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오늘도 통증과 맞짱 떴는데, 재가안거 31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30. 11:02

오늘도 통증과 맞짱 떴는데, 재가안거 31일차

 

 

통증이 쓰나미처럼 밀려 온다. 1파가 오고 나면 2파가 밀려 온다. 통증의 쓰나미가 끊임없이 밀려 온다. 다리는 마비된 듯 하다. 허벅지의 근육이 딴딴해져서 터지기 일보직전이다. 그럼에도 항복하지 않았다.

 

재가안거 31일째이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다. 수면의 질이 좋지 않은 것이 크다. 요즘 열대야는 없다. 잘 때 선선해서 계절이 바뀐 듯 하다. 그럼에도 잠에서 일찍 깬다.

 

새벽 4시 반에 깼을 때 더 자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된다. 조금 더 자면 컨디션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비몽사몽간의 잠은 수면의 질이 좋지 않다. 차라리 깨어 있는 것이 낫다.

 

새벽에 집에서 출발했다. 아파트 현관문을 나섰을 때가 558분이었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는 6시로 본다. 6시 이전에 집을 나섰으므로 새벽에 집을 나선 것이다.

 

 

새벽에 일터로 향하면 기분이 상쾌하다. 남들 자는 시간에 일어나서 하루일과를 시작한다는 것이 통쾌하기도 하다. 그런데 이 시간에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고 일터에 가는 사람들도 많다는 것이다. 안양천에서 볼 수 있다.

 

일터에 도착했다. 오늘은 컨디션이 좋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런 상태로 좌선을 하면 5분도 앉아 있기 힘들 것 같았다. 최악의 컨디션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잠시 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의자에 앉아서 잠시 졸았다. 불과 1분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럼에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다. 잠시 무의식의 바다에서 있는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오늘도 앉아야 한다. 오늘도 한시간 달려야 한다. 재가안거하는데 있어서 쉼은 없다. 주말에도 달려야 한다. 재가안거에 주말도 없는 것이다. 재가안거는 끝날 때까지 월화수목금금금이 되는 것이다.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암송도 생략하고 행선도 생략했다. 다짜고짜 앉고 보는 것이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앉아서 한시간 보내면 오늘 해야 할 일을 다하는 것이다.

 

그냥 눈감고 앉아 있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앉아 있고자 했다. 그러나 생각은 가만 있지 않았다.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생각이 난 것이다. 이런 생각을 그냥 지켜 보았다.

 

별스런 것이 다 생각났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 생각났다가 사라졌다. 눈을 감고 이런 상황이라면 눈을 뜬 상황이라면 어떨까? 아마 눈의 대상에 마음이 가 있을 것이다. 그 대상과 관련 있는 경험이 있다면 과보로 나타날 것이다.

 

명상중에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봐야 한다. 그러나 볼 힘이 별로 없다. 소음도 한 몫 한다. 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 냉장고 모터 돌아 가는 소리, 건물 전체에서 나는 기계음이 난다. 소음 사중주가 크게 들린다.

 

가만 앉아서 반시간 보낸 것 같았다. 이래서는 안된다. 다시 배의 호흡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여의치 않다. 이때 다리 통증이 시작되었다. 마치 친구보듯이 반가웠다.

 

요즘 좌선 할 때 가장 반가운 손님은 통증이다. 다리통증이 없다면 좌선하는 맛이 나지 않을 것 같다. 이제 통증은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것이다.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처음에는 잔잔하게 나타났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졌다. 마침내 통증이 쓰나미처럼 밀려 왔다. 마치 백만대군이 밀려 오는 것 같다.

 

통증이 쓰나미처럼 밀려 올 때 집어 삼킬 듯 하다. 통증이 백만대군처럼 밀려 올 때 항복하라는 것 같다. 그러나 항복하지 않았다. 통증과 맞짱 떴다. 이제 통증은 두려운 것이 아니다. 통증은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이다.

