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분노가 네 것입니까?” 재가안거 50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18. 11:08

분노가 네 것입니까?” 재가안거 50일차

 

 

분노가 네 것입니까?이 말에 사무쳤다. 어제 저녁 잠자기 전 유튜브에서 들은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이 8년전에 법문한 것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50일차이다. 마침내 50이라는 숫자를 찍었다. 그러나 아직도 한참 남았다. 90일 안거에서 40일 남았다. 이제 반을 넘었을 뿐이다.

 

오늘 한시간 앉아 있었다. 오전 83분부터 93분까지 앉아 있었다. 지루했다. 시계를 두 번 쳐다 보았다. 집중이 되지 않았다. 가면 갈수록 혼침이 계속 되었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망상이 일어났다.

 

나이 먹어서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은 고역이다. 한시간 버티기가 고문당하는 것 같다. 그럼에도 한시간을 채워야 한다. 이번 안거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하루 한시간 앉아 있기로 했기 때문이다.

 

집중이 안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숙면을 취하지 않은 것이 큰 이유일 것이다. 또 한가지는 몸에 열이 있는지 한기가 있다. 타이레놀을 먹고 잤다. 아침이 되어도 한기가 약간 남아 있었다.

 

나이 들어 늙은 나이에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몸에 병이라도 있다면 앉아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수행은 젊어서 하라고 했나보다.

 

악마는 젊은 출가자를 유혹한다. 악마 빠삐만 나이들고 병든 바라문 성직자의 모습으로 변신해서 말한다. 바라문은 콜록거리면서  존자들은 젊고 머리카락이 아주 검고 행복한 청춘을 부여받았으나 인생의 꽃다운 시절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지 않고 출가했습니다존자들은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십시오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마십시오.”(S4.21)라며 말한다.

 

젊어서 출가한 수행은 바라밀공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전생에 수행을 한 과보로 이른 나이에 출가하여 수행자로 사는 것이다.

 

젊은 수행자는 현명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새겼다. 젊은 수행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직자여우리들은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성직자여우리는 시간에 매인 것을 좇기 위해 현재를 버리지 않습니다.

 

성직자여감각적 쾌락의 욕망은 시간에 매이는 것이고괴로움으로 가득 찬 것이고아픔으로 가득찬 것이고그 안에 도사린 위험은 훨씬 더 큰 것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서 유익한 가르침이며시간을 초월하는 가르침이며와서 보라고 할 만한 가르침이며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가르침이며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세존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며 악마를 물리친다.”(S4.21)

 

 

수행자를 유혹하는 것은 악마뿐만 아니다. 기녀도 수행자를 유혹한다. 기녀는 “젊어서 그대는 출가했다. 나의 가르침을 따르시오. 인간의 감각적 쾌락을 즐기시오. 내가 재산을 주겠소. 정말 그대에게 약속하겠소. 아니면내가 불을 가져오겠소.(Thag.461)라고 말했다.

 

기녀는 돈이 많은 사람이다. 돈으로 수행자를 사려 하는 것이다. 이는 성자를 타락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자를 꺽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전 재산을 주겠다고 했다. 믿지 않은 듯하자 불 앞에서 맹세하겠다고 한다.

 

사람을 함부로 믿지 말라고 했다. 사람을 믿으면 실망하기 쉽다. 여러 남자를 상대하는 기녀의 말을 얼마나 믿어야 할까? 더구나 기녀는 “우리가 늙어서 둘이서 지팡이에 의지하게 될 때, 둘이서 함께 출가하면두 곳에서 행운의 주사위가 던져지는 것입니다.(Thag.462)라고 말했다. 수행은 늙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교인들은 삼보에 의지한다. 설령 스님이라고 하여 스님을 의지처로 해서는 안된다. 성자가 아닌 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 하물며 기녀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기녀에 따르면, 젊었을 때는 즐기는 삶을 살다가 수행은 늙었을 때 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다.

 

현명한 수행자는 기녀의 마음을 읽었다. 수행자를 유혹하여 타락하게 만드는 것임을 파악한 것이다. 이에 수행자는 “기녀가 합장하여 애원하는 것을 보았다. 장식하고좋은 옷을 입었으나, 죽음의 왕의 그물이 펼쳐진 것 같았다.(Thag.463)라며 알아 챈 것이다.

 

수행은 젊었을 때 하라고 했다. 수행은 힘 있을 때 하라고 했다. 20대 때 수행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고, 30대 때는 아나함이, 40대 때는 사다함이, 50대 때는 수다원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60대 때 수행하면 무엇이 될까?

 

나이 들어 수행하면 불리한 것이 많다. 몸의 기능이 약화 되어서 앉아 있기도 힘들다. 그래서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노년출가에 대하여 수행승들이여노년의 출가자가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설법을 하기 어렵다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A5.60)라고 했다.

 

노년출가가 어렵다고 한다. 나이가 60이 넘어 출가한다면 그래도 조금은 나을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기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나이가 70이 넘어 출가한다면 힘들어질 것이다. 몸의 기능이 하나 둘 망가질 때 앉아 있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80이 되어 출가한다면 어떻게 될까? 누워 지내기 쉬울 것이다.

 

출가는 젊었을 때 해야 한다. 수행도 젊었을 때 해야 한다. 나이 들어 출가하거나 수행한다고 할 때 장애가 있다. 그래서 경에서는 “1) 총명을 얻기 어렵다. 2) 위의를 갖추기 어렵다. 3) 박학하기 어렵다. 4) 가르침을 따르기 어렵다. 5) 가르친 것을 기억하기 어렵다. 6) 가르친 것을 잘 이해하기 어렵다. 7) 설법을 하기 어렵다. 8) 계율을 수지 하기 어렵다.”(A5.60)라고 했다.

