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통증은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지고, 재가안거 28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27. 18:48

통증은 파도처럼 밀려와 부서지고, 재가안거 28일차
 
 
매일 이른 오전에 좌선을 한다. 일터에 아침 일찍 나와서 앉아 있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차질이 생겼다. 오전 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오전 일찍 관곡지에 다녀 오고자 했다. 해마다 매년 7월말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시흥 관곡지로 간다. 그곳에 연꽃테마파크가 있다. 올해에는 좌선 한다고 하여 가지 못했다. 여름이 다 지나가기 전에 다녀 오고자 했다.
 
재가안거 28일째이다. 안거를 하겠다고 결심은 했지만 이렇게 오래 갈 줄 몰랐다. 앞으로 안거는 두 달 더 남았다. 이런 추세라면 완주할 것 같다.
 
매일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 목표이다. 좌선의 성과와는 무관한 것이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에 가장 큰 의미를 둔다. 앉아 있어 버릇 하려 하는 것이다. 수행은 습관 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오늘 좌선은 2시 56분에 시작되었다. 어느 날과 마찬가지로 타이머를 한시간으로  세팅해 두었다. 이렇게 해 두지 않으면 언제 끝나는지 알 수 없다. 가능하면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행선도 없이 앉았다. 암송도 하지 않았다. 예비수행을 일체 하지 않은 채 막바로 앉았다. 이럴 경우 예상되는 결과가 있다. 집중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행선이나 암송을 했을 때 어느 정도 집중이 이루어진다. 이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가면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막바로 앉았을 때 집중이 되는데 시간이 걸린다.
 
오전에 좌선하는 것과 오후에 좌선하는 것은 다르다. 오전에, 그것도 이른 아침에 좌선하면 반은 접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다. 잠에서 깬 그 상태가 유지 되기 때문에 언어적 형성에 따른 번뇌가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마음은 어느 정도 오염이 되어 있다. 번뇌에 물든 마음에서 앉았을 때 망상이 요동친다.
 
오늘 오후 좌선은 대단했다. 그야말로 번뇌망상의 바다가 되었다.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하고자 했으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집중할 수 없었다. 내버려 두었다. 생각이 일어나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둔 것이다.
 
생각이 일어났다가 집을 짓고 사라지는 것이 반복되었다. 생각도 법이다. 번뇌와 망상도 법이다. 이는 법념처에서 ‘여섯 가지 안팍의 감역’에 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법념처에 정신에 대한 것이 있다. 이는 “정신을 분명히 알고 사실을 분명히 알고 그 양자를 조건으로 속박이 생겨나면 그것을 분명히 알고, 아직 생겨나지 않은 속박이 생겨나면 생겨나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이미 생겨난 속박을 버리게 되면 버리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알고, 이미 버려진 속박이 미래에 생겨나지 않는다면 생겨나지 않는 대로 그것을 분명히 안다.”(D22.22)라고 했다.
 
여섯 가지 감각의 영역이 있다. 이 중에서 정신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정신과 사실에 대한 관찰’이라고 한다. 여기서 사실은 담마(dhamma)를 번역한 말이다. 담마는 법(法)이라고 번역된다. 마음의 문으로 들어 오는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선불교에 ‘번뇌즉보리’라는 말이 있다.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는 말이다. 번뇌를 번뇌인줄 안다면 깨달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번뇌가 번뇌인 줄 모르고 자신의 것인 줄 안다면 깨달음이라 볼 수 없을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에 대하여 ‘객관명상’이라고도 말한다. 마치 제3자가 보는 것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번뇌가 일어났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번뇌와 망상이 발생 했을 때 마치 남이 보듯 관찰하는 것이다.
 
