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사띠(正念)와 삼빠자나(正知)에 대하여, 재가안거 35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3. 12:32

사띠(正念)와 삼빠자나(正知)에 대하여, 재가안거 35일차

 

 

오늘 1시간 50분 앉아 있었다. 오전 8시에 시작한 좌선이 950분이 끝난 것이다. 그것도 끝내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에 끝낸 것이다. 기록이다.

 

매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앉아 있기 기록을 말한다. 얼마나 오래 앉아 있느냐가 좌선의 승패를 가르는 것 같다. 번뇌에 가득 차 있다면 5분도 앉아 있기 힘들 것이다.

 

한시간 좌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번 안거에서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 목표이다. 앉아 있어 보아야 법을 볼 수 있다. 30분씩 두 번 앉아 있어 보았으나 하다가 만 것 같았다. 최소한 한시간은 앉아 있어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시간은 긴 시간이다. 하루일과 중에 한시간 일하면 엄청난 양의 일을 할 수 있다. 하물며 1시간 50분은 어떠할까? 놀랍게도 좌선을 시작하기 전에 본 보리수 새이파리가 그 사이에 쑤욱 커져 있다!

 

 

오늘은 테라와다불교 재가안거 35일째이다. 계절도 바뀌어 좌선도 할만하다. 지난 여름은 무척 더웠다. 앉아 있으면 가슴골로 땀이 주르르 흘렀다. 이제는 더 이상 더위는 느끼지 않는다. 안거가 끝날 때쯤 되면 오히려 추위를 느낄지 모르겠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자영업자에게는 주말이 없다. 일인사업자에게는 월, , , , , , 금이다. 안거를 하는 수행자의 삶은 어떠할까? 수행자에게도 역시 주말이 없다. 일요일이라 하여 하루 쉬지 않는다. 평일과 똑 같은 일과를 보낸다. 그래서 안거에 들어간 자의 일주일은 월화수목금금금이 된다.

 

글을 쓸 때는 늘 긴장 된다. 하얀 여백을 대할 때 어떻게 메꾸어 나갈지 긴장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좌선을 하기 위해 방석에 앉을 때 역시 긴장된다. 나는 과연 한시간을 잘 보낼 수 있을지 걱정되는 것이다.

 

일단 앉아 본다. 일단 해 보는 것이다. 앉다 보면 수가 있을 것이다. 핸드폰 타이머를 1시간에 세팅해 놓고 자리를 고른다. 평좌한 자세에서 몸통을 좌우로, 앞으로 뒤로 하여 자리를 잡는다. 허리는 곧게 편다. 허리에 굽은 곳아 없게 한다. 한시간 달리기 위해서는 자세가 좋아야 한다. 두 손은 선정인 자세로 한다. 엄지는 서로 붙이지 않는다.

 

하시간 좌선을 하려면 허리힘이 강해야 한다. 한시간은 사실상 허리힘으로 버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리를 곧게 펴게 하려면 엉덩이 방석을 여러 개 깔아야 한다. 직경 3센티 되는 방석을 네 개 깔았다. 10센티가 넘는 단차가 생겼다. 오른쪽 다리의 저림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타이머의 시작과 함께 카운트 된다. 한시간에서 제로를 향하여 카운트 되는 것이다. 이 한시간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것은 달려 가 보아야 알 수 있다.

 

처음 앉을 때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몸과 마음이 하나로 되어 있기 때문에 라는 생각이 강하다. 그래서 나의 몸, 나의 마음으로 본다. 그러나 호흡에 집중하여 사띠가 확립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몸과 마음이 분리되는 것이다. 이를 정신과 물질의 분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은 서로 의지한다. 몸이 있으면 마음도 있고, 마음이 있으면 몸도, 있다. 몸은 있는데 마음이 없다면 색계 사선천에 있는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 asaññasatta)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마음은 있는데 몸은 없다면 무색계의 존재가 될 것이다.

