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복부새김은 집과 가정과 일터에 이어 네 번째 피난처, 재가안거 46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14. 12:35

복부새김은 집과 가정과 일터에 이어 네 번째 피난처, 재가안거 46일차
 
 
돌아 갈 집이 있기에 길을 떠난다. 돌아갈 집이 없다면 정처없이 떠돌것이다. 해가 어스름한 무렵에 불빛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할 때 집으로 향한다.
 
장기간 여행하는 사람이 있다. 전세계를 대상으로 여행하는 사람이다. 생업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은퇴했거나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에 해당된다.
 
어떤 여행자가 있다. 여행자는 인도를 여행했다. 세 달이 넘는 인도여행에서 속된 말로 ‘개고생’을 했다고 한다. 오토바이 한대에 의지하여 인도북부 오지를 탐험했는데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는 것이다.
 
여행자는 6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고자 한다. 본래 1년 예상을 하고 집을 떠나왔으나 몸도 지치고 마음도 지쳐서 이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돌아갈 집이 있기에 험지, 오지를 여행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돌아갈 집이 있다. 노숙자의 경우 돌아갈 집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처는 있다. 굴다리 한켠에 박스를 쌓아 놓은 곳이 돌아갈 집인 것이다. 또한 자리를 펴는 곳이 돌아갈 집인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돌아갈 집이 있다. 돌아갈 집이 있기에 밖에 돌아다닐 수 있다. 그런데 돌아갈 곳이 하나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직장이다.
 
이런 말이 있다. 남자는 가정과 직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말은 여자에게도 해당된다. 남자가 가정만 있고 직장이 없으면 방황하기 쉽다. 반대로 직장은 있지만 가정은 없다면 역시 방황하기 쉽다. 그럼에도 돌아갈 집은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사람들은 집이 있다. 이는 방이 있다는 말과 같다. 잠잘 수 있는 방을 말한다. 그런데 집은 있지만 가정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 사람은 가정이 없다. 가정이 없어도 돌아갈 집이 있다. 이럴 때 돌아갈 집은 피난처가 된다.
 
가장 이상적인 삶은 어떤 것일까? 이는 집도 있고 가정도 있고 직장도 있는 케이스가 이에 해당된 것이다. 이렇게 삼박자가 맞았을 때 안정될 것이다. 이 세 가지 조건이 만족되면 피난처가 된다.
 
요즘 갈수록 일인가구가 늘어나고 있다. 나홀로 사는 사람들이 가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자녀가 집을 떠나 독립해서 혼자 사는 경우도 있다. 부부가 함께 살다가 한쪽이 별세하는 경우 혼자 살게 된다. 이혼하게 되었을 때 혼자 사는 경우도 있다.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것이 더 낫다. 혼자 사는 것보다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 부부가 함께 산다면 서로가 서로의 의지처가 되어 준다.
 
둘이 함께 살아서 불편한 경우도 있다. 서로 성격이 맞지 않는 케이스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성격차이로 불화가 자주 일어나다 보면 결국 혼자 살게 될 것이다.
 
요즘 홀로 사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홀로 사는 것을 좋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잔소리하는 사람도 없고 간섭하는 사람도 없어서 홀로 사는 것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나 홀로 살게 됨에 따라 외로움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수행자들은 홀로 사는 경우가 많다. 사람이 사는 곳에서 뚝 떨어진 곳에 거처를 마련해 놓고 홀로 사는 것이다. 농사도 짓고 애완동물도 키우면서 살기도 한다. 고독한 삶이다.
 
외로움과 고독은 다른 것이다. 외로움을 타는 것은 타인에게 의지하고픈 마음이 있는 것이다. 반면에 고독을 즐기는 것은 자신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일반사람은 외로운 삶을 살지만 수행자는 고독한 삶을 살아간다.
 
 
집과 일터를 왕래하는 삶을 살고 있다. 집과 가정과 일터가 있는 것이다. 세 가지 피난처를 갖추고 있다. 여기에 하나 더 피난천가 생겼다. 이를 복부새김의 피난처라고 말하고 싶다.
 
재가안거 46일째이다. 오늘은 늦게 일터에 나왔다. 오늘 아침 늦게 일어난 것이다. 시계를 보니 6시 45분이었다. 이렇게 늦게 일어난 적이 없었다. 아무래도 수면제 탓일 것이다.
 
