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혼침으로 보낸 한시간, 재가안거 27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26. 11:00

혼침으로 보낸 한시간, 재가안거 27일차
 
 
오늘 좌선의 결과는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다. 수면의 질이 좋지 않았을 때 좌선은 실패하기 쉽다. 혼침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오늘 좌선이 그랬다.
 
운전 중에 졸음이 쏟아질 때가 있다. 고속도로 운전 중에 졸음이 쏟아지면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껌을 씹는 다거나, 창을 열어 놓는다거나, 노래를 부르는 등 갖가지 방법을 써 보아도 졸음 앞에 장사가 없다. 이런 경우 졸음휴게소에서 잠시 눈을 붙여야 한다.
 
좌선 중에 졸음이 쏟아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운전 중에 졸음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좌선 중에 졸음은 잠으로 이어질 수 있다. 좌선 중에 졸면 아무런 수행의 효과가 없다. 졸음과의 싸움만 할 뿐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일곱 번째 법수에‘졸고 있음 경’(A7.61)이 있다. 경의 제목이 순수한 우리말이다. 초기불전연구원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본에서는 ‘졸림의 경’이라고 작명했다. 이는 빠짤라(pacalā)를 번역한 것이다. 영어로 ‘shaking, trembling, wavering’의 뜻이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조는 모습이 연상된다.
 
부처님은 천안통으로 마하 목갈라나 존자가 조는 모습을 보았다. 이에 눈 깜짝할 사이에 목갈라나 존자 앞에 나타났다. 부처님은 “그대는 졸고 있지 않았는가?”라며 물었다. 이에 목갈라나 존자는 “세존이시여, 그렇습니다.”라며 솔직하게 말했다.
 
목갈라나 존자는 명상 중에 있었다. 그러나 혼침이 와서 졸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혼침을 즐기고 있었을지 모른다. 먼저 부처님은 “혼침에 빠뜨리는 그러한 지각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고 그러한 지각을 익히지 말라.”(A7.61)라고 했다. 이에 부처님은 일곱 가지 혼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혼침에 대한 일곱 가지 방법 중에 ‘빛에 대한 지각’이 있다. 이는 “빛에 대한 지각활동을 기울이고, 대낮에 대한 지각을 확립해야 한다.”라는 내용이다.
 
빛과 대낮은 밝음을 상징한다. 혼침은 어두움을 상징한다. 빛으로 어둠을 몰아 내는 것이다. 좌선 중에 밝음을 지각하여 밝음이 나타난다면 혼침과 같은 어둠을 몰아 낼 것이다.
 

 
혼침인 상태에서 한시간 앉아 있었다. 어쩌면 아무 의미없는 행위인지 모른다. 멍한 상태에서 앉아 있다 보니 시간은 잘 갔다. 타이머를 보니 10분 남았다. 남은 시간이라도 최대한 집중해 보고자 했다. 그래서 빛에 대한 지각을 했다. 그러나 너무 혼침이 너무 강해서 속수무책이었다. 이럴 때는 차라리 통증이라도 왔으면 좋겠다. 혼침을 날려 보낼 다리 저림이 시작된다면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았다.
 
혼침 중에 좌선을 하면 갖가지 망상이 일어난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 나타나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없으면 망상속에서 보내기 쉽다. 이럴 때 재빨리 알아차려 중단 시켜야 한다. 그리고 주 관찰 대상인 배로 와야 한다.
 
혼침 중에 담마를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망상이 허락도 없이 들어 오는 것과 다르다. 경전이나 논서에 본 것을 떠 올리는 것이다. 오늘 새벽에 본 것을 떠 올리고자 했다.
 
오늘 새벽 4시 20분에 일어났다. 오전 좌선을 위해서 더 잠을 자야 하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 대신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었다. 읽은 것을 읽고 또 읽었다. 조건파악의 지혜와 의심극복청정에 대한 것이다.
 
 
“행위는 이숙 가운데 없고,
이숙은 행위 가운데 없다.
상호 양자는 텅 빈 것이지만,
행위 없이는 과보가 없다.”
 
그러나 행위를 취해서
그것에서 과보가 생겨난다.”
 
그 가운데 윤회의 행위자인
신들이나 하느님은 없다.
원인이자 연료이자 조건인
순수한 사실들만 일어난다.”(Vism.19.20)
 
 
청정도론 19장 의혹에 대한 극복의 청정에 있는 게송이다. 이 게송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이렇게 의역했다.
 