 

몸과 마음이 있어야 법의 성품을 알기 쉽다. 몸만 있고 지각이 없는 색계 무상유전천의 존재는 법의 성품을 알 수 없다. 한량 없는 세월을 마치 죽은 자처럼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죽어야 지각이 살아나는 무상유정천의 존재는 마음을 혐오하는 수행을 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고 보았을 때 마치 기절한 것처럼, 마치 식물인간처럼 수많은 겁의 세월을 보내는 것이다. 무색계의 존재는 어떠할까?

 

무색계의 존재는 몸이 없다. 오로지 정신만 있다. 몸이 괴로움의 원천이라고 보아 몸을 혐오하는 수행을 한 과보로 무색계의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우주가 성주괴공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할 때 한량없는 세월을 정신적 존재로만 보냈을 때 법의 성품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 지금은 법의 성품을 보기 위한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존재로 태어나면 법의 성품을 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앙굿따라니까야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 세상에서는 법을 보기 힘들다.

 

 

첫째지옥에서 태어나는 것.
둘째축생으로 태어난 것.
셋째아귀의 영역에 태어나는 것.
넷째수명이 긴 신들의 무리에 태어나는 것.
다섯째무지한 야만인들 사이에 태어나는 것.
여섯째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관점을 가지는 것.
일곱째지혜가 없어 둔하고 어리석은 것.
여덟째세존이 출현하지 않은 것.

 

 

위 여덟 가지는 앙굿따라니까야 좋지 않은 시간의 경’(A8.29)에 실려 있다. 여덟 가지 중에서 넷째 수명이 긴 신들의 무리에 태어나는 것이 있다. 여기서 수명이 긴 무리의 신들은 무상유전천과 무색계의 존재를 말한다. 대체 수명이 얼마나 길기에 수명이 긴 신들이라고 했을까?

 

무상유정천의 존재는 수명이 500겁이다. 우주가 500번 생겨났다가 깨지기를 반복하는 긴 시간이다. 무색계천의 존재는 더 길다. 공무변처천은 2만겁, 식무변천처천은 4만겁, 무소유처천은 6만겁, 비상비비상처천은 8만겁이다.

 

마음을 혐오하여 무상유정천에 사는 존재와 몸을 혐오하여 무색계천에 사는 존재가 있다. 이들 천신들은 오래 산다. 오래 살아야 행복한 것일까?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 왜 그런가? 좋지 않은 시기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왜 좋지 않은가? 정법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좋지 않는 시기이다.

 

정법은 오래 가지 않는다. 부처가 출현하면 정법시대가 되는데 오래 가지 않는다. 부처가 출현할 당시에는 정법이 온전하지만 부처가 열반에 들고 나면 정법은 서서히 오염되기 시작한다. 후대로 내려갈수록 오염되어서 결국 사라져 버리고 만다.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매우 짧다. 정법은 부처가 출현한 후에 매우 짧은 시간 머물다가 사라진다. 정법이 사라지면 다시 암흑의 시기가 된다. 그러다가 어느 때 부처가 출현한다.

 

초기경전에 따르면 비빳씬 부처가 출현했을 때는 91겁 전이었다. 다음으로 씨킨 부처가 출현한 것은 31겁전이었다. 무려 60겁의 공백기간이 있다. 부처가 출현 했을 때 잠깐 밝은 세상이었다. 그러나 정법이 오염되어 사라져 버렸을 때 다시 암흑의 세상이 되었다.

 

정법이 머무는 기간은 매우 짧다. 찰나에 빛이 났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대부분 기간은 어둠의 세월이다. 그런데 현겁에서는 무려 네 명의 부처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까꾸싼다, 꼬나가마나, 깟싸빠, 고따마 부처님을 말한다. 앞으로 멧떼이야(미륵불)까지 출현한다면 현겁은 다섯 명의 부처가 출현하게 된다. 그래서 현겁에 대하여 행운의 겁이라고 한다.

