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빤냐와로 스님의 명언, 재가안거 54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22. 11:18

빤냐와로 스님의 명언, 재가안거 54일차

 

 

오늘 좌선은 실패 했다. 한시간 내내 망상으로 보내다가 끝났다. 이런 날은 없었다. 최악의 날이다. 그럼에도 한시간 채웠다.

 

비록 망상으로 보냈지만 한시간 눈을 감고 있는 효과는 대단했다. 이전과 이후의 기분 상태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54일째이다.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다. 몸이 그렇다는 것이다. 지난 밤에는 깨지 않고 잤다. 잠이 보약이다. 잠을 잘 자야 면역력이 생긴다. 수면제를 먹고서라도 잠을 자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지난 일주일 힘들었다. 몸이 따라 주지 않아서 고통스러웠다. 몸에 한기가 있는 상태에서 일감이 들어 왔고 더구나 행사까지 있었다. 모두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일은 피할 수 없다. 일감이 들어 왔을 때 납기 내에 맞추어 주어야 한다. 주말작업도 불사하고 밤낮으로 했다. 그 과정에서 무리가 왔다. 몸이 더욱 더 쇠약해진 것이다.

 

업친데 덥친 격이다. 정평불 행사가 있었다. 12일 수련회와 눈부처학교가 있었다. 빠져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수 하나라도 채워 주고 싶었다. 다들 바쁘다는 이유로 빠졌을 때 행사가 썰렁할 것임에 틀림 없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타이레놀을 먹고 버텼다.

 

 

오늘 아침은 평온하다. 온도와 습도는 적당하다. 온도는 20도이고 습도는 30%로 적당하다. 일년 중에 이런 날은 드물 것이다. 겉옷을 입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덥지 않아서 좋다. 매일매일 이런 날만 같아라.

 

 

어제 보다 나은 오늘이다. 등의 한기는 없어졌다. 몸의 컨디션이 회복 되니 기분도 상쾌하다. 더구나 날씨도 받쳐 준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불쾌한 것이 있다. 어제 뉴스가 그것이다.

 

요즘 뉴스를 보지 않는다. 일체 신문, 인터넷, 유튜브에서 정치와 관련된 뉴스를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간접적으로 소식을 알게 된다.

 

어제 경악했다. 그러나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정신건강에 해로울 것 같기 때문이다.

 

번뇌가 일어나면 괴롭다. 보기 싫은 것을 보았을 때도 번뇌가 일어난다. 이럴 경우 아예 보지 않는 것이 낫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맛지마니까야 2번경에 따르면 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가 있다고 했다.

 

피함에 의해서 끊어지는 번뇌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성찰에 의해서 이치에 맞게 사나운 코끼리를 피하고 사나운 말을 피하고 사나운 소를 피하고 사나운 개를 피하고 뱀, 말뚝, 가시덤불, 갱도, 절벽, 웅덩이, 늪지를 피한다. 총명한 길벗은 앉기에 적당하지 않은 자리에 앉는 자, 가기에 적당하지 않은 장소로 가는 자, 사귀기에 적당하지 않은 악한 친구와 사귀는 자를 악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그는 성찰하여 이와 같은 적당하지 않은 자리, 적당하지 않은 장소, 악한 친구를 피한다. 수행승들이여, 피하지 않으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날 것이지만, 피하면 곤혹과 고뇌에 가득 찬 번뇌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이것들을 피함에 의해서 끊어져야 하는 번뇌라고 한다.”(M2)

 

 

여의치 않으면 피해야 한다. 마주쳐서 번뇌를 일으키는 것보다 피해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경에서는 사나운 짐승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사나운 짐승은 반드시 짐승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짐승 같은 인간들을 피하는 것도 번뇌를 피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 뉴스를 보지 않는다. 앞으로도 뉴스 볼 날 없을 것 같다. 뉴스만 보면 분노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번뇌를 야기하는 뉴스는 볼 필요가 없다. 이것도 피함으로 인하여 끊어지는 번뇌라 해야 할 것이다.

 

모임에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그 사람 보기 싫어서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런 것도 어쩌면 피함으로 인하여 끊어지는 번뇌라 해야 할 것이다.

 

뉴스를 피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재단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맛대로 뉴스를 보냈을 때 보지 않을 권리도 있는 것이다. 공평하게 균형 있게 진실되게 사실대로 보도한다면 보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모임에 보기 싫은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모임에 나가지 않는다면 자신만 손해일 수 있다. 더 좋은 사람과 교류할 기회를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려니 하며 중립적인 마음을 내는 것이다.

 

 

명상이 항상 잘 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잘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달려 있다. 그날그날 기분에 달려 있다. 그럼에도 한시간 눈을 감고 앉아 있었을 때 그 효과는 크다. 명상전과 명상후는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면 사람이 변한다고 한다. 수행을 해서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면 수행효과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뜻하는 빠알리어 바와(bhava)변화한 존재를 뜻하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수행을 뜻하는 빠알리어 바와는 문자적으로 존재를 말한다. 수행을 하면 어떤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과 이후의 상태가 변해 있다는 말과 같다.

