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아나빠나사띠에서 사마타의 길과 위빠사나의 길, 재가안거 34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2. 09:49

아나빠나사띠에서 사마타의 길과 위빠사나의 길, 재가안거 34일차
 
 
한시간을 거뜬히 앉아 있었다. 평좌한 자세에서 자세 한번 바꾸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만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았다. 그러나 창 밖으로 들려 오는 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 오토바이 소리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일어날 때는 거뜬히 일어났다. 처음 안거를 시작할 때는 다리가 마비 되어서 도중에 자리를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좌선이 끝나면 마비된 다리에 피를 돌게 해야 했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러나 안거 34일깨가 되어서 일까 힘이 붙는 것 같다. 오늘은 아무런 통증 없이 거뜬히 일어났다.
 
오늘은 테라와다불교 재가안거 34일째이다. 오늘 후기는 속도전 해야 한다. 1시간 반 이내로 완성해야 한다. 1시간 좌선에 1시간 반 후기를 쓰는 것이다. 좌선이 끝나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을 두드린다.
 
고요한 사무실에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생각한 것이 모니터 여백에 팍팍 박힌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대강 생각해 놓은 것을 빠른 속도로 칠 뿐이다.
 
오늘은 암송과 행선 없이 곧바로 좌선에 들어갔다. 오늘 정오에 제사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님 기일 제사이다.
 
시간을 역산 하면 아침 7시에는 앉아야 한다. 7시부터 1시간 좌선을 하고 1시간 반 이내로 후기를 작성해야 한다. 집에는 9시 반까지 들어가야 한다. 상을 닦는 등 제사 준비를 해야 한다. 시간이 없다. 쓰는 것도 속도전이다.
 
좌선이 잘 될지 잘 되지 않을지는 알 수 없다. 앉아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마음가짐은 단단히 가져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야야겠다는 마음가짐을 말한다.
 
처음부터 배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잘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을 내려 놓으면 움직임이 보인다. 이 움직임을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나꾸어채야 한다. 세렝게티 평원에서 치타가 폭발적 스피드로 먹이를 낚아 채듯이 낚는 것이다.
 
치타는 한번 낚아챈 먹이는 놓치지 않는다.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물고 있는다. 좌선에서 호흡을 보았을 때 놓치지 않아야 한다. 끝까지 따라가야 한다.
 
호흡을 보고자 했다. 코 끝에서 보는 것은 아니다. 호흡을 코 끝에서 본 적은 한번도 없다. 배운 대로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보고자 했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이 따라 가는 것이다.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새기는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을 따라 가다 보면 멈출 때가 있다. 마치 행선하다가 멈추는 것과 같다. 행선하다 멈춘다는 것은 방향전환하기 위해서 멈추는 것이다.
 
서 있을 때도 몸을 관찰한다.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세 번 스캔하는 것이다. 마음을 신체의 특정부위에 차례로 두는 것이다. 눈의 촉촉함을 새기고, 코의 벌렁거림을 새기고, 입술의 촉촉함을 새기는 등 신체 부위에 마음을 가져 가게 하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휴지기가 있다. 이때 틈이 생긴다. 이 틈으로 잡념이 치고 들어 올 수 있다. 이를 방지 하기 위해서 엉덩이 닿는 느낌으로 마음을 가게 해야 한다. 그래서 부품(새김)-엉덩이(새김)-꺼짐(새김)이 된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은 사실상 세 단계이다. 부품과 꺼짐과 닿음을 말한다. 그런데 복부의 움직임이 느릴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행선할 때 6단계로 하듯이 분절하여 단계적으로 새긴다. 마치 톱니바퀴가 “착, 착”하고 하고 돌아가듯이 새기는 것이다.
 
톱니바퀴 돌아 가듯이 새길 때 선정인한 두 손도 움직임이 있다. 부품이 단계적으로 진행될 때 손에서 느끼는 감각도 단계적으로 느낌이 온다. 이 뿐만이 아니다. 몸도 미세하게 좌우로 움직이는 것 같다.
 
