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만나면, 재가안거 47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15. 12:32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만나면, 재가안거 47일차

 

 

좌선이 끝난지 10분이 되었다. 10분이 지난 후에 자판을 치고 있다. 그 사이에 화장실에 가고 원두커피를 내렸다. 원두커피를 마셔가며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생생하고 따끈따끈한 글이 될 것 같다.

 

좌선이 끝나자 마자 글을 쓰면 있는 그대로 쓸 수 있다. 그 사이에 뉴스를 본다든가, 유튜브를 본다든가, 에스엔에스를 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타인의 주의나 주장에 휘말리지 않는다.

 

오늘은 재가안거 47일차이다. 언제나 변함 없이 오전만 되면 자리에 앉는다. 자리에 앉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업체 담당들 출근하기 전에 끝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전화가 걸려 올 수 있기 때문이다.

 

좌선시간은 정해진 시간이 없다. 가장 안정된 때에 자리를 앉는다. 일찍 오면 일찍 자리에 앉고 늦게 오면 늦게 앉는다. 공통적으로 아침식사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커피 한잔을 마셔야 한다.

 

좌선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때 앉는다. 대개 오전 7시반에서 8시가 되기 쉽다. 한시간동안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한다. 좌선이 만족스럽지 않으면 더 앉아 있는다. 만족스러워도 더 앉아 있는다. 요즘은 이래저래 더 앉아 있는다. 대체로 한시간 반동안 앉아 있는 것 같다. 앞으로 두 시간 앉아 있을 날도 있을 것이다.

 

오늘 좌선은 한시간으로 끝냈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해서 10시 정각에 끝냈다.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일감을 수주 받았는데 밤낮으로 해야 한다. 일주일 분량 일감이다. 잘하면 반달 먹고 살 돈이 들어 온다. 어찌 전력투구 하지 않겠는가?

 

어제는 저녁 늦게까지 일했다.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본래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했던 것을 또 하는 식이다. 새로운 것이 없다. 물론 이전 것과 백프로 같지 않기 때문에 새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전 것과 같다면 재주문이 된다. 이럴 경우 메일 한통이면 일이 끝난다. PCB제조업체에 메일을 보내서 택배로 발송하라고 전하면 끝이다. 그러나 새로운 도면의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 주어야 한다. 수천, 수만번 클릭해야 완성되는 것이다.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이다. 시간과의 싸움이다. 시간을 투자해서 벌어먹고 사는 직업이다.

 

납기를 지켜 주어야 한다. 고객에게는 두 가지를 잘 해 주어야 한다. 납기와 품질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원하는 기간 내에 만들어 주어야 한다. 만들어 주되 문제가 없게 만들어 주어야 한다.

 

도면을 잘못 본다거나 설계한 것을 확인하지 못했을 때 그대로 손실로 연결된다. 다시 만들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사실상 돈으로 때우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용의 추락이다.

 

나이 먹어서도 일을 하고 있다.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다. 키워드광고를 해도 전화 한통 걸려 오지 않는다. 일인사업자가 나이가 든 것을 눈치 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용인에 있는 주거래업체에서는 꾸준히 일감을 준다. 이런 때 품질사고를 내서 다시 만들어 주는 사태가 발생된다면 달리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이번 주에 해야 할 일이 많다. 정의평화불교연대(정평불) 행사는 하루나 이틀이 멀다 하고 계속 되고 있다. 이번주 화요일에는 종로3가 부근에 있는 불교환경연대 사무실에서 눈부처학교 102강이 있었다. 참석자들이 적어서 머리수라도 보태 주고 싶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저녁에 전철을 탔다. 더구나 다음날 후기까지 작성했다.

 

오늘 금요일 915일은 정평불 수련회가 있는 날이다. 안성시 죽산면에 있는 활인선원에서 12일 수련회가 열린다. 참석자가 어느 정도 되어야 한다. 머리수를 하나라도 더해야 한다. 그러나 일인사업자에게 타격이 크다. 모처럼 일감을 잡아 납기를 맞추어 주어야 하는데 12일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바쁘다. 행사가 있으면 일이 있어서 참석을 못한다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작년에도 그랬고 재작년에도 그랬다는 것이다.

 

모임은 모여야 모임이 이루어져야 한다. 모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주변정리를 해 놓아야 한다. 밀린 일을 속도를 내서 하는 것이다.

 

오늘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어제 밤늦게까지 밀린 일을 했다. 그러나 일의 양이 워낙 많아 주말작업도 해야 한다. 이럴 경우 12일 수련회 참석하면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다.

 

어떻게 해야 할까? 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저녁에 종합토론만 참석하고 심야에 돌아 오는 것이다. 토요일은 마무리 작업하는 날로 갖는 것이다.

