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갑자기 머리가 환해졌는데, 재가안거 26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25. 10:36

갑자기 머리가 환해졌는데, 재가안거 26일차
 
 
갑자기 머리가 환해졌다.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 마치 세렝케티 평원에서 치타가 폭발적 스피드로 낚아챈 먹이를 놓치지 않듯이, 환힌 빛을 붙잡고 싶었다.
 
감은 눈에 갑자기 환해 졌을 때 약간 흥분했다. “혹시 나에게도 니밋따가 뜬 것 아닐까?”라는 기대감을 말한다. 감은 눈에 마치 전등을 켠 것처럼 밝아졌을 때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계속 새기면서 눈으로는 환함을 지각하는 것이다.
 

 
오늘은 재가안거 26일차이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터에 일찍 나왔다. 도착하니 7시 이전이었다. 7시에 아침식사를 했다. 준비 해 온 계란 찐 것 두 개와 토스트 두 쪽이다. 치즈 한 장도 곁들였다.
 
좌선은 7시 반부터 하기로 했다. 좌선 전에 행선을 했다. 시간 적으로 30분 여유가 있었다. 행선할 때는 6단계행선 뿐만 아니라 서 있을 때 바디스캔도 함께 했다.
 
행선은 행(行)과 주(住)에 대한 것이다. 행선이라 하여 워킹메디테이션(Walking Meditation)이라 하는데 이를 보수행, 걷는 수행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행선은 걷는 것 못지 않게 멈추는 수행도 있다. 그것은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서 멈추어 서 있을 때를 말한다.
 
멈추었을 때 가만 있으면 안된다. 마음은 늘 대상을 찾아 가기 때문에 마음을 단속해야 한다. 마음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또한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포인트, 포인트마다 느낌을 관찰해야 한다. 즉, 머리, 이마, 눈, 코, 입, 가슴, 윗배, 배꼽, 아랫배, 엉덩이, 허벅지, 무릎, 장딴지, 발목, 발바닥 순으로 마음을 두는 것이다.
 
마음은 어디엔가 두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어디엔가 가 있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과 거리가 먼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항상 자신을 새기고 있어야 한다. 팔을 뻗을 때도 뻗음을 새겨야 한다. 발을 내밀 때도 내미는 것을 새겨야 한다.
 
일상에서 모든 행위를 새겨야 한다. 더 나아가 마음도 새겨야 한다. 욕망의 마음이 일어났으면 욕망의 마음이 일어났다고 새겨야 하고,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으면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다고 새겨야 한다.
 
재가안거를 시작하면서 변화가 하나 있다. 그것은 일상에서 자신의 행위를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아직도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위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럼에도 나중에라도 알아차린다. 이후부터는 새기고자 노력한다.
 
행선을 하는 것은 법을 보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은 근본법이다. 이를 빠라맛타담마라고 한다. 구경법 또는 궁극적 실재를 말한다.
 
구경법은 개념이 아니다. 구경법은 언어적으로 형성된 개념이 아닌 실재하는 법이다. 그런 구경법은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것을 보고서 무상, 고, 무아를 보자는 것이다. 이렇게 구경법에서 무상, 고, 무아를 보면 그 어떤 것도 집착할 것이 없게 된다. 실재하지도 않은 것을 집착했을 때 허깨비를 붙들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분노가 치밀 때가 있다. 이는 분노라는 개념에 휘둘렸기 때문이다. 분노는 분노 그 자체로 일어났다고 사라진 것이다. 옛날에 일어났던 일이다. 그 옛날 기억을 소환하여 분노했을 때 개념에 지배당한 것이 된다.
 
행선이 끝나고 자리에 앉았다. 좌복을 다시 두툼한 것을 채택했다. 며칠 전에는 얇은 방석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평좌한 다리에 무리가 왔다. 앉은지 이삼십분만 지나면 다리가 저리는 것이었다. 이에 두께가 10센티 되는 방석 위에 자리 잡았다. 그 위에 두께 3센티 되는 방석 세 개를 겹쳐서 깔았다. 이렇게 자리 잡으니 이전 보다 훨씬 안정되었다.
 
타이머를 한시간으로 세팅해 부었다. 좌선 시작과 동시에 시작버튼을 눌렀다. 제로를 향하여 카운트 될 것이다. 가능하면 꼼짝하지 않고 한시간 보내고자 했다.
 
좌선은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을 때 해태와 혼침으로 시달린다. 오늘이 그랬다. 새벽 1시에 깨었을 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었다.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에 대한 것이다.
 