오늘 새벽에 잠에서 깼다. 시계를 보니 1시대였다. 늦게까지 TV나 유튜브를 보던 사람들은 잘 시간이다. 이렇게 도중에 깬 것은 너무 일찍 잠들었기 때문이다. 저녁 9시 때부터 잠을 자기 시작한 것이다.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난다. 그런데 한번 잠에서 깨면 다시 잠자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직장 다니는 사람은 잠을 계속 자야 할 것이다.
 
잠에서 깨었을 때 할 것이 없다. 경전과 논서를 보고 경행을 해 본다. 그러나 한번 달아난 잠을 불러 오기 쉽지 않다.
 
잠은 잠이 와야 잠을 자는 것이다. 억지로 잠을 잘 수 없다. 잠은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잠을 자야겠다는 마음을 내려 놓을 때 잠이 올 것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를 대비해서 수면제를 준비 했다. 어제 병원에서 타 온 것이다. 타이레놀과 함께 일주일 분량을 타왔다.
 
약에 의존하지 않는다. 어지간한 것은 약을 먹지 않고 버틴다. 몸의 자연복원력을 믿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병원에도 가지 않는다. 이빨이 아플 때나 감기에 걸렸을 때 가는 정도이다.
 
스마트폰 메시지에 건강검진 받으라는 문자가 와 있다. 받지 않으면 큰 일 날것처럼 써 있다. 받지 않으면 불이익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애써 무시한다.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건강진단을 거부하는 것도 자랑이 아니다. 비난 받을 일이다. 그럼에도 거부하는 것은 어떤 일인가? 나 자신을 믿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은 자신이 잘 안다.
 
건강한 몸은 아니다. 골골하다고 보아야 한다. 컨디션은 늘 다르다. 잠을 잘 잔 날은 최상의 컨디션이다. 잠을 잘 못 잔 날은 최악의 컨디션이 된다. 이런 때 수면제의 유혹을 떨쳐버리기 힘들다.
 
주변 사람들을 보면 약을 한주먹씩 먹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갖가지 기능이 약화되어서 약의 양도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러나 약은 최소화 한다.
 
장복하는 약이 있다. 그것은 서산 보광당 한약방에서 지어준 ‘십년환’이다. 일종의 장약이라고 볼 수 있다. 속이 더부룩할 때 먹으면 효과가 있다. 또 하나는 ‘팔미원’이다. 이 약은 전립선에 좋다고 한다. 일종의 강장제이다. 이 밖에도 중풍예방에 좋은 ‘백중환’이 있고, 설사나 장염에 좋은 ‘사신환’이 있다.
 
십년환, 팔미원, 백중환, 사신환은 모두 환약이다. 갖가지 약재를 버무려 마치 콩알 모양의 환약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십년환은 장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최근 몇 년 동안 설사를 한번 해 본적이 없다.
 
어떻게 해야 잠을 잘 수 있을까? 잠을 잘 자기 위한 환약은 없을까? 보광당 원장에게 문의했으나 그런 약은 없다고 했다. 양약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어제 코앤이비인후과에서 수면제 일주일 분량을 타 왔다.
 
오늘 새벽 수면제 반개를 먹었다. 확실히 수면 효과가 있었다. 오늘 아침 6시 45까지 잔 것이다. 이렇게 잠을 자서일까 기분은 매우 상쾌 했다.
 
수면제에 의지해서는 안될 것이다. 특별한 날에나 먹는 비상약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여행이나 수련회에 갔었을 때 잠을 꼭 잘 자야만 할 상황에 처했을 때 먹는 것이다.
 
오늘 좌선은 9시 17분에 시작 했다. 일터에 늦게 왔으므로 좌선도 늦게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좌선을 하기 전에 예비동작을 취한다. 식사를 하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오전 한시간 좌선을 위해서 주변정리를 해야 한다. 아침식사도 좌선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한다. 많이 먹거나 자극적인 것을 먹어서는 안된다.
 
오늘 아침식사는 준비한 것으로 먹었다. 집에서 감자와 고구마와 계란 하나씩을 가져 왔다. 감자와 고구마는 에어프라이어에 찐 것이고, 계란은 물에 찐 것이다. 여기에 바나나 반쪽을 곁들였다. 뜨거운 물에 꿀을 타서 함께 먹었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셔야 피의 순환이 되는 것 같다. 이때 그 어떤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는다. 뉴스를 본다든가 유튜브를 본다든가 페이스북을 보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좌선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았다. 한시간 달려 보는 거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그러나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멀리 떠나 있는 것 같다. 이럴 때 배의 부품과 꺼짐으로 복귀해야 한다.
 
