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나는 도달했네 나는 고향에 있네, 재가안거 57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25. 11:17

나는 도달했네 나는 고향에 있네, 재가안거 57일차

 

 

앉아 있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집에 온 것 같다. 집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나그네가 마음 놓고 여행하는 것은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이다.

 

재가안거 57일차이다. 오늘 827분부터 한시간 좌선 했다. 집에 온 것처럼 편안했다. 다리도 아프지 않았다. 방석에 앉아 있으니 이곳이 집 같았다.

 

처음에는 앉기가 두려웠다. 오늘 좌선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특히 다리 통증이 염려 되었다. 평좌를 하면 반드시 오른쪽 다리가 마비되면서 통증이 왔기 때문이다.

 

지금은 더 이상 통증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는다. 이제 길이 난 것 같다. 자주 앉다 보니, 매일 한시간씩 앉다 보니 습관이 된 것이다.

 

더 이상 다리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설령 통증이 찾아 온다 해도 염려 할 것이 없다. 남의 다리 보듯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통증은 때로 귀한 손님과도 같다.

 

오늘 통증이 하나 찾아 왔다. 생각지도 않은 통증이다. 사타구니에 있는 불알이 접힌 것 같은 통증이다. 좌선을 시작한지 20여분 후에 생겼다.

 

접히는 듯한 통증은 점점 커졌다. 예전 같았으면 자세를 바꾸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증은 통증일 뿐이다. 통증이 마음까지 지배하게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통증따로 마음따로가 되게 했다. 그 결과 통증은 점점 약화 되었다. 또한 주관찰 대상으로 마음을 기울였다. 배의 움직임과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 사유를 하게 되자 통증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르게 되었다.

 

좌선을 하면 처음에는 자리가 잡히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한다. 대개 20분 정도 지나면 안정되는 것 같다.

 

좌선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마음속으로 오늘 한 개도 놓치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치고 들어 온다. 그리고 망상이 된다. 이럴 때 요즘 속된 말로 탈탈 털린듯한기분이 든다.

 

망상을 하고 있음을 알았을 때 털렸다는 생각이 든다. 도둑이 들어 집을 활개치고 다니는 것과 같다. 이는 문단속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단속을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일까? 그것은 명백하다. 주관찰 대상을 새기는 것이다. 나의 주관찰 대상은 항상 배의 움직임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새기고 있으면 생각이 치고 들어오지 못한다. 수비를 잘 하고 있는 것이다. 문을 잘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마음지킴이라고도 번역한다.

 

좌선을 해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편안한 시간이 찾아 온다. 이는 집중이 잘 되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또한 주관찰 대상을 잘 새기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다.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마음은 제멋대로 나돌아 다닌다.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가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시각의 대상과 청각의 대상에 가장 많이 가 있다. 어떤 이는 이를 70%가량 된다고 말한다.

 

마음을 대상에 묶어 놓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호흡에 묶어 두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의 움직임에 묶어 두라고 말한다. 마음을 배라는 기둥에 새김이라는 밧줄로 묶어 두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그 밧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이를 고짜라(gocara), 행경(行經)이라고 한다. 마음의 행동반경인 것이다.

 

좌선하면서도 사유할 수 있다. 이는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사띠)이라는 밧줄로 묶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때 마음은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사띠 자체가 선법이기 때문에 일어난 마음도 건전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새김이 없을 때 마음은 제멋대로이다. 대부분 감각 대상에 마음이 가 있다. 대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기 쉽다.

 

좌선을 해서 마음이 편안 해졌을 때 고향에 온 것 같다. 이를 집에 온 것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집은 가장 안전한 곳이기 때문이다. 집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집이 있고 가정이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외국 영화를 볼 때가 있다. 남자가 집에 돌아 올 때 아임 홈(I’m home)”하고 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영화 트루먼 쇼에서 보았다. 그러면 여자가 문을 열어 분다. 우리나라에서는 나 왔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나 집에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집이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장소라는 것이다. 더구나 가정이 있다면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좌선을 하면서 평안이 찾아 왔을 때 집에 있는 것 같다. 아니 여기가 집인 것 같다.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집인 것 같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앉아 있고 싶은 것이다.

 

누구나 집이 있다. 출가 수행자도 집이 있다. 다만 가정만 없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스님은 개나 고양이를 기른다. 반려견과 반려묘를 동반자 삼아 살아 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런 것도 가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스님은 걱정이 태산 같다. 개가 임신했기 때문이다. 3년전에도 임신해서 새끼를 낳았는데 이번에도 임신한 것이다. 그러나 수컷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개는 다음달에 출산이라고 한다. 배가 불러서 누워 있는 모습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페이스북 사진으로 본 것이다.

 

출산을 하면 모두 암케의 몫이 된다. 숫컷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무책임하게 임신만 시킨 것이다.

 

스님은 다음달에 외국 여행 예정이라고 한다. 그 사이에 개의 출산이 예정되어 있다. 누가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임신시킨 수컷이 도와줄 리 만무하다.

 

스님은 한탄했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서 출가했는데 이렇게 축생과 또 인연을 맺은 것을 한탄한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인연을 맺지 않았아어야 하는데.”라며 후회하는 것이다.

 

출가자들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인연을 끊었다. 이는 초기경전에서 부처님이 부모를 즐겁게 하지 않고, 그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하는 가운데, 머리를 삭발하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했습니다.”(M85)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이 집을 떠난 다고 하면 대부분 반대할 것이다. 눈물로서 출가를 막는 부모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출가를 결행한다. 자타카에서는 “풀잎 끝의 이슬이태양이 떠오르면 사라지듯, 이와 같이 사람의 목숨도 그러하니 어머니저를 방해하지 마시오.(JA.IV.122)라고 했다.