 

현겁은 행운의 겁시대이다. 현시대는 정법의 시대이다. 빠알리 삼장과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 있고, 팔정도의 수행방법이 있고, 사향사과와 열반이 있다면 정법시대로 본다. 그런데 수없는 겁을 사는 수명이 긴 신들의 무리들은 부처가 출현해도 윤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신들의 세계에서는 정법을 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법시대에 태어나면 윤회를 끝낼 수 있다. 그러나 조건이 맞아야 한다. 정법시대에 태어나더라도 무지한 야만인들 사이에 태어나거나, 잘못된 견해와 잘못된 관점을 가지거나, 지혜가 없어 둔하고 어리석다면 윤회에서 탈출 할 수 없다.

 

 

인간으로 태어나
바른 가르침이 설해질 때에
올바른 시기를 얻지 못하면
그 시기를 지나치네.

길을 방해하는
좋지 않은 시기들은 많다.
세상에 여래는
언젠가 어디선가 출현하는가?

세상에서 얻기 어려운 것을
눈앞에 보는 자
인간으로 태어남과
올바른 가르침의 교시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자라면
마땅히 그것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리.

어떻게 올바른 가르침을 이해하고
올바른 시기를 놓치지 않을까
올바른 시기를 지나치는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다네.

이 세상에서 올바른 법이 주는
해탈의 길을 잃은 자는
이익을 실현하지 못해
오랜 세월 후회하는 상인과 같네.

무명에 덮인 사람은
올바른 가르침을 어기고
생사의 윤회를
오랜 세월 겪어야 하리.

인간으로 태어나
올바른 가르침의 교시를 만나
스승의 말씀을 행했으니
미래에 행할 것이고 현재에 행하네.

여래가 선포한 길을
걷는 자는
올바른 시기를 알고
위없는 청정한 삶을 꿰뚫었네.

빛에서 생겨난
눈 있는 자가 가르쳐 준
수호 속에서 제어하여
항상 새김을 확립하고 번뇌 없이 지내네.

악마의 세계로 이끄는
모든 경향을 자르고
번뇌를 여윈 님들은
세상에서 피안에 도달하리.”(A8.29)

 

 

좌선은 배운대로 하고자 한다. 마하시방식을 따르는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 잡히지 않는다. 그에 따라 몸과 마음은 번뇌와 망상의 놀이터가 된다.

 

번뇌와 망상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려야 한다. 그리고 주 관찰대상인 배의 부품과 꺼짐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은 홈타운과 같고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어야 한다. 사띠가 확립되면 법의 성품을 보기가 쉬워진다. 나에게는 통증만한 것이 없다. 다리에 저림, 쑤심 등 통증이 일어났을 때 자연스럽게 사띠가 확립된다. 몸이 긴장되면서 온통 마음이 통증에 가 있기 때문이다.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특징이 있다. 그것은 몸의 감각을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몸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마치 자석을 대면 쇳가루가 선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사띠가 확립되면 호흡은 자연스러워진다. 인위적으로 부품과 꺼짐을 새길 필요가 없다. 저절로 호흡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코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몸 전체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말한다. 아마 이것도 대념처경에서 말하는 빠리무카사띠(parimukhasati)’에 해당될 것이다. 전면에서, 또는 몸 주위에서 호흡을 보는 것을 말한다.

 

한시간 정도 앉아 있었을 때 호흡이 저절로 일어났다. 몸 전체가 호흡을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달리 할 것이 없다. 그저 지켜 보기만 하면 된다. 마치 자동으로 몸이 호흡하는 것 같다.

 

몸에서 자동으로 호흡이 일어났을 때 잡념은 들어오지 않는다. 그대신 사유도 할 수 있고 반조도 할 수 있다. 이런 것도 사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띠에는 여러 뜻이 있다. 이전 것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큰 것이다. 다음으로 감각의 문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했을 때 어느 순간 저절로 사띠가 된다는 것이다. 몸 전체가 저절로 호흡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법을 보기가 좋다.

 

저절로 몸이 호흡 했을 때 이미 몸은 내 것이 아니다. 호흡을 지켜보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데 집중했으나 어느 정도 되고 나면 더 이상 새기지 않아도 저절로 호흡을 하는 것이다.

