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이론만 아는 수행거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재가안거 23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22. 11:29

이론만 아는 수행거지가 되지 않기 위하여, 재가안거 23일차

 

 

이론만 하는 수행거지, 이 말이 비수처럼 마음에 꼽힌다. 수행거지라는 말에 마음이 걸린다.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내가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나는 예전에 수행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본래 이쪽 계통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 길로 들어 오게 되었다.

 

직장생활하다 퇴출되어서 더 이상 직장을 잡지 못했을 때 홀로서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무한정 남았다.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았을 때 시간부자가 되었다. 시간을 주체하지 못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것이나 한편 글을 쓰면 시간이 잘 갔다. 2006년부터 글을 썼으니 이런 세월 산 것이 17년되었다.

 

주로 불교에 대한 글을 썼다. 그래서 스스로 불교블로거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불교에 대하여 알고자 썼다. 불교가 어떤 것인지, 부처님이 어떤 말씀하셨는지 궁금해서 썼다.

 

글을 쓰다 보니 자연스럽게 수행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수행기를 읽어 보면 다른 세상 사람들 같았다.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수행에 대한 꿈은 가졌다.

 

생업과 수행을 동시에 하기가 쉽지 않다. 집중수행하려면 10일정도는 시간 내어야 하는데 직장인들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은퇴나 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자영업자는 가능할지 모른다.

 

자영업자는 자리를 지켜야 한다. 언제 전화가 걸려올지 모른다. 대응을 빨리 해야 한다. 최대한 빨리 납기를 지켜야 한다. 이런 면으로 본다면 직장다니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

 

어떤 이들은 생업을 가지지 않고 수행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미얀마 등 남방불교국가에 가서 몇 달씩 머문다. 수행은 이런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알았다.

 

나이는 점점 먹어 갔다. 이에 비례하여 글은 점점 쌓여 갔다. 머리 속에 아는 것은 많아졌다. 이론적으로는 많이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행은 하지 못했다. 고작 집중수행 세 번 가졌을 뿐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이론만 아는 수행거지라고 말할 수 있다.

 

수행거지가 있다면 이론거지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수행만 하는 이론거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언어도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요즘 거리에서 정치현수막을 볼 수 있다. 총선이 멀지 않은 것이다. 지역에서 국회의원 한번 해보고자 하는 사람은 비수와도 같은 현수막을 내 건다. 상대당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리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언어폭력이다.

 

언어폭력이란 무엇인가? 하고 싶은 말만 할 때 언어폭력이 된다. 다른 것은 배제해 버리고 상대방의 가장 치명적 약점을 건드리면 언어폭력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 수행만 하는 이론거지라고 비난했을 때 언어폭력이 되는 것은 자명하다.

 

여기 수행승과 교학승이 있다. 두 수행승은 서로가 서로를 비난했다. 수행승은 교학승에게 들뜨고 오만하고 동요하고 수다스럽고 쓸데없이 지껄이고 새김을 잃고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이 혼란되고 감관은 거칠다.”(A6.46)라며 헐뜯었다. 이에 교학승은 발끈하며 이들은 도대체 무슨 선정에 든단 말인가도대체 어떻게 선정에 든단 말인가?”(A6.46)라며 비난했다.

 

누군가 이론만 아는 수행거지라며 비난한다면 오만한 수행승이 되기 쉽다. 누군가 수행만 하는 이론거지라고 역시 비난한다면 교만한 교학승이 되기 쉽다. 서로 언어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로가 서로를 칭찬해 주어야 한다. 내가 잘한 것이 있으면 약한 것도 있다. 상대방이 잘한 것이 있으면 약한 것도 있다. 단점은 비난하지 말고 장점은 칭찬해 주어야 한다.

 

수행승은 교학승이 가지지 못하는 수행경험이 있다. 교학승은 수행승이 가지지 못하는 교학적 지식이 있다. 이런 것은 장점이다. 그래서 수행승은 교학승에 대하여 벗들이여세상에 이러한 심오한 의취를 지혜로 꿰뚫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A6.46)”라며 칭찬하라고 했다. 또한 교학승은 수행승에게 벗들이여세상에 이러한 불사의 세계를 몸으로 접촉하고 있는 놀라운 사람들을 세상에서 만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A6.46)라며 칭찬하라고 했다.

 

수행승과 교학승은 각각 장점도 있고 약점도 있다. 약점을 말한다면 언어폭력이 된다. 그러나 장점을 말한다면 공덕이 된다.

 

수행승은 몸으로 심오한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다. 이런 체험은 존중해 주어야 한다. 교학승은 심오한 지혜가 있다. 이런 점 역시 존중해 주어야 한다. 교학만 있고 수행이 없는 자에 대하여 수행거지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폭력이다. 반대로 수행만 있고 교학이 없는 자에 대하여 이론거지라고 말하는 것 역시 언어폭력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23일째이다. 오늘 아침 일찍 일터에 나왔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터에 나오니 아침 610분이 되었다. 미화원과 내가 가장 일찍 나온 것이다.