좌선 중에 복부에 마음을 두는 것은 여행자가 집에 돌아 오는 것과 같다. 방황하던 마음이 집으로 되돌아 오는 것 같다. 이럴 때 복부는 돌아갈 집과 같은 것이다.
 
복부는 집과 같다. 복부는 홈과 같다. 복부는 직장과 같다. 복부는 일터와 같다. 복부는 집과 같고, 가정과 같고, 일터와 같다. 남자는 가정과 직장이 없으면 방황한다고 한다.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반사람에게 집과 가정과 일터는 피난처와 같다.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이고, 언제든지 복귀할 수 있는 곳이다. 수행자에게 복부는 피난처와 같다.
 
번뇌망상이 있어도 언제든지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다. 복부의 움직임을 보는 것은 돌아갈 집이 있는 것과 같고, 가족이 있는 가정이 있는 것과 같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터가 있는 것과 같다.
 
찬콩 스님이 있다. 틱낫한 스님과 함께 프랑스에서 플럼빌리지를 만든 스님이다. 찬콩 스님은 교계신문 인터뷰에서 호흡이 피난처라고 했다. 이에 자극받아 시를 하나 쓴 것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호흡이 피난처)
 
 
매일 숨을 쉰다.
들이 마시고 내쉬고를 반복한다.
지금까지 숨을 쉬며 들이 마시며
호흡하며 살아 왔다.
 
숨을 멈춘다면 사망이다.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지 못한다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물고기가 물의 고마움을 모르듯
사람들은 숨의 고마움을 모른다.
물고기가 밖으로 나오면 헐떡이듯
산소가 희박하면 헐떡인다.
 
“있을 때 잘해!”라는 유행가도 있다.
숨을 쉴 때 잘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청정한 삶이다.
 
늘 새벽을 새벽을 맞는다.
새벽은 해가 뜨는 전조이다.
착 가라 앉은 새벽에
숨소리가 난다.
 
들이 마시고 내쉬고 할 때마다
이전의 행위가 부끄러워 진다.
이럴 때 외워 놓은 시가 생각난다.
마음에 드는 시는 외워놓고 볼 일이다.
 
그날의 행위가 깨끗한지는
잠자리에 들면 알 수 있다.
한 생의 삶이 청정한지는
죽음의 침상에 누워봐야 알 수 있다.
 
더러운 삶을 산 자는 
‘내가 악을 지었다’고 후회한다.
청정한 삶을 산 자는
‘내가 선을 지었다’고 환호한다.
 
청정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늘 깨어 있는 삷이다.
깨어 있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현재만 계속 된다면
죽지 않는 것과 같다.
게으른 사람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깨어 있지 않아 지금 여기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순간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다면 어떻게 될까?
 
숨을 들이 마시고 내 쉰다.
호흡하면 잡생각이 나지 않는다.
피난처가 삼보라 하지만
이 순간 만큼은 호흡이 피난처이다.
 
(호흡이 피난처진흙속의연꽃, 2015-05-04)
 
 
찬콩 스님은 호흡이 피난처라고 말했다. 이 말에 사무쳤다. 그래서 호흡이 피난처라는 제목으로 시를 하나 써 보았다. 경전 문구를 근거로 해서 써 본 것이다.
 
호흡은 피난처로 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지금은 복부를 피난처로 삼고 있다. 시를 새로 쓴다면 ‘복부가 피난처’로 해야 할 것 같다.
 
요즘 복부를 피난처로 하고 있다. 세 개의 피난처가 있는데 이제 네 번째 피난처가 생긴 것이다. 집, 가정, 일터라는 세 개의 피난처에다가 복부새김이라는 피난처가 더해진 것이다.
 
복부를 피난처로 삼기에는 충분하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 있으면 마음이 평화롭다. 이는 사마타 수행이 아니다.
 
호흡만을 새기고 있으면 사마타가 된다. 호흡수행에서 호흡의 들어오고 나가는 데 초점을 모으면 사마타 수행이 된다. 그러나 공기가 콧구멍에 닿는 느낌을 관찰한다면 위빠사나 수행이 된다.
 
호흡에서 닿음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생멸하는 빠라맛타(실재)이다. 더 확실하게 빠라맛타를 관찰 할 수 있는 방법은 복부를 보는 것이다.
 