 
원인인 업이 과보 속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가 서로로부터 공(空)하다.
있는 것이 아니다.

과보가 원인인 업 속에
업과 과보 두 법은
즉 분리되어 있다.
그렇지만 업을 떠나서는 과보가 생겨나지 않는다.

 
사실은 업을 의지해서만 과보가 그 업으로부터
그 업 때문에 생겨난다.


이 세상. 이 중생들에게
한생이 끝나면 또 한생
한 종류의 생이 끝나면 다른 종류로 변하며 생겨나는
물질·정신의 연속인 윤희를
만드는 창조하는 천신이나 범천이나 창조주는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 원인인 업이라는 조건과
뒷받침해주는 요인인 과보라는 조건. 이 두 조건 때문에
업과 과보라는 정신물질 법. 그 자체만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생겨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69-170쪽)
 
 
행위와 이숙은 업과 과보와 같은 말이다. 업과 과보는 다름 아닌 정신적 물질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 신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번 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업이 있고 과보가 있는 한 윤전하게 되어 있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업과 과보에 따라 정신과 물질의 원인들을 경험하여 알고 본 수행자는 이전 생의 임종 마음과 새로운 생의 재생연결 마음의 생겨나는 모습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2권, 170쪽)라고 했다.
 
이번 생과 다음 생을 연결해 주는 마음이 있다. 이를 재생연결식이라고 한다. 죽음의 마음 바로 다음에 일어나는 마음이다. 이렇게 바로 일어나면 틈이 없게 된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눈에서 형색이 드러나면 그 형색에 대해 서 ‘무엇인가?’라고 마음 기울이는 것처럼 전향 마음이 생겨난다. 그 전향의 바로 다음에 보는 마음이 생겨난다. 그렇게 생겨날 때 전향 마음과 보는 마음에 서로 틈이 없듯이, 임종 마음과 재생연결 마음도 서로 틈이 없다. 이전 생에서 마지막 임종 마음이 사라지면 과거 업 때문에 새로운 생에서 제일 첫 마음인 재생연결 마음이 생겨난다.” (2권, 170-171쪽)
 
 
죽음의 마음과 재생연결식과의 관계에 대하여 전향마음과 보는마음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이다. 눈으로 대상을 보았을 때 무엇인지 잘 모른다. 이때 의문에서 마음이 개입해야 제대로 사태를 파악할 수 있다. 이때 틈이 없다는 것이다. 번개보다 빠르게 사태가 파악되는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재생되었을 때 틈이 없다. 이렇게 되었을 때 중유 또는 중음신은 있을 수 없다. 티벳 사자의 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49일간의 중유상태는 없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행하는 천도재도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죽자마자 바로 태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 “그것들에게 중간자는 없고, 그것들에게 중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떠한 것도 오지 않지만, 결생이 생겨난다.”(Vism.19.23)라고 했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죽는다고 해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지은 업이 남아 있는 한 과보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다음 생이 시작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일체의 과거-미래-현재의 원리들은 죽음과 결생을 통해서 알려진다.”(Vism.19.21)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모든 과거-미래-현재의 법들을 죽음과 재생연결을 통해 분명하게 알게 된다.”(2권, 171쪽)라고 했다.
 
삼세는 죽음과 재생으로 연결되어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의식과 재생연결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 이전 마음이 원인이 되어서 다음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결과가 된다. 그런데 다음 마음, 즉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때는 업이 원인이 되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은 대상이 있어야 일어난다는 것이다.
 
재생연결식도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 대상이 바로 업이다. 더 자세하게 말하면 업과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에 따라 재생연결식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틈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지은 업 중에 가장 강한 것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살생업을 지었다면 살생에 대한 업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다. 악처에 떨어지기 쉽다. 선정수행을 오래 동안 했다면 선정의 상태에 대한 업을 대상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날 것이다. 색계나 무색계 천상이기 쉽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마음의 안정과 평안이라거나 빛과 같은 특별한 체험을 바라는 것이라면 힘들게 앉아 있을 필요가 없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나를 탐구해 보니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해체하여 보았더니 정신-물질의 작용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과거의 나와 미래도 나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삼세에 걸쳐 나가 없음을 아는 것에 대하여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라고 한다.
 
