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선정의 숫돌에 지혜의 칼을 가는 것처럼, 재가안거 58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26. 11:24

선정의 숫돌에 지혜의 칼을 가는 것처럼, 재가안거 58일차

 

 

잔뜩 흐린 날씨이다. 비까지 간간히 뿌리고 있다. 이런 날에 우울에 빠지기 쉽다. 사람들은 무언가 즐길거리를 찾아 나설 것이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즐거운 대상에 마음이 가 있기 쉽다. 그러나 이제 막 명상을 끝낸 사람은 평온하다.

 

재가안거 58일째이다. 오늘은 아침 89분부터 한시간 앉아 있었다. 한시간이 길긴 길다. 대충 언제 끝날지 알 수 있지만 알람이 울려 봐야 알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오늘 좌선에서는 마음이 평안했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일터에 왔을 때 약간 졸리웠다. 아마도 지난밤에 깊은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대개 꿈만 꾸는 잠은 깊은 잠이 아니다. 잠을 자도 잠을 잔 것 같지 않다.

 

아침 625분에 일어났다. 대개 6시 이전에 일어난다. 늦은 것이다. 감자와 구고구마를 에어프라이어에 구웠다. 계란을 물에 삶았다. 요즘 이 세 가지는 아침 메인 메뉴나 다름 없다. 여기에 샌드위치 한쪽에 치즈를 곁들인다. 꿀물과 함께 다섯 가지 음식을 먹는다. 세상에 이것만한 아침 식사는 없는 것 같다.

 

커피를 마셨다. 오랜만에 절구질한 커피이다. 식사를 하자마자 바로 앉으면 불편하다 최소한 20분 이상은 있어야 한다. 커피 한잔 마실 시간이다.

 

커피를 마실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인터넷도 보지 않고 스마트폰도 보지 않는다. 책도 보지 않는다. 그저 편하게 책상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언어적 행위를 하면 좌선에 영향을 준다. 글을 읽는 행위는 분석적 행위에 해당된다. 언어적 행위 자체가 개념인데, 여기에 분석까지 하면 개념 플러스가 되어 개념에 지배당하게 된다.

 

명상은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명상은 개념을 배격한다.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어적 행위에 대한 모든 것은 배제 되어야 한다. 아침에 뉴스도 보지 않고. 신문도 보지 않고, 스마트폰도 보지 않고, 책도 보지 않는 이유에 해당된다.

 

실재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언어적 개념이 들어가면 실재를 볼 수 없다. 좌선에서 호흡을 새기는 이유에 해당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긴다.

 

오늘 좌선은 다른 날과 달랐다. 다리에 감각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다리에 피가 돌지 않아 감각이 마비된 것과 다르다. 평좌한 다리에 아무런 느낌이 없어서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약의 힘인지 모른다.

 

이것이 감기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등에 한기가 오락가락 한다. 타이레놀을 먹으면 조금 낫는 것 같다.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한기를 느낀다. 특히 무리하면 그렇다. 멀리 갔을 때 특히 그렇다. 전철을 타고 이동하여 행사에 참여하고 나면 더욱더 그렇다.

 

어제는 병원에 가서 약을 타왔다. 그래 보았자 타이레놀 하나에 항상제 한알이다. 그럼에도 효과가 있는 것 같다. 이런 효과가 좌선에도 나타나는 것 같다. 몸이 나른 해지는 것이다. 평좌한 다리에 통증은커녕 앉아 있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가벼웠다.

 

자리에 앉으면 편안하다. 오늘은 약기운 때문에 졸릴 줄 알았다. 그러나 한시간 내내 졸음은 없었다. 그 대신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떠 올랐다. 그리고 사유를 했다.

 

생각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떠 오른 생각이 있고 자발적으로 생각하는 사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다. 마치 눈으로 대상을 보고 있을 때 보여지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일 것이다.

 

생각이 떠 오르는 것은 보여지는 것과 같다. 나의 의지와 무관한 것이다. 눈이 있어서 대상을 보는 것이다. 마음의 문이 열려 있어서 생각이 들어 오는 것이다.

 

보여지는 것은 보여지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들어 오는 생각은 들어 오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보여지는 것이 보는 것으로 전개 되면 업이 된다. 마찬가지로 들어 온 생각을 생각하는 것 역시 업이 된다. 이 단계에서 알아차림이 있어야 한다.

 

좌선할 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마치 축구에서 수비가 뚫린 것과 같다. 문단속을 하지 않아 도둑이 든 것 같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어서 드라마처럼 전개 될 때 허탈하다. 번뇌망념에 탈탈 털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좌선할 때는 처음부터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새겨야 한다. 그리고 좌선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개도 놓치지 않으리라.”라며 다짐을 해야 한다. 이런 다짐이 없다면 그저 멍하니 앉아 있게 될 것이다. 흔히 하는 말로 멍때리기가 되는 것이다.

