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구분, 재가안거 42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10. 11:44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구분, 재가안거 42일차
 
 
상쾌한 구월의 일요일 아침이다. 구월 들어 두 번째로 맞는 일요일 아침 날씨는 23도이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쾌적한 날씨이다. 이런 날씨만 같아라.
 
오늘 일요일임에도 일터로 향했다. 자영업자, 일인사업자에게는 주말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개인사업을 하는 자에게는 평일이나 주말이나 똑 같은 날이다.
 
일요일 아침임에도 일찍 길을 나섰다. 아침 6시 20분에 아파트를 출발했다. 눈만 뜨면 밥만 먹으면 아지트로 가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집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밥은 일터에서 먹었다. 아니 밥을 먹은 것이 아니라 미리 준비한 계란 삶은 것과 고구마 삶을 것을 가져가서 먹은 것이다. 샌드위치 두 쪽과 함께 먹었다.
 
일요일 이른 아침 길을 나서면 상쾌하다. 사람들은 일요일이라고 자거나 쉬고 있을 시간이다. 그럼에도 길을 나섰을 때 승리자가 된 듯 하다. 그런데 진정한 승리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 안양천변에 사람들로 가득하다.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도 많다. 일단의 무리들이 달려 온다. 마라톤을 하는 사람들일까? 수십명의 남녀가 무리를 지어 서울 방향으로 이동한다.
 

 

 
일터에 도착했다. 어제 저녁에 난을 물동이에 담궈 놓았는데 이를 옮기는 작업을 했다. 난에 물을 줄 때는 위에서 주지 말라고 한다. 꽃집 아저씨가 말한 것이다. 물동이에 난 화분을 몇 시간 푹 담궈 놓으라고 했다.
 

 
화분에 물을 주었다. 난 화분에 있던 물을 준 것이다. 난에 수분도 공급하고 일반 화분에 물을 주어서 일석이조가 된다.
 
현재 사무실에는 30개가 넘는 화분이 있다. 대부분 품종이 다른 것이다. 마치 화원 같기도 하고 식물원 같기도 하다. 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없지 않을 수 없다.
 

 
애지중지 하는 것이 있다. 보리수를 말한다. 페이스북친구 박영빈 선생이 선물로 준 것이다. 보드가야 보리수에서 나온 것이다. 귀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보리수가 처음에는 잘 자라지 않았다. 잎이 떨어지고 새잎이 나지 않아 초조 했으나 지금은 염려 없다. 요즘 새잎이 계속 나온다. 처음 가져왔을 때 보다 두 배나 커진 것 같다.
 
또 하나 아끼는 식물이 있다. 그것은 난 화분이다. 능인선원불교교양대학 김대영도반이 선물한 것이다. 난 화분 중에서 황룡관이 가장 볼만하고 가격이 비싼 것인데 이를 능가한다. 이름하여 ‘황금일향’이라 한다. 잎의 테두리가 황금색이어서 그렇게 이름 붙였을 것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42일째이다. 오늘도 변함없이 자리에 앉았다. 오늘도 한시간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오늘 잘 달릴 수 있을까? 이런 의문과 함께 자리에 앉는다.
 
어떻게 해야 좌선을 실패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까? 아마 그것은 노력에 달렸을 것이다. 처음부터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이다. 배에 마음을 집중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그날그날 컨디션이 다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날그날 조건이 다름을 말한다. 어떤 날은 잘 되는가 하면 어떤 날은 망치는 날도 있다. 몸상태에 따라 다른 것이다.
 
오늘 나의 컨디션은 어땠는가? 오늘 아침 컨디션은 대체로 좋았다. 어제 오전까지 한기가 있었으나 오후에 잡혔다. 몸에 한기가 있다는 것은 몸에 열이 있다는 말과 같다. 몸이 어디가 나쁜지 알 수 없다.
 
병원에 가지 않는다. 건강진단을 받지 않는다. 이런 행위는 비난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개인사업자로 살면서 17년동안 건강진단 한번 받아 보지 않았다. 이런 것은 자랑할 것이 못되고 비난 받기에 충분하다.
 
몸에 어떤 병이 있는지 모른다. 설령 병이 있다고 하더라도 병원에 가는 일을 없을 것이다. 도를 깨우친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
 
아침 좌선은 산뜻하게 출발했다. 처음부터 배의 움직임을 보았다. 호흡을 보아야 정상괘도에 올라가기 때문이다. 호흡을 보지 않으면 망상에 시달리기 쉽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졸리는 것이었다.
 
