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좌선 중에 숫자를 세어 보았더니, 재가안거 55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23. 10:46

좌선 중에 숫자를 세어 보았더니, 재가안거 55일차
 
 
빠다나경에 “비빠락깜마 지비땅 요가케맛사 빳띠야”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선정을 닦아서 멍에로부터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는 뜻이다. 부처님 6년 고행을 끝내고 네란자라 강가에서 용맹정진한 것을 말한다. 이에 훨씬 못미치지만 좌선을 하다 보면 때로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재가안거 55일째이다. 오늘 컨디션은 대체로 좋은 편이다. 약간 한기가 있기는 하지만 문제 되지 않는다. 어제 저녁 금요니까야모임 갔었을 때 약간 힘들었다. 안양에서 고양까지 승용차로 두 시간 가까이 달려 간 것이 피곤한 것이다. 간신히 두 시간 앉아 있다 온 셈이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들이 많다. 요즘 의무적으로 하는 것은 좌선이다. 매일 한시간 좌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일종의 몸 길들이기이다.
 
일단 앉아 있어 버릇 해야 다음 것들이 진행된다. 처음에는 번뇌망상 때문에 5분도 앉아 있기 힘들다. 앉아 있은지 20-30분이 지나면 이번에는 다리에 통증이 온다. 특히 평좌한 오른쪽 다리가 끊어질 듯 아픈 것이다.
 
지금은 한시간 보내기가 거뜬하다. 한시간 앉아 있어도 전혀 몸의 감각을 느끼지 않는다. 때로 깃털처럼 가볍다. 때로 나른하기도 하다. 기분 좋은 나른 함이다. 한시간 앉아 있다가도 벌떡 일어날 수 있다. 예전에는 다리에 피를 돌게 하고 다리를 풀어 주는 등 조치를 했었다.
 
한시간 앉아있기가 되다 보니 집중도 되는 것 같다. 주관찰대상인 복부에 집중하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 보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의 모습이나 모양을 보는 것은 아니다. 배의 움직임에 대한 느낌을 아는 것이다. 이것을 풍대라고 해야 할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은 사대 중에서 풍대에 해당된다. 이는 몸을 구성하는 지, 수, 화, 풍 사대 중에서 바람의 세계가 두드러진 것이다. 또한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개념이 아닌 실재를 보는 것이다. 풍대는 빤냣띠가 아닌 빠라맛타인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 보는 수행을 말한다. 개념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 보았을 때 존재의 실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무상, 고, 무아라는 세 가지 법의 공통된 특징으로 알 수 있다.
 
오늘 아침 좌선은 8시 7분부터 시작 했다. 시작은 순조로웠다. 자리에 앉자 마자 주관찰대상으로 향했다. 복부를 본 것이다.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 있으면 보인다. 움직이는 것이 느껴지는 것이다.
 
움직임을 감지 했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한다. 계속 물고 늘어져야 한다. 계속 따라가야 한다. 언제까지 따라가야 할까? 아마 몇 분 따라가다 보면 마음이 평안해진다.
 
좌선하면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다. 이번에는 숫자를 세어 보기로 했다. 주관찰대상인 복부에 집중했을 때 얼마나 따라가는지 알아 보기 위한 것이다.
 
호흡을 하면서 숫자를 세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아직까지 한번도 그렇게 해 보지 않았다. 이번 좌선에서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숫자를 50까지 세어 보았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기면 망념이 치고 들어 올 수 없다. 여기에다 숫자를 세니 더욱 더 방비가 되는 것 같다. 동시에 집중도 잘 되는 것 같다.
 
언제까지 숫자를 세고 있을 수 없다. 숫자 세기를 중단하고 다시 복부의 움직임을 새겼다. 새기면 새길수록 마음이 평안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이 평안하다면 집중이 잘 되고 있음을 말한다. 또 다른 말로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말한다.
 
명상전과 명상 후는 다르다. 명상 전에는 세상에서 삶을 살지만 명상 후에는 좀 더 다른 세상에서 사는 것 같다. 아마 이것이 수행의 효과일 것이다. 수행이라는 것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좌선 하면서도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는 불청객처럼 찾아 오는 망념과 다른 것이다. 새김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에서 생각하는 것은 지혜에 해당된다. 이를 삼빠자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용어는 ‘올바른 알아차림’(한국빠알리성전협회) 또는 ‘분명한 앎’(초기불전연구원)으로 번역된다.
 
사띠와 삼빠자나는 항상 함께 간다. 특히 수행에 있어서 그렇다. 사띠가 단독으로 쓰일 때는 계속을 뜻하는 아누(anu)가 붙어서 아눗사띠(anussati가 된다. 한자어로는 수념(隨念)이라고 한다.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는 붓다눗사띠(buddhānussati), 즉 불수념(佛隨念)같은 것이다.
 
수념은 사마타 명상에 속한다. 아나빠나사띠도 단지 호흡이 들고 나가는 것에만 집중한다면 사마타 명상에 해당된다. 이렇게 사띠가 붙은 것은 사마타명상이기 쉽다.
 
사마타명상에서는 삼빠자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위빠사나명상에서는 사띠와 삼빠자나는 항상 함께 있지만 사마타명상에서 삼빠자나라는 말은 보기 힘들다.
 
복부를 주관찰 대상으로 했을 때 집중이 일어난다. 복부는 풍대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몸을 관찰하는 수행이 된다. 사념처 중에서 신념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사념처이든지 사띠와 삼빠자나는 항상 함께 한다. 이는 사념처가 위빠사나 수행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사띠와 삼빠자나가 함께 하는 것이다. 사띠만 있는 위빠사나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 사띠만 있는 수행이라면 그것은 사마타가 될 것이다. 부처님만 계속 생각하는 붓다눗사띠(佛隨念)가 대표적이다.
 
