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돌부처가 되었는데, 재가안거 29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28. 11:39

돌부처가 되었는데, 재가안거 29일차

 

 

삐리릭~, 삐리릭~”연속해서 알람소리가 울린다. 이를 요즘 속된 말로 쌩까기로했다. 신호음을 무시하고 계속 가기로 한 것이다.

 

재가안거 29일째이다. 오늘 월요일 아침은 비가 내렸다. 평소에는 걸어서 일터에 가지만 비가 심해서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도착하자 마자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그것은 한시간 좌선하는 것이다.

 

요즘 일상은 한시간 좌선에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다. 좌선에 방해되는 행위는 일체 하지 않는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기본이다. 뉴스나 유튜브, 에스엔에스를 열어 보는 언어적 행위에 대한 것도 일체 하지 않는다.

 

좌선에 식사도 중요한 요소이다. 너무 많이 먹거나 자극적인 음식은 피해야 한다. 오늘 아침은 삶은 계란 두 개, 밤호박 사분의 일조각, 그리고 모닝식빵 하나를 먹었다. 여기에 꿀물을 곁들였다.

 

아침에 커피를 마셔야 한다. 아침식사를 끝냈을 때 커피를 필요로 했다. 분쇄된 커피 가루가 있다. 페이스북친구 임진규 선생이 보내 준 것이다.

 

 

임진규 선생은 커피업에 종사하고 있다. 강남에서 이탈리아 커피를 수입해서 판매 하고 있는 사업가이다. 절구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것을 보고서 보냈다고 한다. 분쇄커피를 마시면 시간이 절약될 것이라고 했다. 이런 글을 자필로 쓴 카드를 택배에 넣어 보내 왔다.

 

아침도 먹고 커피도 마셨다. 이제 수행을 해야 한다. 먼저 행선을 했다. 행선을 하면 약간 집중이 생긴다. 육단계 행선 과정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에 가져 가고자 하는 것이다.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을 때마다 비장한 각오를 한다. 마치 출격을 앞둔 전투기 조종사와 같다. 정글을 해쳐 나가는 모험가와도 같다. 오토바이 하나에 의지해서 오지를 달리는 바이커와도 같다.

 

오늘 좌선은 잘 할 수 있을까? 오늘 좌선은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늘 오른쪽 다리가 저렸기 때문에 평좌 자세에서 바깥으로 했다. 안쪽에 왼쪽다리를 놓고 사타구니 쪽으로 바싹 당겼다.

 

본래 평좌 자세는 결가부좌 자세가 변형된 것으로 본다. 이는 한번 해보아서 추론으로 안다. 왜 그런가? 결가부좌 했을 때 이를 풀듯이 두 다리를 바닥에 붙였을 때 평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평좌는 결가부좌의 변형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허리는 곧게 폈다. 처음부터 곧게 펴야 한다. 이는 손으로 허리를 만져 보면 알 수 있다. 약간 에스(S)자 형으로 굽어 있기 쉬운데 이를 쭈욱 펴는 것이다. 그러면 가슴도 자연스럽게 펴지게 된다. 고개는 똑바로 들어야 한다. 고개가 약간 숙여져 있으면 머리 무게 때문에 고개에 무리가 따른다.

 

 

허리도 최대한 곧게 펴고, 가슴은 활짝 펴졌고, 고개는 빳빳하게 세워졌다. 마치 머리에서부터 엉덩이까지 상체가 일직선이 된 듯 하다. 이 자세로 달리면 된다. 이 자세로 출격하는 것이다.

 

좌선을 하는 것은 산행을 하는 것과 비슷할 때가 있다. 산행할 때 처음에는 무척 힘든다. 왜 그럴까? 산행 초입에 이른바 깔딱고개가 있기 때문이다.

 

산행을 시작 할 때는 다리가 풀리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걷다 보면, 오르다 보면 다리가 풀리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것도 첫 번째 깔딱고개에 이를 때까지 속된 말로 쎄빠지게올라가야 한다. 좌선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좌선할 때도 깔딱고개가 있는 것 같다. 처음 자리에 앉았을 때는 자리가 잡히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자리가 잡힌다. 마치 산행할 때 오르막 길을 오르는 것과 같다.

 

산행 할 때 깔딱고개에 오르고 나면 다리가 완전히 풀린다. 몸 상태가 완전히 바뀌어 보린다. 다리가 풀린 상태에서 이제 능선을 타면 그야말로 비단길을 걷는 것과 같다. 좌선도 이외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좌선을 할 때는 마음의 대상이 있어야 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두라고 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는 것이다. 코에서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다. 코에서 호흡을 관찰하면 사마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복부에 마음을 두고자 했다. 그러나 좀처럼 복부의 움직임이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때 번뇌와 망상이 들끓는다. 자신도 모르는 생각이 갑자기 튀어 나와 집을 짓는다. 이럴 때 알아차림 하여 주관찰 대상인 복부에 마음을 둔다.

