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더 달릴 수도 있었으나, 재가안거 32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8. 31. 11:53

더 달릴 수도 있었으나, 재가안거 32일차

 

 

오늘 1시간 23분 달렸다. 더 달릴 수도 있었으나 그만 두었다. 내일도 있고 모래도 있다. 이번 안거 끝날 때까지 앞으로 두 달 더 달려야 한다.

 

재가안거 32일째이다. 어제 한국불교의 안거가 끝났다. 음력으로 7월 보름에 하안거가 끝난 것이다. 또한 이날은 백중이기도 하다. 절에서는 이날 천도재를 하는 등 재를 지내기도 하는 날이다.

 

테라와다불교의 안거는 동아시아불교의 안거와 다르다. 고대인도의 전통을 따른다. 부처님 당시의 제도를 따르고자 한다. 테라와다불교에서의 안거는 우기에 시행된다.

 

테라와다 안거는 음력으로 6월 보름에 시작된다. 음력으로 6월은 부처님당시 우기가 시작되는 달이다. 이후 세 달 안거가 있는데 이는 우기가 세 달인 것과 같다.

 

인도의 날씨는 우리나라와 다르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인도에서는 건기, 혹서기, 우기 이렇게 세 개의 계절이 있다. 우기가 시작되면 비가 내리는 날이 많기 때문에 돌아다니기 힘들다. 길에 지렁이 등과 같은 생명체가 있어서 밟아 죽일 수도 있다. 이런 이유 등으로 안거가 시행되게 되었다.

 

 

 

안거를 하고 있다. 일터가 있는 사무실에서 재가안거를 하는 것이다. 매일 한시간 좌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오늘로서 32일째가 되었다. 안거가 끝날 때까지 앞으로 두 달 더 달려야 한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앉아 버릇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5분이라도 앉아 있는 버릇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사오년전 위빠사나를 지도한 김도이 선생은 매일 아침 최소한 30분은 앉아 있을 것을 말했다. 그러나 지키지 못했다.

 

한시간을 어떻게 앉아 있을까? 나에게 한시간은 무척 큰 시간이다. 하루일과를 8시간으로 보면 8분의 1에 해당되는 긴 시간이다. 이 시간이면 일을 해도 진도가 엄청나게 나간다. 글을 쓰면 하나가 나오는 시간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면 100키로를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한시간 동안 꼼짝 않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앉아 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늘 아침 기록을 세웠다.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소리가 났음에도 이를 무시했다. 1분이 지나자 알람은 자동으로 멈추었다. 이후부터는 덤이다. 여분의 시간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했다.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되었다.

 

오늘 한시간 좌선은 버티기로 일관했다. 극기훈련하듯이 목표로 하는 한시간을 채우고자 했다. 그것은 호흡이 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좌선을 시작할 때 배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마음은 망념에 지배 받는다.

 

호흡은 기둥과도 같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놓아야 마음이 달아나지 않는다. 호흡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새김의 줄이 느슨해진 것 같아서 마음은 망념의 놀이터가 된다.

 

호흡을 집과 같다. 집이 없다면 방랑자가 될 것이다. 목적도 없이 계획도 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떠돌아 다니는 나그네와 같다. 좌선한다고 앉아 있을 때 호흡을 잡지 못하면 마음은 방랑자가 되는 것과 같다.

 

호흡을 새겨야 한다. 한시간 내내 호흡새김이 약해서 마음은 망념의 놀이터가 되었다. 망념을 지켜 보는 것도 재미 있는 일이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일어나서 집을 지을 때 그 짧은 순간에 만리장성을 쌓는 것과 같다. 이때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면 망상의 집은 무너진다.

 

호흡 새김이 약하면 고문당하는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하다.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을 때 몸 이곳 저곳으로 분산되기 때문이다.