사띠와 삼빠자나가 함께 가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디가니까야 대념처경을 보면 사념처에 대하여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새김을 확립하여”(D22.2)라는 정형구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올바른 알아차림은 삼빠자나를 말하고, 새김은 사띠를 뜻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새김이 있으면 삼빠자나가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생각을 할 수 있음을 말한다. 새김이 있는 생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지혜이다. 사띠 자체가 선법이기 때문에 삼빠자나는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복부의 움직임을 계속 관찰하면 새김이 확립된다. 그리고 평안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된다. 이런 상태에서 머물고 싶어 진다. 동시에 생각이 일어난다. 이때 생각은 꾸살라(kusala), 즉 선법(善法)이고, 또한 착하고 건전한 법이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생각을 했다. 오늘 이른 아침에 읽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마음에 와 닿았다.
 
 
생겨나지 않으면 생성되지 않고
현재 생겨남으로 생성된다.
마음이 괴멸하면 세상은 멸하니,
궁극적 의미의 사실이다.”(Vism.20.72)
 
 
이 게송은 청정도론 20장 도비도비견청정에 있다. 이 게송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찰나생찰나멸이다. 한번 생겨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위빳사나 수행방법은 청정도론을 기반으로 한다. 마하시 사야도는 이 게송에 대하여 “아직 생겨나지 않은 마음으로 즉 생겨날 마음으로 태어나고 있는 것. 존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생겨나고 있는 현재 마음으로만 생존하는 것이다. 마음이 소멸하기 때문에 세상이라고 부르는 중생이 죽는다. 그렇지만, 즉 마음이 소멸할 때마다 중생들이 죽지만, ‘철수가 살아 있다’라고 불리는 상속 개념은 말할 때 현재 마음으로는 생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실재성품과 비슷하다.”(2권, 237-238쪽)라고 해석 해 놓았다.
 
참으로 심오한 게송이다. 찰나생찰나멸하는 마음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상속으로 설명했다. 이는 “마음이 소멸할 때마다 중생들이 죽지만, ‘철수가 살아 있다’라고 불리는 상속 개념은 말할 때 현재 마음으로는 생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실재성품과 비슷하다.”(2권, 237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더 자세히 알 수는 없을까?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생겨날 마음 어느 하나하나도 아직 생겨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중생들은 아직 생겨나지 않은 마음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생겨나고 있는, 머물고 있는 마음만 분명하다. 따라서 생겨나 있는 마음으로만 살아 있을 수 있다. 이미 생겨났던 마음도 소멸하고 사라져 버렸을 때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은 이의 임종 마음처럼, 다시 생겨나지 않은 채 완전히, 철저히 소멸하고 사라지기만 한다. 따라서 ‘마음 하나하나가 계속해서 사라져 버릴 때마다 중생들 죽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철수가 살아 있다. 영화가 살아있다’ 등으로 말할 수 있는 상속 개념은 항상 옳은 실재성품과 비슷하다. 무엇 때문인가? 그렇게 말할 때 마음이 계속해서 새로 생겨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살아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만약, 마음 하나가 사라져 버렸을 때 뒤에 다시 새로운 마음이 생겨나지 않는 다면 중생은 진실로 죽어 버린다. 이렇게 마음 하나하나가 사라져 버릴 때마다 죽을 수 있는 모습도 수행자는 알고 보고 이해한다. 그래서 ‘죽는다’라고 하는 것도 ‘지금 새겨 아는 마음 하나하나가 소멸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사라지는 종류일 뿐이다’라고 결정할 수 있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237-238쪽)
 
 
마음은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영속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마음에서 기억하고 있다면 살아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마음도 빠라맛타(실재)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더 이상 마음에서 기억하지 않았을 때 정말 죽어 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이름을 계속 기억하면 살아 있는 것 같지만 이름을 잊어 버렸을 때 진짜 죽은 것과 같다.
 
분노할 때가 있다. 분노가 일어 났을 때 즉시 사라진다. 영속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분노를 기억해서 마음에 두고 있다면 분노가 계속 살아 있는 것과 같다. 분노를 죽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분노하는 그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더 이상 분노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죽은 자나 똑 같은 것이다.
 

 
오늘 재가안거 55일째를 맞았다. 오늘은 정평불 북콘서트가 있는 날이기도 하다. 어제부터 사무실 정리를 했다. 북콘서트 준비를 한 것이다. 선물도 준비 했다. 먼 곳에서 오는 손님들에게 줄 것들이다. 책과 꿀을 준비 했다.
 

 
책은 정평불 3년 8개월 활동한 것에 대한 글모임이다. 글을 모아 보니 책으로 하나가 되어서 북콘서트를 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는 백권의 책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무실 이름을 백권당(百卷堂)으로 했다.
 

 
오늘 백권당에서 북콘서트가 열리는 날이다. 조금 지나면 12시에 사람들이 올 것이다. 어떤 이는 미리 화분을 보내왔다.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난 화분 보내는 것으로 축하를 하는 것 같다. 화분에는 “백권당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크게 써 있다.
 

 
오늘 행사에 앞서서 좌선을 했다. 하루라도 거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장문의 후기를 작성한다. 한번 써 놓으면 남는 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전에 이렇게 써 놓았기 때문에 북콘서트 하는 것이다. 오늘은 기쁜 날이다.
 
 
2023-09-2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