 

한시간 좌선은 긴 시간이다. 한시간 동안 운전을 하면 고속도로로 100키로를 갈 수 있는 거리이다. 평좌한 자세에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눈을 감고서 달린다. 그러나 온갖 장애물을 만나게 된다. 번뇌와 망상이라는 장애가 가장 크다.

 

미얀마 수행센터에서 회자 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라는 말이다. 좌선은 인내하는 것이다. 꼼짝하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복부의 움직임만 관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온갖 번뇌가 죽 끓듯 하고 망상이 집을 짓는다.

 

오늘 좌선에서 한시간 동안 정주행하기로 했다. 한시간 동안 자세를 바꾸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는 다리가 저릴 때 자세를 바꾸어 주었으나 그냥 쌩까고달리기로 한 것이다.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다. 그러나 몇 십분 지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추측할 수 있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면 틀린 경우가 많다. 심리적 시간과 실제 시간에 괴리가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좌선을 시작한지 50분 정도 지난 것 같다. 50분 동안 번뇌와 망상이 지배했다. 남은 시간이 10분 정도 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늘 좌선을 번뇌와 망상으로 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흔히 이런 말을 듣는다. 말년운이 좋아야 한다는 말이다. 소년급제한 자가 말년때까지 좋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초년운은 좋지만 말년운은 좋지 않을 수 있다. 초년에서 중년 때까지는 좋지만 말년이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초년운과 중년운은 좋지 않았지만 말년운이 좋을 수 있다.

 

좌선을 시작해서 50분동안 번뇌와 망상으로 보냈다면 초년운과 중년운이 좋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나 남은 10분 동안 심기일전해서 성과를 낸다면 어떻게 될까? 이는 말년운이 좋은 것과 같아서 초년과 중년의 고생을 상쇄하고도 남는 것과 같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좌선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이때 오른쪽 다리 통증이 찾아 왔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마치 손님이 찾아 온 듯 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맞듯이 통증을 반겼다.

 

통증은 손님과도 같은 것이다. 손님이 찾아 왔으면 집 안으로 안내해야 한다. 그리고 소님대접을 해야 한다. 번뇌망상중에 통증이 찾아 왔으니 얼마나 반가운가! 이제 강력한 관찰 대상을 갖게 되었다.

 

통증은 오른쪽 다리 무릎 전반에서 밀려 왔다. 무릎이 시큰거리기도 했다. 마치 파도가 밀려 오는 것처럼 찾아 왔다. 파도 1파가 밀려와서 부서지듯이, 통증 1파가 밀려와서 부서졌다. 이어서 파도 2파가 밀려와서 부서지듯이, 통증 2파가 밀려 왔다. 이렇게 통증의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 왔다.

 

파도가 치면 포말과 함께 부서진다. 특히 바위에 부딪치면 산산조각 부서진다. 통증도 산산조각 부서진다. 통증 1파가 밀려와서 부서지면 통증 2파가 밀려와서 부서진다. 이런 부서짐을 즐겼다.

 

 

처음 안거가 시작 되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통증이었다. 다리가 한번 저리기 시작하면 마치 마비되는 것 같았다. 다리가 마비 되어서 피가 통하지 않았다. 가만 두면 큰 일 날 것 같았다. 이럴 때는 자세를 바꾸어 준다. 그리고 피를 통하게 해 준다.

 

안거가 거듭될수록 통증과 싸움이 시작되었다. 앉을 때마다 늘 걱정되는 것은 오른쪽 다리 통증이었다. 그래서 앉는 것 자체가 고통이 되었다. 앉은지 이삼십분이 되면 어김 없이 통증이 엄습했다.

 

명상을 하면 마음의 안정이 되고 평화로워진다. 그런데 다리통증이 시작되면 마음의 평화는 깨진다.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인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대담해지기 시작했다. 통증과 한번 맞짱떠 보겠다는 것이다.

 

언젠가 좌선을 했을 때 통증을 관찰했다. 다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계속 갔다. 그랬더니 슬며시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로 알게 된 것은 통증이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통증이 사람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좌선을 하다 보면 그만 두고 싶을 때가 있다. 다리가 저릴 때 고통 그 자체가 되는데 이때 그만 두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마음을 속이는 마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악마가 지금 그만 둬!”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마음은 간사하다고 말한다. 좌선 중에 마음의 간사함을 본다. 번뇌망상이 기승 부릴 때, 통증이 심할 때 좌선을 그만 두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를 마음이 장난하는 것으로 본다. 마음이 간사한 것이다.

 

마음이 장난 하는 것을 눈치 채야 한다. 간사한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좌선을 그만 두게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다시 주관찰대상인 복부의 움직임에 마음을 가져 간다.

 

좌선 중에 통증이 일어나면 반가운 손님과도 같다. 그런데 안거가 거듭될수록 통증이 두렵지 않게 되었다. 통증의 파도가 밀려 왔을 때 남의 통증 보듯 한 것이다. 마치 남의 다리 보듯 통증을 관찰하는 것이다.