배가 부품 때는 몸이 좌에서 우로 가는 것 같다. 마치 “척, 척”하며 톱니바퀴 돌아가듯이 움직인다. 부품이 끝났을 때는 휴지기가 있는데 이때 마음을 엉덩이로 보낸다. 엉덩이 닿는 느낌을 보는 것이다. 꺼질 때는 이와 반대 순으로 한다.
 
부품과 꺼짐을 좌에서 우로 관찰했다. 그래서 ‘부품 여러 단계-오른쪽 엉덩이 닿는 느낌, 꺼짐 여러 단계, 왼쪽 닿는 느낌’ 순으로 관찰했다. 일 없이 무의미 하게 반복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은 번뇌와 망상의 놀이터가 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하자 편안해졌다. 좌선 초기라 그런지 다리 통증도 없었다. 세상에서 이런 자세가 가장 편한 것 같았다. 이럴 때 갑자기 오성식의 “아,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라는 말이 떠 올랐다.
 
유튜브에서 오성식 선생의 영상을 종종 본다. 한때 영어 강사로 이름을 날린 오성식 선생은 한국과 캐나다를 오가면서 유학컨설팅 사업을 하고 있다. 오성식은 나와 같은 학번이기도 하다. 물론 학교는 다르다. 그럼에도 동급생이라 그런지 호감이 간다.
 
오성식 선생은 우면산 아침 산행을 하면서 “지금 이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다. 몸과 마음이 편하면 행복할 것이다. 더구나 자연과 함께 있어서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좌선의 행복만 못할 것이다.
 
부처님 제자 중에서도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수행승이 있었다. 왕으로서 출가한 밧디야 존자는 “아! 행복하다. 아! 행복하다.”라며 감탄사를 읊었다.
 
밧디야 존자는 왜 늘 행복이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다녔을까? 이는 다음과 같은 같은 알 수 있다.
 
 
세존이시여, 예전에 제가 속가에서 통치할 때에 후궁 안에도 보초가 배치되었고 후궁 밖에도 보초가 배치되었고 성곽 안에도 보초가 배치되었고 성곽 밖에도 보초가 배치되었고 나라 안에도 보초가 배치되었고 나라 밖에도 보초가 배치되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보호를 받고 수호를 받는데도 두렵고 혼란스럽고 의심스럽고 전율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존이시여, 숲속으로 가도 나무 밑으로 가도, 빈 집으로 가도 두렵지 않고 혼란스럽지 않고 의심을 여의고 전율하지 않고, 무심하고, 안온하고 만족하며, 사슴과 같은 마음으로 지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이익을 살펴 숲속으로 가도, 나무 밑으로 가도, 빈 집으로 가도 언제나 이와 같이 ‘아! 행복하다. 아! 행복하다.’라고 감탄사를 읊는 것입니다.”(Ud.2.10)
 

 

 
밧디야 존자가 행복한 이유가 있었다. 출가하기 전에 왕으로 살 때는 살해 당할 위험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럴 염려가 없다는 것이다. 온갖 감각적 욕망으로 가득한 궁에서 사는 것보다 이렇게 숲에서 사슴처럼 사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하여 행복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던 것이다.
 
숲에서 사슴처럼 사는 것은 무소유로 사는 것이다.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았을 때 행복한 것이다. 그 소유에는 당연히 번뇌도 들어 있다. 현재 조건에 만족하면서 산다면 번뇌 없이 사는 것과 같다.
 
좌선을 하면 이와 같은 무소유의 번뇌 없는 상태가 된다. 자연스럽게 행복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오성식 선생이 자신의 처지와 관련하여 “아, 너무 행복합니다.”라고 말했으나 이는 선정의 행복과 비교하면 비할 바가 아니다. 아무리 행복해도 그것은 거친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
 
거친 감각적 행복은 미세하고 잔잔한 행복을 따라 올 수 없다. 누구든지 수행을 하면 잔잔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설령 선정의 상태까지 가지 않다고 하더라도 눈을 감은 채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안정과 평화와 행복을 얻는다.
 
