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그것이 남들에게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재가안거 33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1. 11:37

그것이 남들에게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재가안거 33일차
 
 
평좌한 다리를 풀었다. 그리고 거뜬히 일어섰다. 무려 1시간 35분 앉아 있었다. 그러나 다리저림은 없었다. 다리통증도 없었다. 전에 없는 일이다. 좌선을 하다 보니 이런 날도 있는 것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33일째이다. 계절이 바뀌었다. 오늘은 9월 1일이다. 더구나 날씨는 21도에 불과하다. 불과 2주전까지만 해도 열대야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이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오늘 좌선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처음부터 세게 밀어 부쳐 보고자 했다. 앉자 마자 호흡을 보고자 한 것이다. 여기서 호흡을 본다는 것이 호흡이 몸 앞에서 현전(現前)하는 것을 말한다. 대념처경에 있는 빠리무카사띠(parimukhasati)를 말한다.
 
여기 수행승이 숲으로 가고 나무 밑으로 가고 한가한 곳으로 가서 앉아 가부좌를 틀고 몸을 바로 세우고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내쉰다.”(D22.3)
 
 
배의 움짐임을 보고자 했다. 마음을 배로 가게 했다. 마치 행선할 때 마음을 발을 따라가는 것과 같다. 그리고 멈추어 섰을 때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하는데 마음을 원하는 부위에 이동시키는 것과 같다.
 
호흡은 잘 잡히지 않았다. 코로 호흡을 보는 것과 배로 호흡을 보는 것은 다르다. 코로 호흡을 보면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이는 다름아닌 빤냣띠(槪念)를 말한다.
 
코로 호흡을 보면 개념이 되어 버려서 사마타가 되어 버린다. 마음이 대상과 딱 붙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따르년 코로 호흡을 보는 아나빠나사띠에 대하여 사마타 40가지 명상주제 중의 하나라고 했다.
 
위빠사나를 하려면 마음을 복부에 두어야 한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복부에서 부품과 꺼짐은 빠라맛타(實在)를 보기 위한 것이다.
 
오늘 컨디션은 대체로 좋았다. 그러나 잠을 오래 자지는 못했다. 새벽에 깼을 때 잠이 오지 않아 책을 보았다. 그때가 몇 시인지 알 수 없다. 일체 언어적 형성에 관한 것과 멀리 하고자 했다. 시계를 보는 것도 해당된다. 그러나 경전과 논서를 보는 것은 예외이다.
 
새벽에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었다. 머리맡에 있어서 손만 뻗치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여러 권의 경전과 논서를 읽었다.
 
경전과 논서를 읽고 다시 누웠다. 읽은 것이 잠재의식 속에 남아서 꿈으로 나타난다면 이것보다 더 좋을 것이 없다고 본다. 잠에서 깨어 유튜브를 보거나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좌선할 때 ‘달린다’는 표현을 한다. 마치 자동차 운전자가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오토바이로로 오지를 여행하는 바이커가 미지의 도로를 달리는 것과 같다.
 
좌선도 운전하는 것과 같다. 이때 운전대는 사띠와 같은 것으로 본다. 호흡은 엔진과도 같다. 그리고 몸은 차체와도 같다. 그런데 운전을 잘하기 위해서는 전방을 잘 주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운전할 때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운전하면서 말을 할 수 있고, 운전하면서 음료수를 마실 수도 있고, 운전하면서 전화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운전하는 것이다. 나머지 것들은 서브에 지나지 않는다. 좌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좌선할 때는 오로지 호흡에만 집중해야 한다. 호흡에 집중하지 않으면 잡념이 치고 들어 온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의 밧줄로 묶어 두지 않으면 마음은 달아나 버린다.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정신의 문(意門)으로 들어 오는 잡념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호흡을 어느 정도 지켜 보면 여유가 생긴다. 마치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운전자가 운전 중에 여유가 생겨서 옆에도 보고 말도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항상 눈은 전방을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띠가 확립되면 반조를 하게 된다.
 
좌선 중에 생각할 수 있다. 이는 호흡을 놓쳤을 때 잡념이 치고 들어 오는 것과 다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생각하는 것은 꾸살라담마(kusala dhamma: 善法)이라고 볼 수 있다.
 
좌선 중에 생각하는 것은 자각하는 것과 같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디가니까야 16번경에서 “출가자들은 적멸에 들어 지냅니다. 그대는 지각하면서 깨어 있었는데 비가 쏟아지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떨어지고 벼락이 치는데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D16. 103)라고 했기 때문이다.
 
