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눈을 감고 있으나 뜨고 있으나, 재가안거 43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11. 11:28

눈을 감고 있으나 뜨고 있으나, 재가안거 43일차

 

 

눈을 감아도 아무 생각이 없고 눈을 떠도 아무 생각이 없다. 눈을 뜬 채로 가만 있었다. 눈을 감은 것과 다름 없다. 번뇌망상도 들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은 것이나 눈을 뜬 것이나 똑 같은 상태가 되었다.

 

오늘은 재가안거 43일째이다. 오늘 좌선은 1시간 48분 했다. 오전 812분에 시작해서 10시에 끝냈다. 912분에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지만 무시고 계속 앉아 있었다. 여분으로 48분을 더한 것이다.

 

해야 할 일이 많다.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한다. 오후에는 창동 장모댁에 가서 김치를 가져 와야 한다. 니까야모임 후기도 써야 하고 스리랑카 성지순례기 마무리도 해야 한다. 여기에다 책만들기 서문도 써야 한다.

 

요즘 오전은 수행으로 다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전일과는 좌선을 중심으로 해서 돌아간다. 좌선 전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이는 뉴스도 보지 않고 유튜브도 보지 않고 페이스북도 보지 않음을 말한다.

 

오전에는 명상에 영향 주는 행위는 일체 하지 않는다. 뉴스를 보아서 그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면 명상을 제대로 할 수 없다. 그래서 명상을 하기 전에는 주변정리부터 해 놓아야 한다.

 

명상이 끝나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렇게 후기를 작성하는 것이다. 명상 중에 일어났던 것을 솔직하게 쓰는 것이다. 누가 평가하는 사람도 없다. 있는 그대로 마음 놓고 쓰는 것이다.

 

오늘 오전 좌선 한시간은 망상속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고자 했으나 생각이 치고 들어 온다. 아마 방심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내가 생각을 해서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생각이 일어나서 들어 온 것이다. 이런 생각은 불청객 같은 것이다.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오는 사람을 불청객이라고 한다. 주로 축하는 자리에서 볼 수 있다. 축하연에서는 초대하는 사람만 와야 한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오는 사람은 달갑지 않다. 그러나 애사에서는 다르다. 문상 가는 것은 초대하지 않아도 갈 수 있다. 애사에서 불청객은 없다.

 

번뇌와 망상은 불청객과 같은 것이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들어 왔을 때 수비가 뚫린 것 같다. 마치 도둑이 들어 온 것 같다. 더구나 집까지 지었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 짧은 순간에 만리장성을 쌓았을 때 허탈하기 그지없다.

 

도둑을 막으려면 문단속을 잘해야 한다. 좌선에서 문단속 잘하는 것이 사띠이다. 사띠가 문지기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꽁꽁 묶어 두었을 때 훌륭한 문지기 역할을 한다.

 

좌선하면서 이상한 습관이 생겼다. 종이 울릴 때 분발한다는 것이다. 한시간으로 설정해 놓은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는 번뇌망상으로 보낸다. 알람이 울리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그때부터 고도의 마음 집중을 하려 하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다 보면 사마타의 길과 위빠사나의 길이 있다. 사마타의 길로 갈 것인 것 위빠사나의 길로 갈 것인지는 정하면 된다. 대상에 대하여 몰입하면 사마타의 길이고, 대상에 대하여 관찰하면 위빠사나의 길이 된다.

 

알람이 울리고 나서 사마타를 하기로 했다. 눈 앞의 허공을 대상으로 해 보기로 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약간 밝은 기운이 있는데 이것을 대상으로 하나가 되어 보기로 한 것이다.

 

마음이 대상과 일치되면 다른 것은 들어 오지 않는다. 마음을 감은 눈 앞에 허공을 대상으로 마음을 두었을 때 엉덩이의 닿는 느낌이나 다리의 가벼운 통증은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허공이 마음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공무변처정을 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 단계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공 대상은 다만 들어 보았을 뿐이다. 언젠가 위빠사나를 지도하는 김도이 선생이 허공을 대상으로 한다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다.

 

이번 재가안거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좌선을 하면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실험해 보고 있다. 오늘은 허공을 대상으로 마음을 두기로 했다.

 

마음을 허공에 대상에 두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감은 눈에 밝음을 대상으로 마음을 두는 것과 같다. 호흡이 들고 나갈 때 그 호흡이 빛으로 변한다는 말을 들었다. 이른바 니밋따가 뜨는 것이다. 이런 기대를 하며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허공을 응시했을 때 이점이 있다. 집중이 잘 된다는 것이다. 집중이 되면 몸이 아픈 것도 모른다. 몸의 감각을 모르기 때문이다. 오로지 앞만 바라보았을 때 잘 들리지도 않는 것 같다.

