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호흡은 저절로 새기는 마음도 저절로, 재가안거 52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20. 11:23

호흡은 저절로 새기는 마음도 저절로, 재가안거 52일차

 

 

참으로 편안하고 아늑하다. 이대로 계속 있고 싶다. 여기는 또 다른 세계이다. 눈을 감고 앉아 있으나 현실을 벗어난 나만의 세계에 있다. 이런 맛에 좌선하는 것인지 모른다.

 

오늘은 재가안거 52일째이다. 컨디션은 대체로 좋다. 잠은 잘 잤다. 등의 한기도 없어졌다. 오늘 좌선은 잘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또 다시 비가 내리고 있다. 어떤 이는 요즘 같은 날씨에 대하여 가을장마라고 말한다. 세차게 내리는 비에 감이 다 떨어졌다고 한탄 하는 이도 있다. 농작물 피해가 막심한 것 같다.

 

 

사람들은 날씨에 영향 받는다. 그날 날씨가 우중충하면 기분도 우울해진다. 햇볕이 쨍쨍하면 마음도 밝아 진다. 그러나 전천후 날씨가 있다. 좌선하면 날씨에 영향 받지 않는다.

 

오늘 아침 일터에서 식사를 했다. 감자와 고구마를 쪄 왔다. 계란 하나를 삶아 왔다. 샌드위치 한쪽에 치즈를 넣었다. 인삼 갈은 물에 아침식사를 했다. 뒤끝 없는 최상의 청정한 식사이다.

 

일터에 오면 해야 할 것들이 있다. 아침부터 업무는 하지 않는다. 좌선에 영향 주기 때문이다. 이메일을 열어 보았을 때 부정적인 내용이 있다면 그것을 해결하기 전까지는 명상을 할 수 없다. 그 대신에 화초를 가꾸었다.

 

동이에 담궈 놓은 난화분을 옮겨 놓았다. 어제 저녁 퇴근 할 때 동이에 담궈 놓은 것이다. 난화분은 일곱 개나 된다. 30개 가까이 되는 화분에 물을 주었다. 알라카시아는 너무 자라서 쓰러져 있다. 지지대를 꼽고 줄로 묶어 주었다.

 

모든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앉기만 하면 된다. 앉을 때는 비장한 마음이 든다. 마치 출진하는 장수와 같은 심정이다. 마침내 자리에 앉는다. 말 안장에 앉는 것 같다.

 

방석에 앉을 때 다짐을 한다. 오늘은 꼭 부품과 꺼짐을 빠지지 않고 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새기겠노라고 다짐하는 것이다.

 

자리에 앉아서 배에 집중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배의 움직임이 보인다. 손을 대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부풀 때 이를 새긴다. 꺼질 때도 새긴다. 그러나 처음에는 쉽지 않다. 몸과 마음이 아직 적응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지 괘도에 오르기 위해서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앉자마자 새김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생각이 치고 들어 온다. 아직 새기는 힘이 약할 때 치고 들어오는 것이다. 생각이 망상이 된다. 마치 하나의 꿈을 꾸는 것 같고 마치 하나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다.

 

생각이 치고 들어와 드라마를 펼칠 때 허탈하다. 마치 수비가 뚫린 것 같다. 축구에서 수비가 뚫리면 골로 연결된다. 마치 집에 도둑이 든 것 같다. 새김을 놓쳤을 때 도둑이 들어와 활개 치는 것 같다.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고 말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어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말보다 훨씬 더 낫다.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사띠한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새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에서 사띠의 역할은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배의 부품을 관찰할 때 이를 사띠한다고 하는데 이는 부품을 기억하는 것이다. 이를 순수한 우리말로 새긴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띠는 기억하는 역할도 있지만 지키는 역할도 있다. 잡념이 치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수비하는 것이다. 사띠를 놓치면 집의 문이 열려 있는 것과 같다. 도둑이 활개치고 다닐 것이다.

 

잡념이 치고 들어 오면 나의 마음을 내 주는 것과 같다. 잡념이 망상이 되어서 집을 짓기 때문이다. 그 짦은 시간에, 그 짧은 찰나에 만리장성을 쌓는 것이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고 드라마 한편을 보는 것 같다.

 

자리에 처음 앉으면 몸과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다. 아직 자리가 잡혀 있지 않은 것이다. 시간이 더 지나야 한다. 아마 20분정도는 지나야 자리가 잡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망상의 지배를 받는다. 망념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이러기를 여러 번 반복한다.

 

좌선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환해지는 때가 있다. 의식이 명료해지는 때이다. 이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마치 세렝케티 평원에서 치타가 먹이를 발견하듯, 부품과 꺼짐의 먹이를 나꿔채야 한다.

 

머리가 환해지는 때가 기회이다. 이때 마음을 배의 부품과 꺼짐에 가져 간다. 가져 간다기 보다는 가만히 있으면 움직임이 보이는 것이다. 이 움직임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먹이를 발견한 것처럼 물고 늘어져야 한다.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앉아 있다고 해서 항상 머리가 환하고 명료한 것은 아니다. 마치 날씨 같다. 흐렸다가 개었다가 하는 것 같다.