좌선하다가 졸 수도 있을까? 이번 안거에서 한번 졸아 보았다. 그런데 오늘 좌선에서는 졸음이 쏟아졌다는 것이다. 마치 고속도로 운전 중에 졸음이 쏟아 지는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졸음이 올 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멈출까?”라고 생각한 것이다. 졸음이 가시고 난 다음 다시 좌선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악마의 속삭임으로 보았다. 마음장난에 속지 않고자 한 것이다. 계속 가기로 했다.
 
졸음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졸음이 올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앙굿따라니까야에서는 “1) 듣고 배운 대로 가르침을 마음으로 사유하고 숙고하고 정신으로 탐구하여야 한다. 2) 듣고 배운 대로 가르침을 상세히 암송해야 한다. 3) 양쪽 귀를 잡아당기고 손으로 신체를 마찰해야 한다. 4)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양쪽 눈을 씻고 사방을 쳐다보고, 별자리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5) 빛에 대한 지각활동을 기울이고, 대낮에 대한 지각을 확립해야 한다. 6) 앞과 뒤를 지각하면서 감관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 정신을 밖으로 흩어지게 하지 않고 경행한다. 7)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자가 누운 형상을 취해야 한다.”(A7.61)라고 했다. 이 중에서 다섯 번째 항 ‘빛에 대한 지각활동을 기울이는 것’이 가장 마음에 든다.
 
졸음이 왔을 때 빛에 대한 지각활동을 하고자 했다. 마음을 대낮같이 밝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밝음에 대한 명상을 해야 할 것이다. 빛과 같은 니밋따가 뜨면 최상일 것이다.
 
졸음이 쏟아 졌을 때 대책이 없다. 빛에 대한 지각활동을 하고자 했으나 어떻게 할 줄 몰랐다. 그때 전화가 왔다. 핸드폰에서 진동이 난 것이다. 장모가 전화했다. 김치 해 놓을 테니 월요일 오후에 가져 가라는 것이다.
 
졸음은 어떤 계기가 되면 싹 달아난다. 전화를 받고 나자 졸음이 사라졌다. 이렇게 본다면 졸음이라는 것은 일종의 심리적 현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좌선 중에 전화를 받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받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전화를 받고 난 다음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다. 졸음이 싹 달아난 것이다. 그리고 집중이 생겼다.
 
목표로 하는 한시간에서 28분을 남겨 놓고 전화를 받았다. 이전에는 졸음과 싸웠으나 졸음이 가신 상황에서는 집중할 수 있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가져 갔다.
 
일을 할 때는 집중해서 해야 한다.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고가 난다. 품질사고가 나면 손실이 발생한다. 다시 만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좌선할 때도 집중 해야 한다. 눈에 불을 켜고 확인하고 또 확인 하듯이, 마음의 불을 켜고 부품과 꺼짐을 지켜 보아야 한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좌선할 때는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잘 안된다고 말한다. 이는 욕망으로 수행을 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그렇다고 노력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좌선을 할 때는 대념처경을 염두에 둔다. 대념처경에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림을 갖추고 새김을 확립하여(ātāpī sampajāno satimā)”(D22.2)라는 가르침이 있다. 사념처 수행을 할 때는 사띠와 삼빠자나와 함께 노력이 필요함을 말한다. 그것도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다.
 
좌선을 할 때는 새김을 확립해야 한다. 이는 집중된 상태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런데 사념처 수행에서 집중된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세 가지 조건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따빠(ātapa)와 사띠(sati)와 삼빠자나(sampajāna)이다. 이를 각각 노력, 올바른 알아차림, 새김이라고 한다.
 
좌선을 할 때 사띠와 삼빠자나만 있어서는 안된다. 아따빠라 불리우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 삼박자가 맞았을 때 원하는 집중에 이를 수 있다. 이런 노력은 욕망과 다른 것이다.
 
어떤 이는 수행에서 신비한 체험을 바란다. 빛과 같은 체험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욕심이다. 수행을 욕망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을 내려 놓았을 때 성취될 수 있을지 모른다.
 
노력은 욕망과 다른 것이다. 대념처경에서도 노력(아따빠)과 올바른 알아차림(삼빠자나)과 새김(사띠)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니까야를 보면 노력도 여러 용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차례로 나열하면 와야마(vāyama), 위리야(viriya), 압빠마다(appamāda), 빠다나(padhāna), 아따빠(ātapa)가 된다.
 
