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메뚜기가 되지 않고자, 재가안거 40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8. 12:00

메뚜기가 되지 않고자, 재가안거 40일차
 
 
지금시각은 오전 9시 35분, 몸과 마음이 산뜻하다. 막 잠에서 깨어난 것 같다. 잠을 잘 자고 일어난 것 같다. 명상을 시작하기 전과 비교된다.
 
오늘 좌선은 오전 8시 6분에 시작했다. 스마트폰에 타이머를 설정해 놓고 매모앱에 시작 시간을 써 놓았다. 그리고 달렸다. 달리다 보니 목표로 하는 한시간이 되었다.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지만 내버려 두었다. 더 달리고자 한 것이다.
 
명상을 여분으로 했다. 목표로 하는 한시간을 채웠기 때문에 더 앉아 있는 것은 덤으로 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멈출 수 있다. 그런데 종이 울릴 때 더 집중이 잘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죽음을 앞둔 사람이 남아 있는 시간이 없는 것과 같다.
 
계속 달리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 할 일이 많다. 오랜만에 일감 수주 받은 것을 작업해야 한다. 책 만들기도 해야 한다. 명상후기도 써야 한다. 이번 안거에서 오전을 명상으로 보내고 있다.
 
오늘 1시간 16분 앉아 있었다. 그 동안 무수한 사건이 있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어도 일어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다. 명상을 마무리 하고자 할 때는 반조하는 시간도 가졌다.
 
명상을 어떻게 해야 잘 하는 것인가? 남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서도 알 수 있다. 유튜브 법문을 통해서도 듣는다. 그러나 참고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해 보아야 한다. 해 보면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을 찾게 된다. 명상 마무리할 때 반조하는 것은 오늘 처음 시도해 본 것이다.
 
명상을 마무리할 때 반조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명상을 처음 시작 했을 때부터 도중에 일어난 갖가지 사건, 그리고 사유한 것, 꼭 기억해야 할 것 등을 정리하는 것이다. 이처럼 반조의 시간에 정리된 것을 후기에 쓰고자 한다.
 
명상이 끝나고 후기를 쓸 때 13분 공백기간이 생겼다. 명상이 끝나자 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릴 수 있으나 몇 가지 액션을 취했다. 일단 화장실을 다녀 오는 것이다.
 
명상이 끝나고 화장실에 간다. 복도를 지나 화장실에 갈 때 발걸음이 사뿐하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몸과 마음이 산뜻하다. 어떤 이념이나 사상에 지배 받지 않은 상태이다. 이 상태에서 뉴스를 본다면 그 순간부터 격정에 휘말리게 될 것이다.
 
명상이 끝나면 커피를 마셔야 한다. 명상 시작 전에도 커피를 마신다. 이제까지 마신 커피 중에서 이태리커피가 최상인 것 같다. 페이스북 친구가 선물한 것이다. 절구질해서 커피 만들어 먹는다는 글을 접한 것이 이유가 된 것 같다.
 
페이스북 친구는 절구질할 시간을 줄여 주기 위해서 커피를 보낸다고 했다. 세 번 박스 채로 보낸 것 같다. 혹시 이런 글이 암시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화장실을 다녀오고 커피를 만드는 시간이 10분 걸렸다. 이제 자리에 앉을 시간이다. 책상에 앉아 후기를 쓰는 것이다. 이런 후기는 명상이 끝난지 10분이 약간 지났을 때 시작된다. 요즘 속된말로 “따끈따끈한” 것이다. 일체 외적 자극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방금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이다.
 
사무실에서는 자판치는 소리가 요란하다. 머리 속에서 생각나는 것을 치다 보면 모니터의 흰 여백에 “탁, 탁”하고 박힌다. 쓸 내용은 정해졌지만 어떻게 전개 될지 알 수 없다. 자판 치는 대로 가는 것이다.
 