 

안거를 시작했을 때 가장 두려운 것은 통증이었다. 좌선을 시작한지 이삼십분이 지나면 어김없이 오른쪽 다리가 저렸는데 그때 마다 항복했었다. 다리를 풀어 버리거나 자세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최근 삼일 동안 자세 한번 바꾸지 않았다. 통증과 한판 붙어 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통증과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통증이 두렵지 않은 것은 통증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집어 삼킬듯이 압도하지만 두렵지 않은 것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보았기 때문이다. 분리해서 보니 통증에는 실체가 없었던 것이다.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었던 것이다.

 

통증은 단지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뿐이다. 통증의 파도가 몰아 쳤을 때 육체라는 물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본 것이다. 정신은 단지 지켜만 보면 된다.

 

통증이 일어났을 때 대하는 태도가 있다. 그것은 통증따로, 마음따로라는 것이다. 통증이 마음에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통증은 통증이고 마음은 마음인 것이다.

 

상윳따니까야 나꿀라삐따의 경에 병을 대하는 태도가 있다. 나꿀라삐따가 중병에 걸려서 신음하고 있을 때 사리뿟따 존자는 그대는 이와 같이 나의 몸은 괴로워하여도 나의 마음은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배워야 합니다.”(S22.1)라고 말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통증따로, 마음따로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몸이 아프면 괴롭다. 가시가 손톱에 찔려도 아이고 아파 죽겠네!”라고 말한다. 아픈 것도 모자라서 죽도록 아프다는 것이다. 이는 육체적 괴로움이 정신적 괴로움으로 전이 된 것이다.

 

범부들은 통증을 참지 못한다. 통증을 자아와 동일시 해서 아파 죽겠네!”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들 같다.

 

몇 달 전 정형외과 병원에 있었다. 어느 환자는 연속해서 아프다고 신음하며 소리를 냈다. 나이가 팔십이 넘은 여자노인이다. 아마 골절상을 입은 것 같다. 환자용 침대에 누워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아프다고 하는 것이 가슴 아파 보였다.

 

아프면 신음을 낸다. 그런데 아프다고하여 아파죽겠네!”라고 하면 더 아프다. 육체적 아픔이 정신적 아픔으로까지 전이 되어 화살을 두 방 맞은 것이다. 계속 아프다고 말하면 수많은 화살을 맞을 것이다.

 

잘 배운 부처님 제자들은 육체적 괴로움을 정신적 괴로움으로까지 가져 가지 않았다. 육체적 괴로움은 육체적 괴로움으로 끝낸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돌조각을 맞았을 때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이 라자가하에 있을 때의 일이다. 그 때 부처님은 돌조각 때문에 발에 상처가 났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세존께서는 몸이 몹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을 심하게 느끼셨다.”(S1.38)라고 했다. 부처님도 육체적 아픔을 느꼈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도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픔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육체적 아픔에 한정된다. 육체적으로 아프고 무겁고 쑤시고 아리고 불쾌하고 언짢은 것이 정신적인 아픔으로까지 전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떻게 아픔을 견디어 냈을까?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며 마음을 가다듬어 상처받지 않으면서 참아내셨다.”(S1.38)

 

 

부처님은 육체적 고통을 새김과 알아차림으로 극복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새김과 알아차림은 사띠(sati)와 삼빠자나(sampajāna)를 말한다. 한자어로는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를 말한다.

 

새김이 확립되면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왜 그런가?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보기 때문이다. 정신과 물질이 하나인 것으로 본다면 육체적 괴로움은 마음의 괴로움이 될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하나인 것으로 본다면 아파도 내가 아픈 것이다.

 

부처님은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분리된 것으로 본 것이다. 이는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해서 본 것과 같다.