마하시전통에서는 복부를 관찰하라고 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찬먜 선원의 우 자나까 시야도는 법문집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복부 관찰 이유)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위빳사나 수행법은 존귀 하신 마하시 세야도께서 널리 보급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 방 법을 계발한 분이 마하시 세야도는 아닙니다.

마하시 세야도께서는 28세 되던 해에, 당시 아라한으로 알려져 있었던, 매우 유명한 수행 스승이신 제따완 세야도의 지도하에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때 한 재가신도가 단기 출가를 하여 역시 제따완 세야도의 지도를 받으며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집중과 꿰뚫어보는 지혜의 진보를 이루는데 있어 어떤 것이 가장 적합한 방법인지를 찾아내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복부의 불러오고 꺼지는 움직임에 대한 관찰이었습니다.

그는 복부의 움직임은 바람요소(와요 다투)의 특성으로,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면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관찰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복부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이 집중과 꿰뚫어보는 지혜의 진보를 이루는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수행자가 복부의 불러오고 꺼지는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처음 계발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이 방법으로 성과를 올린 그 수행자는 다른 수행자들에게도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해보라고 권했고, 다른 수행자들 또한 그가 경험한 것과 같은 효과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방법을 그들의 스승인 제따완 세야도께 보고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제따완 세야도께서는 <마하사띠빳타나 숫따>에 근거하여 볼 때, 복부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마하사띠빳타나 숫따>에 '네 가지 기본적인 물질요소의 관찰' 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복부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은 그 부분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네 가지 요소는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빠타위 다투, 아뽀 다투, 떼조 다투, 와요 다투입니다. 빠타위 다투(땅의 요소)는 딱딱함과 부드러움, 아뽀 다투(물의 요소)는 유동성과 응집성(점착성), 떼조 다투(불의 요소)는 따뜻함과 차거움, 와요 다투(바람요소)는 동작, 움직임, 진동, 지탱함 등의 고유한 특성이 있습니다.

불러오는 움직임과 꺼지는 움직임을 관찰할 때, 집중이 깊어지면 여러 분은 복부의 형태나 모양을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때로는 몸의 형태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련의 움직임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마하사띠빳타나 숫파>에서 네 가지 물질적인 요소의 관찰에 대한 설명과 일치하는 것이므로 존귀하신 제따완 세야도께서는 복부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 마하시 세야도 역시 이 방법을 시도하셨고, 마하시 세야도 께서도 이 방법이 매우 성공적이고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마하시 세야도께서 제자들을 지도할 때 무엇을 관찰해야 좋을지 잘 모르는 수행자들을 위해 이 방법을 위빳사나 수행의 기본 대상으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 28, 439-441쪽,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출간)
 

 

 
복부를 관찰하는 수행법은 미얀마에서 20세기 초반에 계발한 것이다. 이는 풍대에 대한 것이다. 또한 경전적 근거도 가지고 있다. 이를 널리 보급하여 세계화 시킨 사람이 마하시 사야도인 것이다.
 
복부관찰 할 때 방법이 있다. 그것은 모양을 보지 말라는 것이다. 움직임만 보라고 했다. 그래서 “집중이 깊어지면 여러 분은 복부의 형태나 모양을 의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때로는 몸의 형태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일련의 움직임만을 깨닫게 됩니다.”라고 했다.
 
복부를 새길 때 복부의 모양이나 형태를 떠올리며 관찰한다면 이는 빳냣띠(개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움직임만 관찰한다면 이는 빠라맛타(실재)가 될 것이다.
 
오늘 재가안거 56일째를 맞이 하여 1시간 11분 앉아 있었다. 대부분 시간을 망상으로 보냈지만 막판에 복부의 움직임을 보게 되었다. 집중이 잘 되어서 부품과 꺼짐의 전단계를 새기게 되었다.
 
배의 부품에도 단계가 있고 배의 꺼짐에도 단계가 있었다. 부품과 꺼짐 사이에 멈춤이 있는데 이것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멈춤 다음에 잠시 휴지기 동안에는 엉덩이 닿음을 새겼다.
 
알람이 울리고 나서도 계속 좌선 했다. 한번 잡은 것을 놓치지 싫었다. 도중에 전화 진동이 울렸지만 무시했다. 계속 가고자 한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을 새기자 마음이 편해졌다. 마치 집에 온 것 같다. 복부새김은 집과 가정과 일터에 이어 네 번째 피난처가 되는 것 같다.
 
 
2023-09-1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