지금 후기를 쓰는 마음은 평온하다. 블라인드 쳐져 있는 창 바깥은 훤하다. 9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이다. 오염되지 않은 마음에서 이렇게 자판을 두드리는 것도 행복이라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40일째이다. 드디어 40이라는 숫자를 찍은 것이다. 안거가 90일동안 지속되니 이제 절반이 머지 않았다. 처음에 “나도 안거라는 것을 해볼까?”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매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방석에 앉을 때 전장에 나가는 장수같다. 방석에 앉는 것이 전장에 나가기 위해 말을 타는 것 같다. 전투에 임하는 장수와 같은 심정이 되는 것이다. 오늘 전투에서 이길지 질지는 알 수 없다.
 
자리에 앉을 때는 처음이 중요하다. 초반부터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어떻게 하는가?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마음은 대상이 없으면 방황하기 쉽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어야 한다. 어떻게 묶어 두는가? 사띠라는 밧줄로 꽁꽁 묶어 두는 것이다.
 
마음은 가만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이기 쉽다. 마음 가는 대로 가는 것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간다. 감각적 대상을 찾아서 감각의 대상에 마음에 가 있기 쉽다.
 
수행은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다. 수행은 마음을 단속하는 것이다. 마음을 제어하지 않고 단속하지 않으면 불선한 것에 가 있기 쉽다. 그 불선한 것은 다름아닌 감각적 욕망이다. 시각, 청각 등 다섯 가지 감각적 대상을 말한다.
 
마음은 내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을 내것이라고 믿는다. 내마음 대로 하고 있으니 마음을 내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정말 마음을 내마음 대로 하고 있을까? 마음을 내마음 대로 하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마음에 끌려 다닌다.
 
유튜브에서 본 것이 있다. 어떤 젊은이는 다니던 직장을 정리한 후에 세계 여행을 떠났다. 외국에서 몇 달을 보내는 자유여행을 한 것이다.
 
여행자는 특별한 목적도 특별한 계획도 없다. 이번 달에는 이 나라에 가서 머물고 다음 달에는 저 나라에서 머무는 여행을 말한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즉흥적이다.
 
여행자는 어느 날 갑자기 태국음식이 생각났다. 여행지에서 태국음식에 대한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여행지는 그날 당장 태국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숙소를 예약했다. 단지 태국음식을 먹기 위해서 예약한 것이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마음은 내버려 두면 “멋대로”가 된다. 마음 내키는 대로 하는 것이다. 태국음식이 먹고 싶어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건너 가는 것이다. 마치 메뚜기 같다.
 
메뚜기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이런 세월을 산 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멋진 외국 풍광이나 진기한 음식 사진은 남아 있을 것이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감각적 대상에 가 있기 쉽기 쉽다. 마음이 감각적 대상에 가 있으면 불선한 것이 된다. 그리고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감각적 대상은 지금 즐거운 것이라고 할지라도 오래 가지 못한다. 즐거운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변해서 다른 마음으로 되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어떤 느낌도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어떤 수행승이 한적한 곳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다. 수행승은 한적한 곳에서 홀로 명상을 하다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 떠올랐다. 이는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 (ya kiñci vedanīya ta dukkhasmi)”(S36.11)라는 부처님 말씀을 말한다.
 
어떤 것을 느끼든지 그것은 괴로움이라고 한다. 이는 "어떠한 느낌이든지 모두 괴롭다.”라는 말과 같다. 모든 느낌이라고 했을 때 괴로운 느낌은 물론 즐거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무덤덤한 느낌도 괴로움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은 수행승을 칭찬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서 새기고 있는 것에 칭찬한 것이다.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기억하고 새기는 것도 사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수행승이여, 훌륭하다. 수행승이여, 훌륭하다. 나는 세 가지의 느낌 곧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관하여 말했다. 나는 이러한 세 가지의 느낌에 관하여 말했다.
 