어제 후기에서 1시간 35분 앉아 있었던 이야기를 썼다. 그렇다고 체험을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앉아있기 기록을 갱신한 것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이 앉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 앉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는 것이다. 더 이상 다리 통증도 없는 것 같다. 설령 통증이 온다면 법의 성품을 관찰할 수 있는 손님으로 맞이 하겠다.
 
어제 페이스북에서 어느 스님이 격려의 글을 받았다. 아마 후기를 관심 있게 읽어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스님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겨 주었다.
 
 
사두!
사두!
사두!
()
훌륭하고 훌륭한 모습 입니다.
다만,
청정도론
아비담마 훌륭한 말씀은 석존 삽십칠 보리분법으로 귀속 시켜모두 소멸하시길 희망해 봅니다.
아무런
분별심이 사라지면
삼매로 이끄는 빛이 나타나고 빛이 나를 이끌어 들입니다.
희열과 몸의 진동도
경험하지만 •••
선정에 들어가기 위한
인도자 일 뿐 !
거사님께서
체험을 하시면
많은 이들이 함께따라 체험을 할 것으로 기대 됩니다.
집중하되 집중 하지 않고 하는 수행!
선정 체험
기대 합니다.
()”(B스님)
 
 
B스님은 페이스북에 선정에 관한 글, 그리고 깨달음에 관한 글을 자주 올린다. 아마도 체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초기불교와 관련된 교학의 글도 자주 올린다. 이런 태도는 다른 스님들과 비교 된다.
 
페이스북에서 수많은 스님들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스님들의 글에서는 불교가 보이지 않는다. 본분사보다는 부업에 더 열중하는 것 같다. 수행중에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올려 놓으면 훌륭한 법보시가 될 것이다.
 
B스님은 이번 격려와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주욱 간다면 아마 선정체험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이번 안거에서는 몸 길들이기, 몸 만들기로 충분하다.
 
 
요즘 매일 수행후기를 올리고 있다. 이런 시도가 사람들에게는 신선했던 것 같다. 어제는 정찬주 작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먼저 글 쓰는 것에 대하여 노고를 칭찬했다.
 
정찬주 작가가 항상 강조하는 말이 있다. 글을 쓸 때는 두 가지만 주의하라고 했다. 그것은 비속어를 쓰지 않는 것과 동어반복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만 주의하면 훌륭한 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정찬주 작가는 후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후기를 남기는 것이 자신을 과시하거나 자만에 찬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가능하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고자 한다.
 
후기를 작성하면 세 군데에 옮긴다. 하나는 블로그에 올리고, 또 하나는 페이스북에 올린다. 마지막으로 담마와나 밴드에 올린다.
 
담마와나 밴드에 올리는 것은 담마와나 안거법회에서 법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듣고 감동받아 안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담마와나 밴드에 매일 후기를 올리고 있다.
 
어제 담마와나 밴드에서 댓글을 하나 받았다. 그것은 아나빠나사띠가 사마타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박글이다.
 
평소에 격려와 성원을 아끼지 않는 J법우가 있다. 법우는 조심스럽게 “아나빠나사띠가 반드시 사마타 수행이라고 단정적으로 말씀 하시네요. 호흡의 특성(들숨의 시원함  날숨의 탁함/들숨과 날숨의 온도차/들숨과 날숨의 길이등등),길고 짧음, 시작과끝 이러한  내용을 관찰해도 사마타 수행으로 봐야 하나요?”라고 글을 남겼다.
 