 

오늘 한시간 좌선에서는 통증은 없었다. 어제 좌선에서 통증은 극에 달했던 것과 대조적이다. 오죽 했으면 후기에서 통증과 맞짱뜬다고 제목을 달았을까? 그러나 오늘 좌선에서는 극심한 통증은 찾아 오지 않았다. 어제 보다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 것일까? 잠을 잘 자서 그런 것일까?

 

한시간 좌선이 끝나는 알람이 울렸다. 그러나 일어나기가 아쉬웠다. 마치 버티기나 극기훈련하다 끝나는 것 같았다. 더 앉아 있기로 했다.

 

덤으로 사는 인생이 있다. 죽을 고비를 넘긴 자가 사는 삶에 대하여 덤으로 산다고 말한다. 덤으로 사는 인생을 산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앞으로 살아 가는 것 자체가 공짜이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없다. 좌선도 그런 것 같다.

 

더 달리고 싶었다. 지금부터 달리는 것은 덤으로 달리는 것이다. 한시간좌선이라는 해야 할 일을 마쳤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이렇게 생각되자 호흡이 보이기 시작했다.

 

좌선의 성공여부는 사띠의 확립에 달려 있다. 일단 사띠가 확립되면 그 다음부터는 명상이 쉬워진다. 마치 저절로 가는 것 같다. 호흡만 붙들고 있으면 애를 쓰지 않아도 제 갈 길을 가는 것 같다.

 

여분의 명상에서 집중은 잘 되었다. 호흡을 붙들고 있으니 망념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대신 반조는 있었다.

 

망념은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치고 들어 오는 것이다. 일종의 불청객과 같다. 더구나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망념의 집을 짓는다. 그러나 반조는 이와 다르다. 자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김이 확립되었을 때 반조가 일어난다. 그것은 착하고 건전한 법이다. 이를 꾸살라담마(kusaladhamma)라고 해야 할 것이다. 경전적 지식에 대한 것도 반조에 해당된다.

 

새김이 확립되면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다. 새김이 확립되면 반조가 일어난다. 반조는 지혜와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새김이 확립되었을 때 몸은 남의 것이 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한시간 좌선을 넘기고 덤으로 명상을 할 때 다리의 통증은 없었다. 그러나 약간 뻐근한 느낌은 있었다. 엉덩이는 닿는 느낌이 있어서 무거웠다. 그러나 새김이 있을 때는 이런 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나의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마치 제3자가 보듯이 관찰하는 것이다.

 

새김이 확립되었을 때 몸은 나무토막과도 같은 것이다. 숨을 쉬고 신진대사 작용이 저절로 일어나는 나무토막을 말한다. 새김이 확립되었을 때는 오로지 호흡과 이를 새기는 마음만 있게 된다.

 

몸이 나무토막과도 같이 되었을 때 몸은 내것이 아닌 것이 된다. 다리에서 통증이 일어나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엉덩이 닿는 느낌이 깊어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 보게 된다. 물질과 정신이 분리 된 것이다. 통증은 통증이고 이를 아는 마음은 아는 마음이 된다.

 

여분의 명상을 했을 때 새김이 문지기의 역할도 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되었다. 사띠가 왜 문지기인가? 이는 마음의 문을 지켜 주는 역할도 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늘 일어나게 되어 있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다.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이 몸과 마음은 망념의 놀이터가 되기 쉽다. 마치 성벽에서 성문을 열어 놓는 것과 같다. 마음의 문 단속과 관련하여 뽀틸라 장로의 이야기가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뽀틸라와 관련된 이야기)

 

부처님께서 싸밧티 시의 제따 숲에 계실 때, 장로 뽀틸라와 관련된 이야기(Pothilattheravatthu)이다. 장로 뽀틸라(Pothilatthera)는 일곱 부처님을 걸쳐서 삼장법사로 오백 명의 수행승들에 게 가르침을 설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이 수행승은 스스로 괴로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 내가 그를 일깨우리라.'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그 장로가 시중들러 오면, ‘뚯차 뽀틸라(Tuccha Pothila: 텅빈 뽀틸라), 오라, 뚯차 뽀틸라여, 인사하라. 뚯차 뽀틸라여, 앉아라. 뚯차 뽀틸라여, 가라.’라고 말했다. 그가 일어서서 가면, ‘뚯차 뽀틸라가 갔다.’라고 말했다.