 

머리가 환해 졌을 때 마음이 명료해진다. 이때가 찬스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따라가며 새긴다. 처음에는 분명하지 않다. 부품에서 꺼짐으로 넘어갈 때 멈춤도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모양이나 모습으로 새겨서는 안된다. 처음에는 명칭을 붙이기 때문에 모양이나 모습으로 새길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명칭을 떼 버린다. 그 다음부터는 마음으로 새기는 것이다.

 

마음으로 어떻게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까? 이는 복부의 운동성과 관계가 있다. 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새기면 배의 모양이나 모습과 관계 없이 움직임을 마음으로 새길 수 있는 것이다.

 

한번 입에 문 먹이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번 잡은 배의 움직임을 계속 새겨야 한다. 주변에 시끄러운 소리가 나도 오로지 부품과 꺼짐을 새겨야 한다.

 

차 지나가는 소리가 시끄럽다. 전철 지나가는 소리는 우뢰와 같다. 여기에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건물 전체에서 나는 기계음이 난다. 갖가지 소리가 오케스트라 연주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새기고 있으면 소리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지는 것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새기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마음이 편안해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만큼 집중이 되었음을 말한다. 당연히 잡념도 줄어 든다.

 

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면밀히 새기면 새길수록 잡념은 치고 들어오지 못한다. 당연히 망상의 집도 짓지 못한다. 그 대신 자각이 일어난다. 이를 반조라고 말할 수도 있고 알아차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또 다른 말로 삼빠자나라고 말할 수 있다.

 

배의 움직임을 새기고 있어도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새김이 없을 때 치고 들어오는 잡념과 다른 것이다. 잡념은 나도 모르게 들어 오는 것이다. 청하지도 않았는데 들어오는 불청객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생각하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건전한 것이다. 경전적 지식도 될 수 있고 법문에서 들었던 내용일 수 있다. 이런 것도 사띠일 것이다.

 

사띠가 있는 상태에서 생각은 왜 건전한 것인가? 이는 새김의 힘이란 무엇인가수행승들이여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수행들이여이것을 새김의 힘이라 한다.”(A5.14)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는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A5.14)이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새김이 획립되었을 때 망념은 치고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나 자각은 일어난다. 이를 알아차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알아차림은 삼빠자나를 말한다. 사띠는 새김으로 번역하고, 삼빠자나는 알아차림으로 번역한다. 이때 사띠와 삼빠자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사띠는 이전 것을 기억하는 의미가 강하다. 또한 마음의 문을 지키는 역할도 한다. 주 관찰 대상인 배의 움직임을 새겼을 때 망념이 치고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둔다.”라고 말한다. 청정도론에서는 이렇게 사띠에 대하여 설명해 놓았다.

 

마음은 멋대로이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대상에 머물러 있는다. 마음은 제어하지 않으면 여섯 가지 감각 대상에 가 있는 것이다.

 

마음을 한 곳에 머물러 있게 하려면 머물 대상을 정해야 한다. 호흡이 좋은 대상이 된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복부가 대상이 된다.

 

좌선을 할 때 복부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주 관찰대상인 것이다. 좌선을 해서 20분정도 경과하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는데 이는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묶어 둔 것이다. 마음을 복부의 움직임에 새김의 밧줄로 묶어 둔 것이다.

 

소를 기둥에 묶어 부면 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인다. 마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복부의 움직임을 새긴다는 것은 마음을 복부의 움직임에 새김의 밧줄로 묶어 두는 것과 같다. 그런데 줄은 어느 정도 길이가 있다. 그래서 그 길이만큼만 마음이 활동한다. 이를 고짜라, 행경이라고 한다.

 

소를 묶어 두면 줄의 길이만큼만의 범위에서 풀을 뜯는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복부에 새김의 밧줄로 묶어 두면 그 길이만큼만 생각 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잡념이 치고 들어 올 수 없다. 그러나 생각은 할 수 있다. 이것을 자각, 반조, 또는 삼빠자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경전에 표현 되어 있는 것처럼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는 것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삼빠자나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이라고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분명한 앎이라고 번역했다. 이런 삼빠자나에 대한 주석적 설명을 보면 “1) 행동의 목적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2) 수단의 적합성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3)활동반경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4)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Pps.I.253)라고 되어 있다.

 

삼빠자나에 대한 설명을 보면 삼빠자나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즉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의 밧줄로 묶어 놓은 상태에서 삼빠자나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행동목적을 알아차린다고 했다. 무엇보다 활동반경에 대한 알아차림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다름 아닌 고짜라, 행경을 말한다.

 

삼빠자나를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아마 그것은 네 번째 항에 설명되어 있는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일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현상을 빤냣띠(개념)으로 보지말고, 빠라맛타(실재)로 보자는 말과 같다.