 

평소에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천둥 치는 것처럼 크게 들린다. 그런데 허공을 바라보고 있을 때 소리는 적게 들리는 것 같다. 몸의 감각만 둔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리의 감각도 둔해지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 눈을 감은 상태에서 밝음을 대상으로 허공을 응시했을 때 분명히 니밋따를 생각했다. 나에게도 니밋따가 뜨기를!”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계속 밀어 부쳤다.

 

어느 순간 눈 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그것은 바로 앞에 있는 칸막이다. 명상공간 사방에 놓은 사무실용 칸막이를 말한다.

 

칸막이는 처음에는 아스라이 보였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보였다는 것이 신기했다. 분명히 눈 앞에 칸막이도 있고 바닥에는 매트도 보였다. 계속 보고 있으니 더욱더 선명하게 보였다.

 

눈을 깜박였다. 칸막이는 사라졌다. 조금 지나자 칸막이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더욱더 선명했다. 칸막이 경계선까지 뚜렷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좌우에 있는 화분까지 희미하게 보였다.

 

눈을 감고 있어도 앞이 보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마치 눈을 뜬 것처럼 생생하게 보였다. 좌선을 하고 있는 앞모습도 보였다. 눈을 떠 보았다. 눈을 감은 상태나 눈을 뜬 상태나 똑같았다.

 

사마타 수행을 하면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알람이 울린 후 여분으로 한 48분동안 번뇌망상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몸의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감은 눈 앞에 허공만 응시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칸막이가 보였다는 것이다. 그것도 어느 순간 마치 눈을 뜬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이번 여분의 좌선에서 의도적으로 사마타 수행을 하고자 했다. 의도적으로 허공을 응시한 것이다. 이런 상태로 계속 있고자 했다. 그 결과 번뇌망상은 생기지 않았다.

 

몸의 감각이 마비되고 소리의 감각은 줄어 드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눈 앞에 칸막이가 보였다는 것이다. 칸막이뿐만 아니라 매트와 화분도 보였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보인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니 실눈을 뜨고 있었던 것이다.

 

실눈을 뜬 상태에서 앞이 훤하게 보였다. 마치 눈을 뜬 것처럼 보인 것이다. 그런데 눈을 뜬 상태나 감은 상태나 같았다는 것이다. 눈을 뜬 상태에서도 번뇌망상이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명상을 하면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을 해보고 있다. 오늘은 알람이 울린 후에 사마타를 해보기로 했다. 그 결과 48분을 달릴 수 있었다. 번뇌망상이 있는 상태라면 5분 앉아 있기도 힘든데 눈을 감은 상태에서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니 48분이 지나 간 것이다. 그러나 사마타 명상이 목적이 아니다 위빠사나 명상을 해야 한다.

 

오늘 새벽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었다. 언제 보아도 구구절절 새겨야 할 내용이다. 법의 세 가지 특성, 즉 무상, , 무아에 대한 것을 읽어 보면 위빠사나 수행을 왜 하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이런 것이다.

 

 

계속 관찰하고 새기는 물질-정신의 생멸을 직접 경험하여 알게 되었을 때 그 물질 정신을 생겨나서는 없어지기 때문에, 무너져 버리기 때문에 무상하다라고, 또한 생멸이 끊임없이 괴롭히기 때문에 괴로움이다라고, 또한 바라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지배할 수 있는 나가 아니기 때문에 무아이다리고 알고 보고 이해하는 것은 직접관찰 지혜로 삼특성을 제기하여 관찰하는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 202)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은 직접관찰 위빠사나에 해당된다. 이는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과 정신을 관찰하면 세 가지 특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상, , 무아라는 일반적 특성을 말한다.

 

정신법과 물질법에는 무상, , 무아의 세 가지 특성이 항상 따라다닌다. 이를 정신-물질법 공통적 특성이라고 한다. 이런 공통적인 특성이 있으면 실재하는 법이다. 이를 빠라맛타라고 한다. 위빠사나 명상의 대상이 되는 법이 이에 해당된다.

 

실재하는 법이 있으면 실재하지 않는 법이 있다.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법을 말한다. 이를 빤냣띠라고 한다. 사마타명상의 대상이 되는 법이 이에 해당된다.

 

오늘 사마타명상을 했다. 의도적으로 빛을 보고자 한 것이다. 실재하지 않는 법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빛은 보지 못했다. 그대신 실눈을 뜬 상태에서 명상홀 칸막이를 보았다. 그런데 실눈인 상태에서도 마치 눈을 뜬 것처럼 선명하게 보였다는 것이다. 나중에는 눈을 떠 버렸다.

 

눈을 뜬 상태나 눈을 감은 상태나 같은 상태가 되었다. 무엇보다 번뇌와 망상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 뜬 상태로 계속 앉아 있고자 했다. 이런 것도 수행의 진전일까?

 

 

2023-09-1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