질문에 대하여 답을 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28일’ 책을 보라고 했다. 찬먜 사야도라 칭하는 우 자나카 사야도의 법문집이다. 우 자나카 사야도는 마하시 사야도의 직제자 중의 하나이다. 사야도는 호흡수행이 사마타로 되는 경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호흡수행이 사마타로 되는 경우에 대하여)
 
여기서 잠깐 존귀하신 마하시 세야도께서 호흡수행을 사마타 수행 유형과 위빳사나 수행 유형으로 구별하신 것을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위숫디막가 주석에서 호흡수행은 사마타 수행의 마흔 가지 주제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에 따를 경우 호흡수행은 사마타 수행입니다. 그 러나 마하사띠빳타나 숫따(D22)에서는 호흡수행이 위빳사나 수행으로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하시 세야도께서는 호흡수행을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의 두 가지 타입으로 구별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호흡수행이 위빳사나 수행인지 사마타 수행인지는 어떻게 구 별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대상의 종류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의 대상은 거의 개념입니다. 반면 위빳사나 수행의 대상은 언제나 정신적·육체적 과정 등의 궁극적 실재입니다. 왜냐하면 궁극적 실재를 대상으로 수행했을 때만이 그 실재만의 고유한 특성과 모든 실재들이 공유하는 일반적 특성인 비영속, 괴로움 비인격성(무아)를 깨 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마음을 호흡의 들어오고 나가는 데 초점을 모으면 그것은 사마타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호흡의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정신적 과정도 아니고 육체적 과정도 아닌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이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이 왜 개념인지 이해가 잘 안 되는 수행자를 위해 여러분이 지금 문을 통해 수행실에 들어왔다 나간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들어오고 나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정신적 과정입니까, 아니면 육체적 과정입니까?

그것은 정신적 과정도 아니고 육체적 과정도 아니고 단지 ‘들어감과 나감’일 뿐입니다. 즉, 개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 이 호흡의 들어옴과 나감에 마음을 모을 때 이 호흡의 들어옴과 나감도 단지 개념일 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마음을 호흡의 들어오고 나가는 데 초점을 모으면 그것은 사마타 수행인 것입니다. 그에 비해 여러분이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 공기가 콧구멍에 닿는데 그때 그 ‘닿음’을 관찰한다면 그것은 위빳사나 수행입니다. 왜냐하면 이 ‘닿음’이라는 것은 네 가지의 기본적인 물질적 요소들을 포함하여 여덟 종류의 육체적 단위로 구성되는 육체적 과정으로 개념이 아닌 궁 극적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공기가 콧구멍에 닿는 이 ‘닿음’ 이라는 대상은 위빳사나 수행을 할 때 좌수행에서 복부의 움직임이 잘 느껴지지 않을 경우에 복부의 움직임을 대신해서 기본 대상으로서 관찰하는 ‘앉아있음, 닿음’ 의 ‘닿음’과 동등한 관찰대상입니다.

(위빳사나 28일, 406-407쪽,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출간)
 
 
호흡 수행은 사마타의 길과 위빠사나 수행의 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호흡수행한다고 하여 오로지 들숨과 날숨에만 집중하면 사마타수행이 되어 버린다. 호흡이 들어오고 나감에만 마음을 둔다면 개념수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끝에서 일어나는 감촉을 새긴다면 위빠사나 수행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마하시 사야도는 복부를 관찰하라고 했다. 복부를 관찰하면 사마타의 길로 갈 염려가 없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은 풍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풍대는 빳냣띠(개념)가 아니라 빠라맛타(실재)이다. 그런데 코의 호흡에서 접촉하는 느낌은 복부의 부품과 꺼짐에서 닿는 느낌과 같은 의미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좌선할 때 부품, 꺼짐, 닿음을 새기는 것은 모두 위빠사나에 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사마타는 대상과 붙어 버리기 때문에 대상에 몰입되어 버린다. 이는 하나의 개념에 집중하여 몰입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개념은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을 계속 생각하는 불수념(佛隨念) 역시 사마타수행에 해당된다. 반면 사마타 수행은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이 아닌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코 끝에서 감촉을 보았다면 이는 위빠사나 수행이 된다. 감촉에서 생멸을 보고, 무상, 고, 무아를 보기 때문에 실재를 보는 수행이 된다.
 
오늘 1시간 좌선이 끝났다. 더 달릴 수 있으나 오늘 일정이 있어서 여기서 멈추어야 했다. 그리고 1시간 반동안 후기를 작성한다. 후기는 수행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 후기를 작성하는 것도 수행의 하나이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2023-09-0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