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이미 지난 일인데, 재가안거 37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5. 12:18

이미 지난 일인데, 재가안거 37일차

 

 

그 사람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벌렁벌렁한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불쾌하고 괘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 문제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을 것이다.

 

재가안거 37일차이다. 오늘은 1시간 47분 앉아 있었다. 도중에 한번 자세를 바꾸었다. 평좌한 왼쪽 다리에 마비가 왔기 때문이다. 핸드폰을 보니 좌선을 시작한지 52분 되었다.

 

오늘 좌선은 759분에 시작되었다. 좌선을 시작하기 전에 암송과 행선을 했다. 행선대에서 가볍게 걸으면서 빠나나경(정진의 경, Sn3.2)를 암송했다. 25개의 게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막힘 없이 암송했다.

 

암송은 속으로 한다. 본래 암송은 소리 내서 하는 것이다. 자신이 내는 소리를 듣고 암송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아직까지 그렇게 못하고 있다.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빠알리어 게송을 뜻을 새기며 암송하고자 했다.

 

암송이 끝나자 행선을 했다. 행선은 오래 하지 않았다. 10여분 했다. 좌선에 비중을 두다 보니 소원해지는 것 같다. 그다지 잘 집중이 되지 않았다.

 

자리에 앉았다. 먼저 불을 껐다. 사무실 형광등을 끈 것이다. 칸막이로 되어 있는 명상공간은 약간 침침했다. 동굴 속 같은 분위기가 되는 것 같다. 바지는 추리닝 바지로 바꾸어 입었다. 좌선할 때 편하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시동을 걸고 달리면 된다. 평좌한 상태에서 허리를 폈다. 손을 대 보아서 굽은 데가 없는지 확인 했다. 허리를 폈을 때 머리와 가슴과 허리와 엉덩이가 일직선이 된다.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세운 것이다. 머리를 약간 앞으로 하면 머리의 무게를 느낀다. 고개를 들게 되었을 때 머리도 세워진다. 머리와 허리가 일직선이 되었을 때 오래 달릴 수 있다.

 

처음부터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처음 앉았을 때는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 몸의 감각을 느낀다. 밖에서 들려 오는 차량과 전철 등 소음소리가 크게 들린다. 옆 사무실에서 전동드라이버로 작업하는 소리도 크게 들린다.

 

가능하면 빨리 호흡에 집중해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몸과 마음이 적응하는데 있어서 수십분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좌선 중에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생각을 하기도 한다. 좌선 중에 생각을 하게 되면 좌선이 힘들어진다. 마음은 대상을 향하게 되어 있는데 생각이 대상이 되었을 때 마음의 무게를 느낀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해야 한다. 인위적으로라도 만들어 관찰해야 한다. 그러나 생각이 연속으로 일어났을 때 마음은 분산된다. 다리에 통증이 시작되었을 때 점점 더 심해진다.

 

통증이 시작되었다. 아마 40분이 지나서부터였을 것이다. 좌선을 시작한지 40분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자 왼쪽 다리에서 통증이 시작된 것이다.

 

평좌를 하면 거의 대부분 오른쪽 다리에서 통증이 왔다. 그러나 오늘은 왼쪽다리에서 통증이 왔다. 이런 날은 거의 없다.

 

왼쪽 다리를 바깥쪽에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왼쪽다리 통증이 심해졌다. 무릎 아래쪽이 마비되었다. 동시에 왼쪽 엉덩이의 무게를 느꼈다. 엉덩이 닿는 느낌이 천근만근이 되는 것 같았다.

 

왼쪽다리와 왼쪽엉덩이에서 동시에 통증이 오자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통증을 정복한 바 있다. 통증이 와도 견디어 낼 수 있는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번 안거에서 최대수확이 될 것은 아마 통증에 대한 대처일 것이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 남의 것으로 본 것이다. 통증을 내 것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통증을 마치 제3자가 관찰하듯이 본 것이다.