 

나이 들어 수행하고 있다. 나이가 육십이 넘어서 앉아 있는 것이다. 젊은 시절에는 이런 것이 있는 줄도 몰랐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다니기 바빴다. 그렇게 20년 살다 보니 사십대가 되었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교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불교는 교학만 공부해서는 안된다. 실천해야 한다. 배운 것을 실제로 경험해 보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한 것을 몸으로 아는 것이다. 더 나이 먹기 전에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수행이라는 것을 해 보고 싶었다.

 

 

수행은 나홀로 할 수 없다. 수행은 스승도 있어야 하고 도반도 있어야 하고 수행처도 있어야 한다. 현재 재가안거 하고 있는 입장에서 담마와나 선원이 나의 수행도량이라고 볼 수 있다.

 

 

어제 담마와나 선원에서 법회가 있었다. 테라와다 스님을 모시고 특별법회가 열린 것이다. 법사는 담마위하리 스님이다. 한국테라와다불교 소속의 스님이다. 담마와나 선원장 떼자사미 스님도 함께 했다.

 

 

청파동 법회에 참석하고자 했다. 재가안거를 하고 있는 입장에서 안거가 절반 되는 시점이기도 해서 찾아 간 것이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찾아 갔다.

 

법회는 늦게 참석했다. 오전 10시 반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도중에 담마위하리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담마위하리 스님은 산냐(saññā)에 대하여 법문 했다. 주로 문자 풀이 위주로 법문 했다. 산냐에서 산과 냐로 구분하여 설명한 것이다.

 

스님에 따르면 산냐는 사(sa)+냐나(ñāa)라고 했다. 여기서 냐는 앎이라는 뜻이다. 빤냐할 때도 냐가 들어가고 산냐할 때도 냐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의 뜻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어원적으로 상카라에 가깝다고 했다.

 

빠알리어 중에 삼마가 있다. 이는 삼은 바르다는 뜻이다. 그런데 삼마에서 마가 자유로워지다의 뜻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삼은 산냐에서 사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삼마딧티(sammādiṭṭhi)라고 했을 때 이 말은 바른 견해(正見)이 되는데, 어원적으로 풀이하면 어떤 이미지나 지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는 뜻도 있다고 한다.

 

한자를 파자 하면 뜻이 오묘하다. 한자를 파자하여 설명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 보면 일리가 있다. 빠알리도 파자해 보면 심오한 뜻이 있다. 어원을 거슬로 올라 가면 몰랐던 것도 알게 된다. 담마위하리 스님은 어원 분석을 통해서 용어를 설명하고자 했다.

 

담마위하리 스님은 여러 이야기를 했다. 스님은 참석자들에게 지혜란 무엇입니까?”라며 질문했다. 이에 어떤 참석자가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지혜는 무상, , 무아의 지혜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답에 대하여 왜곡된 지혜라고 말했다.

 

불교적 지혜는 무상, , 무아의 지혜임에 틀림 없다. 그럼에도 이런 답에 대하여 왜곡된 대답이라 한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깨달은 자의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님은지혜 없는 사람이 지혜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스님의 말을 들어 보니 타당하다. 이는 깨달음이란 깨달은 자만이 알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은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왜곡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진실어자라고 했다. 부처님은 진실만을 말하는 자, 진리만을 말하는 자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은 진실하지 못한 말, 진리가 아닌 것이 되기 쉽다. 입만 벙긋하면 어긋나는 것이다.

 

본래 진리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진리는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은 언어로써 진리를 설했다. 누구나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열반은 말로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초기경전을 보면 언어로써 설명되어 있다. 비유로써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열반은 안전하기가 섬과 같고, 열반은 안은하기가 동굴같다는 식이다. 또한 탐, , 치가 없는 것이 열반이라고 했다.

 

 

법문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은 11시에 먹었다. 테라와다스님들은 12시 이후에는 먹을 수 없다. 12시 이전에 식사를 끝내야 하는 것이다.

 

 

재가자들은 법당에서 밥을 먹었다. 한접시에 밥과 나물 등 음식을 담아와서 함께 먹은 것이다. 밥을 함께 먹으니 식구 같다. 자주 얼굴을 보니 익숙하기도 하다.

 

 

밥을 먹기 전에 사람들에게 공지한 것이 하나 있다. 담마와나 북콘서트를 1028() 12시에 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늘 좌선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혼침으로 한시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시간을 버텼다. 오늘은 만족스럽지 않지만 다음날은 기약할 수 있다.

 

재가안거라 하여 매일 한시간씩 좌선을 하고 있다. 그리고 유튜브 법문을 듣고 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일도 하면서 좌선도 하면서 몇 가지 일을 함께 하다 보니 집중력도 떨어진다. 그럼에도 이것이 최선이다. 더 나이 먹기 전에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해 놓아야 한다.

 

 

수행을 하면 매일매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어제 보다 다른 오늘이 된다. 재가안거를 해서 통증을 남의 것으로 보게 된 것은 큰 소득이다. 분노도 남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 통증을 지켜 보듯이 분노도 지켜 보고자 한다.

 

어제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에 사무쳤다. 스님의 8년전 법문에서 분노가 네 것입니까?”라는 말에 사무친 것이다. 나는 언제나 욕망과 분노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까?

 

 

2023-09-1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