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재가안거 56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24. 13:07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재가안거 56일차

 

 

꼼짝 않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손가락도 발가락도 꼼짝 않고 마치 관에 있는 것처럼, 응급실에 있는 것처럼 누워 있었다. 임종을 맞이하는 듯이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재가안거 56일째이다. 날씨는 맑고 화창하다. 이른 아침에 일터로 향할 때 찬 기운도 느껴진다. 본격적인 가을이 시작 되는 것 같다.

 

오늘 일요일임에도 일터로 향했다. 자영업자, 일인사업자는 주말이 없다. 당연히 일요일도 없다. 안거에 들어가는 자 역시 일요일은 없다. 재가안거를 하는 재가불자 역시 일요일은 평일과 다름 없다.

 

컨디션은 그다지 좋지 않다. 어제 무리 했었던 것 같다.

 

정평불 북콘서트를 했다. 오전부터 시작하여 점심을 중식집에서 마칠 때까지 사람들과 함께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전철로 이동하여 광화문에서 열리는 기후행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갔다. 또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저녁에는 시청-남대문 사이에서 열리는 촛불행동에 참여했다. 또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평불 북콘서트에 참여하기 위하여 광주에서 온 조강철 선생을 용산역까지 배웅해 드렸다.

 

어제는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 까지 긴장의 연속이었다. 용산에서 KTX로 귀가하는 조강철 선생을 배웅하고 집에 오자 10시 가까이 되었다. 하루 종일 사람들과 함께 한 것이다. 일부로 멀리서 찾아 온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오늘 아침에 사무실 정리정돈을 했다. 어제 북콘서트함으로 인하여 다기(茶器) 등을 치운 것이다. 사무실 정리를 하고 오늘 해야 할 일에 들어 갔다. 좌선을 하고자 한 것이다.

 

좌선에 앞서 행선을 했다. 행선대에서 줄 그어진 대로 걸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걷다가 나중에는 동작 하나하나 새기며 걸었다.

 

행선 할 때 새기며 걸으면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과 다름 없다. 단지 앉아 있느냐 서 있느냐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행선 할 때는 6단계 행선을 한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때 발을 뗄 때는 먼저 뒷꿈치를 든다. 다음에 앞꿈치를 뗀다. 발을 디딜 때는 앞꿈치와 뒷꿈치를 동시에 댄다. 이런 차이가 있다.

 

발을 밀 때 비행기 타는 것 같다. 발을 들어서 밀 때 쓰윽하며 스무스하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이때가 행선 하는 맛을 느끼게 한다. 6단계 행선에서 가장 긴 시간이기도 하다.

 

발을 뗄 때, 앞꿈치를 뗄 때 소리가 난다. 맨바닥에서 맨발로 행선할 때 접착 되었다가 떨어지는 소리이다. 이 소리가 귀에 들릴 때 기분이 매우 상쾌하다. 행선하는 맛을 느끼게 한다. 왜 그럴까? 새김이 선명하기 때문이다.

 

행선은 오래 하지 않았다. 30분 이내로 끝냈다. 좌선을 하기 위한 예비동작으로서 의미도 있다. 그러나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은 좌선 못지 않게 중요하게 여긴다. 좌선과 행선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이는 행선으로 인하여 얻는 이익이 많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았다. 두께가 10센티나 되는 푹식한 방석 위에 갈색 레자 방석 네 개를 올렸다. 엉덩이에 받칠 것이다. 레자 방석은 두께가 2.5센티기 된다. 네 개를 겹쳤으므로 두께가 10센티 된다.

 

 

방석은 푹신하다. 처음 안거에 들어갈 때는 맨 바닥에서 하다시피 했다. 그 결과 평좌한 다리 통증으로 인하여 몇 차례 자세를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단차가 10센티 나는 방석으로 세팅했다. 그 결과 한시간 앉아 있어도 통증은 느끼지 못한다.

 

오늘 좌선은 30분밖에 하지 못했다. 좌선 도중에 졸음이 왔기 때문이다. 아마 어제 무리한 결과일 것이다. 졸음이 와서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누워 버렸다.

 

명상이라 하여 반드시 좌선과 행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와선도 있다. 누워서 명상하는 것을 말한다. 서울에 있는 위빠사나 수행센터에서는 종종 와선도 했다. 대부분 몇 분 지나지 않아 잠을 잤다.

 

와선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방법은 동일하다. 주관찰대상을 새기는 것이다. 누워서도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누워 있으면 편안하다. 피곤하면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도 힘들다. 이럴 때는 누워서 가만 있는다. 그냥 누워 있는 것이다.

 

우리말에 그냥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이유없이라는 말과 같다. 국어사전을 찾아 보았다. 찾아 보니 기본의미는 어떠한 작용을 가하지 않거나 상태의 변화 없이 있는 그대로라는 뜻이다. 두 번째 의미는 아무 뜻이나 조건 없이:”라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거의 맞는 것 같다.

 

그냥 누워 있었다.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거리지 않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눈을 감은 채 임종에 처한 자처럼 누워 있었다.

 

죽음에 이른 자는 손가락 하나 까닥거릴 힘이 없을 것이다. 눈 뜰 힘도 없을 것이다. 마치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것이다. 다만 의식은 있을 것이다. 청각도 있을 것이다.

 

명상홀에서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처음에는 약간 잠 들었다. 불과 몇 초 되지 않은 것 같다. 이후에는 잠을 자려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온갖 생각이 일어났다.