 

수행을 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갔다면 존재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뀐 것이다. 수다원인 자가 수행을 해서 사다함이 되면 이것도 또한 존재의 변화가 있게 된다. 수행이 존재를 변하게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 최종적으로 아라한에 이르게 된다.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배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닦을 것도 없다. 수행의 완성이다. 이렇게 수행을 한다는 것은 어떤 존재로 되는 것이다.

 

어제 담마와나선원 북콘서트용 글모음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기억하고 싶은 문구를 발견한 것이다. 써 놓고서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빤냐와로 스님이 법문한 것이다. 이를 빤냐와로 스님 명언록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빤냐와로 스님 명언록)

 

 

1. 보시는 마음으로 베푸는 것이 진정한 보시입니다.

2.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는 부처가 출현할 때 태어나고자 1아승지 10만겁동안 서원을 세웠습니다.

3.
대상에 대해서 심념처로 할지 수념처로 할지 스승에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4.
대상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5.
유투브에서 자기 얘기 하는 사람의 법문은 들을 필요 없습니다.

6.
조그만 거라도 질문하고 답을 받아야 합니다.

7.
내방식대로 하는 것을 탈피해야 합니다.

8.
수행에서 무상무아가 드러나지 않으면 중단해야 합니다.

9.
까티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과거전생부터 공덕을 갖추었을 것입니다.

10.
사띠를 둘 곳은 육근입니다그 외에 사띠 두면 안됩니다.

11.
음식에 절제를 모르는 것과 잠을 많이 자는 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12.
한계를 넘을 때는 강한 정진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하루 6시간 자면 잠을 2시간만 자고 4시간은 정진에 쏟아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13.
지금 해야 할 일은 선한 일만 하는 겁니다악한 일이 생각나면 스톱해야 합니다.

14.
수행 중에 어떤 경우에서든지 삼특상(무상무아중의 하나는 드러나야 합니다.

15.
마음에서 환희심과 선한 마음이 일어나는 스님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스님입니다.

16.
평범한 사람이 되십시오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잘 사는 것입니다.

17.
전생의 무수한 업은 언제 작용할지 모릅니다.

18.
도는 한번 이루어지면 끝이지만 과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집니다.

19.
출가하고 난 다음 사띠가 없으면 견디기 힘듭니다홀로 꾸띠에서 자살하기도 하는데 홀로 지내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20.
사띠는 자동적으로 되야 합니다죽을 때도 자동적으로 되야 합니다하기 싫어도 자동적으로 되야 합니다.

21.
나마-루빠 단계(위빠사나 1단계)나 원인과 결과 단계(위빠사나 2단계)에서도 사띠는 용을 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됩니다.

22. 75
세 이상되면 도와 과를 이루기 힘듭니다. 1-25세에 수행하면 불환자(아나함)가 될 수 있고, 26-50세 수행하면 일래자(사다함)이 될 수 있고, 51-75세에 수행하면 예류자(수다원)이 될 수 있습니다. 75세 이상은 힘듭니다.
23.
위빠사나하다가 피곤하면 사마타하면 됩니다."

(2022년 담마와나 까티나 가사공양 법요식, 2022-11-06)

 

 

참으로 주옥 같은 말이다. 이런 글을 써 놓고서도 책 만들기 위해서 편집하다가 확인 했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새겨야 할 말이다. 벽에다 붙여 놓고 새기면 더 좋을 것이다.

 

요즘 재가안거 하면서 유튜브를 종종 본다. 주로 빤냐와로 스님 과거 동영상을 본다. 8년전에 법문한 것이 많다. 지금 들어도 새롭다. 어떤 것은 두 번 듣는 것도 있다. 들을 때마다 새로운 것은 몸에 체득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튜브에는 갖가지 법문이 있다. 어떤 것은 호기심으로 들어 보지만 내용이 없어서 그만 둔다. 어떤 동영상 법문을 들어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타령한다. 어떤 원로 스님은 마음공부한다고 말한다.

 

마음공부란 무엇일까? 어떤 이는 불교공부를 마음공부라고 말한다. 스님도 마음공부라고 말한다. 마음공부와 불교공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마음공부한다고 했을 때 부처님 가르침이 없을 수가 있다. 불교 아닌 단체에서도 마음공부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사띠를 강조한다. 한번 법문하면 사띠 하나로 한시간 보낸다. 그러나 들어보면 알 듯 말듯 하다. 구체적이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띠만 말했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깨달음은 깨달아 보아야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말도 막연하다. 깨달음을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깨달음을 신비화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공부, 사띠, 깨달음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공통적으로 마음에 대한 것이다. 마음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사람, 마음타령 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어 보면 물질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는다. 오로지 마음이다.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에서 세상의 끝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이는 부처님이 그러나 벗이여, 세계의 끝에 이르지 않고서는 괴로움의 끝에 도달할 수 없다고 나는 말합니다. 벗이여, 지각하고 사유하는 이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3)라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저 우주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우리 몸과 마음에 있다.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는 지, , , , 이라는 네 가지 광대한 원리로 이루어진 이 몸 안에 있는 것이다.