 

좌선이 끝나는 시간 10분을 남겨 놓고 통증의 파도가 밀려 왔다. 마치 해안에서 윈드서퍼가 파도타기를 즐기듯이 통증의 파도타기를 즐겼다. 통증은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 이상 더 이상 통증으로 인한 두려움은 없었던 것이다.

 

좌선 시간 한시간에서 50분은 번뇌망상으로 보냈다. 다행히도 10분을 남겨 두고 통증이 찾아 와서 통증을 즐겼다. 통증을 남의 다리 보듯 한 것이다. 이렇게 통증을 즐기자 복부의 움직임도 분명하게 보였다. 이때 나의 몸은 마치 돌부처가 되는 것 같았고 목석이 되는 것 같았다.

 

돌부처는 항상 그 자리에 앉아 있다. 돌로 만든 부처나 나무로 만든 불상은 움직임이 없다.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마치 돌부처나 목석이 되는 것 같았다. 숨만 쉬는 돌부처나 목불을 말한다.

 

마침내 알람이 울렸다. 한시간이 지난 것이다. 그런데 더 있고 싶었다. 알람소리를 꺼야 한다. 그러나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내버려 두면 저절로 꺼질 것이다. 1분정도 지나자 더 이상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좌선시간 한시간이 지났다. 목표달성을 했으니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막판에 사띠가 확립되어 돌부처처럼 되었기 때문에 이 상황을 계속 즐기고 싶었다. 더구나 오른쪽 다리에서 일어나는 통증이 마치 파도가 부서지는 것처럼, 옥이 부서지는 것처럼 부서질 때 쾌감을 느꼈다.

 

알람 울림도 끝났다. 돌부처가 되어 계속 앉아 있었다. 계속 가고자 했다. 마치 가보지 않은 길을 가보고자 했다. 번뇌망상은 싹 사라졌다. 반조의 마음만 남았다. 좌선 초기와 완전히 다른 몸상태가 되었다. 마치 산행 초기에 깔딱고개 넘기 전의 몸상태와 능선길을 타는 몸상태가 다른 것과 같다.

 

한시간 좌선이 끝나고서도 계속 달렸다. 언제까지 달려야 할까? 마치 능선길을 타는 것 같은 안온한 마음이 들었다. 복부의 움직임은 분명하고 통증은 옥처럼 부서진다. 돌부처가 되었을 때 그냥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 보기만 하면 된다. 이럴 때 상윳따니까야에서 읽은 경전 구절이 떠 올랐다.

 

 

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우거진 숲이 보인다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늪지대가 보인다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험준한 절벽이 보인다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라그 길을 따라 잠깐만 가면 풍요로운 평원이 보인다”(S22.84)

 

 

여기서 풍요로운 초원은 열반을 의미한다. 열반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우거진 숲, 늪지대, 험준한 절벽을 통과해야 한다. 여기서 우거진 숲은 무명을 상징하고, 늪지대는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상징하고, 험준한 절벽은 분노와 절망을 상징한다.

 

나그네는 길을 가고 있다. 두 갈래 길에서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이럴 때 부처님은 오른 길로 가라고 했다. 오른 길은 팔정도(八正道)의 길이고, 왼 길은 팔사도(八邪道)의 길이다. 그런데 팔정도의 길로 가는데 있어서 길은 쉬운 것은 아니다.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우거진 숲, 늪지대, 험준한 절벽을 만나듯이, 팔정도의 길을 가는 수행자는 무명, 감각적 욕망, 분노와 절망이라는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

 

길을 가는 나그네 온갖 어려움을 뚫고 마침내 풍요로운 초원에 도달했다. 팔정도의 길을 가는 수행자는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풍요로운 초원과도 같은 열반에 도달한다.

 

여분의 좌선을 했을 때 번뇌망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고 반조의 마음만 일어났다. 이럴 때 평소 불쾌하게 생각했던 것이 떠 올랐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모욕당했다고 늘 마음속에 담고 있었는데 이런 것도 나의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통증이 파도처럼 밀려와서 부서진다. 옥쇄(玉碎)라는 말이 있듯이, 통증이 옥처럼 산산조각 나며 부서진다. 이런 통증을 마치 남의 다리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았다. 그래서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마음도 나의 것이 아니라 남의 생각처럼 보고자 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게 되지 않는다.

 

여분의 좌선을 15내지 20분정도 했다. 오늘 좌선은 1시간 20분 가량 한 것이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자세 한번 바꾸지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이제 다리를 풀어야 했다. 그런데 쉽게 다리가 풀어졌다는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다. 마치 통증이라는 공포에 속은 듯한 느낌이다. 이전에는 다리가 마비되어서 피가 통하지 않아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어났다. 나는 통증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일까?

 

 

2023-08-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