 

일감이 없다면 12일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고객의 주문만 바라보고 사는 사업자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모임도 좋지만 먹고 사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토요일 일감이 마무리 되면 917일 일요일 정진산행을 부담없이 갈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좌선은 행복했다. 오늘 새벽 잠을 잘 자서 그런 것 같다. 도중에 깨지 않고 잔 것이다. 도중에 깨면 피곤한 하루가 된다. 도중에 깨지 않은 것은 아마도 수면제를 반개 먹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제 늦게까지 작업했다. 귀가하니 11시가 넘었다. 몸에 한기가 왔다. 몸에 열이 있는 것 같다. 다음날 수련회도 참가해야 하는데 걱정 되었다. 이전에 있던 감기약을 먹었다. 그리고 수면제 반개를 먹었다. 이것이 효과 있었던 것 같다.

 

좌선은 부담 없었다. 다리통증도 없었다. 엉덩이 닿는 느낌은 심하지 않았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었다. 마음을 한 대상에 두면 다른 대상은 잊어버린다. 설령 통증이 있다고 하더라도 내것이 아닌 것으로 본다.

 

이제 통증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가벼운 다리통중이나 엉덩이 닿는 무게를 느끼지만 내 것으로 보지 않는다. 남의 다리, 남의 엉덩이로 보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것도 수행의 진전일 것이다.

 

물질과 정신을 분리해서 보면 통증이 정신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좌선할 때 다리 통증을 느끼지만 내가 아프다라고 느끼지 않는 것이다. 다만 뻐근하다라고 느낄 정도이다. 때로 시원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통증이나 닿은 만큼은 이제 내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나의 것으로 보는 것 같다.

 

좌선을 시작하기 전에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좌선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 예외가 있다. 경전과 논서는 본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을 열어 보았다. 이미 한 번 본 것이다. 그럼에도 열어 본 것은 명상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초기경전, 즉 니까야는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아도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논서 역시 아무 곳이나 펼쳐 보아도 수행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위빠사나 명상을 할 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그렇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감동적인 구절을 읽었다. 그것은 분노에 대한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분노의 마음, 원한맺힌 마음에 대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자애의 마음이다.

 

오늘 좌선은 평온 했다. 기쁨이 넘쳤다. 그렇다고 선정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단지 앉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편했다는 것이다. 눈을 감고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좋았음을 말한다.

 

자애명상을 시도해 보았다. 한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방법은 알고 있다. 청정도론에 자애명상 하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어제 저녁 작업을 하면서 유튜브 영상을 하나 보게 되었다. 망갈라 위하라에서 만든 사범주 수행(https://youtu.be/cfoqq8fM_ZY?si=Eqz8RQNWlKnM1MP8)이 그것이다. 파옥 사야도가 2005년 켈리포니아에서 법문한 것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들려 주는 것이었다. 삿다마사라 빅쿠가 녹취해서 해설한 것으로 2015년 서울 향천선원에서 법문한 것이다.

 

파옥 사야도의 자애명상에 따르면 자애명상 대상의 조건이 있다. 두 가지로 압축 된다. 그것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일 것과 동성일 것이 조건이 된다. 왜 이 두 가지가 중요한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하여 먼저 가족을 대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근심걱정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한다. 또한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 하여 이성을 대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애정이 생겨날 수 있음을 말한다.

 

파옥 사야도의 자애명상은 자애명상의 진수를 보여 주는 것 같다. 먼저 니밋따가 떠야 한다. 강력한 빛으로 대상을 비추어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여기서 자애의 대상은 웃는 모습이다. 물론 마음으로 만들어낸 이미지이다.

 

자애의 대상으로서 가장 가깝고도 동성인 대상은 누구일까? 스승이 가장 이상적인 대상이라고 한다. 동성으로서 존경하는 스승을 대상으로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스승의 모습은 웃는 모습이다. 물론 자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이미지이다.

 

나에게도 스승이 있을까? 스승은 없지만 우호적인 사람들은 있다.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떠 올리면 웃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을 내야 할까?

 

파옥 사야도에 따르면, 먼저 얼굴에 집중하라고 했다. 그리고 네 가지 형식의 자애의 마음을 보내라고 했다. 이는 이 훌륭한 분께서 위험에서 자유롭기를!” “이 훌륭한 분께서 정신적인 괴로움에서 자유롭기를!” “이 훌륭한 분께서 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훌륭한 분께서 평안하고 행복하기를!”라고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파옥 사야도가 말한 네 가지 자애의 마음은 자애송(The chant of Metta)

에 있는 것이다. 이는 아베라 혼뚜(averā hontu), 아브야빳자혼뚜(abyāpajjhā hontu, 아니가혼뚜(anīghā hontu), 수키 앗따남 빠리하란뚜(sukhī attāna pariharāntu)”라는 구절을 말한다.

 

자애명상은 세 번째 선정까지 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자애의 마음을 내었을 기쁨과 행복이 절정에 달하기 때문이다. 네 번째 선정에서는 평온이기 때문에 자애의 마음에 의한 선정은 3선정까지에 해당된다.