와야마(vāyama)는 강도가 가장 약한 정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이는 영어로 ‘striving, effort’로 해석되는데 ‘노력’의 의미가 강하다. 팔정도분석경(S45.8)에서는 삼마와야마라 하여 ‘바른 노력’ 또는 ‘정정진’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위리야(viriya)는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vigour; energy; effort; strength’의 뜻이다. ‘힘’과 관련 있다. 그래서 뷔리야는 오근과 오력, 칠각지에서 사용된다. 오근에서는 ‘정진의 능력’이라 하여 “위리야 인드리야”(S48.9)라고 했고, 오력에서는 ‘정진의 힘’이라고 하여 “위리야 발라”(S48.43)라고 했다. 또 칠각지에서는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라고 하여 “위리야 삼봇장가”(S46.3)라고 했다.
 
압빠마다(appamāda)도 정진의 의미가 있다. 압빠마다가 왜 정진의 의미일까? 이는 압빠마다라는 말이 사띠와 거의 동의로서 ‘늘 깨어 있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이다. 한자어로는 ‘불방일’의 뜻이다. 영어로는 ‘vigilance; earnestness’로 설명된다. 이렇게 본다면 압빠마다는 “수행의 대상을 놓치지 않음, 잊지 않음, 항상 깨어 있음”의 뜻이 된다. 법구경에서는 “방일하지 않음이 불사의 길이고 방일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다.”(Dhp.21)라고 했다. 이로 알 수 있는 것은 깨어 있지 않은 자, 사띠가 없는 자는 죽음 목숨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방일한 사람은 죽은 자와 같다.”(Dhp.21)라고 했을 것이다.
 
빠다나(padhāna)가 정진인 것은 부처님의 성도과정과 관련이 있다. 살인자와 같은 오온, 악마와 같은 오온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가 마르는 등 용맹정진을 필요로 한다. 어느 정도인가? 이는 빠다나경에서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Stn.440)라고 표현된 것에서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센 정진의 의미로 본다. 이는 빠다나가 ‘[adj.] chief; foremost. (nt.) exertion; effort; striving’의 뜻인 것으로도 확인된다. 빠다나를 ‘용맹정진’으로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아따빠(ātapa)가 있다. 빤냐완따 스님은 아따빠에 대하여 십이연기분석경(S45.8)을 예로 들어서 설명했다. 삼마사띠와 관련하여 “ātāpī sampajāno satimā”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고”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따빠는 ‘힘써 노력함’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 영어로는 ‘sunshine; heat of the sun’의 뜻이고, 한자어로는 ‘陽光, 熱, 熱心’의 뜻이다.
 
노력을 뜻하는 다섯 가지 용어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은 와야마이고 가장 강도가 센 것은 아따빠가 된다. 왜 아따빠가 가장 센 노력일까? 그것은 실제로 수행할 때 주의력과 집중을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순간집중을 요한다. 이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사마타는 다른 것이다. 위빠사나에서는 움직이는 대상에 대하여 집중을 요구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찰나삼매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찰나삼매는 빠알리어로 카니까사마디(khaika samādhi)라고 한다. 여기서 카니까라는 말은 ‘momentary; temporary; changeable’의 뜻이다. 순간집중을 말한다.
 
찰나적으로 순간적으로 삼매가 있을 수 있을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가능하다고 말한다. 행위에 집중하면 찰나삼매가 됨을 말한다. 바느질이나 뜨개질, 독서를 연상하면 된다.

찰나삼매를 뜻하는 카니까사마디는 경전에 나오지 않는다. 주석서에서 볼 수 있다. 경전에서는 수없이 삼매에 대해서 언급되어 있는데 이를 주석서에는 크게 근접삼매, 본삼매, 찰나삼매로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위빠사나 수행에서 요하는 찰나삼매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수행자가 신심, 정진, 새김, 삼매, 통찰지의 힘이 좋고 균형을 잘 이루게 되면 관찰하고 새기는 것만 계속 이어져 마음이 깨끗하게 된다. 이런저런 대상들을 생각하는 장애들도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와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게 일정 기간 동안 관찰할 때마다 물질과 정신이라는 대상에만 고요히 집중되는 삼매가 아주 분명하게 생겨난다. 이러한 삼매를 찰나삼매라고 한다. 관찰하고 새기는 마음 그 한순간 머물러 집중하는 삼매라는 뜻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55쪽)