 

통증을 정복했다고 생각했다. 왼쪽 다리가 마비되어 통증이 밀려 왔을 때 남의 다리 보듯 했다. 나와 무관한 것이라고 보았다. 통증은 통증이고 이를 아는 마음은 아는 마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통증이 마치 쓰나미처럼 덥쳐왔다. 이럴 때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 오늘 암송한 빠다나경에서 악마의 여섯 번째 군대인 비루(bhīrū)’가 생각났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룰 때 악마 나무찌(namuci)와 싸웠다. 나무찌는 악마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우두머리를 말한다. 여기서 악마의 군대는 마라세나(mārasenā)를 말한다. 한역으로 마군(魔軍)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마구니가 된다. 이런 악마의 군대는 팔군(八軍)으로 이루어져 있다.

 

팔마군은 까마(Kāmā), 아라띠(arati), 쿱삐빠사(khuppipāsā), 딴하(tahā), 티나밋다(thinamiddha), 비루(bhīrū), 비찌킷차(vicikicchā), 막코탐보(makkho thambho)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우리말로 이름 붙이면, 욕망, 혐오, 기갈, 갈애, 권태와 수면, 공포, 의혹, 위선과 고집의 군대가 된다.

 

마구니라 하여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니다. 귀신이나 도깨비, 야차와 같은 무서운 형상의 존재가 아님을 말한다. 이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까마)’도 마구니 중에 하나인 것이다. 또한 권태와 수면(티나밋다)’도 마구니라고 한다.

 

선방에서 한철 보낸 어느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선방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수면이라고 한다. 자신은 선정에 들었다고 말하지만 졸고 있었던 것이다. 빠나다경에 따르면 악마의 다섯 번째 군대인 티나밋다가 이에 해당된다.

 

오늘 좌선 중에 악마를 보았다. 그것은 공포이다. 평좌한 왼쪽 다리에서 마비가 왔을 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을 느꼈다. 통증을 나의 것이 아니라고 보면 그만이다. 그렇게 봤었다. 그러나 점점 심해지면서 감각이 마비 되었을 때 겁이 났다.

 

한번 겁이 나면 참을 수 없다. 겁에 질렸을 때 다리를 풀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참고 견디었다. 통증 따로, 새기는 마음 따로 본 것이다. 이는 정신 따로, 물질 따로 본 것과 같다.

 

시간 지나면 통증이 풀어질 줄 알았다. 이럴 때는 차라리 통증을 보지 말고 배의 호흡을 보면 더 나을지 모른다.

 

통증이 심해졌을 때 마음을 배로 옮겨 가면 통증을 느끼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 발생한 통증은 달랐다. 마치 집어 삼킬듯이 다가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엉덩이 닿는 통증과 이중으로 왔을 때 공포를 느꼈다. 빠다나경에서 여섯 번째 마구니에 해당되는 비루(bhīrū)가 생각났다.

 

통증이 심해지자 부처님 위신력에 의지하고자 했다. 빠다나경에서 악마를 물리치는 게송이 생각난 것이다. 마음 속으로 빠다나경의 15번째 게송을 빠알리어로 암송했다.

 

 

에사 나무찌 떼 세나(Esā namuci te senā)

깐핫사빕빠하리니(kahassābhippahārinī)

나 남 아수로 지나띠(Na na asūro jināti)

제뜨봐 짜 라바떼 수캄(jetvā ca labhate sukha)”

 

나무치여, 이것들은 그대의 군대,
검은 악마의 공격군인 것이다.
비겁한 자는 그를 이겨낼 수가 없으나
영웅은 그를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는다.”(Stn.441)

 

 

부처님은 정각을 이룰 때 악마의 군대를 막아 냈다. 악마의 팔군이 총공격할 때 이와 같은 게송으로 격퇴한 것이다.

 

악마의 팔군은 이겨내기 힘든 것이다. 감각적 욕망이라는 악마의 군대를 어떻게 물리칠 수 있을까? 혐오라는 군대는 또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대부분 패하고 만다.

 

게송에서는 비겁한 자는 악마의 군대를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 남 아수로 지나띠(Na na asūro jināti)”라 하여, “비겁한 자는 그를 이겨낼 수가 없다.”라고 했다. 여기서 아수로(asūro)는 아수라를 말하는데 이는 육도윤회에서 아수라계의 존재를 말한다.

 

천계에서 신들의 전쟁이 있다. 니까야를 보면 주로 제석천과 아수라와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진다. 여기서 제석천은 선신이고 아수라는 악신이다. 전쟁을 하면 제석천이 승리하고 아수라는 패한다.