열반의 상태라 하여 기절한 상태라 볼 수 없다. 열반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에 자각할 수 없다. 그러나 깨어나면 다시 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자각과 관련하여 또 하나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난다의 경’에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그 때 난다는 이와 같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린다. 수행승들이여, 난다에게는 느낌이 자각적으로 일어나 고 자각적으로 유지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지고, 지각이 자각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유지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지고 사유가 자각 적으로 일어나고 자각적으로 유지되고 자각적으로 사라진다. 수행 승들이여, 난다는 이와 같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린다.”(A8.9)라고 말씀 하셨다.
 
좌선 중에 자각은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가능하다. 이런 자각을 반조와 같은 것이라고 본다. 또한 사띠와도 같은 것이라고 본다.
 
사띠가 왜 반조와 자각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가? 이는 사띠는 기억의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띠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띠에 대하여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A8.30)라고 했다.
 
사띠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수행용어로 사용할 때는 ‘새김’이라고 번역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 방식이다. 지킴의 뜻도 있다. 감각의 문을 지키는 성문지기와 같은 역할도 하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는 의미가 강하다.
 
좌선에서는 사띠가 확립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호흡을 관찰해야 한다. 마하시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둔다.
 
호흡은 변화무쌍한 것 같다. 어느 때는 빨라지기도 하고 어느 때는 느려지기도 하다. 이런 호흡은 단지 지켜 보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면 안된다. 그럼에도 집중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인위를 배제할 수 없다.
 
사띠를 확립하기 위해서 방법을 하나 사용해 보았다. 그것은 복부에 6단계 행선방식을 적용해 보고자 한 것이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에 6단계를 적용하여 관찰하고자 한 것이다.
 
행선 할 때는 6단계 행선을 한다. 마음을 온통 여섯 단계의 발에 움직임에 가 있게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여섯 단계로 분절하여 관찰하고자 했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여섯 단계로 관찰하면 호흡이 느려질 수밖에 없다. 또한 관찰이 끝났을 때 휴지기가 있다. 휴지기 때는 엉덩이 닿는 느낌을 관찰한다.
 
복부의 움직임을 여섯 단계로 관찰했다. 마치 행선하듯이 마음을 온통 여섯 단계로 분절하여 보고자 했다. 마치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듯이 관찰했다.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아마 그것은 ‘무의미’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수행에 의미를 두면 안된다는 것이다. 수행을 잘 하기 위해서 의욕을 내면 안됨을 말한다.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 수행이다. 마치 연주자가 똑 같은 음악을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과 같다.
 
노래하는 가수가 있다. 가수는 노래 한곡에 대하여 수백, 수천번 부른다. 피아노를 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똑 같은 곡을 수백, 수천번 반복하여 칠 것이다. 프로야구 선수가 있다. 피처라면 볼을 수백, 수천 번 던질 것이다. 타자라면 배트를 수백, 수천번 휘두를 것이다.
 
달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똑 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면 길이 있다.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것이 될 수도 있다. 수행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행한다고 하여 행선과 좌선을 하고 있다. 행선 할 때는 6단계 행선을 한다. 사무실 바닥에 14걸음에 해당되는 표시를 해 놓고 걷는다. 똑 같은 동작을 수십 번 반복한다.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한다. 남들이 보기에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수행은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이다. 똑 같은 행위를 수십, 수백, 수천, 수만 번 반복했을 때 달인이 될 것이다. 행선에서 6단계 행선을 하는 것과 좌선에서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지켜 보는 것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하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이런 선택에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자신만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유튜브 ‘5분 뚝딱 철학’에서 본 것이 떠올랐다. 영상 제목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feat.사르트르)’에 이런 내용이 있다.
 
 
즉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면, 그것이 나한테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된다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전부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하면. 그것이 곧 나의 정체성을 규정하게 됩니다.” (결심이 필요한 순간들(feat.사르트르), 5분 뚝딱 철학)
 

 

 
영상에 따르면 선택에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했다. 여기서 선택은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지금 내가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은 나의 선택이다. 그것이 남들에게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일지라도 나에게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알람을 한시간 설정해 놓았다. 오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오로지 복부의 움직임만 집중해서 관찰하기로 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집중이 약해졌을 때, 새김이 약해졌을 때 망념이 치고 들어 왔다. 그때 마다 복부로 마음을 보내서 분쇄했다. 망념의 집을 짓지 못하게 한 것이다.
 
