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통증따로 마음따로, 재가안거 30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29. 11:45

통증따로 마음따로, 재가안거 30일차


 

이제 통증에서 자유로운 진 것 같다. 오늘 확실히 느꼈다. 허벅지 통증이 극에 달했지만 남의 것 보듯이 지켜 본 것이다. 이런 때는 없었다.

재가안거 30일차이다. 줄기차게 달려 왔다. 처음 시작했을 때 이렇게 오래 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삼분의 일 달려 왔다. 앞으로 두 달 더 달려야 한다.

나이가 한살한살 먹어 갈수록 초조 했다.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다 보면 인생이 허무 할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수행을 해야 하는데.”라며 생각해 왔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가 쉽지 않았다.

불교에 입문했을 때도 초조 했었다. 삼십대 후반이 되었을 때 불교를 배워 보고 싶었다. 그것은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개인적인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불교에 분명히 해법이 있을 것 같았았다.

나이가 한살두살 먹어가자 초조했다. 사십대가 넘어갔다.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데.”라는 생각만 하다가 세월을 보낸 것이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2003년 가을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도심포교당이 있었다. 그곳에 가면 불교를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학기중이었다. 다음 학기에 가기로 했다. 그래서 2004년 3월에 능인선원불교교양대학에 가게 되었다.

인생에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다름아닌 팔고에 대한 것이다. 생, 노, 병, 사,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취온고는 개인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진짜문제이다. 팔고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어도 일주일이고 약을 먹지 않아도 일주일이다. 몸에 상처가 나면 일주일 지나면 깨끗이 아문다. 그러나 사고와 팔고는 세월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세월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 중에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원증회고이다. 이는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이다. 여기서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건이 될 수도 있다. 사람과 사건이 동시에 될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생과 사는 잘 알지 못한다. 태어난 것은 기억하지 못하고 죽는 것은 아직 죽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모른다. 현실적으로 나와 무관한 것처럼 보인다.

애별리고는 삶 속에서 겪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과 이별은 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랑하는 것은 사람일수도 있고 사건일 수도 있다.

구부득고도 삶 속에 겪는 괴로움이다. 남들이 향유하는 것을 가지지 못했을 때 박탈감을 느끼는 것이 해당될 것이다.

오취온고는 심오한 것이다. 불교공부를 해야 알 수 있다. 사성제를 이해해야 알 수 있고 팔정도 수행을 해야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 원증회고만한 괴로움은 없는 것 같다.

불교에 입문한 것은 원증회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의 만남에 대한 괴로움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난다고 하여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더 큰 괴로움으로 다가온다. 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에 틀림없이 해법이 있을 것 같았다.

원증회고에 대한 해법은 불교에 있었다. 불교에 입문하고 난 다음 개인적으로 초기경전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또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접하면서 알게 되었다. 미얀마 사야도의 법문집도 도움이 되었다.

불교입문한지 19년 되었다. 경전에 근거한 글을 쓴지 17년 되었다. 그 동안 쓴 글은 7,200개가 넘는다. 이제는 책으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현재 100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초기경전을 읽었다. 그리고 느낀 것을 글로 표현했다. 주로 원증회고,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대한 괴로움에 대한 것이다. 어느 정도 성과는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만 이해한 것이다.

경전적 지식도 지혜에 해당된다. 경전을 읽고서 나름대로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것도 지혜에 해당된다. 더 좋은 것은 몸으로 체험해 보는 것이다.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수행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세 번 집중수행 했었다. 첫 번째는 2015년에 2박3일 일정으로 한국명상원 가평설악 수련원에서 집중수행한 바 있다. 물론 수행기를 남겼다. 두 번째는 2019년 1월초에 미얀마 담마마마까에서 2주간 집중수행했었다. 미얀마불교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세 반째는 2019년 7월 직지사에서 5박6일 위빠사나 집중수행을 했었다. 담마마마까 에인다까의 사야도의 법문과 수행점검이 있었다.

수행을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명상홀에서 모여서 수행하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수행은 남 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기도는 골방에서 하라는 말이 있듯이, 수행도 남 보지 않는 곳에서 하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재가안거를 시작한지 한달이 되었다. 갑자기 발심하게 되었다. 2023년 한국테라와다불교 안거법회에서 빤냐와로 스님의 입재법문을 들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승가의 스님들만 안거하는 줄 알았는데 법문을 들어 보니 재가자들도 대상이었던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발심하여 출가하는 장면이 있다. 맛지마니까야 82번경인 ‘랏타빨라의 경’에서 랏타빨라가 그랬다.