보면 사라진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알면 사라진다’는 말과 같다. 모르면 사라지지 않는다. 모르면 움켜 쥐고 있다. 상윳따니까야 ‘악마의 모음’(S4)을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허공 가운데 움직이는
생각이라는 올가미
내가 그것으로 그대를 묶으리.
수행자여, 내게서 벗어나지 못하리.”(S4.15)
 
 
악마 빠삐만이 부처님을 생각이라는 올가미로 묶어 두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이라는 올가미는 주석에 따르면 “정신[意根]과 사실[法境]에 관련된 감역에서 일어나는 체험적 현상을 비유한 것이다.”(Srp.I.177)라고 했다. 이는 법념처에서 ‘정신과 사실에 대한 관찰’에 대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악마는 부처님을 생각이라는 올가미로 묶어 두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감각적 욕망에 대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답했다.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의 감각적 즐거운 것들
거기서 나의 욕망은 떠났으니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S4.15)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은 오욕락에 대한 것이다. 다섯 가지 감각의 문으로 들어온 것은 마음의 문(意門)에서 지각이 된다.
 
오문에서 파악된 것은 어떤 것인 것 알 수 없다. 단지 전향의 마음만 일어 났을 뿐이다. 여기에 정신이 개입 되어야만 어떤 것인지 파악된다. 그래서 맛지마니까야 18번 경인 ‘꿀과자의 경’에서 깟짜나 존자는 번뇌망상이 일어나는 원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벗들이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나고,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낀 것을[112] 지각하고, 지각 한 것을 사유하고, 사유한 것을 희론하고, 희론한 것을 토대로 과거, 미래, 현재에 걸쳐 시각에 의해서 인식되는 형상에서 희론에 오염된 지각과 관념이 일어납니다.”(M18)
 
 
시각과 형상과 시각의식이라는 삼사화합이 가장 먼저 일어난다. 여기서 시각의식은 어떤 대상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대상에 전향하는 의식만 있게 된다. 그 대상이 어떤 것인지 알려면 마음의 문에서 정신이 파악해야 한다. 그래서 의문에서 “정신과 사실을 조건으로 정신의식이 생겨난다.”(M18)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신의식이 생겨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진행될까? 이는 “그 세 가지를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로 오문에서 진행되었던 과정이 그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삼사화합촉에 의해서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는 느낌에서 갈애로 가는 길과 느낌에서 지각으로 가는 길이 있다. 전자는 십이연기가 회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유전연기에 대한 것이다. 후자는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맛지마니까야 18번경인 ‘꿀과자의 경’에서는 망상이 일어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 출발점은 삼사화합촉에서부터 시작된다.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으로 진행하는 것은 같다. 다만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면 연기가 회전된다. 느낌에서 지각으로 넘어가면 망상이 된다.
 
망상이 일어날 때 과거에 있었던 것을 원인으로 한다. 이는 다름아닌 과거에 지은 업(業)에 대한 것이다.
 
어떤 대상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떠 올랐을 때 과거에 경험한 것이다. 경험한 것이 대상이 되어서 생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사실을 알고 보면 결과에 대한 것이다. 과거 지은 업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번뇌와 망상도 법이라고 했다. 법념처에서 여섯 가지 감감영역에서 발생하는 것도 법인 것이다. 지금 망상이 일어났다면 이는 과보로서 나타난 것이다. 과거의 것이 원인이 되어서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 지은 업이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삶은 업과 과보의 흐름이다. 이는 행위와 결과의 계속이라는 말과 같다. 신체적으로 언어적으로 정신적으로 행위를 했을 때 업이 되는데 언젠가 과보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때 과보를 업이숙(業異熟: kammavipaka)이라고 한다. 업이 달리 익는 것을 말한다. 업이 시간에 따라 달리 익는 것이다.
 
망상이 일어났을 때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행위가 과보로 나타난 것이다. 이는 업과 과보, 행위와 결과, 원인과 결과에 따른 것이다. 그래서 십이연기에서는 원인에 대한 것을 보면 무명, 형성, 갈애, 집착, 존재로 보고 있다, 결과에 대한 것으로서는 식, 명색, 육입, 접촉, 느낌으로 보고 있다.
 
번뇌가 일어난 것은 결과이고 과보이고 업보인 것이다. 그런데 과보는 또한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과보로서 번뇌가 망상이 되면 망상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원인이 된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된다.
 
