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머리에 전등이 켜진 것처럼, 재가안거 59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27. 11:06

머리에 전등이 켜진 것처럼, 재가안거 59일차

 

 

알로까, 빛이라고 한다. 광명이라고도 한다. 밝음도 빛이라 할 수 있을까? 좌선 중에 머리가 밝음이 왔는데 이를 빛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단지 집중이 잘 되었을 뿐이다.

 

오늘 재가안거 59일째이다. 오늘은 어제에 이어 가는 비가 왔다. 우산을 써도 되고 안되도 되는 날씨이다. 그러다 보니 날씨가 우중충하다. 사람 마음도 영향 받는 것 같다.

 

오늘 좌선은 832분에 시작 되었다. 좌선이 끝났을 때는 955분이었다. 1시간 23분 좌선 한 것이다. 그런데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 한시간은 사실상 혼침과 망상의 연속이었다는 것이다.

 

명상이 언제나 잘 되는 것은 아니다. 그날 컨디션에 영향을 받는다. 어떤 날은 처음부터 잘 되는 때가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분명히 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날은 집중이 되지 않아 망상 속에서 보낼 때가 있다. 더구나 졸립기까지 한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시간이 된다.

 

혼침이 왔을 때 좌선을 끝내고 싶어진다. 그러나 한시간을 채워야 한다. 이번 안거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아 있기로 자신과 스스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한시간은 매우 긴 시간이다. 한시간을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한다면 고문이라 할 것이다.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을 때 세상에 이런 고문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좌선하는 것에 대하여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활동하는 것에 대하여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라고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삶의 방식일 것이다. 대표적으로 TV시청을 들 수 있다. 요즘은 유튜브시청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좌선을 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이렇게 본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눈을 감고 앉아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힘들다. 가만 앉아 있다 보면 망상이 되기 쉽다. 온갖 생각이 치고 들어와서 만리장성을 쌓는다.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허탈하다. 집에 도둑이 들어서 탈탈 털린 것 같다.

 

명상의 최대 적 중의 하나는 혼침이다. 잠이 덜 깬 상태 같은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된다. 왜 그런가? 상태가 자꾸 변하기 때문이다. 마치 날씨 같은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바깥의 날씨는 맑아졌다. 가는 비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이른 아침 일터로 왔을 때와 상황이 다른 것이다. 몸 상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좌선 한시간에서 거의 대부분을 혼침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옛날 생각도 났다. 이런저런 생각이 갑자기 튀어 나온 것이다. 마치 폭풍우치는 바다에서 배가 표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갑자기 평온해질 때가 있다.

 

좌선 하다 보면 몸상태는 변화무쌍하다. 혼침으로 시간을 보내다가도 어느 순간 맑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비가 오다가 그치고 갑자기 해가 나는 것 같다. 이런 때를 놓쳐서는 안된다.

 

기회가 오면 기회를 잡아야 한다. 거의 한시간 내내 혼침과 망상으로 보내다가 순간적으로 밝음이 왔다. 머리가 훤해지는 것 같았다. 배의 부품과 꺼짐도 선명했다.

 

이런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계속 새겼다. 의도적으로라도 새겼다. 부품을 계속 따라 가다 멈출 때도 멈춤을 새겼다. 일 없이 반복해야 한다. 생활의 달인처럼 반복하는 것이다.

 

한참 새기고 있을 때 알람이 울렸다. 한참 재미보고 있는데 끝나는 것 같았다. 한시간 내내 혼침과 망상으로 보내다가 이제야 제대로 새기고 있는 것 같은데 종이 울린 것이다. 더 가기로 했다.

 

알람이 울렸지만 계속 달렸다. 지금 부터는 여분의 시간이 된다. 언제든지 명상을 끝낼 수 있다. 목표로 하는 한시간 명상을 달성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마지막이라고 생각되면 더 집중이 되는 것 같다. 알람이 울리자 그때부터 집중이 더 잘 되는 것이었다.

 

언제까지 달려야 할까? 배의 부품과 꺼짐, 그리고 멈춤까지 놓치지 않고 새겼을 때 번뇌와 망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주관찰 대상에 마음이 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마음을 배의 부품과 꺼짐이라는 기둥에 새김의 밧줄로 묶어 놓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을 복부의 움직임에 묶어 놓았을 때 마음이 평안해졌다. 마음이 한없이 편안하고 아늑하고 안온해진 것이다. 이럴 때 머리도 환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전구가 켜진 것처럼 환했기 때문이다.