 

새김은 좌선에서만 필요로 될까? 새김은 일상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 , , , , , , , 정에도 새김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새김은 사띠를 말한다. 마음챙김이라고도 번역된다.

 

새김이라는 말은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어이다. 그러나 이 말은 잘 쓰이지 않는 것 같다.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사띠의 본래 의미와 동떨어진 번역어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이들은 의도적으로 기피하기도 하다.

 

새김은 일상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걸을 때도 새기며 걷는 것이다. 한발 한발 걸을 때 새기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설 때도 새기려고 하고 앉을 때도 새기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디가니까야 새김의 토대의 큰 경(D22, 대념처경)을 보면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관찰몸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이 있다. 먼저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관찰을 보면 다음과 같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 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D22.5)라고 했다.

 

 

 

이는 행, , , 와에 대한 것이다. 행위를 새기는 것이 반드시 좌선에서 호흡에 대한 것만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상에서도 새겨야 함을 말한다.

 

걸어 갈 때는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라고 했다. 한발 한발 걷고 있을 때 새기면서 걷고 있는데 누가 걷는 것일까? 내가 걷고 있는 것일까?

 

위빠사나 수행에서 내가라는 말이 나오면 이는 수행이 아니다. 자아가 있다고 여기는 이교도나 불교를 모르는 일반사람들은 내가 걷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교인이라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어떠한 뭇삶도 가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사람도 가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감인가? 어떠한 뭇삶의 감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감도 아니다. 어떠한 원인으로 가는가? 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요소의 침투에 의해서만 간다.”(Smv766)라고 했다.

 

일반사람들은 갈 때 내가 간다라고 말한다. 항상 내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을 분석하면 내가 가는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하여 마음의 작용과 운동()의 요소의 침투에 의해서 간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의 암시와 몸의 암시로 감을 말한다.

 

행선을 할 때 행선대를 왕래한다. 발을 옮길 때 내가 옮긴다기 보다는 의도가 옮긴다고 본다. 그 의도는 어디서 나오는가? 마음의 암시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음의 암시는 몸의 암시로 이어진다. 내가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어떤 주재자가 있어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정신과 물질의 작용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그는 몸에 대해 몸을 안으로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밖으로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몸을 안팎으로 관찰한다. 또는 몸에 대해 생성 현상을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소멸의 현상을 관찰하거나 몸에 대해 생성과 소멸의 현상을 관찰한다. 단지 그에게 순수한 앎과 순수한 새김이 있는 정도만큼 몸이 있다.’라는 새김이 이루어진다.”(D22.5)

 

 

걸음을 걸을 때 내가 걷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파악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면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생멸이다.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다른 것과 섞이지 않는다. 한번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순수한 앎과 순수한 새김이 있는 정도만큼 몸이 있다.’라는 새김이 이루어진다.”(D22.5)라고 했다.

 

흔히 사람들은 나를 내세운다. 그래서 내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언어적 개념이 들어간 것이다.

 

나라는 것은 언어적 명칭에 대한 것이다. 중생이라는 말도, 남자, 여자, 창조주라는 말도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언어적으로 명칭 되어진 개념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생멸이 없는 것이다.

 

생멸이 있으면 실재하는 것이다. 생멸이 없으면 개념이다. , 남자, 여자, 창조주라는 말은 개념이다. 생멸이 없어서 죽지도 않는다. 이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영원히 존재한다. 오로지 마음으로만,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기 위한 수행이다. 언어적 행위를 부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라는 개념을 오온으로 분해 해야 한다. 마치 수레를 해체 해 놓으면 더 이상 수레라고 말할 수 없듯이, 나라는 개념을 해체하여 색, , , , 식으로 분해해 놓으면 더 이상 나라는 개념은 발 붙이지 못할 것이다.

 

일상에서 새길 때는 행, , , 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몸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도 해당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였다.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은 나아가고 돌아오는 것에 대해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앞을 보고 뒤를 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굽히고 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드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먹고 마시고 소화시키고 맛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가고 서고 앉고 잠들고 깨어 있고 말하고 침묵하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춘다.”(D22.5)

 

 

이는 일상에서 알아차림에 대한 것이다. 일상에서 새김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또한 마음챙김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히 대변보고 소변보는 것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춘다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아무 생각 없이 대변이나 소변을 보지 말라는 말이다.