랏타빨라는 어느날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했다. 그래서 “세존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재가에 살면서 궁극적으로 원만하고 궁극적으로 청정하고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청정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자,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어떨까?”(M82)라며 발심출가한 것이다.

스님들은 재가자들에게 관심의 대상이다. 가장 궁금한 것은 출가이다. 그래서 “스님은 왜 출가하셨어요?”라며 당돌하게 물어 본다. 이에 대하여 흔쾌히 대답하는 스님이 있는가 하면 대답을 회피하는 스님도 있다.

초기경전을 보면 하나의 특징이 있다. 발심출가한 것을 보면 먼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감동받는 장면이 나온다. 랏타빨라도 그랬다. 그래서 “나도 출가해 볼까?”라며 발심하는 것이다.

스님들의 출가이유를 보면 다양하다. 분명히 어떤 스님들은 생계형출가도 있고 도피형출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이상적인 출가는 발심출가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감동받아 출가하는 것이다.

안거는 발심에 따른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자가 “나도 출가해볼까?”라며 발심했듯이, 빤냐와로 스님의 안거입재법회 법문을 듣고서 “나도 안거라는 것을 해볼까?”라며 발심한 것이다.

초기경전과 논서는 수없이 봤다. 경전과 논서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봤다. 글도 수천 개 썼다. 그러나 체험이 없다.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몸으로는 체득된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계에 부딪쳤을 때 깨지고 만다.

어떻게 해야 깨지지 않는 견고한 법을 얻을 수 있을까? 직접 몸으로 부딪쳐서 얻는 수밖에 없다. 방법은 알고 있다. 다만 해보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안거를 하게 되었다. 그것도 재가안거라고 이름 붙여 보았다.

오늘 아침은 일찍 일터에 나왔다. 일터에 도착하니 아침 6시 18분이었다. 아파트 현관에서 5시 56분에 나왔다. 배낭을 하나 매고 이마트 안양점을 돌아 경수산업도로를 가로지르고 안양천을 건너서 왔다.

일터에 일찍 왔으니 좌선도 일찍 시작된다. 그런데 좌선을 하기 전에 반드시 예비적으로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암송하는 것과 행선하는 것이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일년 넘게 암송하고 있는 경이다. 이 경을 암송하면 마음을 다 잡게 된다. 부처님이 악마 나무찌와 싸워 승리한 게송이기 때문이다.

행선을 할 때는 육단계 행선을 한다. 멈출 때는 머리 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스캔한다.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한다.

행선할 때 사대를 느끼고자 한다. 몸은 사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행선할 때 사대를 보기 쉽다. 지대는 닿는 느낌에서 알 수 있는데 이는 몸의 ‘토대’가 된다. 수대는 행선으로 알기 힘들지만 몸의 ‘응집’으로 수대를 본다. 화대는 닿는 느낌에서 차갑거나 따뜻한 것에 대한 것이긴 하지만 ‘성숙’의 상징으로 본다. 풍대는 몸이 이동할 때 움직임으로 보는데 이는 ‘이동’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물질은 사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교수가 있다.

어느 교수가 있다. 이 교수는 유튜브에서 아비담마를 격렬하게 비난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해석한 것이 맞다고 한다.

교수는 권위가 있는 사람이다. 정년퇴임한 그 교수는 유튜브에서 나름대로 자신이 생각한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핵심은 오온에 대한 것이다. 오온에서 색에 대하여 물질로 보지 않고 인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교수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접하고 있는 불교는 잘못된 것이다. 특히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교수의 이론을 보면 수행이 없다. 오온에서 색에 대하여 물질이라 하지 않고 인식된 것이라고 했을 때 수행이 있을 수 없다.

이번 테라와다 입재법회 때 빤냐와로 스님은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해체해서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을 관찰하라는 말과 같다. 이는 빠라맛타(실재)를 보라는 말과 같다.

모든 것이 인식된 것이라면 이를 어떻게 봐야 할까? 아마 그것은 빤냣띠(개념)의 세상일 것이다. 언어적 형성에 따른 것은 모두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정신과 물질을 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개념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현상을 보기 위한 것이다. 실재를 보기 위해서는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해서 관찰해야 한다. 개념(빤냣띠)를 배제하고 실재(빠라맛타)를 보는 것이 수행이다.