 

좌선을 하면서 자애의 마음을 내 보았다. 동성으로서 존경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 올려 보았다. 웃는 이미지를 만들어 보았다. 오래 보지는 못했다. 짧게나마 이 훌륭한 분들이 위험에서 자유롭기를! 괴로움에서 자유롭기를!, 몸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평안하고 행복하기를!”라고 자애의 마음을 내 본 것이다.

 

자애명상을 했을 때 이성도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파옥 사야도에 따르면 이성을 개별적으로 명상하지 말라고 했다. 이런 경우는 삽베 잇토이요(sabbe itthoiyo)”라 하여 모든 여자들로 하는 것이다. 이성의 경우 모든 여자들이라고 그룹으로 묶어서 아베라 혼뚜(averā hontu), 아브야빳자혼뚜(abyāpajjhā hontu, 아니가혼뚜(anīghā hontu), 수키 앗따남 빠리하란뚜(sukhī attāna pariharāntu)”라며 자애의 마음을 내는 것이다.

 

자애명상은 짧게 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자애명상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사람 한사람 불로서 이미지를 떠 올리며 자애의 마음을 내 보았다. 그런데 자애명상은 반드시 존경하는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만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편한 사람도 대상이 될 수도 있고, 미안한 사람이 대상이 될 수도 있고, 원한 맺힌 사람도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애명상을 하다 보니 미안한 사람이 떠 올랐다. 과거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내가 무지해서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길거리에서 만나면 사과를 하고 싶다.

 

이 나이에 과거를 되돌아 보면 후회스러운 일이 많다.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한 것은 주체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하니까 따라 간 것이다. 마치 세상의 흐름대로 사는 것과 같다.

 

언젠가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만남이다.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 말 한마디에 오해가 풀렸다.

 

과거 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젊었을 때 아무 것도 모르고 저질렀는데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연히 만나기라도 한다면 사과하고 싶다.

 

행위을 하면 반드시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내가 잘못한 것은 사과 하고 싶다. 그렇다면 상대방이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도 분이 풀리지 않는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용서 되지 않는다. 나는 과거 그 사람의 과거의 허상을 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비난하는 사람이라는 것도 성냄을 뿌리로 한 마음과 함께 생겨나는 정신법들, 마음에 의해 생겨난 물질법들일 뿐이다. 다섯 무더기(五蘊)일 뿐이고, 물질과 정신일 뿐이다. 비난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어떠한 존재는 따로 없다. 그 물질과 정신들도 비난하는 바로 그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 그러니 지금 화낼 일도 없다. 비난하는 물질과 정신들이 없는데도 그 뒤에 화를 내고 있으면 그 물질과 정신들의 연 속된 결과인 새로운 물질과 정신들에 대해서 비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것은 마치 부모에게 원한을 가져 그들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나 손자에게 복수를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비난당하고 있는 그대도 다섯 무더기일 뿐이다. 그 다섯 무더기, 물질과 정신들도 바로 지금 사라져 간다. 그러한 물질과 정신의 연속된 결과인 바로 지금 물질과 정신들이 화를 내고 있다면 부모 시대에는 어찌할 수가 없어 아들, 손자, 손녀 시대가 되어서야 복수를 하는 것과 같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92)

 

 

 

법구경 3번 게송을 보면 그는 나를 욕하고 때렸다.”라는 문구가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원한을 품을 것이다. 원한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 이름만 들어도, 그 사람 얼굴만 보아도 그 때 그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좋을까?

 

원한을 원한으로 갚을 수 없다. 욕망을 욕망으로 제거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걱정을 걱정해서 걱정을 없앨 수 없는 것과 같다.

 

욕망을 제거하려면 욕망을 내려 놓아야 하고, 걱정을 제거하려면 걱정을 내려 놓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원한을 원한으로 갚을 수 없다.

 

원한을 내려 놓아야 한다. 그래서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고 했다.

 

지금 내가 그 사람을 원망스럽게 생각한다면 나는 그 사람의 허상에 사로 잡혀 있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이 과거에 행위한 것에 대하여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나만 괴로운 것이 된다. 그런데 이런 행위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부모가 저지른 잘못을 아들이나 손자에게 복수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이미 지난 일이다. 과거 일을 꺼집어 내서 곱씹고 있다면 그 사람의 아들이나 손자에게 복수를 하고자 하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지금 내가 화를 내는 것은 마치 부모에게 원한을 가져 그들이 죽은 뒤에 그 아들이나 손자에게 복수를 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 92)라고 했다. 이는 과거 허상에 대한 집착이다.

 

나를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때 당시 그 사람의 정신법과 물질법이 나를 비난 했다. 비난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 어떠한 존재는 따로 없다. 나는 허상을 보고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난 일이다. 행위를 한 사람은 없다. 다만 행위는 남아 있다. 행위가 있어서 언젠가 조건을 만나면 과보로 나타날 것이다.

 

내가 힘들게 한 사람을 만나면 사과할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을 만나면 더 이상 원수를 갚지 않으려 할 것이다. 지금 물질과 정신들이 화를 낸다면 부모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것과 같다. 과거의 허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오로지 정신법과 물질법의 무더기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2023-09-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