있지만
한 생각이 뽀록하고 올라오면 
그 생각이 일어 났다는 것을 그 놈이 바로 알아채요.
 
 
그럼 조금전까지만 해도 텅텅비어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엇이 생각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까요?
텅텅비어 고요했는데 그 텅텅비어 고요한 것이
죽은 것이 아니고 살아있다는거
그리고 지성知性이 있어서 빛보다 빠르게 안다는 거
텅텅비어 아주 고요한 상태로 살아있는 그것이 내 본성입니다.
그것이 알아챔, 앎 자체입니다.
 
내면의 빛을 본다던가
천상의 소리를 듣는다던가
천상에 있는 듯한 말할수 없는 지복감이나
부처님, 예수님을 명상이나 기도중에 만난다던가
화두가 깨지고 밑둥이 확 빠진듯한 느낌이나
내 몸이 온 세상을 비추는 거울처럼 투명하게 변한 상태
내 몸이 완전히 사라지는 듯한 경험이 아니고
 
 
오직 
오직
오직 앎만이 해탈을 시켜 줍니다.
 
 
그것은 원래부터 해탈할것이 없었다는 것을 아는 앏입니다.
그런데 이 앎은 앎 스스로를 확인할때 그렇다는 것을 앎니다.
즉 이 앎은 희한하게도 앎 스스로를 확인 할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앎 스스로가 스스로를 확인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아는 그놈, 
즉 앎자체가 스스로를 깨닫는 순간 온세상에 앎만 홀로있다는 것을 압니다.
태초부터 그 앎이 혼자라는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하나의 앎이 묘妙를 부려서 
둘로 셋으로 나온후 원래 하나라는 것을 잊어 버린것입니다.
왜냐면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 앎은
개념적 앎이 아닙니다.
생각으로 아는 앎이 아닙니다.
생각이 완전히 끊어져 나간후에 
그 마음 바탕을 확인한 앎입니다. 
즉 텅텅 빈 본성이 듣고 말하고 쓰고 다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텅텅 빈채로 있는 그 본성은 듣고 말하고 쓰는 것에 
한번도 물든 적이 없습니다.
즉 아주 고요히 텅빈채로 있는 그것이 즉 앎입니다.
다시 말하면 빈 (마음의식) 공간=앎 자체입니다
 
 
그런데 그 앎을 통해서 
눈을 떠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앎에서 공간적으로 펼쳐진 세상입니다.
즉 앎 자체가 공간화 되어 3차원 영상으로 만들어진 세상입니다.
그러나 그 앎과 공간안의 대상들이 둘이 아닙니다.
이래서 일체유심一切唯心 마음뿐 입니다.
 
 
하나다라는 것을 스스로 확인한 앎자체가 
눈을 떠 세상을 보면 
비여있다는 앎이 물질에 스며들어 보입니다.
즉 물질, 사람, 소리 모든 것이 있으면서도 비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앎이 물체를 투과하면서 자성自性 없이 비여서 있음을 스스로 앎니다.
 
 
그 앎안에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시간이 없고 영원한 현재입니다.
공간도 없고 앎 자체입니다.
앎에서 펼쳐 놓으면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처럼 보일뿐입니다.
 
 
이 앎은 태어난 적도 죽은 적도 없습니다.
텅텅빈채로  아주 아주 고요한 그 놈이 알고 보고 말하고 다 합니다.
또 스스로를 확인하여 알수 있습니다.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이라는 사실을 
하나(뿐인) 님이 바로 그것이라는 사실을
보는 觀 놈 스스로가 自 있는 그 자리 在,  관자재 보살이 이것이라는 것을
둘이 아닌 불이문 不二門에 들어간다는 것이 바로 그 앎이라는 사실을
비어서 고요한데 영묘하게 아는 공적영지 空寂靈知가 바로 이거라는 사실을
눈앞에 홀로 밝은 이놈! 
이 앎만 또렸합니다!
 