 

 

먼저 아침을 먹었다. 집에서 삶아 온 계란 두 개와 어제 사다 놓은 샌드위치 두 조각을 먹었다. 영양을 생각해서 치즈 한조각도 넣었다. 꿀물도 타 먹었다.

 

아무리 바빠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식물에 물을 주는 것이다. 요즘처럼 더운 날에는 일주일에 한번 물을 주어야 한다. 먼저 난에 물을 준다. 동이에 물을 담고 그 안에 담구어 놓는다. 난의 생장을 위해서 비료 알을 몇 개 넣는 것을 잊지 않는다. 6개는 점심 이후까지 최소 7시간 이상 담구어 놓는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앉아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컨디션이 좋지 않다. 열대야이기 때문일까 수면의 질이 좋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어제부터 시행한 것이 있다. 그것은 30분 앉아 있기를 말한다. 한시간 앉아 있다 보니 초보수행자에게는 너무 긴 시간이다. 이를 30분씩 쪼개서 두 번 앉으니 매우 효율적이다.

 

오늘 좌선은 실패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것은 마음이 번뇌로 들끓었기 때문이다. 어제 본 글에 자극 받은 것도 있다. 그리고 새벽에 책을 본 것도 있다. 새벽에 논서를 본 것이다.

 

좌선할 때는 어떤 책도 보지 않는 것이 좋다. 잠에서 깨었을 때 그 마음을 고스란히 좌선으로 가져 오는 것이다. 가능하면 언어적 행위를 삼가야 한다.

 

좌선시간 30분은 긴 시간이 아니다. 조금 앉아 있다 보면 10-20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남은 시간은 10-20분이다. 이 짧은 시간에 성과를 내야 한다. 자연히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컨디션이 엉망일 때는 앉아 있기도 힘들다. 전반 30분 좌선이 그랬다.

 

더 이상 소음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냉장고 전원도 차단하지 않았다. 앉아 있다 보니 냉장고 소리에 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났다. 여기에다 오전 9시가 되자 냉방이 가동되는 소리가 더해졌다. 건물 전체에서 나는 기계음은 너무 적어서 들리지도 않았다.

 

사무실 명상홀에 앉아 있으니 소음사중주가 되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사람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노래소리가 난다면 어떻게 될까?

 

2019년 미얀마 선원에 있었을 때이다. 그때 새벽에 명상홀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노래소리가 났다. 아마 토요일이라 마을에서 마을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틀었을 것이다. 노래소리는 한시간 이상 계속 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혀 집중을 하지 못했다.

 

명상을 하려면 소음마저 초월해야 한다. 어느 정도일까? 상대방이 말을 할 때 그 음성에만 마음을 둔다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래소리가 났을 때 단지 소리를 물질로 본다면 노래소리는 빠라맛타(궁극적 실재)’가 될 것이다.

 

수행초보자이다. 나는 수행거지나 다름없다. 수행초보자는 소리에 민감하다. 그럼에도 소리와 함께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리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더욱더 복부의 움직임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 그리고 닿음을 관찰하고자 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번뇌에 휩싸여 있고 또한 졸음이 와서 지탱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30분을 버텼다.

 

전반부 30분 좌선이 끝났다. 너무 피곤해서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마치 책상이 밥상이 되기도 하듯이, 명상공간이 누워 있는 방이 되었다.

 

40분 누워 있었다. 이럴 때 약간 잠이 들면 최상의 조건이 된다. 마치 전자제품이 리셋(Reset)되듯이 몸도 마음도 상쾌해 진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후반 30분 좌선을 했다. 몸과 마음이 충전되어서일까 전반 30분 보다 훨씬 나았다. 이렇게 본다면 명상은 그날의 컨디션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명상중에 생각을 할 수 있다. 이는 생각이 치고 들어 오는 것과는 다르다. 명상중에 생각은 성찰이 될 수 있고 반조가 될 수 있다. 이런 것도 사띠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띠라 하여 반드시 마음챙기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사띠라 하여 반드시 마음지키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새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사띠가 된다.

 

바로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되고 오래 된 것을 기억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명상중에 반조가 일어나는 것도 당연히 사띠에 해당된다.

 

사띠를 새김이라고 번역한다. 한국빠일리성전협회 번역어이다.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 보다 훨씬 더 실용적이다. 그것은 정신법과 물질법을 관찰하는데 있어서 새긴다라고 하는데 이것보다 더 좋은 용어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하였다.

 

두 번째 좌선에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고자 했다. 여기에 엉덩이 닿음까지 추가했다. 소음 사중주가 나고 있기는 하지만 배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덜 마음이 간다.

 

위빠사나 수행은 가장 강한 대상을 찾아 간다. 좌선을 하면 복부가 대상이 된다. 통증이 시작되면 통증이 대상이 된다. 큰 소리가 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큰 소리가 대상이 된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주관찰대상은 복부이다. 그러나 복부의 움직임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이럴 때 외부 대상에 마음이 가기 쉽다. 소음이 난다면 소음에 마음이 가 있는 것이다. 이럴 때 빛에 대한 지각이 효과적일 것이다.