 

요즘 아파트 입구에서 어떤 사람을 본다. 담배 피우러 나가는 사람이다. 아파트 단지가 금연지역임에도 동에서 일부 사람들은 담배를 피운다. 경비실 뒤편 구역에서 피우는 것이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 대부분은 나이 든 노인들이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것 같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 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피우지 않고 밖에서 피우는 것이다. 그런데 담배 피우는 구역에는 금연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노인들이 담배를 피운다. 그러자 장년도 여기에서 피우고 심지어 청소년도 피운다.

 

담배 피우는 노인의 행위를 지켜 보았다. 동작이 대단히 빠르다. 머리는 허옅게 샜는데 하는 행위는 철 없는 젊은 사람 같다. 나이만 먹었을 뿐이지 빠릿빠릿한 행위가 경솔하게 보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나의 거울이라고 말한다. 타인을 보고서 나를 돌아 본다. 타인의 행위를 보고서 나의 행위를 돌아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노인의 깽동깽동한 행위를 보고서 새김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나도 저러지 않았나 성찰해 본 것이다.

 

아침에 일터로 나서는 순간부터 나의 행위를 새겨 본다. 놓칠 때가 더 많지만 그래도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차림 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대변을 볼 때나 소변을 볼 때도 올바로 알아차림을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를 적용한다면 밥 먹을 때도 새기며 먹어야 하고, 옷을 입을 때도 새겨야 한다. 동작을 천천히 할 수밖에 없다.

 

어른인지 아이인지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행동에 달려 있다. 무언가 쫓기듯이 빨리빨리 하면 경박한 것이다. 빠릿빠릿한 행위가 삶 속에서는 미덕일지 모르지만 수행의 세계에서는 경박하고 천박하고 경솔한 것이다.

 

새김을 유지하려면 천천히 행동해야 한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에서는 허리 아픈 환자처럼 천천히 움직여라.”라고 했다.

 

남의 행동을 보면서 타산지석으로 삼는다. 나이 먹은 만큼 나이 값을 해야 한다. 나이 든 자는 무엇이든지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빠릿빠릿하게 아무 생각 없이 행위하면 사고가 난다. 넘어질 수 있다. 넘어져서 골절상이라도 있게 되면 수명이 짧아질 수 있다.

 

오늘은 재가안거 57일째이다. 오늘 좌선은 한시간 동안 평온했다. 날씨는 흐리고 우중충 했지만 눈을 감은 명상의 세계는 평화로웠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한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데 다른 세계에 가 있는 것 같았다.

 

명상은 정신으로 이루어진 세계에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모든 신체적인 행위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단지 호흡만 대상으로 한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새김이라는 밧줄로 묶어 놓았을 때 그 길이만큼만 사유가 일어난다. 이런 사유를 즐겼다.

 

좌선 중에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면 마음이 평안하다.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일이 없이 새겨야 한다. 마치 행선할 때 여섯 단계 발의 움직임을 새기는 것과 같다. 이렇게 새기는 것에 대하여 마치 숫돌에 칼을 가는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청정도론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예를 들어 남자가 땅 위에 서서 잘 드는 칼을 들어서 커다란 대나무 덤불을 잘라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계행의 땅에 입각해서 선정의 돌로 연마된 통찰의 지혜라는 칼을 정진력으로 책려된 예지적 지혜의 손으로 움켜잡고 일체의 자신의 상속 중에 생겨난 갈애의 결박을 풀고 절단하고 파괴해 야 한다.”(Vism.1.7)

 

 

매듭을 푸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하나 푸는 방법이 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칼로 베어 버리는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후자의 방법을 택했다. 이는 지혜의 칼로 엉킨 매듭을 베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난마를 단칼로 베어 버리는 것과 같다.

 

난마처럼 엉킨 인생의 매듭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부처님은 가장 빠른 방법을 제시했다. 그것은 계, , 혜 삼학을 닦는 것이다. 지혜의 칼로 베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행의 바탕에서 삼매를 닦아야 한다. 그런데 삼매를 닦는 것에 대하여 선정의 돌에 지혜의 칼을 가는 것이라고 했다.

 

칼을 갈 때 숫돌을 이용한다. 지혜의 칼을 갈 때는 선정이라는 숫돌을 이용해야 한다. 선정을 닦으면 닦을수록 지혜의 칼은 예리해 질 것이다. 더욱더 갈면 머리털 한올도 여러 조각으로 베어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지 베어 버릴 수 있는 예리한 지혜의 칼을 만들어야 한다. 두 손으로 검을 꼬아 잡고 난마처럼 얽힌 매듭을 단칼에 베어 버려야 한다. 그렇게 했을 때 길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나고, 경지의 찰나에 그는 결박을 벗어난 자가 되어 신들을 포함한 세상에서 최상의 공양받을 만한 님이 된다.”(Vism.1.7)라고 했다.

 

 

2023-09-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