 

뽀틸라는나는 주석서와 더불어 삼장에 통달했다. 나는 오백 명의 수행승들과 여러 커다란 모임에서 가르침을 설한다.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나를 반복해서 뚯차 뽀틸라라고 부른다. 부처님께서는 틀림없이 선정 등이 없기 때문에 나를 그렇게 부른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120요자나 떨어진 곳에 서른 명의 수 행승들이 사는 곳을 찾아가서 그 모임의 대장로에게 인사를 하고존자여, 나의 의지처 가 되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벗이여, 그대는 법사가 아니오 우리는 당신을 통해서 무 언가를 알게 됩니다. 왜 그리 말합니까?’ ‘존자여, 그렇게 말하지 말고 나의 의지처가 되어주십시오

 

그들은 모두 번뇌를 부순 거룩한 님들이었다. 대장로는이 분은 배움에 의지하여 교만함에 틀림없다.’라고 생각하여 보다 젊은 장로에게 보냈다. 그도 또한 그 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그를 보다 젊은 장로에게 보냈다. 최종적으로 대낮에 앉아서 바느질하고 있는 겨우 일곱 살 먹은 사미 앞에 보내졌다.

 

그는 교만을 꺾고 사미 앞에 합장하고참사람이여 나의 의지처가 되어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스승이여, 왜 그리 말합니까? 당신은 많이 배워서 우리는 당신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게 됩니다.’ ‘참사람이여, 그렇게 말하지 말고 나의 의지처가 되어주십시오’ ‘존자여, 만약에 훈 계하는 것을 참아낸다면, 그대의 의지처가 되어주겠소’ ‘참사람이여, 그렇게 하겠습니다. 불속에 뛰어들라면 뛰어들겠습니다.’

 

그러자 사미는 멀지 않은 곳에 한 호수를 가르키며, ‘존자여, 옷을 입은 채로 저 호수에 뛰어드시오라고 말했다. 사미는 그의 값비싼 두 겹으로 된 아래 윗옷을 입고 있는 것을 알고도 훈계를 참아내는가를 조사하기 위해 말했다. 법사는 말하자마자 물속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는 옷자락이 젖으려 할 때존자여, 나오라고 말했다. 말하자마자 호수에서 나와 선 법사에게 사미는존자여, 개미굴 에 여섯 개의 구멍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굴로 도마뱀이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잡으려면 다른 다섯 구멍을 막고 여섯 번째 구멍은 놔두고 그 구멍으로 잡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그대도 여섯 감관의 문 가운데 남은 다섯 감관의 문을 닫고 정신의 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많이 배운 그 수행승에게 그 사미의 말은 등불과 같았다. 그는참사람이여,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신체적인 몸에 주의를 기울여 명상수행에 몰입했다.

 

부처님께서는 120요자나 떨어진 곳에 앉아 있지만, 그 수행승을 관찰하고이 수행승은 스스로를 확립하여 광대한 지혜를 지니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모습을 나투어 그에게명상에서 광대한 지혜가 생기고 명상하지 않으면 광대한 지혜가 부서진다. 성장과 퇴락의 두 가지 길을 알아서 광대한 지혜가 성장하도록 거기에 자신을 확립하라.’(Dhp.282)라고 말했다. 이 가르침이 끝나자 뽀틸라는 거룩한 경지를 성취했다.(DhpA. III. 417-421)

 

 

삼장법사 뽀틸라 장로와 칠세 아라한인 사미의 이야기를 보면 교학보다 수행임을 알 수 있다. 제아무리 많이 배운 삼장법사도 칠세 아라한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것은 오문은 닫고 오로지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는 것이다.