 

임종에 이른 자의 처지를 생각해 보았다. 손가락 하나, 눈꺼풀 하나 움직일 힘이 없는 자에게 남아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의식과 청각이다. 마음의 문은 열려 있기 때문에 생각은 밀려 올 것이다. 귀는 열려 있기 때문에 갖가지 소리는 들려 올 것이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냥 지켜 보았다. 손하나 발하나 까닥거리지 않고 꼼짝없이 누워 있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생각을 지켜 본 것이다. 여기서 와선을 한다면 마음은 주관찰대상에 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누워 있을 때 의식은 있다. 마음의 문은 열려 있기 때문에 정신작용은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런 저런 생각에 생각의 집을 짓는다. 그러다가 이를 알아차리면 무너진다. 마치 정신이 나돌아 다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유체이탈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은 제멋대로 일어난다. 주관찰 대상에 마음이 가 있지 않았을 때 마음의 문으로 들어오는 생각은 통제되지 않는다. 이런 정신은 나의 것일까?

 

이번 안거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통증에 대한 것이다. 통증은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좌한 오른쪽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팠을 때 이를 객관적으로 바라 본 것이다. 통증 따로 아는 마음 따로가 된 것이다.

 

상윳따니까를 보면 나꿀리삐따 장자는 중병에 걸렸다. 병고에 시달리자 부처님이 병문안 왔다. 부처님은 그러므로 장자여, 그대는 이와 같이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S22.1)라고 말했다.

 

몸은 괴로워도 어떻게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하여 사리뿟따 존자는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속박됩니다.”(S22.1)라고 말했다.

 

물질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 물질에 매여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물질은 변화한다는 사실이다. 물질은 변하고 부서지는 특징이 있다.

 

지금 변화가 없어 보이는 것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라고 했다.

 

페이스북을 보면 셀카놀이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얼굴을 찍어서 올리는 것이다. 그것도 매일 올린다. 아마 얼굴에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다지 잘 생기지 않은 사람도 셀카놀이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보기가 역겹다.

 

사람들이 셀카놀이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얼굴을 자아와 동일시 하는 것이다.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은 얼굴을 자신과 동일시 하기 때문에 얼굴에 상처가 난다거나 얼굴이 노화 되면 죽을 듯이 괴로워 할 것이다.

 

물질은 변화 된다. 변화되는 것은 물질만이 아니다. 느낌도 변화되고, 지각도 변화되고, 형성도 변화되고, 의식도 변화된다.

 

오온은 가만 있지 않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런 오온에 대하여 자아와 동일시 하여 자신의 것으로 여겼을 때, 변화로 인하여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날 것이라고 했다.

 

나꿀리삐따 장자는 사리뿟따 존자의 설법을 듣고 병이 나았다. 이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더욱 상세하게 설명했기 때문이다. 몸은 아프지만 마음까지 아파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몸은 아플 수 있다. 좌선 중에 통증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통증을 마음으로까지 가져 간다면 내 통증이 된다. 내 통증이 되었을 때 나는 아프다라고 말한다. 과연 나라는 것은 있기나 한 것일까?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라는 것은 없다. 무아(無我)이다. 그런데 이를 한자어 그대로 해석하여 내가 없다라고 받아 들이면 무아인데 어떻게 윤회합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아는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순간순간 변화하는 오온에서 영속된 것은 없다는 말이다. 물질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순간순간 변하기 때문에 나라고 할만한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있다면 나라는 명칭은 있을 것이다. 남자, 여자, 중생 등과 같은 언어적으로 형성된 명칭을 말한다.

 

오늘 와선은 934분에 시작해서 1112분에 끝났다. 이는 스마트폰 메모 앱에 기록해 두어서 알 수 있다. 무려 1시간 38분 와선 한 것이다.

 

와선 할 때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호흡은 자동으로 되었다. 배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는 났다. 다만 정신의 문으로 들어 오는 생각은 어찌할 수 없었다.

 

사람이 힘이 없어서 누워 있을 때 정신은 통제 되지 않는다.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정신은 제 멋대로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지배 받는 것이다. 이럴 때 빤냐와로 스님의 명언이 하나 생각났다. 그것은 전생의 무수한 업은 언제 작용할지 모릅니다.”라는 말이다.

 

임종의 순간에 어떤 업이 작용할지 모른다. 그것은 선업일 수도 있고 불선업일 수도 있다. 성자의 흐름에 들지 않는 한 제아무리 보시를 많이 하고 계율을 잘 지켰어도 어떤 세계에 태어날지 모르는 것이다.

 

오늘 좌선에서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정신을 지켜 보았다. 변화무쌍한 정신작용을 보면서 이것이 나의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통증 바라보듯이, 객관적으로 보고자 했다.

 

물질은 나의 것이 아니다. 정신도 나의 것이 아니다. 명색은 나의 것이 아닌 것이다. 당연히 오온도 나의 것이 아니다. 변화하기 때문에 나의 것이 아닌 것이다. 변화 하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나의 것이 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이다. 나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라고 한다. 나는 언어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름도 변하지 않는다. 언어적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재하는 것은 변한다.

 

오온은 변화 한다. 잠시도 가만 있지 않는다. 얼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지만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한다. 이런 얼굴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겨 셀카놀이한다면 나중에 얼마나 슬퍼할까?

 

오늘은 재가안거 56일째이다. 좌선하다가 졸리워서 누웠다. 와선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주관찰대상을 새기지 않은 것이다. 그대신 일어난 생각을 지켜 보았다.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2023-09-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