 

좌선 중에 졸릴 때가 있다. 또한 외부대상에 마음이 가 있을 때가 있다. 마음이 해이해져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빛에 대한 지각을 갖추어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려 해태와 혼침으로부터 마음을 정화합니다.”(D2.65)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명상 중에 해태와 혼침이 왔을 때는 광명상(光明想; ālokasaññā)’을 취하라고 했다. 이와 같은 광명상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밤이나 낮이나 빛을 지각할 수 있기 위하여 장애가 없는 청정한 지각을 갖춘다.”(Smv.211)라고 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빛을 보는 것에 대하여 하나의 경계로 보고 있다. 광명에 대하여 수행장애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을 더 잘하게 하기 위해서 광명상은 필요로 된다. 수행자가 나태해지고 졸리 울 때 빛에 대한 지각을 가지면 새로운 기분이 된다는 것이다.

 

수행자가 졸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럴 때 부처님은 혼침에 빠뜨리는 그러한 지각에 정신활동을 기울이지 말고 그러한 지각을 익히지 말라.”(A7.61)라고 했다그리고 혼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곱 가지 방법을 알려 주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듣고 배운 대로 가르침을 마음으로 사유하고 숙고하고 정신으로 탐구하여야 한다.

2) 듣고 배운 대로 가르침을 상세히 암송해야 한다.

3) 양쪽 귀를 잡아당기고 손으로 신체를 마찰해야 한다.

4)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양쪽 눈을 씻고 사방을 쳐다보고별자리와 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

5) 빛에 대한 지각활동을 기울이고대낮에 대한 지각을 확립해야 한다.

6) 앞과 뒤를 지각하면서 감관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정신을 밖으로 흩어지게 하지 않고 경행한다.

7)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자가 누운 형상을 취해야 한다.”(A7.61)

 

 

몸이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졸릴 수 있다. 수행에 장애가 발생했을 때 일곱 가지 방법을 사용하면 좋을 것이다. 그런데 다섯 번째를 보면 빛에 대한 지각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잘 집중이 되지 않을 때 광명상을 취하는 것이다. 그러면 깨어 있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오늘 좌선은 성과가 좋지 않았다. 특히 첫 번째 30분 좌선이 그랬다. 집중이 되지 않은 것이다. 그저 앉아만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럴 때는 광명상을 취하라고 했다. 빛에 대한 지각을 했을 때 깨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혼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일곱 가지 방법이 있다. 이렇게 해도 안되고 저렇게 해도 안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후의 방법은 일곱 번째에 있다. 그것은 잠을 자는 것이다.

 

잠이야말로 확실하게 해태와 혼침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좌선 중에 잠시 누워 있는 것은 일곱 번째 항목에 해당된다. 그래서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이며 사자가 누운 형상을 취해야 한다.”(A7.61)라고 했다.

 

오늘 좌선을 30분씩 두 번 했다. 첫 번째 좌선을 했을 때 집중이 되지 않아 빛에 대한 지각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수행초보자라서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어쩌다 눈앞이 밝아질 때가 있는데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눈 앞에서는 빛을 지각하면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어쩌면 광명상을 취하게 될지 모른다.

 

첫 번째 좌선 후에 드러누웠다. 이렇게 눕는 행위가 잘못된 것은 아님을 알았다, 이는 혼침을 벗어날 수 있는 일곱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최후의 방법이다. 잠이야말로 보약임을 알 수 있다.

 

오늘 재가안거 23일차이다. 오늘도 장문의 수행후기를 작성했다. 수행하는 시간보다 배 이상 긴 시간이다. 이런 나는 아직도 교학을 즐기는 교학승과 같다. 수생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아마도 이론만 아는 수행거지라고 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장점과 단점이 있다. 내가 잘 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못하는 것도 있다. 반대로 내가 못하는 것을 상대방이 잘하는 것도 있다. 그런데 장점을 가진 자가 단점을 가진 자를 비난하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언어폭력에 해당될 것이다.

 

수행자라면 상대방의 장점은 칭찬해 주어야 한다. 교학에 밝은 사람이 있다면 그 성과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반대로 수행에 밝은 사람이 있다면 그 수행성과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자애의 마음이다.

 

 

글을 쓴지 오래 되었다. 교학을 공부한지도 오래 되었다. 청정도론은 오래 봐서 그런지 너덜너덜 해졌다. 요즘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신주단지 모시듯이 보고 있다. 이런 나는 이론만 아는 수행거지나 다름 없다.

 

 

이론도 알고 수행도 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내가 늦은 나이에 수행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이런 노력에 대하여 어떤 스님은 페이스북에서 훌륭하고 훌륭하십니다. 저 보다도 백배는 수행자의 삶을 실천하시네요. 이론까지 겸비한 삼장법사는 아니더라도 그게 비견할 만한 바람직한 불자의 롤모델입니다. 수희찬탄드립니다.”라며 칭찬해 주었다.

 

 

2023-08-2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