 

몸과 마음을 하나로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마 나가 있다고 볼 것이다. 몸이 아파도 내가 아픈 것이고, 화가 나도 내가 나는 것이다. 느낌이나 감정을 모두 내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범부들은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본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내것으로 보았을 때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은 나이고, 이것인 나의 자아이다.”라고 여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나의 것이라고 여겼을 때 아파 죽겠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호불호가 분명하다. 한번 좋으면 죽어라좋아하고, 한번 싫으면 죽도록싫어한다. 이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으로 보면 극단적으로 된다. 좋은 느낌이 일어나면 목숨을 건다. 좋은 느낌에 대하여 죽어도 좋아!”라며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아는 제자들은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대응한다. 오온으로 분해해서 대응하는 것이다.

 

오온에서 물질은 물질이고, 느낌은 느낌이고, 지각은 지각이고, 형성은 형성이고, 의식은 의식인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이 자신일 수 없고, 느낌이 자신일 수 없고, 지각이 자신일 수 없고, 형성이 자신일 수 없고, 의식이 자신일 수 없다. 오온에 나는 없는 것이다!

 

오온에는 나는 없다. 이는 마치 수레에 수레가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다네.”(S5.10)

 

 

게송에서는 뭇삶(衆生)에 대하여 거짓이름이라고 했다. 중생, 즉 자아라는 말은 거짓이름이라는 말이다. 이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명칭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다. 언어적 형성에 대한 것이므로 빤냣띠(개념)이라고 한다. 명칭은 빠라맛타(실재)가 아닌 것이다.

 

내가 아프다고 했을 때 나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기에다 더 붙여서 아파 죽겠다고 말한다. 좋아 죽겠다고 말하고 싫어 죽겠다고 말한다. 이렇게 내가 개입되면 육체적 괴로움이 정신적 괴로움으로 전이된다. 물질과 정신을 하나로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돌조각에 맞았을 때 괴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육체적 괴로움으로 끝났다. 새김을 확립하고 알아차림이 있었을 때 정신적 괴로움으로까지 전이 되지 않았다. 화살을 한방만 맞은 것이다. 좌선 중에 다리통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알람을 한시간 설정해 놓았다. 한시간이 다 되어 갈수록 통증이 기승을 부렸다. 마치 덥칠듯이, 집어삼킬듯이 통증이 다가왔다. 그러나 전혀 두렵지 않았다. 통증의 실체를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통증은 나의 것이 아니고, 통증은 내가 아니고, 통증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통증따로 마음따로가 된 것이다. 통증은 통증이고 마음은 마음인 것이다.

 

알람이 울렸다. 그러나 마치지 않았다. 더 달리고 싶었다. 통증과 함께 계속 달리고 싶었다. 어느 순간에 이르면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8분 더 달렸을 뿐이다.

 

좌선 초반부는 그냥 지켜만 보았다. 생각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본 것이다. 그러다가 통증이라는 손님을 맞았다. 반가운 손님이다. 마치 무기력한 삶에 활력을 불어 넣는 듯 했다. 마치 대양에서 폭풍우가 밀려 왔을 때 선장과 선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듯, 몸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사띠가 확립된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자 몸 상태가 달라졌다. 좌선 초기의 무기력한 몸상태가 아니다. 통증으로 인하여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수행일 것이다.

 

수행이란 무엇인가? 수행을 빠알리어로 바와나(bhāvanā)라고 한다. 바와나는 문자적으로 존재를 의미한다. 무언인가로 되는 상태를 말한다. 수행이라 하여 닦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로 되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 어떤 상태로 되어진다. 수행을 해서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 것도 어떤 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좌선을 해서 전후가 달랐다면 수행의 효과가 있는 것이다.

 

좌선하기 전과 후는 확실히 다르다. 완전히 다른 컨디션이 된 것이다. 무기력한 상태에서 활력이 넘치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수행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하는지 모른다. 수행은 닦는 것이라기 보다는 어떤 상태로 되는 것이 맞다고 본다.

 

 

2023-08-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