 

계속 달렸다. 멈추고 싶을 때까지 달리는 것이다. 마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자가 달리는 것 같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가 오늘을 마지막 날처럼 사는 것이다.

 

알람이 울린 이래 새김은 계속 이어졌다. 처음에는 호흡을 따라가며 새겼으나 나중에는 저절로 새겨지는 것 같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 저절로 새김이 됨을 말한다. 이럴 때 테라가타에 있는 게송이 생각났다.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횐희하지도 않는다.

일꾼이 급여를 기다리듯,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6)

 

죽음을 기뻐하지 않고

삶을 횐희하지도 않는다.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

단지 나는 때를 기다린다.”(Thag.607)

 

 

 

이 게송은 쌍낏짜 장로가 읊은 것이다. 그러나 이 게송은 테라가타 이곳 저곳에서도 볼 수 있다. 이 게송은 아라한의 인생관에 대한 것이다.

 

아라한은 생사를 초월한 무아의 성자이다. 무아의 성자에게 삶과 죽음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죽음도 바라지 않고 더구나 삶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아라한은 오온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린 성자이다. 살아도 그만이고 죽어도 그만이다.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다. 무아의 성자에게 죽음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죽음이라는 말은 언어적 개념에 해당되는 것으로 있지도 않은 것이다.

 

무아의 성자는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것은 오온의 죽음이다. 오온이 죽었을 때 불사(不死: amata)가 된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해제된 자에게 죽음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사, 죽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죽지 않기 때문에 태어남도 없다.

 

죽음에는 진짜 죽음도 있고 가짜 죽음도 있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는 자는 진짜로 죽는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 했다면 지은 업()으로 인하여 재생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아의 성자는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버렸기 때문에 오온이 죽어도 죽지 않는다. 불사가 되는 것이다.

 

무아의 성자 아라한은 조용히 때를 기다린다고 했다. 마치 월급생활자가 월급날자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그런데 무아의 성자는 삶과 죽음을 초월했기 때문에 남은 삶을 던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삶을 놓아 버렸을 때 오온의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라한은 죽는 그 순간까지 사띠를 유지한다고 했다. 그리고 동시에 삼빠자나를 유지한다. 이는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sampajāno patissato)”(Thag.607)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항상 새김과 올바른 알아차림이 있는 것이다.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린 이후 새김이 유지 되었다. 마치 시한부 인생처럼 계속 앉아 있었다. 언제든지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아라한이 남은 삶을 던져 버리는 것처럼 좌선을 끝낼 수 있는 것이다.

 

여분의 좌선을 했다. 그러다 보니 새김이 분명해졌다. 배의 부품과 꺼짐, 멈춤 전과정을 볼 수 있었다. 나중에는 저절로 부품과 꺼짐, 멈춤이 되는 것 같았다. 이에 따라 새김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시간을 23분 보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분명히 새겼을 때 머리가 환해졌다. 처음에는 전등이 켜진 줄 알았다. 그러나 좌선을 할 때는 불을 꺼 놓는다. 오늘처럼 날이 흐린 날은 약간 어수룩하다.

 

새김이 분명해졌을 때 머리가 밝아졌다. 혹시 이런 것도 니밋따(nimitta) 아닐까? 그러나 니밋따일리가 없다. 니밋따는 선정 수행해서 특별한 기법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단지 집중이 됨에 따라 머리만 밝아 졌을 뿐이다.

 

오늘 재가안거 59일째를 맞아서 극적인 변화를 보았다.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는 혼침과 망상으로 보냈으나 알람이 울리고 난 이후부터는 집중이 잘 되었다.

 

좌선이 잘 안된다고 포기 해서는 안된다. 한시간 목표를 설정해 놓은 것은 잘한 것 같다. 마치 날씨에 변화가 있듯이, 몸에도 한시간 동안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막판에 머리가 환해져서 이를 놓치지 않았다. 기회를 잡은 것이다. 이후 알람이 울릴 때까지 밀고 갔다. 알람이 울리고 나서도 23분을 더 달렸다. 그 결과 혼침과 망상으로 보낸 좌선을 여분의 시간동안 새김이 있는 상태로 보낼 수 있었다. 머리에 전등이 켜진 것처럼 환한 상태를 맛보았다.

 

 

2023-09-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