 

게송에서는 악마와 군대와 싸워서 패한 자에 대하여 아수라와 같은 존재로 보고 있다. 그것도 비겁한 자로 보고 있다. 왜 비겁한 자일까? 악마의 군대에게 항복했기 때문이다. 욕망, 혐오 등 불선법과 싸워서 진 것에 대하여 용기 없는 자, 겁쟁이로 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악마의 군대와 싸워서 이겼다. 이에 대하여 제뜨봐 짜 라바떼 수캄(jetvā ca labhate sukha)”라 하여, “영웅은 그를 이겨내어 즐거움을 얻는다.”라고 했다. 여기서 영웅이라는 말은 제뜨봐를 말하는데 이 말은 ‘having conquered’의 뜻으로 정복자를 말한다.

 

정복자는 부처님의 칭호로 종종 쓰인다. 오염원과 싸워서 승리했을 때도 정복자라고 한다. 악마의 군대와 싸워서 이겼을 때도 정복자가 된다. 이와 같은 정복자를 영웅이라고 했다.

 

악마의 군대와 싸워 이긴 영웅은 즐거움을 얻는다고 했다. 이는 행복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악마의 군대는 검은 군대라는 것이다. 왜 검은 군대라고 했을까? 이는 깟핫사빕빠하리니(kahassābhippahārinī)에서 깐하(kaha)가 검정(black)을 뜻하고, 아빕빠하라나(abhippaharaa)가 공격(attack)을 뜻하기 때문에 검은 군대가 되는 것이다.

 

악마의 군대는 불선법의 군대이다. 불선법은 어두운 것이다. 불선법의 군대에 항복했을 때 비겁자가 될 것이다. 겁이 많아서 항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왼쪽 다리가 마비되어 통증이 심해지자 공포에 질려 결국 항복했다.

 

재가안거 37일째이다. 자만이 생긴 것 같다. 통증은 다 잡았다고 생각했다. 통증이 일어나면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 배의 움직임으로 마음이 가면 통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왼쪽다리에 마비와 함께 통증의 쓰나미가 밀려 왔을 때 공포를 느껴서 다리를 풀었다.

 

좌선한지 50분만에 통증이 와서 자세를 바꾸었다. 10분만 더 지나면 한시간 채우게 된다. 그러나 아쉬웠다. 통증이 있음으로 해서 더욱더 집중이 되었기 때문에 더 가고자 했다.

 

마침내 한시간 경과를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이를 무시했다. 자세를 바꾸자 집중이 잘 되었다. 마치 모든 것이 새로 세팅된 듯 했다. 더구나 좌선 초기와 완전히 다른 몸 상태가 되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봤다. 좌선을 시작한지 1시간이 지났을 때 호흡은 분명히 보였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을 때 마치 호흡이 바로 몸 앞에 있는 듯 했다. 더욱더 새기자 몸 전체가 호흡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람이 울리고 난 후에 하는 좌선은 더 잘되는 것 같다. 여분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든지 멈출 수 있다. 그러나 멈출 수 없는 것은 이 상태에 오기까지 대가를 치룬 것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사띠를 확립해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몸이 마치 없는 것처럼 가벼우면 사띠가 확립된 것이다. 호흡을 면전에서 분명히 볼 수 있으면 마음은 평화 그 자체가 된다.

 

호흡을 계속 지켜 보았다. 오로지 호흡에 마음을 두었다. 호흡을 따라가며 세밀하게 새기고자 했다.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옆사무실에서 나는 전동드라이버 소리는 문제 되지 않았다. 오백대의 수레가 지나가는 것 같은 전철 지나가는 소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몸 앞에서 호흡이 일어났을 때 어느 순간 일부로 새기지 않아도 되었다. 호흡이 자동으로 새겨졌기 때문이다. 이 상태에 이르자 마치 전등을 켠 것처럼 머리가 밝아 졌다. 이런 상태에서 호흡을 계속해서 새기면 니밋따가 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세를 바꾼 후에 두 번째 좌선은 거의 57분 했다. 거의 한시간 한 것이다. 그런데 한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호흡을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호흡과 함께 있으면 세상이 평화롭다. 이 맛에 명상하는 것인지 모른다. 다리 저림이 있기는 하지만 문제 되지 않는다. 호흡을 새기는 것이 더 크기 때문에 다리에 약간 통증이 있는 것은 제3자가 보듯 하는 것이다. 이럴 때 분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삼빠자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 즉 호흡을 잡고 있는 상태에서 모욕 받은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오래 전의 일이다. 그때 모욕 받은 것이 상처로 남았다. 그 사람이 생각날 때마다, 그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일이 생각난다. 아직도 그 일을 극복하지 못한 것 같다.

