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자아를 죽여버리려면, 재가안거 25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24. 11:58

자아를 죽여버리려면, 재가안거 25일차
 
 
오늘 좌선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막판에 배의 부품과 꺼짐을 분명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통증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좌선시간을 한시간으로 바꾸었다. 한시간이 너무 길고 지루하여 30분씩 두 번으로 바꾸어서 이틀간 시행해 봤었다. 그러나 반시간은 너무 짧았다. 집중하려 하면 알람이 울리는 것이었다. 이에 오늘은 다시 한시간으로 복귀했다.
 
어제 글에서 좌선에 대하여 폄하하는 글을 올렸다. 경 외우기에 비한다면 좌선은 거지먹기 또는 날로먹기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한시간 좌선을 해보니 경솔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시간은 몰라도 한시간 앉아 있기는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하루일과 중에서 오전은 수행으로 보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이 되어서 일어나면 TV나 뉴스, 유튜브, 페이스북 등 좌선에 방해되는 것은 하지 않는다. 오로지 좌선에 올인한다. 행선도 좌선을 하기 위한 준비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자리에 앉을 때는 비장한 마음을 갖는다. 오늘은 반드시 배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말겠다는 다짐을 말한다. 이런 각오가 있어야 그나마 번뇌가 덜 일어난다.
 
한시간 좌선은 긴 시간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면 100키로를 주파할 수 있는 시간이다. 가만 앉아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호흡은 피난처와 같다는 것이다.
 
호흡을 놓칠 때가 있다. 그때 잡념이 들어 온다. 이럴 때 곧바로 호흡으로 복귀해야 한다. 배의 움직임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다. 이는 통증도 다르지 않다.
 
얼마나 지났을까? 알람이 울릴 시간이 되었다. 아마 십여분 남았을 것이다.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렸다. 가장 강한 대상에 마음을 두어야 하기 때문에 통증에 마음을 두었다. 그런데 더욱 통증이 강화 되는 것이었다. 또한 엉덩이 닿음도 묵직해져서 점차 무거워져 갔다.
 
통증이 심하면 다리를 풀고 싶어 진다. 겁부터 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차례 경험으로 알고 있다. 심리적인 요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험을 해 보았다. 마음을 통증에서 배의 호흡으로 옮겨 간 것이다.
 
통증은 매우 강력한 대상이다. 위빠사나 명상은 강한 대상을 관찰해야 한다. 통증을 관찰하면 통증은 사라질 수 있다. 통증은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통증으로 인한 느낌은 빠라맛타라고 볼 수 있다. 느낌은 개념이 아닌 궁극적 실재인 것이다.
 
통증을 어떻게 해야 할까? 배로 마음을 두었을 때 통증은 약화 되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짐을 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분명하면 할수록 통증은 잊어 버리게 되었다.
 
통증은 다분히 심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알람이 울려서 좌선이 끝났을 때 다리를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었다. 전에는 다리가 마비되듯 하여 움직일 수 없는 정도였다. 이렇게 본다면 호흡은 피난처와도 같다.
 
나는 왜 좌선을 하는가? 왜 이렇게 고행하듯이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인가? 남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은 나 자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이다. 어떻게 향상시키는가? 그것은 나라는 존재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태어나서 이제까지 나는 나로 살아 왔다. 이 모습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 성향이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온에 대하여 나라고 여겼을 때 불편한 점이 많았다. 욕망, 분노, 감정에 지배되는 경우가 많았다. 좋아도 내가 좋은 것이고 싫어도 내가 싫은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호불호와 쾌불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하고 좋아하고, 한번 싫으면 ‘죽도록’ 싫은 것이다. 이는 극단이다. 극단에 치우쳐 살았을 때 마음이 불편하고 괴롭다. 그런데 이런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를 죽여버리는 것이다.
 
나를 죽여버리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나를 죽여버릴 수 있을까? 부처님은 나를 죽일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설했다. 그것은 마치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이다. 이는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마법의 주문 정형구는 니까야 도처에서 발견된다. 그 만큼 중요한 말이기 때문이다.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부처님의 직설임을 증명하는 것이 된다.
 
마법의 주문을 오온에 적용하면 나를 죽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분노가 일어 났을 때 “분노는 내가 아니고, 분노는 나의 것이 아니고, 분노는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분노뿐만 아니라 52가지 마음부수 전체를 마법의 주문에 대입하면 나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죽이려면 마법의 주문을 외워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더욱 더 근본적으로 알아야 한다.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나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해체해서 보아야 한다.
 
군대 있을 때 일이다. 군대에서는 병사에게 M16소총을 지급한다. 총기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총을 잊어 버리면 큰 일 난다. 이런 총은 늘 가까이 해야 하고 때로 닦고 기름칠 해 주어야 한다.
 
M16은 분해하기 쉽다. 분해하는데 몇 초도 걸리지 않는다. 총이 여러 조각으로 분해 되었을 때 이를 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 자동차가 있다. 자동차 정비를 하기 위해서 바퀴를 떼어내고 심지어 엔진까지 떼어 내어서 마당에 깔아 놓았을 때 이를 자동차라고 할 수 있을까?
 
총은 분해 되었을 때 더 이상 총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동차 역시 분해 되었을 때 자동차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 역시 오온으로 분해 해 놓았을 때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의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해 해 놓으면 더 이상 나는 없다. 단지 정신과 물질만 있을 뿐이다.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이라는 다발로 분해 되었을 때 나는 없다. 있다면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나는 있을 것이다.
 