 
이 앎은 도착하려는 피안에서 
한발자국도 떠난적이 없었음을 
아는 부처의 앎입니다!
 
 
그런데 그 앎안에는 부처도 사실 없습니다.
오직 앎만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도 알수 없습니다.
 
(혜민스님, 깨달음이란)
 

 
이 시는 2014년 혜민스님의 블로그에서 발견한 것이다. 한국불교 선사들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 한국불교에서는 진짜 나를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혜민스님은 그 놈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일까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아는 그 놈, 졸리면 졸리는 지 아는 그 놈을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라 하였다.
 
혜민스님은 모든 것을 지켜 보는 자가 있다고 했다. 그것을 관자재라고 했다. 지켜보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도 이런 자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혜민스님이 말하는 그놈을 보면 서산대사의 선가귀감 에서 하나의 게송이 연상된다. 그것은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이라는 게송이다.
 
선사들은 본래 나가 있다고 말한다. 본래 부처라고도 한다. 내가 본래 부처이기때문에 본래 부처를 보는 것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본래 나에 대한 명칭은 많다. 혜민스님은 그놈이라고 했고, 선가귀감에서는 일원상이라고 했다. 어떤 것이든지 명칭 붙이기 나름이다. 그것은 진짜 나가 될 수 있고, 한자어로는 진아가 될 것이다.
 
정말 진짜 나는 있는 것일까? 진아가 있다면 부처님이 분명히 이야기 하셨을것이다. 그러나 니까야 어디를 보아도 진아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에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이때에 어떤 수행승의 마음에 이와 같은 생각이 일어났다. ‘물질은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느낌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지각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형성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의식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M109)
 
 
어떤 수행승은 왜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자아를 상정하는 것이다. 이는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 (iti kira, bho, rūpa anattā, vedanā anattā, saññā anattā, sakhārā anattā, viññāa anattā; anattakatāni kammāni kamattāna phusissantī)”(M109.14)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 빠알리 구문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그런데 자아가 없이 지은 업들은 도대체 어떤 자아와 접촉하는가?”라고 번역했다.
 
어떤 수행승이 자아를 상정하게 된 것은 행위, 즉 업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업을 저장할 자아가 있어야 함을 말한다. 마치 대승에서 알라야식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행승의 의문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영원주의에 빠져 버린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어떤 수행승이 자아를 상정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읽었다. 이는 유신견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수행승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서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무지하고 몽매해서 그의 마음이 갈애에 의해 지배되면서도, 이와 같이 ‘물질은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느낌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지각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형성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의식도 나의 자아가 아닌 것 같다.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라고 스승의 가르침을 앞지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여러 가지 것에 대해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질문을 통해서 나에게서 수련을 받았다.”(M109.14)
 
 
부처님은 나가 없다고 했다. 이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과 같다. 그 대신 오온으로 설명했다. 그런데 오온은 내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수레를 분해해 놓으면 수레는 온데간데 없고 명칭만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어떤 수행승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오온에 대하여 나가 아닌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온 너머에 또 다른 나가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업을 저장하는 자아가 없는데 어떠한 자아에서 그 업이 과보를 생성하는가?”(M109)라는 의문에 대한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아를 상정하는 것이다. 지금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는 나 너머에 또 다른 나, 즉 초자아를 상정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는 현상과 본질로 설명한다. 파도와 바다로 비유하기도 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는 등 여섯 감역으로 느끼는 나가 있는가 하면 이런 행위를 저장하여 과보를 산출하게 하는 또 다른 나, 초자아를 상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나는 없다고 했다.
 
부처님은 나를 부정했다. 나라는 것은 오온을 지칭하는 관습적 명칭이라고 했다. 나를 오온으로 분해해서 보면 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수행승은 업과 업의 과보를 생각하면서 초자아를 생각했다. 마치 본래 나, 진짜 나, 참나와 같은 것이다.
 