번뇌가 일어났을 때 번뇌가 일어난 줄 알면 되는 것이다. 번뇌에 끄달려 집을 짓는 일은 없게 된다. 그래서 법념처에서 정신과 사실에 대해서는 “ ‘의식은 이와 같고 의식의 발생은 이와 같고 의식의 소멸은 이와 같다.’라고 분명히 안다.”(D22.21)라고 했다.
 
여섯 감역에 대하여 사성제의 고, 집, 멸, 도 형식으로 관찰하면 집착할 것이 없다. 그래서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D22.21)라고 했다.
 
정신과 사실을 관찰 했을 때 연기의 법칙을 알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집찰하지 않는다. 단지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사실을 알 뿐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더 이상 집착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악마 빠삐만에 대하여 “죽음의 신이여, 그대가 패했다.”(S4.15)”라고 말했다.
 
알면 사라진다고 했다. 악마 빠삐만은 “ ‘세존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 부처님은 나에 대하여 알고 있다.’라고 알아채고 괴로워하고 슬퍼하며 그곳에서 즉시 사라졌다.”(S4.15)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악마의 정체가 탄로난 것이다. 악마에 대하여 알면 악마는 더 이상 발붙이지 못한다.
 
한시간 좌선을 하면서 거의 대부분 시간을 망상으로 보냈다. 그러나 망상도 법이라는 것을 안다면 지켜 볼 뿐이다. 그런데 보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악마 빠삐만이 발 붙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시간 좌선은 긴 시간이다. 한시간 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좌선을 한시간 하면 다리가 저려서 자세를 바꾸어 주어야 한다. 또한 자세를 바꾸어 주면 새로운 기분으로 좌선에 임할 수 있다. 그러나 한시간 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번뇌망상도 시들해질 즈음에 오른쪽 다리가 저리기 시작했다. 통증이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통증이라는 손님이 찾아 온 것이다.
 
좌선할 때 번뇌망상이 일어나면 좌선이 힘들어진다. 그러나 통증이 발생되면 긴장된다. 가장 강력한 대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번뇌망상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통증은 단번에 번뇌망상을 제압해 버린다. 마치 주식에서 커다란 일봉이 나타나면 다른 일봉을 제압해 버리는 것과 같다.
 
통증이 시작되었을 때 반가웠다. 강력한 새김의 대상이 나타난 것이다. 호흡과 비할 바가 아니다. 호흡은 항상 있는 것이기 때문에 봐도 언제든지 돌아갈 집과 같다. 그러나 통증은 불청객이다. 번뇌와 망상도 불청객이긴 하지만 비교도 되지 않는 큰 대상이다. 법을 관찰하기에 통증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좌선을 매일 해서 몸이 길들어지면 다리통증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럴 때 법을 보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일부로 통증을 만들어 내서 관찰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지침서 중에 ‘위빳사나 수행 28일’이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간행된 것으로 미얀마 ‘찬먜’ 수행센터의 우 자나카 사야도가 법문한 것이다. 이 책을 보면 통증을 관찰하기 위하여 통증을 만들어서 관찰하는 장면이 나온다. 좌선을 해서는 통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다.
 
통증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반가운 손님이다. 법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 자나카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러분이 통증을 관찰할 때 집중이 충분히 깊으면 꿰뚫어보는 지혜가 예리해져서 통증의 성품을 꿰뚫어보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그저 통증을 불쾌한 감각으로만 깨닫습니다.
 
통증은 여러 분과 연관되어 있지 않습니다. 통증은 여러분으로부터 떨어져 있습니다. 집중이 더 깊으면 신체적 형태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통증만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 수행이 더 진전되면 여러분은 통증을 마치 일어났다 사라지는 바다의 물결처럼 깨닫습니다. 하나의 물결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서 다른 물결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물결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이런 식으로 여러분은 하나씩 차례대로 일어나서는 사라지는 통증의 물결들을 봅니다.