 

사성제의 진리는 이 몸과 마음을 통찰 했을 때 알 수 있다. 그런데 몸은 내버려두고 마음만 바라 보았을 때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을까? 아마 로케트를 타고 우주 끝까지 날아가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유튜브를 보면 마음공부라하여 마음타령 하는 원로 스님을 볼 수 있다. 유튜브를 보면 오로지 사띠만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을 그냥 알아차림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알갱이가 없다. 들으면 들을수록 오리무중이다. 더구나 그들은 꿈을 깨어 보아야 꿈을 알 수 있고, 깨달아 보아야 깨달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깨달음을 신비화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진리를 설했다. 그 진리는 다름아닌 네 가지 진리, 사성제를 말한다. 괴로움에 대한 진리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을 떠나서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22번 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설하고, 이와 같이 말하는 나를 두고 수행자나 성직자들은 진실 없이 공허하고 허망하게 거짓으로 중상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허무주의자이다. 살아있는 뭇 삶에게 단멸과 파멸과 허무를 가르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수행자나 성직자들이 진실 없이 공허하고 허망하게 거짓으로 중상하여 수행자 고따마는 허무주의자이다. 살아있는 뭇 삶에게 단멸과 파멸과 허무를 가르친다.’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와 같이 설하는 자, 그와 같이 말하는 자가 아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가르친다.”(M22)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뱀에 대한 비유의 경(Alagaddūpamasutta, M22)’에서 허무주의자가 아니라고 했다. 부처님이 단멸과 허무를 가르친다고 비난하는 외도에 대하여 나는 예나 지금이나 괴로움과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가르친다. (Pubbe cāha bhikkhave, etarahi ca dukkhañceva paññāpemi, dukkhassa ca nirodha)”(M22.47)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은 고와 고소멸을 설했다. 이는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한 것과 같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 이교도의 경을 보면 “수행승들이여여섯 가지 세계를 조건으로 입태가 있고입태를 조건으로 명색이 있고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역이 있고여섯 가지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있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있다수행승들이여또한 나는 느끼는 자의 관점에서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발생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가르치고,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다’라고 선언한다.(A3.61)라고 천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에서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이 몸과 마음을 떠나서 세상의 끝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이 육척단신의 몸 안에 세계와 세계의 발생과 세계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있음을 나는 가르칩니다.”(S2.23)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는 오온에서 세상의 발생과 끝을 보는 것이다.

 

오온은 몸과 마음에 대한 것이다. 세상은 오온에 있는 것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이런 세상은 여섯 가지 감역의 세상과 같다.

 

상윳따니까야에 세계 끝까지의 경’(S35.116)이 있다.  경에서는 세계가 정의되어 있다. 부처님이 정의해 놓은 것이다. 어떤 것일까? 이는 벗들이여, 시각을 통해 세계에 대하여 세계를 지각하고 세계를 사유합니다.”(S35.116)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정신 이렇게 여섯 감역의 세계가 있어서 지각하고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사대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우리 몸은 여섯 가지 감각의 장으로도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 것이 우리가 사유하고 지각하는 세계이다. 우리는 이 몸을 떠나서 사유하고 지각할 수 없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불교공부에 대하여 마음공부라 하여 유심론적으로만 말한다. 어떤 이는 오로지 사띠만 말하며 깨달음이란 깨달아 보아야 아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마음타령만 한다.

 

몸이 기반 되지 않는 마음공부나 사띠는 허황된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과 먼 것이다. 이런 때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은 주옥 같은 것이다. 몸과 마음에 기반한 법문이다. 정신과 물질에 대한 법문이다.

 

빤나와로 스님의 법문은 이 시대에 꼭 맞는 법문이다. 빤냐와로 스님이 말한 5 번 항 유투브에서 자기 얘기 하는 사람의 법문은 들을 필요 없습니다.”라든가, 8번 항수행에서 무상무아가 드러나지 않으면 중단해야 합니다.”라든가, 14번 항수행 중에 어떤 경우에서든지 삼특상(무상무아중의 하나는 드러나야 합니다.”라든가, 10번 항사띠를 둘 곳은 육근입니다그 외에 사띠 두면 안됩니다.”라든가, 16번 항평범한 사람이 되십시오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잘 사는 것입니다.”라든가, 17번 항전생의 무수한 업은 언제 작용할지 모릅니다.”라든가, 20번 항사띠는 자동적으로 되야 합니다죽을 때도 자동적으로 되야 합니다하기 싫어도 자동적으로 되야 합니다.”라든가, 21번 항나마-루빠 단계(위빠사나 1단계)나 원인과 결과 단계(위빠사나 2단계)에서도 사띠는 용을 쓰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됩니다.”라는 말은 깊이 새겨야 할 말이다.

 

 

오늘 54일째 좌선이 끝났다. 좌선은 실패로 끝났지만 내일이 있다. 내일은 더 잘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갖는다. 그러나 오늘 무엇보다 빤냐와로 스님의 명언을 새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인터넷에 공유하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한다.

 

 

2023-09-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