진짜 그놈은 있는 것일까? 혜민스님은 그놈에 대하여 모든 것을 지켜 보는 자라고 했다. 이를 관자재라고 했다. 선가귀감에서는 일원상이라고 했다. 더구나 부처도 모르고 가섭도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진짜 나가 있다면 부처님도 말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경전에는 진짜 나, 업을 저장하는 나는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부처님은 “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라고 스승의 가르침을 앞지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M109)라며 염려 했다.
 
부처님은 초자아를 상정하고 있는 어떤 수행승의 의문을 풀어 주기 위해서 수행승들에게 법문했다. 그것은 무아상경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질은 영원한가, 무상한가?”(M109.15)로 시작되는 무아의 가르침을 문답식으로 법문한 것이다.
 
니까야를 보면 도처에 무아에 대한 가르침을 볼 수 있다. 주로 문답식이다. 이런 가르침을 펼친 것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여러 가지 것에 대해 그때그때의 경우에 따라 질문을 통해서 나에게서 수련을 받았다.”(M109.14)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아 또는 초자아를 상정하는 수행승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불교는 무아의 종교이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에서는 자아를 세운다. 오온이 무상한 것은 알지만 더 큰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후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간파한 것 같다. 이는 맛지마니까야 102번경에서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훌륭한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로서 ‘자아는 지각이 있는 것으로서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다.’라고 설하는 자들이 있는데, 1)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자아는 지각이 있고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것이다.’라고 설하기도 하고, 2)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자아는 지각이 있고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서 비물질적인 것이다.’라고 설하기도 하고, 3)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자아는 지각이 있고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서 물질적이기도 하고 비물질적이기도 한 것이다.’라고 설하기도 하고, 4)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자아는 지각이 있고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서 물질적인 것도 아니고 비물질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설하기도 하고,5)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자아는 지각이 있고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서 유일성을 지각하는 자이다.’라고 설하기도 하고, 6)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자아는 지각이 있고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서 다양성을 지각하는 자이다.’라고 설하기도 하고, 7)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자아는 지각이 있고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서 유한한 것을 지각하는 자이다.’라고 설하기도 하고, 그들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자아는 지각이 있고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 것으로서 무한한 것을 지각하는 자이다.’라고 설하기도 한다. 또는 이러한 견해를 뛰어넘는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한량없고 동요 없는, 의식이 가득한 세계가 자아라고 설한다.”(M102.4)
 
 
부처님은 자아가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에 대하여 파악했다. 이를 7가지로 설명했다. 이는 영원주의자들의 견해에 해당된다. 이런 견해는 공통적으로 “그들은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고 존재하는 자아”(M102.3)를 상정하는 것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자각이 있다.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 전체적으로 아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다. 이를 자아 또는 초자아라고 볼 수 있을까?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마음의 안정과 평안을 찾기 위한 것일까?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한 것일까? 불교인들이 수행을 하는 목적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끊어 내기 위한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으면 오온에 대하여 나라고 여긴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행위를 저장하는 또 다른 자아가 있다고 상정한다. 흔히 그놈, 일원상, 진짜나, 자재자 같은 것이다. 과연 이런 초자아가 있기나 한 것일까?
 
수레는 수레로서 기능을 할 때 수레라는 명칭이 붙는다. 그러나 수레를 분해 해 놓으면 더 이상 수레라고 말할 수 없다. 나라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수행을 해서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보고 또한 조건발생하는 것을 안다면 더 이상 나라는 것은 단지 명칭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아가 있다고 여기면 또한 초자아가 있다고 여기게 된다. 과연 이런 자아나 초자아는 있기나 한 것일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가 관찰하고 있다’라든가, ‘관찰하는 것은 나의 행위이다’라는 등으로 “새기고 있는 개인, 주체가 있는 것처럼”생각하는 집착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면, 그러한 수행자의 관찰은 “그러한 잘못된 생각, 집착, 사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아직 사견버림이라고 말할 수 없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47쪽)
 
 
마하시사야도에 따르면 자아를 상정하는 것은 집착이라고 했다. 자아 또는 초자아는 집착의 산물이다. 또한 영원주의적 견해를 갖는 사견이 된다.
 