때로는 통증을 하나하나의 층으로서 보기도 합니다. 하나의 층이 일에 났다가 사라지고 나서, 그 뒤를 이어 또 다른 층이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통증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바다의 물결처럼 경험하든 층으로써 경험하든 그것은 여러분이 통증의 비영속을 깨닫고 있음을 의미합니다.”(위빳사나 수행 28일, 293-294쪽)

 

 
통증을 관찰하는 목적은 비영속에 있다. 이는 다름 아닌 ‘무’상을 관찰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통증은 생멸하기 때문이다.
 
한번 일어난 통증이 계속 가는 경우는 없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통증은 물결 같다는 것이다. 마치 바다가에서 밀려 오는 파도 같은 것이다.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 오는 것이다.
 
파도는 바위에 부딪치면 포말과 함께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통증의 파도도 포말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우 자나카 사야도는 “여러분은 통증을 물거품으로서 깨닫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집중이 되어서 꿰뚫어 보는 지혜가 예리해졌을 때를 말한다.
 
통증이 물거품 같다는 것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상윳따니까야 ‘포말의 비유의 경’에서 느낌에 대하여 “느낌은 물거품과 같네.”(S22.95)라고 부처님이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물거품에 실체가 있을 수 없다. 포말은 무상하고 무아인 것이다.
 
한시간 좌선 중에 오른쪽 다리 통증이 나타났을 때는 아마 끝나기 10분전쯤 되었을 것이다. 통증이 본격화 되자 이제까지 들끓던 번뇌망상은 싹 사라졌다. 통증에 마음을 두자 집중이 강화 되었다. 나태 했던 마음도 다 잡게 되었다.
 
통증을 계속 지켜 보았다. 견딜 만 했다. 통증은 다분히 심리적 요인도 있다는 것을 여러 차례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마치 파도처럼 밀려와서 부서지는 통증을 마치 남의 다리 보듯 지켜 보았다. 그랬더니 통증이 점차 약화 되는 것이었다!
 
보면 사라진다고 했다. 알면 사라진다는 말과 같다. 악마 빠삐만도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물러갔다. 통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런 통증에 대하여 우 자나카 사야도는 이렇게 말했다.
 
 
깊은 집중의 결과로 꿰뚫어보는 지혜가 예리해지면 여러분은 통증을 물거품으로서 깨닫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통증 그 자체에서 깨닫고 있는 것은 단지 통증에 무질서하게 구성되어진 물질의 많은 작은 입자 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물질적 혼합물은 통증 그 자체가 아니며, 단지 통증이라는 감각을 산출하고 있을 뿐입니다.”(위빳사나 수행 28일, 294쪽)
 
 
통증은 통증 그 자체가 아니라고 했다. 통증은 단지 감각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통증이라는 물질과 같다. 그런데 물질은 변화되고 부서지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통증도 변화되고 부수어진다. 마치 파도가 바위에 부딪쳐서 포말과 함께 사라지는 것과 같다. 
 
한시간 좌선에서 막판에 통증을 보았다. 통증의 발생에서 소멸까지 지켜 보았다. 예전 같았으면 겁이 나서 다리를 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통증도 생멸하는 법인 것을 알기 때문에 지켜 보기로 한 것이다.
 
통증은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통증은 통증이라는 그 자체의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통증이 통증이라는 고유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통증을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통증은 파도처럼 밀려와서 부서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 자나카 사야도는 “때때로 이 물거품과 같은 통증은 폭발하거나 분해됩니다.”(294쪽)라고 말했다.
 
통증은 그 자체로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통증에 실체가 없듯이 괴로움에도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괴로운 느낌일 뿐이다. 이런 괴로운 느낌은 조건에 따라 생멸한다. 파도처럼 부서지는 것이다. 오늘 오른쪽 다리 통증도 파도처럼 부서졌다.
 
한시간 좌선을 마쳤다. 처음에는 번뇌와 망상으로 시간을 보냈으나 다행히도 오른쪽 다리에 통증이 발생되어서 법을 볼 수 있었다. 이렇게 통증을 보는 것은 무상을 보는 것이 된다. 통증에 실체가 없음 보게 된다.
 
좌선이 끝났을 때 가뿐했다. 예전 같았으면 마비된 다리를 풀기 위하여 시간을 필요로 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뜬히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것도 법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23-08-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