수행은 몸을 필요로 한다. 몸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 수행이 될 수 없다. 머리로만 알고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빤냣띠(개념)가 된다. 교수가 주장하는 것은 차라리 빤냣띠에 가깝다. 거기에는 수행이 없다.

오랜 세월 불교를 연구한 명예교수는 색에 대하여 물질이 아니라 인식된 것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자신이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알아냈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니 기존 논서, 즉 아비담마와 청정도론과 같은 논서를 격렬히 비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론과 상충되기 때문에 비난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 좌선은 7시 15분에 시작했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에 타이머를 한시간에 세팅해 두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좌를 했다. 두툼한 방석에 앉았다. 한시간 달리다 보면 다리저림 현상을 어느 정도 완화 시켜 주기 때문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잘 잡히지 않았다. 소음이 심한 이유도 있다. 도로에 차량 지나가는 소리, 철길에 전철 지나가는 소리,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 여기에 건물전체에서 나는 저주파의 기계음까지 ‘소음사중주’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사람소리나 음악소리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좌선은 그냥 앉아 있기로 했다. 번뇌가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망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지켜 보기로 한 것이다. 번뇌와 망상도 법이다. 여섯 가지 감각의 문 중에서 의문으로 들어 오는 빠라맛타이다. 알아차려야 할 법인 것이다.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다. 아마 반이 넘어 간 것 같다. 그때까지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가능하면 미동도 하지 않고자 했다.

배의 움직임 보다는 번뇌와 망상을 지켜 보는 쪽으로 마음을 틀었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중심이 없었다. 번뇌와 망상에 휘둘리다 보니 지루해졌다. 이럴 때는 재빨리 호흡으로 돌아 와야 한다.

명상 할 때 호흡은 의지처와 같다. 호흡에 의지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번뇌망상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럴 때 호흡은 피난처와도 같다. 이런 명상은 MBSR과 같은 것이다.

존 카밧진 교수가 개발한 MBSR이 있다. 이 명상기법은 스트레스 완화에 대한 것이다. 불교의 사념처에서 명상기법만 가져와서 정신건강 치료용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런 MBSR에서 종교적인 것은 없다. 스트레스완화로 인한 마음의 안정과 평화에 대한 것이 주목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 안거에서 명상하는 것은 MBSR과 차원을 달리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명상한다고 하여 앉아 있는 것이 스트레스완화나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나는 이번 안거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그것은 명백하다. 나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번뇌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이에 통증관찰 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좌선을 시작한지 50분 정도 지났을 때 다리에 통증이 왔다.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통증이 왔다는 것은 법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오늘 통증은 오른쪽 다리 허벅지에서 왔다. 허벅지가 쑤시는 듯 아팠다. 마치 형틀에 앉은 자에게 작대기를 엑스(X)자로 고문하는 것 같았다. 통증이 주기적으로 엄습했는데 나에게는 오히려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안거를 시작할 때 통증에 대하여 겁을 먹었다. 앉은지 이삼십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오른쪽 다리 통증이 시작되었다. 마치 마비 된 듯 아팠다. 겁을 먹어서 자세를 바꾸곤 했다. 그러나 이제 통증은 더 이상 두렵거나 무서운 것은 아니다. 법의 성품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이 보다 더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통증을 관찰하는 것은 즐겁다. 이런 말을 하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그러나 통증의 정체를 알고 나면 두려울 것이 없다. 통증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증은 왜 본래 없을까? 통증이 본래 있는 것이라면 항상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통증은 조건발생하는 것이다. 통증이 일어날 만 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평좌를 한 상태에서 50분이 지나자 통증이 발생한 것이다. 발을 꼬고 앉은 상태에서 시간이 지나니 통증이 발생한 것이다.

이번 안거에서 한가지 확실하게 안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통증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통증은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는 손님 같은 것이다.

통증을 지켜 보았다. 당연히 남의 다리 보듯 지켜 보는 것이다. 고문하는 것처럼 허벅지에서 주기적으로 통증이 일어났지만 정신적 괴로움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상윳따니까야에서 읽은 가르침이 생각났다.