 

어떻게 해야 분노를 극복할 수 있을까? 분노의 밥상을 받지 않으면 그만일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다. 모욕을 당했을 때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것 같다고 사과했다. 그럼에도 늘 가슴 한켠에 남았다.

 

원한이 맺힌 것이 있으면 풀어 버려야 한다. 법구경에서는 결코 이 세상에서 원한으로 원한은 풀리지 않는다.”(Dhp.5)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후송에 답이 있다. 후송에서는 원한의 여읨으로 그치나니 이것은 오래된 진리이다.”(Dhp.5)라고 했다.

 

걱정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이 있을 때 걱정을 해서 걱정이 사라진다면 걱정이 없어서 정말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원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한을 풀려면 원한을 해서는 안된다. 법구경 5번 게송처럼 원한의 마음을 내려 놓아야 원한이 풀린다. 어떻게 해야 할까?

 

통증이 생겼을 때 객관적으로 보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나의 통증이 아닌 것이다. 분노에 찬 원한은 어떻게 해야 풀 수 있을까? 물론 원한을 내려 놓으면 풀어질 것이다.

 

마치 통증을 잡듯이 원한도 잡고자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았다. 원한을 제3자 보듯이 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럴 때 갑자기 이것이 괴로움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을 때 분노가 일어난다. 원한이 되어 맺혀 있다. 그런데 원한을 가지면 가질수록 나만 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한이 괴로움이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문제를 알았으면 문제를 해결하기 쉽다. 원한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괴로움에 빠지지 않고자 했다. 이런 원한에 따른 괴로움은 집착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집착하기 때문이다. 원한도 집착에 따른 것이다. 모욕 받았다고 하여 분노가 일어 났을 때 이를 붙잡고 있다면 집착이 된다.

 

좌선을 하는 것은 오온이 내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아는 것이다. 이런 논리로 따진다면 통증도 내것이 아니고 원한도 내것이 아닌 것이 된다.

 

통증은 알아차리기 쉽다. 좌선 중에 일어나는 통증을 남의 다리 보듯 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는 통증이라는 물질 따로, 그리고 이를 아는 마음이 따로가 되기 때문이다. 원한은 어떠할까?

 

원한을 나의 것이라고 여기면 괴롭다. 원한에 대한 집착을 하면 괴로운 것이다. 이미 지난 일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 상윳따니까야에서 읽은 수행녀 고따미가 생각났다.

 

수행녀 고따미는 출가하기 전에 아들을 잃었다. 이에 악마는 수행녀를 유혹한다. 악마는 수행녀에게 다가가서 그대 아들을 잃어버리고 홀로 슬퍼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가? 외롭게 숲속 깊이 들어와 혹시 남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닌가?”(S5.3)라며 유혹한 것이다.

 

수행녀 고따미는 악마를 알아 보았다. 악마가 멋진 남자로 변신하여 유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수행녀는 언제나 자식을 잃은 어머니도 아니고 남자도 이미 지난 일이네. 나는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으니 벗이여, 그대를 두려워하지 않네.”(S5.3)라고 말했다.

 

수행녀는 이미 지난 일이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에게 가치 있고 사랑스런 것이 모두 덧없음을 말한다. 아들에 대한 것이나 남자에 대한 것도 모두 덧없다는 것이다.

 

원한에 사무친 일은 이미 지난 일이다. 지난 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집착이다. 집착은 결국 괴로움이 되고 만다. 원한의 마음을 가지면 가실수록 괴로울 뿐이다.

 

원한을 원한으로 해결할 수 없다. 원한은 원한을 내려 놓아야만 해결된다. 이럴 때 이미 지난 일이네.”라는 말이 답이 될 것 같다.

 

 

2023-09-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