 

호흡은 본래 저절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좌선을 해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했을 때 호흡이 저절로 되는 것을 알았다. 이럴 때 다리통증이나 엉덩이 아픔은 객관적으로 관찰된다. 나와 분리되는 것이다. 통증은 통증이고 마음은 마음인 것이다. 그래서 통증따로 마음따로가 되는 것이다.

 

이번 안거의 목적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보는 것이다. 사띠가 확립되어서 통증을 남의 통증 보듯 했다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은 쉽지 않은 것 같다. 분노의 마음, 적의의 마음, 모욕의 마음 같은 것을 말한다.

 

몇 달 전의 일이다. 모임에서 모욕을 당했다. 그 사람은 나를 모욕했다. 나를 지목하여 공개적으로 저격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분노했다. 그 사람의 성향 문제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분이 풀리지 않았다.

 

분노는 혐오로 이어졌다. 그 사람 이름이나 얼굴만 보아도 혐오가 일어났다. 설령 그 사람이 사과를 한다고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모욕당한 것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오늘 좌선은 모욕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타이머가 1시간이 되어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음에도 좌선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했다. 분노, 적의, 모욕, 혐오가 어떻게 나의 마음을 지배하게 되었는지 숙고하며 보냈기 때문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통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통증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나의 통증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통증따로 지켜보는 마음 따로가 되는 것이다. 분노, 적의, 모욕, 혐오라는 불선법도 통증 관찰하듯이 날려 버릴 수 없을까?

 

오늘 좌선은 1시간 50분 했다. 이제까지 한 것 중에서 가장 긴 시간이다. 시간이 이렇게 길어진 것은 분노, 적의, 모욕, 혐오라는 불선법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불선법은 통증관찰하는 것과 차원이 다른 것 같다.

 

분노는 쉽게 가라 앉지 않을 것 같다. 분노가 혐오가 되었을 때 그것은 나의 분노, 나의 혐오가 되어 버린다. 이렇게 되었을 때 나는 불선법의 노예가 된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좌선 하면서 사유할 수 있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사유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다. 분노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사유했을 때 이런 것도 지혜로운 행위라고 볼 수 있다.

 

좌선하면서 사유할 때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한다. 몸에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호흡에 마음을 두면서 또 한편으로는 분노를 객관적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을까? 아마 이것은 사띠(sati)와 삼빠자나(sampajāna)로 보면 가능할 것 같다.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다. 한자어로는 정념(正念)과 정지(正知)라고 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는 새김올바른 알아차림으로 번역했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마음챙김분명한 앎으로 번역했다.

 

사띠와 삼빠자나는 수행용어이다. 수행을 하면 두 용어는 항상 함께 한다. 그런데 빤냐와로 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페이스메이커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어제 저녁에 잠결에 빤냐와로 스님의 칠각지 법문을 유튜브로 들었다. 사띠와 삼빠자나의 관계에 대하여 마라톤 할 때 주자와 페이스메이커의 관계로 설명했다.

 

페이스메이커는 주자가 잘 달릴 수 있도록 도와 주는 역할을 한다. 사띠와 삼빠자나의 관계에 있어서 주자는 삼빠자나가 되고 페이스메이커는 사띠가 된다.

 

사띠가 왜 페이스메이커와 같은가? 그것은 호흡관찰로 알 수 있다. 몸관찰에 대해서는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호흡을 해야 알 수 있다. 그래서 얼굴 앞으로 새김을 확립하여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들이쉬고 새김을 확립하여 숨을 내쉰다.”(D22.3)라고 했다.

 

사띠가 확립되어야 삼빠자나가 된다. 이는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D22.3)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안다는 말은 바로 삼빠자나를 말한다.

 

좌선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사념처는 호흡이 기본이라는 사실이다. 호흡관찰을 해서 사띠가 확립되어야 그 다음이 진행됨을 말한다. 몸관찰하여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숨을 분명히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런 논리라면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도 역시 호흡에 따른 사띠가 확립되어야 한다.