상윳따니까야에 ‘나꿀라삐따의 경’(S22.1)이 있다. 나꿀라삐따 장자가 중병에 걸렸을 때 사리뿟따 존자가 문병 가서 법문해 주었다. 사리뿟따 존자는 먼저 “장자여, 어떻게 해서 몸도 괴로워하고 마음도 괴로워하는 것입니까?”라며 말했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질을 자아로 여기거나,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거나,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거나,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며, ‘나는 물질 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됩니다. 그는 ‘나는 물질이고 물질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겨 속박되지만 그 물질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 물질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 때문 에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S22.1)

 


오온에서 물질에 대한 것이다. 몸에 대하여 집착하는 사람이 있다. 내세울 것이 얼굴밖에 없는 사람은 나이가 늙어 감에 따라 주름이 지고 피부가 노화되는 것을 괴로워할 것이다. 이는 얼굴을 자신의 것이라 여기고 더 나아가 자아와 동일시 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의 변화에 따른 괴로움이 정신적 괴로움으로 까지 전이 되는 것이다. 이는 화살을 두 번 맞는 것과 같다.

얼굴 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사람은 얼굴에 상처가 나면 괴로울 것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은 불명예가 되었을 때 견디기 힘들 것이다. 이는 몸에 병이 나면 괴로운 것과 같다. 육체적인 괴로움이 정신적인 괴로움으로까지 전이 된 것이다. 육체적인 괴로움이라는 화살을 한방 맞았고, 여기에다가 정신적 괴로움이라는 화살을 한방 더 맞아서 두 방 맞은 것과 같다.

사리뿟따존자의 가르침은 좌선에도 적용할 수 있다. 좌선 중에 다리에 통증이 왔을 때 “몸은 괴로워하여도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는 것입니다.”(S22.1)라는 가르침을 말한다. 허벅지가 막대기로 고문당하는 것처럼 통증이 왔을 때 이를 정신적 괴로움으로까지 느끼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는 이렇게 말했다.

“장자여, 세상에 잘 배운 고귀한 제자는 고귀한 님을 보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을 알고 고귀한 님의 가르침에 이끌리고, 참사람을 보고 참사람의 가르침을 알고 참사람의 가르침에 이끌려서, 느낌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느낌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지 않고, 자아 가운데 느낌이 있다고 여기지 않고, 느낌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나는 느낌이고 느낌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습니다. 그는 ‘나는 느낌이고 느낌은 나의 것이다.’라고 여기지 않아 속박되지 않지만, 그 느낌은 변화하고 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 느낌이 변화하고 달라지는 것에도 불구 하고,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S22.1)

오온 중에서 느낌에 대한 것이다. 다리통증은 괴로운 느낌에 대한 것이다. 이런 느낌에 대하여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이 느낌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 느낌은 내가 아니고, 이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통증은 따로 통증이 되어 버린다. 육체의 괴로움은 느끼지만 그것이 정신적 괴로움으로까지 전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잘 배운 사람들의 특징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그렇다는 것이다.

범부들은 특징이 있다. 오온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 좋아하고, 한번 싫으면 ‘죽어도’ 싫은 것이다. 그래서 “이 느낌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 느낌은 내가 아니고, 이 느낌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이다.

오온을 나의 것으로 여기면 괴로움이 따른다. 육체적 괴로움이 정신적 괴로움이 되는 것도 오온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종착지는 어디인가? 이에 대하여 초기경전에서는 “그에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납니다.”라는 정형구로 설명한다. 오온에 대한 집착은 절망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존 카밧진이 개발한 MBSR처럼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기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아는 것이다.

명상을 하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알 수 있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과 물질적 현상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단지 조건에 따라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현상에 대하여 나의 것이라고 집착했을 때 괴로움이 일어난다.

좌선을 했을 때 통증이 발생한다. 이전에는 이런 통증을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내 몸에서 발생한 것이니 나의 것이 틀림 없는 것이다. 그런 물질과 정신으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통증발생 따로”가 되고, “아는 마음 따로”가 된다. 육체적 통증이 정신적 괴로움으로까지 발전하지 않는 것이다.

좌선 시간이 점점 끝나감에 따라 통증도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혀 두렵지도 않았고 겁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며 통증을 즐겼다. 알람이 울리고 나서도 15분 더 앉아 있었다. 통증따로 마음따로가 된 것이다. 이런 것도 이번 안거에서 얻은 성과일 것이다.



2023-08-2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