수행승이여, 그런데 나는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고 했다.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파괴되고야 마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괴멸하고야 마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사라지고야 마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소멸하고야 마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수행승이여, 어떠한 것이 느껴지든 그것은 괴로움 안에 있다는 사실은 모든 형성된 것은 변화하고야 마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S36.11)
 

 
이 가르침은 상윳따니까야 느낌상윳따(S36)에 실려 있다. 일체 느낌은 괴롭다는 것이다. 이는 ‘일체개고’의 가르침과 같다. 그렇다고 “책상도 괴롭고 스마트폰도 괴롭다.”라고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괴롭다고 하여 책상도 괴롭고 스마트폰도 괴롭다고 본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의 제자 중에 마부출신 찬나가 일체개고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과 같다.
 
찬나는 마부출신으로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와 주었다. 찬나는 부처님을 따라 출가했지만 부처님이 열반에 들 때까지 성자의 흐름에 들지 못했다. 또한 자만이 대단하여 “내가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와 주었는데”라며 부처님의 두 상수제자인 사리뿟따 존자와 묵갈라나 존자도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찬나와 같은 수행자에게 법을 가르쳐 주면 오해 하기 쉽다. 특히 일체개고에 대한 것이 그렇다. 가르침을 잘 이해 하지 못하는 자에게 일체개고를 설했을 때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일체개고에 대하 가르침은 오온으로 한정된다. 우리 몸과 마음으로 한정되어야 함을 말한다. 그럼에도 일체개고를 삼라만상과 산천초목에까지 확대하면 책상도 괴롭고 스마트폰도 괴롭다고 말할 것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일체는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한 것이다. 이는 우리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우리 몸과 마음을 떠나서 다른 것을 대상으로 했을 때 법의 성품을 알 수 없다.
 
부처님은 일체가 괴롭다고 했다. 그래서 일체개고를 설했다. 여기서 말하는 일체는 여섯 가지 감각영역에 해당된다. 그래서 일체가 괴롭다고 한 것은 일체 느낌이 괴롭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는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고고성은 괴로움 자체가 괴롭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상처가 났을 때 괴로운 느낌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괴고성은 변화하기 때문에 불만족으로 인하여 괴로운 것이다. 감각대상을 즐기다가 즐거움이 사라졌을 때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행고성은 형성된 것 자체를 괴로운 것으로 본다. 이를 잘못 이해하면 책상도 괴롭고 스마트폰도 괴롭고 도와 과도 괴로운 것으로 본다.
 
세 가지 괴로움의 특성 중에서 행고성이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 형성된 것 자체가 괴롭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잘못 적용하면 괴롭지 않은 것이 없게 된다.
 
누구나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은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즐거운 느낌도 괴로운 느낌이라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즐거운 느낌이 오래 가지 못해서 불만족하다는 것은 받아 들일 것이다. 가장 받아 들이기 힘든 것은 무덤덤한 느낌도 괴로운 느낌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행고성에 대한 것이다.
 
사람들은 괴로움 그 자체인 고고성은 잘 알고 있다. 변화에 따른 불만족이 괴로움이라는 괴고성 역시 어느 정도 받아 들인다. 그러나 무덤덤한 것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은 받아 들이기 힘들다. 이에 어떤 이는 아라한이 되어야 행고성을 알 것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일체가 괴롭다고 했다. 불교인이라면 이런 사실을 받아들인다. 삼법인이 진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일체개고에 대하여 명쾌하게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는 “형성된 것은 무상하다는 것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S36.11)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이른바 행고성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행고성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열해서 설명했다. 형성된 것은 모두 무상할 뿐만 아니라, 모든 형성된 것은 파괴되고야 마는 것, 모든 형성된 것은 괴멸하고야 마는 것, 모든 형성된 것은 사라지고야 마는 것, 모든 형성된 것은 변화하고야 마는 것이라고 나열해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내버려 두면 멋대로 된다. 마음 내키는 대로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 하자는 대로 하다 보면 메뚜기가 된다. 감각적 대상을 따라 마음이 자꾸 이동하는 것이다. 심지어 맛 있는 음식을 찾아 국경을 넘어가기도 한다.
 