 

이번 좌선을 하면서 사념처에도 단계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다. 사념처 수행한다고 하여 막바로 마음보는 수행, 즉 심념처로 건너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심념처를 하려면 먼저 몸부터 관찰해야 할 것이다. 호홉을 보는 것이 먼저인 것이다. 호흡을 보는 것 없이 곧바로 마음 보는 수행, 심념처로 넘어 갔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아마 사띠가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나의 마음이라고 여전히 여길 것이다.

 

사념처를 보면 순서가 있다. 몸관찰, 느낌관찰, 마음관찰, 법관찰 순서를 말한다. 이 순서를 무시하면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가장 기본은 몸관찰하는 것이다. 왜 호흡을 먼저 보라고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몸관찰하여 사띠가 확립되었을 때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마 삼빠자나일 것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분명히 안다.”라고 했을 것이다.

 

삼빠자나는 올바로 분명히 아는 것이다. 이는 지혜 영역에 해당된다. 사띠를 하여 범위를 한정시켜 놓으면 그 다음에 삼빠자나가 일을 하는 것이다. 더 깊게 보는 것이다.

 

대념처경에 삼빠자나에 대한 주석이 있다. 이는 “1) 행동의 목적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2) 수단의 적합성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3)활동반경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4)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Pps.I.253)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 중에서 네 번째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에 주목한다.

 

삼빠자나를 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이는 개념이 아닌 실재를 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관찰했을 때 나라는 것은 없음을 말한다.

 

사띠와 삼빠자나는 역할이 다르다. 사띠는 범위를 한정 짓는 것이다. 사념처에서 몸, 느낌, 마음, 법으로 나누는데 이렇게 크게 구분 하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그리고 사띠는 마음을 대상에 묶어 둔다. 다만 여유 있게 묶어 둔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로 묶어 둔다.”라고 했다.

 

마음은 제어 하지 않으면 항상 대상에 가 있다. 대부분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에 가 있다. 이런 마음은 제어되어야 한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라는 밧줄에 묶어 두면 다른 대상에 가 있지 않을 것이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사띠의 줄로 묶어 두어야 한다. 이때 마음은 줄의 길이만큼만 움직일 것이다. 이를 고짜라(gocara), 즉 행경(行經)이라고 한다. 마음의 활동범위를 말한다. 이렇게 마음의 활동범위가 있어야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사마타는 마음을 대상에 밀착시키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대상과 하나가 되었을 때 틈이 없다.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틈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대상에서 약간 떨어져서 관찰한다. 그래야 제3자가 보듯이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사띠는 범위를 정하는 것이다. 사띠를 확립한다는 것은 관찰 범위를 정하는 것과 같다. 몸을 관찰 할 때 사띠가 확립되면 통증을 객관적으로 바라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리통증에 대하여 남의 다리 보듯 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삼빠자나라고 볼 수 있다.

 

통증을 관찰하면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통증따로 마음따로가 되는 것이다. 이는 물질따로 마음따로가 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보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하여 보면 내가 통증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조건발생한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는 다름 아닌 실재를 보는 것이다.

 

통증을 내 것이라 여기면 개념을 보는 것이 된다. 나가 개입 된 것이다. 그래서 아파도 내가 아픈 것이다. 그러나 사띠가 확립되어 통증을 제3자의 위치에서 객관적으로 관찰하게 되면 통증은 더 이상 내것이 아니다. 이는 지혜에 해당된다. 이런 지혜가 다름아닌 삼빠자나이다. 이런 삼빠자나는 삼빠자나 네 가지 특징 중에서 네 번째 해당되는 실재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Pps.I.253)일 것이다.

 

오늘 1시간 50분 좌선을 했다. 다리에 통증이 없었다. 일어날 때는 거뜬히 일어났다. 그리고 매우 상쾌했다. 좌선을 시작했을 때와 좌선이 끝났을 때 몸 상태가 달라져 있었다.

 

오늘 좌선을 오래 한 것은 분노에 대한 끝장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에서 통증을 제3자의 입장에서 관찰하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는데 분노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분노, 적의, 모욕감, 혐오는 여전히 남아 있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아무래도 자애와 연민수행을 해야 할 것 같다.

 

 

2023-09-0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