지혜에는 두 가지가 있다. 몸으로 체득해서 아는 지혜와 추론으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몸으로 아는 지혜는 수행을 해 보면 알 수 있다. 행선과 좌선을 통하여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하면 알 수 있는 것이다. 특징은 생멸이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멸은 항상하지 않다. 변해서 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것에 목숨 걸 필요가 없다. 다음으로 추론으로 알 수 있는 지혜가 있다. 이는 삼세에 대한 것이다. 과거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추론으로는 알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법을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의 법을 추론으로 알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죽음과 재생연결의 사라지는 모습, 생겨나는 모습을 이해한 수행자는 ‘과거생의 정신-물질 중 어느 하나도 새로운 생으로 건너오지 않는다. 바로 그 과거생에서 남김없이 사라져 버린다. 새로운 생에서는 과거 업 때문에 새로운 정신-물질만 생겨난다’라고 알고 보고 이해하기 때문에 ‘과거생의 정신-물질은 바로 그 과거생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라고, 또한 ‘이번 생의 정신-물질도 바로 이번 생에서 사라지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라고, 또한 ‘다음 생의 정신-물질도 바로 그 생에서 사라져 소멸할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지 않다’라고 숙고한다. 이렇게 숙고하는 것이 명상의 지혜의 처음이다.” (2권, 172-173쪽)
 
 
지금 여기에서 법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일어난 것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빠른 속도로 생멸하고 있다. 그래서 찰나생찰나멸이라고 한다. 이런 법은 다음 법으로 상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한번 일어난 것은 그것이 소멸함으로 끝난다. 과거에 일어났던 법이 지금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는다. 만일 과거 법이 전승되어 왔다면 영원주의가 된다. 자아나 영혼이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현상을 관찰하면 어느 것도 다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다만 업만 전달된다.
 
어느 시기에 업이 익으면, 즉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과보로 나타난다. 그래서 전승되는 것은 업과 과보뿐이다. 그래서 “업으로부터 이숙이 생겨나고, 이숙은 업을 생성한다. 업으로부터 재생이 있고, 이와 같이 세상이 일어난다.”(Vism.19.18)라고 했다.
 
이번 안거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것으로 하고 있다. 안거법회 때 대장로도 정신과 물질을 볼 것을 주문했다. 그런데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보면 나라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이 조건발생하여 생멸할 때 나라는 것은 찾을 수 없다. 과거에도 나는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멸하고 있다.
 

생겨나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바로 그때 앞에서 설명했던 다섯 가지 방법들 중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 정신과 물질의 원인들을 적절하게 경험하여 알고 보아서, ‘과거·현재·미래라는 삼세에 원인인 정신-물질과 결과인 정신-물질만 생겨나고 있다’라고 이해하여 확실하게 결 정할 수 있는 특별한 지혜를 정점에 이른 조건파악의 지혜(paccayapa- riggahañana)라고 한다.”(2권, 173쪽)
 
 
조건파악의 지혜는 위빠사나 지혜 16단계에서 2단계에 해당된다. 이 지혜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정신법과 물질법을 알아야 한다. 우리 몸과 마음이 정신과 물질의 작용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때 나라는 것은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를 삼세에 걸쳐서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 가운데 윤회의 행위자인 신들이나 하느님은 없다. 원인이자 연료이자 조건인 순수한 법들만이 일어난다.”(Vism.19.20)라고 알게 되는 것이다.
 
법을 아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직접 경험하여 아는 지혜와 추론으로 아는 지혜를 말한다. 정신과 물질을 직접 경험하여 아는 것에 대하여 위빠사나 1단계 ‘정신물질을 구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라고 한다. 또한 경전이나 논서를 통해서 추론으로도 알아야 한다. 원인과 결과, 업과 과보에 대하여 아는 것이다. 더구나 삼세에 대하여 내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를 위빠사나 2단계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라고 한다.
 

 
테라와다불교 재가안거 27일째이다. 오늘 좌선은 혼침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졸리울 때 집중을 할 수 없다. 이럴 때 일곱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빛에 대한 지각이다. 혼침으로 어두운 마음을 대낮처럼 밝게 하는 것이다.
 
빛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자 했다. 그러나 졸리운 상태에서는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한시간은 채워야 하기에 버텼다. 마침내 알람이 울렸을 때 한시간을 채웠다. 이런 것도 성과라면 성과일 것이다.
 
재가안거 기간동안 한시간 좌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혼침 등으로 성과가 나지 않았을 때 다시 한번 시도 하고자 한다. 혼침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앉아 있는 것이다. 오후도 좋고 밤도 좋다. 중요한 것은 정신법과 물질법을 보는 것이다.
 
 
2023-08-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