 

출가한 수행자는 집이 없다. 그래서 집에서 집없는 곳으로출가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요즘 출가자에게는 거처가 있다. 더구나 정 붙일 수 있는 반려견도 있고 반려묘도 있다.

 

눈물로 출가를 만류하는 어머니를 뒤로 하고 출가한 자가 개의 임신에 걱정하는 것을 보았다. 스님은 마치 딸의 심정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스님은 자식을 낳아 길러 보지 않았지만 임신한 개를 보니 딸을 보는 듯 측은 하다고 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정을 준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면서 정 주지 않았어야 했는데라며 후회하는 것이다.

 

가정은 애증이 교차하는 곳이다. 그럼에도 집이 있어서 가는 것이다. 돌아 갈 곳은 집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상을 하면 바로 그 자리가 돌아갈 집과 같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안은하고 안전한 집이다.

 

경행을 해도 마음이 편안해질 때가 있다. 발의 움직임을 새기면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과 같다. 이럴 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느낀다.

 

틱낫한 스님이 행선할 때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이는 “I have arrived. I am home.”라는 말이다. 이 말을 우리말로 해석하면 “나는 도달했네나는 고향에 있네.”라는 말이 될 것이다.

 

틱닛한 스님은 경행할 때마다 “I have arrived. I am home.”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틱낫한 스님이 도달한 곳은 어디일까? 그곳은 집이다. 영어로 홈이기 때문에 가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 다른 말로는 열반일 것이다.

 

전재성 선생에 따르면 열반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협의의 열반이고, 또 하나는 광의의 열반이다. 협의의 열반은 열반 그 자체를 말한다. 광의의 열반은 평화를 말한다. 누구든지 평화로우면 열반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좌선을 하면 마음이 평화롭다. 협의의 열반 상태는 아니지만 광의의 열반상태인 것이다. 마치 집에 있는 것과 같다. 아니 가정에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느낌 마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수행승들이여, 과거와 미래의 물질이 무상한 것인데, 하물며 현재의 물질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수행승들이여,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이와 같이 보아서 과거의 물질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미래의 물질을 추구하지 않고,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를 읽다가 기억해 두고 싶어서 사진으로 찍어 놓았던 것이다. 부처님은 지나간 물질에 관심을 갖지 말고, 오지 않은 물질에 환락하지 않고, 지금 생겨난 물질을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실천하라고 했다.

 

흔히 과거는 지나 간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은 것이라서 현재에 충실하자고 말한다. 행복론을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 이렇게 말한다. 이때 행복은 지금 여기에서 경험 되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지하철 공익광고 문구를 보면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고 했다.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여기를 말한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자고 말한다. 행복하게 살자는 것은 지금 여기서 즐기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TV 드라마를 보면 인생 뭐 별거 있어?”라고 말하면서 소주병을 따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부처님은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궁극적 행복이다. 그래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라고 했다.

 

열반의 행복을 증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버려야 할 것이다. 과거와 미래는 물론 현재도 버려야 한다. 그래서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라고 말했다. 물질뿐만 아니라 느낌, 지각, 형성, 의식도 버려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과거도 버리고 미래도 버리고 현재도 버리라고 했다. 특히 현재에 대해서는 그리고 현재 일어난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고 했다. 이 말은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카르페 디엠, 이 말은 현재를 잡아라는 뜻이다. 현재를 잘 보내라는 말과 같다. 어떻게 해야 현재를 잘 보낼 수 있을까?

 

지하철 공익광고에서는 젊은이여! 지금을 즐겨라. 먼 훗날 후회한다라고 했다. 이런 것도 카르페 디엠일 것이다. 카르페 디엠은 금욕적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불교에도 카르페 디엠이 있을까? 불교에서도 현재를 말한다. 그러나 서양사람들이 말하는 행복론과는 다른 것이다. 부처님은 현재 마저 버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의 물질에서 싫어하여 떠나고 그것이 사라지고 소멸하도록 수행한다.”(S22.9)라고 했다. 이 말은 그리고 현재 일어난 상태를 그때 그때 잘 관찰하라.”(M131)라는 말과 같다.

 

명상을 하다 보면 이런 저런 생각이 일어난다.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는 망상이기 쉽고,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는 지혜이기 쉽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는 마음이 안정되고 평안하다. 이는 집중이 잘 되었기 때문이다. 주관찰 대상에 새김이 확립된 것이다. 이런 마음의 안정과 평화도 열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넓은 의미의 열반을 말한다.

 

틱낫한 스님은 경행 할 때 “I have arrived. I am home.”라고 말했다. 이는 “나는 도달했네나는 고향에 있네.”라고 번역할 수 있다.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워서 열반에 있는 상태와 같을 것이다.

 

마음이 안정되고 평화로우면 광의의 열반 상태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는 현재를 즐기지 않는 것과 같다. 현재 그때 그때 일어난 상태를 새기는 것이 되었을 때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오늘은 재가안거 57일째이다. 오늘 한시간 좌선은 대체로 성공적이다. 초반에 망상으로 인하여 탈탈 털렸으나 그때 마다 주관찰 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다. 그 결과 마음이 안정되었다.

 

오늘 좌선에서는 등의 한기도 느낄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열반이 아닐까 생각했다. 넓은 의미의 열반을 말한다. 마치 집에 온 것 같았다. 마치 가정이 있는 집에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때 틱낫한 스님의 “I have arrived. I am home. (나는 도달했네나는 고향에 있네.)”라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다.

 

 

2023-09-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