내가 수행을 하는 목적은 나를 죽이기 위한 것이다. 오온으로 분해해서 놓으면 나라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은 내가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빛과 같은 신비한 체험을 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나를 죽여버리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번 안거 입재법회 때 빤냐와로 대장로가 말한 것이 있다.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했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을 보고자 한다. 정신과 물질을 보면 나를 죽여 버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테라와다불교 재가안거 25일째이다. 스승 없이 수행하고 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스승은 경전이고 또한 논서이다. 특히 마하시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이 나의 진정한 스승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또 읽는다. 중요한 부분은 새겨 두고자 한다. 새겨 두고자 하는 내용을 구글번역기로 캡쳐하여 블로그에 올려 놓는다. 언제든지 열어 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 새벽 2시에 잠이 깼다. 잠이 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전이나 논서를 보는 것이 좋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열었다. 이런 내용이 마음에 사무쳤다.
 
 
업과 그 과보만 번갈아 가면서 생겨나고 있다. 업·행위를 행할 수 있는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과보를 경험할 수 있는 ‘나’라고 하는 것도 없다. 이렇게 보고 알고 이해하는 것을 ‘바르게 봄(sammadassana)’이라고 부르는 ‘조건파악의 지혜(paccayapariggaha ñāa)’라고 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67쪽)
 

 

 
업과 과보 이외에 달리 행위자가 없음을 말한다. 이 말은 청정도론에 실려 있는 게송에 근거한다. 이는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Vism.19.20)라는 게송을 말한다. 여기서 사실은 담마(法)를 말한다.
 
사람들은 나에 대하여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나는 누구인가?”라며 나를 찾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영원히 존재하는 나를 찾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라며 과거의 나에 대하여 의문하고, “나는 미래에 존재할까?”라며 미래에 대하여 의문한다.
 
사람들이 현재, 과거, 미래 삼세에 대하여 의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나에 대한 것이다. 내가 있다라는 가정하에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한다. 그래서 나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진짜 나가 있다는 것을 가정해서 떠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자동차를 분해하면 자동차라는 이름만 남아 있듯이, 우리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해하면 나라는 것은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대복주석서를 인용하여 “ 의심 열여섯 가지는 ‘자아’나 ‘나’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이에게만 생겨날 수 있다. ‘원인과 결과인 정신과 물질들만 계속해서 존재한다. 자아,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잘 알고 보고 이해하는 이에게는 그러한 의심은 생겨날 수 없다.”(2권, 148쪽)라고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나는 누구일까?’라며 삼세에 의문하는데 이는 사실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복주석서에서는 16가지 의문에 대하여  “토끼에게 뿔이 있을까 없을까? 토끼뿔은 어떠한 모습일까?”라는 등으로 의문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토끼에는 뿔이 없고 거북에는 털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누구일까? 나는 과거에 무엇이었을까? 나는 미래에 존재하는 것일까?’라는 식으로 의문하는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 나를 있는 것처럼 의문하는 것과 같다.
 
나의 대한 의문은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면 무너진다. 오로지 업과 업의 과보, 행위와 행위의 과보만 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관찰하여 아는 수행자는 새길 때마다 원인인 업과 결과인 과보만 경험하기 때문에 ‘과거의 여러 생들에서도 이와 같이 결과인 과보와 원인인 업만 생겨났을 것이다. 다음의 여러 생들에서도 이렇게 결과인 과보와 원인인 업만 생겨날 것이다. 업과 과보만 존재한다. 업을 행 하는 중생= 나라는 것은 없다. 결과를 경험하는 중생= 나라는 것도 없다'라고 숙고하여 결정할 수 있게 되어 앞에서 설명한 대로 의심 열여섯 가지를 제거하고 넘어선다.”(2권, 162쪽)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는데 책에서 본 것이 나왔다. 꿈을 꿀 때는 생생했으나 잠에서 깨자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만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만 생각났다. 나의 소유라고 여겼던 것이 나라는 것이 없다고 여겨졌을 때 소유가 사라진 것 같아 아쉬워 하는 꿈을 꾼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간사한 것 같다. 나가 없다는 것을 굳게 믿는 자도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서는 내것으로 여기는 것 같다. 꿈에서도 그랬다. 꿈에서 나는 없다고 여겼는데 집과 같은 소유물에 대한 애착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오늘 재가안거 25일차이다. 한시간 좌선으로 복귀했다. 대체로 성공적으로 좌선을 마쳤다. 믿을 것은 호흡밖에 없는 것 같다. 호흡을 놓치면 이 몸과 마음은 번뇌의 놀이터가 되는 것 같다. 이럴 때 마음을 복부의 움직임으로 가져 가면 사라진다. 심지어 통증도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호흡이 피난처임을 알 수 있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 마음을 어디다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기 때문에 늘 알아차리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어 팔을 무심히 뻗는 것도 알아차려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따르면, 어느 스님이 무심코 팔을 뻗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스님은 다시 한번 팔을 뻗었다. 이번에는 새김하며 뻗은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한동작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수행한다고 하여 행선이나 좌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행, 주, 좌, 와 하는 것도 수행이 되어야 한다. 행위를 할 때 마다 새겨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무엇이든지 천천히 신중하게 하는 수밖에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정신법과 물질법을 알자는 것이다.
 
의도가 있어서 행위하고, 의도와 행위를 모두 새기는 것이 수행이다. 이렇게 알고 볼 때 나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업과 업의 과보만 존재한다. 업 윤전과 과보 윤전만 존재한다. 업의 흐름과 과보의 흐름만 존재한다. 업의 상속과 과보의 상속만 존재한다. 행위와 행위의 과보만 존재한다.”(2권, 163쪽)라고 알고 보는 것이다. 이렇게 알고 보았을 때 나를 죽여버릴 수 있다.
 
 
2023-08-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