 

왜 좌선을 하는가? 왜 힘들게 마치 고행하듯이, 마치 벌받듯이 한시간 앉아 있는가? 고행 끝에 찾아 오는 편안함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명상을 하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개념을 보지 말고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사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위빳사나라는 것은 물질과 정신들이 분명하게 생겨나는 차례대로 관찰하여 어리석은 범부들의 집착, 집착의 대상, 잠재된 번뇌들을 무너뜨리고 제거하는 것이다.”(2, 230)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수행의 차례(patipattikkama)는 다음과 같다. , 돌림 등을 생겨나 는 그 차례대로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관찰하고 있는 수행자가 보고 난 다음 어떤 소리를 들으면, ‘볼 때의 물질들은 들을 때 이르지 못한다. 바로 그 볼 때 사라져 버린다라고 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보고 난 다음 냄새를 맡으면, 먹으면, 닿으면, 생각하면볼 때의 물질들은 냄새 맡을 때, 먹을 때, 닿을 때, 생각할 때에 이르지 못한다. 바로 그 볼 때 사라져 버린다라고 안다.

 

그와 마찬가지로 듣고 난 다음 보면, 냄새를 맡으면, 먹으면, 닿으면, 생각하면들을 때의 물질들은 볼 때, 냄새 맡을 때, 먹을 때, 닿을 때, 생각할 때에 이르지 못한다. 바로 그 들을 때 사라져 버린다라고 안다.

 

냄새 맡은 다음 보면, 들으면, 먹으면, 닿으면, 생각하면냄새 맡을 때의 물질들은 볼 때, 들을 때, 먹을 때, 닿을 때, 생각할 때에 이르지 못한다. 바로 그 냄새 맡을 때 사라져 버린다라고 안다.

 

먹고 난 다음 보면, 들으면, 냄새를 맡으면, 닿으면, 생각하면먹을 때의 물질들 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닿을 때, 생각할 때에 이르지 못한다. 바로 그 먹을 때 사라져 버린다라고 안다.

 

닿고 난 다음 보면, 들으면, 냄새를 맡으면, 먹으면, 생각하면닿을 때의 물질들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먹을 때, 생각할 때에 이르지 못한다. 바로 그 닿을 때 사라져 버린다라고 안다.

 

생각한 다음 보면, 들으면, 냄새를 맡으면, 먹으면, 닿으면생각할 때의 물질들은 볼 때, 들을 때, 냄새 맡을 때, 맛볼 때, 닿을 때에 이르지 못한다. 바로 그 생각할 때 사라져 버린다라고 안다.

 

거듭해서 볼 때, 거듭해서 들을 때 등에도첫 번째 볼 때의 물질이 두 번째 볼 때의 물질에 이르지 못하고, 두 번째 볼 때의 물질이 세 번째 볼 때의 물질에 이르지 못한다. 첫 번째 들을 때의 물질이 두 번째 들을 때 의 물질에 이르지 못하고, 두 번째 들을 때의 물질이 세 번째 들을 때의 물질에 이르지 못한다. 바로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등으로 안다.

 

이렇게 어떠한 한 순간의 물질이 다른 순간에 이르지 못하고 각각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라고 직접 경험하여 알기 때문에 분명한 그 모든 물질들을 무상하다. 괴로움이다. 무아이다라고 일부러 깊이 숙고하지 않고 단지 새기는 것만으로 분명하게 알고 보고 이해한다. 이상이 다섯 번째 관찰방법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231-232)

 

 

여섯 가지 감역의 영역이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사실은 한번 생겨난 것은 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영속하지 않음을 말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그때그때의 경우에 생겨난 것들이 각각의 다른 부분에 도달하지 않고 그때그때 경우에 각 마디, 각 결절, 각 구획에서 마치 달구어진 그릇에 던져진 참깨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는 것처럼, 그 형성들이 부수어진다.”(Vism.20.65)라고 했다.

 

명상을 하는 것은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할 수 있다. 또한 스트레스를 감소하기 위해서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명상은 여기서 더 나아간다. 그것은 정신법과 물질법이 영원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도 사라질 때는 즉시 사라진다. 더구나 사라질 때는 조건 없이 사라진다.

 

좌선 하면서 배의 움직임을 본다. 마음을 복부의 움직임에 새김의 밧줄로 꽁꽁 묶어 놓으면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생멸이다. 일어난 것은 사라질 뿐이다. 오로지 부품과 꺼짐만 있다. 그리고 이를 새기는 마음만 있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마음이 가장 평안하다.

 

새김이 확립되어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하나의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호흡이 저절로 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복부의 움짐임을 따라가며 새기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어느 상태에 이르면 복부의 움직임을 저절로 새기게 되는 것이다.

 

오늘 재가안거 52일째를 맞이 하여 한시간 좌선 했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평좌한 다리에서 통증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저절로 호흡이 되고 저절로 새기는 상태가 되었다. 마음은 지극히 평안해졌다. 더 오래 있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목표가 달성 되었기 때문이다.

 

 

2023-09-2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