논서를 읽고 난 다음에 잠을 청했다. 그러나 잠은 잠이 와야 잠을 자는 것이다.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러다 보니 꿈만 꾸게 되었다. 꿈은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꿈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다. 아름답지 못한 꿈이 있는가 하면 아름다운 꿈도 있다.
 
좌선은 확실히 잠과 관련이 있다. 숙면을 취했을 때 집중이 잘 되는 것은 당연하다. 몸이 아프거나 병이 있을 때 앉아 있을 수 없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은 젊었을 때 해야 한다.
 
왜 젊었을 때 수행 해야 하는가? 빤냐와로 대장로에 따르면 수행을 젊었을 때 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점차 낮아진다. 예를 들어 나이가 20대 때 수행하면 아라한이 될 수 있고, 30대 때 수행하면 아나함이, 40대 때 수행하면 사다함이, 50대 때 수행하면 수다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60대 때 수행하면 무엇이 될까?
 
젊었을 때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수행은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수행은 건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한살이라도 젊을 때 수행을 해야 한다.
 
한시간 좌선을 다 채웠다. 억지로 채운 것이다. 잠을 잘 못 자서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좌선을 포기할 수 없다. 이번 안거기간 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앉아 있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좌선 도중에 자세를 바꾸었다. 도중에 그만 두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는 방법은 기분을 전환해주는 것밖에 없다. 평좌한 오른쪽 다리를 안으로 넣었다. 다시 좌선모드에 들어갔다.
 
오늘 좌선은 버티기가 된 것 같았다. 극기훈련과 같은 것이다. 해태와 혼침으로 인하여 번뇌망상이 기승을 부렸다. 한번 망상의 집을 짓고 나면 맥이 빠졌다. 다시 본래 대상으로 돌아 갔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귀중한 시간이다. 한시간 좌선을 버티기 또는 극기훈련으로 보낸다고 생각하니 아까웠다. 스마트폰을 보니 10분 남았다. 남은 10분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좌선 한시간에서 10분은 6분의 1에 해당된다. 마치 인생 60년에서 10년 남은 것 같다. 남은 생명이 10년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어떤 마음이 들까? 10년 후에 죽음이 온다고 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아마 10년을 최대한 보람 있게 보내고자 할 것이다.
 
나에게 남아 있는 삶이 10년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아마 이루지 못한 일을 이루고자 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 기간 동안 최대한 즐기는 삶을 살고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한부 인생이라면 즐기는 삶은 살 수 없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즐기는 삶을 산다. 즐기는 삶을 사는 이유는 자신이 천년만년 살 것 같은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과연 즐기는 삶을 살까? 아마 대단히 진지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좌선시간이 10분 남았다. 마치 인생에서 10년 남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10분 후면 종이 울릴 것이다. 이제까지 50분을 혼침 속에서 망상 속에서 보냈다면 남은 10분만큼이라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본래 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복부의 움직임에 집중하자 해태와 혼침은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지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이럴 때 갑자기 머리가 환해졌다. 전등이 켜지는 것 같았다. 이럴 때 “아, 내게도 니밋따가 뜨는 것이 아닐까?”라며 기대하게 되었다.
 
머리가 환해졌을 때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감은 눈으로는 환함을 지각하면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다. 그러나 더 이상 밝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두워졌다. 왜 그럴까? 눈을 떠서 창을 보니 그것은 햇볕 때문이었다.
 
사무실에서 좌선할 때는 불을 꺼 놓는다. 창으로 비치는 자연채광에 의존한다. 그러다 보니 명상공간은 약간 어두침침하다. 그런다 갑자기 머리가 환해 졌을 때 이는 니밋따징조가 아니었다. 단지 구름에 가려진 태양이 나올 때였다.
 
좌선을 하면서 반조를 한다. 이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치고 들어오는 생각과 다른 것이다. 주로 경전에서 읽었던 것이나 논서에서 읽었던 것이 떠오른다. 어제 유튜브에서 보았던 어느 테라와다 스님의 법문이 떠 올랐다.
 
유튜브에서 종종 테라와다불교 법문을 듣는다. 우리나라 스님들 중에서도 훌륭한 스님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조회수가 너무 낮다.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것은 수천, 수만번의 조회가 있지만 진리에 대한 것은 몇 십 회가 고작이다.
 
이번에 발견한 영상은 ‘망갈라 위하라’이다. 충남 공주에 위치해 있는 사마타-위빠사나 수행센터이다. 파옥계열의 수행센터라고 볼 수 있다. 지도법사는 삿담사라 스님이다. 이번에 본 영상은 ‘제5회 사마타 위빳사나 명상법회 – 팔정도, 바른견해4(중도)’ (https://youtu.be/aAu6iSLr4WM?si=z0kiFhJrgK6_iMY2)에 대한 것이다.
 