좌선은 망념과의 싸움인 것 같다. 조금만 방심해도 헛점을 파고든다. 그리고 만리장성을 쌓는다. 마치 성벽에서 성문이 열려 있는 것과 같다. 열린 성문으로 도둑이 침입 하는 것과 같다.
 
성문을 잘 지켜야 한다. 이는 정신의 문을 단속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눈을 감은 상태이기 때문에 오문은 차단된 것이나 다름 없다. 귀로 들리는 것이 있기 때문에 도심에서는 귀의 문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코나 혀의 문은 막아진 상태에 있다.
 
정신의 문을 지키는 것이 성문을 지키는 것이 된다. 이때 사띠는 문지기로서의 역할을 한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 성문을 지키는 것과 같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에 대하여 행선 6단계 방식을 적용했다. 인위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망념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었다.
 
아주 면밀히 보고자 했다. 6단계 행선할 때 마음이 단계마다 따라가듯이 보고자 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상당한 집중이 되었다. 망념이 일어나도 곧바로 분쇄 되었기 때문이다.
 
복부를 6단계로 관찰할 때 알람이 울렸다. 한시간이 지난 것이다. 한시간 앉아 있었으므로 목표를 달성했다. 여기서 좌선을 끝내도 된다. 그러나 더 달리고 싶었다. 어제 기록을 깨고 싶었다.
 
알람이 울리고 나면 그때부터 분발되는 것 같다. 종소리가 울릴 때 집중이 최고조 되는 것 같다. 더구나 좌선은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이다. 여분의 좌선은 부담 없다.
 
부담 없이 앉아 있었다. 6단계로 바라 보는 것은 그만 두었다. 그대신 복부의 움직임을 지켜 보았다. 호흡이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짐을 보았다. 자연스럽게 지켜 보았다.
 
여분의 명상은 부담이 없다. 마치 미지의 세계를 달려 가는 것 같다. 사띠는 확립되었다. 망념은 발붙이지 못한다. 그대신 반조가 일어났다. 스스로 생각하는 자각이 일어난 것이다.
 
한시간 좌선에서 통증은 없었다. 고질적인 오른쪽 다리 통증은 나타나지 않았다. 엉덩이가 무거운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남의 것 보듯 했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 나의 것이라고 보지 않고 단지 물질적 현상으로 생각한다. 아마 이것이 정신괴 물질을 분리해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이는 “통증따로 마음따로”가 된 것이다.
 
통증은 통증이고, 마음은 마음인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마음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욕망과 적의와 같은 마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호불호와 쾌불쾌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는 호불호와 쾌불쾌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호불호와 쾌불쾌는 느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통증과 같은 느낌을 말한다.
 
좌선 중에 통증이 일어났을 때 남의 것 보듯이 했다.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일어났을 때 남의 다리 보듯 한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욕망과 적의로 인한 호불호와 쾌불쾌도 남의 것 보듯이 해야 할 것이다.
 
욕망과 적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수행한다고 앉아 있지만 그때 뿐이다. 일상에서는 욕망과 적의에 지배 받는다. 그 결과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난다.
 
호불호와 쾌불쾌가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객관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욕망에 대해서는 “이 욕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 욕망은 내가 아니고, 이 욕망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마법의 주문을 외워야 한다. 적의가 일어나면 “이 적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이 적의는 내가 아니고, 이 적의는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역시 마법의 주문을 외워야 한다.
 
좌선을 하다 보면 부끄러울 때가 있다. 호불호와 쾌불쾌에 대한 것이다. 마음이 청정한 상태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깨진다. 경계에 부딪쳤을 때 무참히 깨진다. 이는 욕망과 적의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욕망과 적의가 일어났을 때 마법의 주문을 외워야 한다. 그리고 중단 시켜야 한다. 어떻게 중단시키는가?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말로 중단시키는 것이다. 욕망이 일어났을 때 “욕망, 욕망”해야 한다. 적의가 일어났을 때 “적의, 적의”해야 한다.
 
오늘 좌선은 기록을 세웠다. 좌선이 끝났을 때가 8시 55분이었는데 35분 더 달렸다. 무려 1시간 35분동안 자세 한번 바꾸지 않고 앉아 있었다. 다리 통증도 없었다. 망상도 그다지 심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반조가 일어났다.
 
오늘 1시간 35분 달렸다. 방석을 하나 더 추가하여 네 개를 쌓은 것이 영향을 준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1시간 35분동안 통증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일어날 때 그 자리에서 거뜬히 일어났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2023-09-0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