좌선을 하는 것은 마음을 단속하는 것과 같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놓았을 때 마음은 밧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마음을 호흡에 묶어 놓으면 마음이 편한해진다. 호흡을 지켜보면 번뇌망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제어 된 것이다. 그러나 호흡을 계속 지켜 보기가 쉽지 않다.
 
좌선을 하다 보면 끊임없이 몸과 마음이 변한다. 가만 앉아 있는 상태에서 호흡만 보아도 이렇게 요동치는 것이다. 하물며 일상에서 마음은 어떠할까? 아마 내 마음이 아닐 것이다.
 
마음을 내 마음이라고 하지만 내 마음이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진정한 내 마음이라면 나의 통제하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통제하에 있는 마음은 또한 내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일 뿐이다.
 
좌선할 때 호흡에 집중하면 마음이 편한해진다. 호흡을 새기는 그 순간은 새기는 마음만 있게 된다. 내가 있어서 새기는 것이 아니라 새기는 마음이 새기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무아의 상태이다.
 
무아의 상태를 유지하기 힘들다. 조금만 방심해도 새기는 마음이 깨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번뇌망상의 놀이터가 된다. 메뚜기가 되는 것이다. 아마도 새기는 힘이 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를 감소하기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수행하는 것은 완전한 행복을 위해 수행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열반이다.
 
불교의 목적은 열반이다. 부처님 가르침의 종착지는 열반이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nibbāna parama sukha)”(Dhp.204)라 했다. 그렇다면 열반을 실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이여, 그런데 나는 이어서 모든 형성된 것의 사라짐에 관해서 설한다.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언어가 사라지고, 두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사유와 숙고가 사라지고, 세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희열이 사라지고, 네 번째 선정에 도달한 자에게는 호흡이 사라지고, 무한공간의 세계에 도달한 자에게는 물질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무한의식의 세계에 도달한 자에게는 무한공간의 세계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도 달한 자에게는 무한의식의 세계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고, 지각하는 것도 아니고 지각하지 않는 것도 아닌 세계에 도달한 자에게는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 대한 지각이 사라진다.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 도 달한 자에게는 지각과 느낌이 사라진다. 번뇌가 부서진 수행승에게는 탐욕도 사라지고, 성냄도 사라지고, 어리석음도 사라진다.”(S36.11)
 
 
여기 파도치는 호수가 있다. 파도가 사라지면 그침이 있고 고요함이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정에 들면 파도가 그치는 것과 같다.
 
경에서는 아홉 가지 선정의 단계에 대하여 설명되어 있다. 최종적으로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이다. 이런 상태에 대하여 번뇌가 부서진 단계라고 했다. 이를 탐, 진, 치가 사라진 단계라고 했다.
 
열반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경전에서는 비유로서 설명된다. 열반에 대한 설명 중의 하나로서 번뇌의 소멸을 들 수 있는데, 이는 다름아닌 탐, 진, 치의 소멸인 것이다.
 
좌선 중에 호흡을 관찰하면 마음이 평안하다. 새기는 힘이 약해서 오래 관찰하지 못하지만 일시적으로나마 번뇌에서 해방된다. 이런 것도 일종의 탐, 진, 치의 소멸에 해당될 것이다.
 
수행을 하면 수행기를 작성한다. 이번 안거에서도 좌선을 할 때마다 후기를 작성하고 있다. 그런데 후기를 작성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이다. 경험한 것도 쓰지만 경전에 실려 있는 가르침도 곁들이기 때문이다.
 
이제 후기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지금 시각은 11시 41분이 되었다. 후기를 9시 35분부터 쓰기 시작했으니 1시간 54분 쓰고 있다. 글을 정리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2시간이 훌쩍 넘어 버릴 것이다. 이렇게 후기 쓰는 것도 수행에 해당된다.
 
 
2023-09-0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