 

삼장법사는 칠세 아라한에게 배웠다. 그것은 감각의 문 단속에 대한 것이다. 이는 어쩌면 문지기로서의 역할인지 모른다. 그런데 오로지 마음의 문, 즉 정신의 문 하나만 열어 놓는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법구경 인연담에서는 오문은 닫고 의문은 열어 놓는 것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오문을 닫는 것에 대하여 다섯 감각문에서 속행을 잠재워지게 하는 것이 다섯 감각문들을 닫는 것이다.”(1, 410)라고 설명해 놓았다. 의문을 열어 놓는 것에 대해서는 그 마음 문에서만 관찰하는 위빳사나 속행이 생겨나게 하십시오.”(1, 410)라고 설명되어 있다.

 

마하시사야도는 감각의 문 단속과 관련하여 속행(速行)’으로 설명했다. 속행은 빠알리어로 자와나(javana)를 말한다. 여기서 자와나는 대상을 경험하는 마음이다. 대상이 강하거나 분명할 때 속행이 일어나는 것이다. 속행이 일어나면 업이 된다.

 

속행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대상을 차단해야 할 것이다. 위빠사나 명상에서 조용한 곳에서 눈을 감고 있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도심이라면 귀를 막을 수 없다.

 

눈도 막고 귀도 막으면 수행이 잘 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맛지마니까야 152번 경에서 웃따라여, 바라문 빠라싸리야의 말대로라면 봉사와 귀머거리도 능력을 계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M152)라고 말했다.

 

수행한다고 하여 눈 막고 귀 막고 살 수 없다. 수행한다고 봉사처럼 귀머거리처럼 살 수 없다. 눈으로 보여지는 것, 귀로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속행으로 진행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띠를 확립해야 한다. 이때 사띠는 문지기로서의 사띠의 확립이 된다.

 

칠세 아라한은 삼장법사에게 정신의 문 하나만 열어 놓으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문에서 접촉 되어진 것은 최종적으로 의문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의문과정을 거치기 전에는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오문은 닫아 버리고 의문 하나만 열어 놓으라고 하는 것으로 본다. 맛지마니까야 152번 경에서 의문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다여, 또한 수행승에게 정신으로 사물을 인식하고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겨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겨나고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 생겨난다. 그는 나에게 마음에 드는 것이 생겨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생겨나고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 생겨나는데, 그것은 조건 지어진 것이고 거친 것으로 의존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고요하고 이것이야말로 수승한 것인데, 그것은 곧 평정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이를테면 아난다여, 어떤 사람이 두세 방울의 물방울을 대낮에 달구어진 철판 위에 놓으면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이 느리더라도 재빨리 기화되어 사라지는 것과 같이, 아난다여, 어떠한 것에 관해서든지 이와 같이 재빨리 이와 같이 신속하게 이와 같이 손쉽게,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 생겨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생겨난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아난다여, 이것을 정신에 의해 인식되는 사물에 대하여 고귀한 계율 안에서 최상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고귀한 분의 계율 안에서 최상의 능력을 계발한다.”(M152)

 

 

의문에 대한 설명은 오문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대상에 대하여 그것은 조건 지어진 것이고 거친 것으로 의존적으로 발생한 것이다.”(M152)라고 아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상이 항상하지 않고 실체가 없음을 말한다.

 

생겨난 것이 있으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M152)라고 했다. 대상은 생멸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평정이 생겨난다고 했다.

 

 

오늘 좌선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한시간 좌선 했을 때는 사띠가 확립되지 않아서 번뇌망념에 시달렸으나 알람이 울리고 난 후에 계속된 죄선에서는 사띠가 확립되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더 달리고 싶었지만 내일도 있고 모레도 있어서 그만 두었다. 오늘 1시간 23분으로 기록을 세웠다.

 

 

2023-08-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