수행중에 ‘내가 관찰하고 있다’라고 여긴다면 이는 사견이라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자아 또는 초자아를 상정하는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109번경에서 어떤 수행승이 “어떤 자아가 자아가 아닌 것이 만들어낸 행위들에 영향을 주는 것인가?”라며 업을 저장하는 또 다른 자아를 상정하는 것과 같다.
 
자아를 상정한다면 이는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다. 연기법에 따르면 영원주의는 부정된다. 이는 조건발생한 것은 반드시 소멸하는 것으로 보는 연기법에 따른 것이다. 그럼에도 부처님 당시에도 일부 수행승들은 “자아는 지각이 있는 것으로서 죽은 뒤에도 손상되지 않는다.”(M102)라는 영원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연기법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영원주의는 사견이 된다. 어떤 자아나 초자아도 있을 수 없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밝혀 진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제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와 제2단계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로 알 수 있다.
 
명상 중에 아는 마음을 안다고 보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자각과 같은 것이다. 명상 전과정을 지켜 보고 있는 듯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에 대하여 초자아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하여 본래 나, 진짜 나, 그놈, 일원상, 진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사견이다. 왜 사견인가? 청정도론 복주석서에서는 이를 미세한 사견이라고 했다. 그리고 의심이 다 사라지지 않은 모습이라고 했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는 어떻게 해야 사라지게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명상을 통해서 가능하다.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보고 또한 조건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하면 나가 있다는 견해는 사라진다. 그럼에도 미세하게 남아 있어서 초자아를 상정한다. 이에 대하여 청정도론 복주석서에서는 “명상의 지혜를 구족한 그 수행자는 견해청정, 의심극복청정을 증득했기 때문에 깨끗한 견해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2권, 247쪽)라고 했다.
 
자아가 있다는 견해,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라고 한다. 유신견은 성자의 흐름에 들 때 사라진다. 그런데 수행단계에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여 보고 조건발생하는 것으로 파악해서 보았을 때 나가 있다는 견해가 사라진다. 이에 대하여 칠청정에서는 견해청정과 의심극복청정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세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초자아를 가정한다. 이는 더 높은 수행단계를 요구한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래 단계의 두 가지 청정으로 사견을 어느 정도 제거했어도 도(道)로써 남김없이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사견은 여전히 생겨날 수 있다.”(2권, 247쪽)
 
 
여기서 두 가지 청정은 ‘견해청정’과 ‘의심극복청정’을 말한다. 두 가지 청정으로 자아가 있다는 사견을 제거 했어도 미세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 미세하게 남아 있는 사견은 도(道)로써 남김없이 제거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다름 아닌 열반을 말한다. 열반에 이르지 않으면 영원주의적 사견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 제자 중에는 부처님의 무아의 설법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업을 저장할 수 있는 초자아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을 의심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의심은 부처님 입멸 후에도 계속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이 나왔을 것이다. 마침내 “옛 부처 나기 전에 홀로밝은 동그라미 석가도 알지 못한다 했는데 어찌 가섭이 전하랴.”라는 게송도 나오게 되었다. 혜민스님의 그놈, 지켜 보는 자, 자재하는 자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오늘 재가안거 60일째를 맞이 하여 한시간 좌선을 했다. 몸과 마음이 편안했다.특히 어느 순간 마음이 지극히 평안했다. 대체로 성공적인 좌선이다. 그런데 이를 모두 자각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이 마음이 선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그놈, 진짜 나, 일원상, 지켜 보는 자, 자재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가 있다는 견해는 사견이다. 우리 몸과 마음에 어떤 실체가 있다는 견해를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 그 어디에도 실체가 있다는 가르침은 없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조건발생으로 파악해서 보면 연기적 흐름만 있을 뿐이다. 자각하는 것도 연기적 흐름에 따른다. 그럼에도 초자아가 있을 것이라는 미세한 사견이 있다. 이런 사견은 도의 지혜로서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2023-09-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