찰나삼매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필요로 된다. 이를 한순간 머물러 집중하는 삼매라고 한다. 이는 대상과 하나가 되어 몰입되는 사마타와 다른 것이다. 순간순간 대상을 새기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선정삼매와 찰나삼매가 다르지 않다고 했다. 이는 “[사마타 수행과] 다른 점은 사마타 선정의 대상은 바뀜없이 하나의 대상이다. 물질과 정신일뿐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생겨남과 사라짐으로도 드러나지 않는다. 위빳사나 삼매의 대상들은 새로운 것이어서 계속 바뀐다. 물질과 정신일 뿐으로도 드러난다.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는 생겨남과 사라짐도 드러난다. 이것만 차이가 난다. 집중되는 모습은 다르지 않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172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차이는 삼매의 대상에 있다. 사마타는 대상이 고정되어 있지만 위빠사나의 대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변화하는 대상에 순간적으로 집중하는 것도 사마타에서의 선정상태와 다름 없다는 것이다.
 
찰나삼매는 선정에서 근접삼매와 본삼매와 같은 것이다. 찰나삼매가 근접삼매와 같은 것은 낮은 단계의 위빠사나 찰나삼매에 해당된다. 아마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찰나삼매가 본삼매와 같은 것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중간단계인 ‘생멸의 지혜’와 높은 단계인 ‘무너짐의 지혜’에 해당되는 찰나삼매가 이에 해당된다. 이 두 단계의 찰나삼매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선정단계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오늘 한시간 좌선을 목표로 했다. 처음부터 배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러나 도중에 졸음이 와서 거의 반시간을 혼침으로 보냈다. 전화를 받고 나자 졸음이 달아났다. 이후부터 집중이 잘 되어서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호흡과 반대로 되는 것 같다. 들숨에 꺼짐이 되고 날숨에 부품이 되는 것이다. 호흡 그 자체에만 마음을 둔다면 사마타가 될 것이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만 마음을 둔다면 사마타 수행이 된다. 더구나 몸으로 호흡하듯이 호흡에 몸 앞에서 보인다면 이를 사마타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배의 움직임에만 마음을 두고 있다면 이를 위빠사나라 해야 할 것이다.
 
위빠사나는 움직이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움직이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여 들여다 보듯이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잘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마치 고양이가 쥐구멍을 들여다 보듯이 관찰해야 한다.
 
한시간이 지나자 알람이 울렸다. 반은 졸음에서 보냈으나 반은 어느 정도 집중이 되었다. 그런데 알람이 울리자 더욱더 집중이 잘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이전까지 호흡을 본 것과 다르다.
 
좌선에 변화가 생겼다. 오늘 처음 느낀 것이다. 이전에는 호흡을 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몸 앞에서 호흡이 느껴지는 것처럼 보였다. 이를 따라가다 보면 머리가 환해지는 등 마음의 평안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오로지 배의 움직임만 보았다.
 
배의 움직임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고양이가 쥐구멍을 들여다보듯 마음을 기울인 것이다. 그리고 대념처경에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새김을 확립하여”라는 문구처럼 열심히 노력하고자 했다.
 
알람이 울린 후에도 배의 움직임을 계속 관찰했다. 그런데 배의 움직임은 계속 변해 갔다는 것이다. 어떤 때는 움직임을 단계적으로 관찰했다. 마치 6단계 행선 보듯이 관찰한 것이다. 그런데 또 어떤 때는 배가 “뽈록뽈록”하는 것이었다.
 
배의 움직임은 변화무쌍하다. 이는 호흡과 다른 것이다. 단지 호흡의 들숨날숨에 마음을 둔다면 사마타가 될 것이다. 그 결과 들숨과 날숨이라는 두 개의 대상에만 집중이 되어서 호흡을 보게 될 것이다. 마치 몸 앞에서 호흡이 보이는 듯하고, 몸 전체로 호흡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로지 배의 움직임만 관찰하면 배가 여러 단계로 움직이기도 하고 뽈록뽈록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배의 움직임만 관찰하면 사마타로 되지 않는다. 오로지 배의 움직임에만 온 마음을 기울이면 이를 위빠사나라 해야 할 것이다. 순간집중에 따른 찰나삼매로 본다. 오늘 새롭게 경험한 것이다.
 
 
2023-09-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