법문은 매우 훌륭하다. 그러나 17시간이 지난 현재 조회수는 고작 38회에 지나지 않는다. 법문을 듣다 보면 귀에 쏙쏙 들어 온다. 특히 초반에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한 정의를 해놓았는데 새기고자 글을 남긴다.
 
삿담마사라 스님에 따르면 사마타 수행에 대하여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수행”이라고 했다. 대상과 마음이 붙어 버렸을 때 대상에 몰입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위빠사나 수행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위빳사나 수행은 견해를 청정하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있는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것들의 원인과 조건을 알고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과 개별적인 특성을 우리가 아는 것 이것이 위빳사나 수행입니다.”라고 말했다.
 
삿담마사라 스님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 내려 주었다. 특히 위빠사나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을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라고 했고, 또한 원인과 조건을 알고 그것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특성과 개별적인 특성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위빠사나 수행은 한마디로 정신과 물질을 알고, 정신과 물질을 파악하는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번 한국테라와다불교 안거법문에서 빤냐와로 마하테로가 강조한 것이 있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알고, 정신과 물질을 파악하라고 했다. 이런 말은 다른 불교 전통에서는 들어볼 수 없다.
 
한국불교의 선종에서 정신과 물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본적이 없다. 오로지 마음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런데 같은 마하시계열이라 하더라도 쉐우민센터에서는 정신과 물질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선불교처럼 오로지 마음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정신과 물질을 파악해야 할까?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열반이다. 열반 체험을 해야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된다. 그래서 사향사과와 열반을 아홉 가지 출세간법이라고 한다. 이는 다름 아닌 정법의 조건이 된다.
 
정법이란 무엇인가? 율장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다. 율장 부기에 따르면 “Smp.225에 따르면, 정법에는 세 가지가 있다. 1) 교법상의 정법(pariyattisaddhamma): 삼장의 모든 부처님 말씀, 2) 행도상의 정법(paipattisaddhamma): 열세 가지 두타행, 열네 가지 의무, 여든 두 가지 대의무, 계행-삼매-통찰, 3) 증득상의 정법(adhigamanasaddhamma): 네 가지 고귀한 길(四向)과 네 가지 경지(四果)와 열반을 뜻한다.”(율장 부기 7장)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정법시대인가? 정법시대에는 세 가지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빠알리삼장이 전승되어 왔고, 팔정도 수행이 있고, 팔정도 수행으로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다면 정법시대인 것이다.
 
정법시대에서는 반드시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해야 한다. 그런데 사향사과의 성자가 출현하려면 반드시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무엇인가? 이에 대하여 삿담마사라 스님은 “정신과 물질의 완전한 소멸이 닙바나입니다.”라고 말했다.
 
열반은 정신과 물질의 완전한 소멸이라고 했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수타니파타에서 학인 아지따가 “존자여, 지혜, 새김과 더불어 명색(정신-신체적 과정)은 어떠한 경우에 소멸하는 것입니까?”(Stn.1036)라며 물어 본다. 이는 열반에 대한 질문이다. 이에 부처님은 “그대에게 명색(정신-신체적 과정)이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의식이 없어짐으로써, 그때에 그것이 소멸합니다.”(Stn.1037)라고 답했다.
 
명색은 정신-신체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이는 정신-물질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지혜와 새김은 나마(정신)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명색이 소멸될 때 지혜와 새김도 소멸된다. 그런데 부처님은 의식도 소멸된다고 했다. 이에 대한 각주의 설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상윳따니까야 ‘도시의 경’(S12.65)과 ‘갈대 묶음의 경’(S12.67)에서 알 수 있다.
 
도시의 경’과 ‘갈대 묶음의 경’에 따르면, 식과 명색은 상호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두 갈대 묶음이 서로 의존하여 서 있는 것처럼 벗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명색을 의존하여 의식이 생겨나고, 의식을 의존하여 명색이 생겨난다.”(S12.67)라고 했다.
 
열반 상태가 되면 명색도 사라지고 의식도 사라진다. 이는 명색과 의식은 서로 ‘명색연식(名色緣識)’이고 ‘식연명색(識緣名色)’이기 때문에, 명색이 사라지면 의식도 사라지고 의식이 사라지면 명색도 사라지게 된다. 이에 대하여 삿담마사라 스님은 “정신과 물질의 완전한 소멸이 닙바나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 테라와다불교 안거법회 때 빤냐와로 마하테로의 법문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안거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정신과 물질을 보라고 했는데 여기에는 심오한 뜻이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열반과도 관련이 있다. 정신과 물질의 완전한 소멸이 열반이기 때문이다.
 
 
2023-08-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