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어떻게 삼빠자나(正知)할 것인가? 재가안거 36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4. 11:42

어떻게 삼빠자나(正知)할 것인가? 재가안거 36일차
 
 
이상한 일이다. 무기력하다가도 좌선만 하면 펄펄 나는 것 같다. 좌선 이전과 이후가 다른 것이다. 몸과 마음이 다른 상태가 되었을 때 이를 수행이라 할 것이다.
 
오늘은 테라와다 재가안거 36일차이다. 오늘 좌선은 한시간으로 끝냈다. 아침에 무기력하여 앉아 있을 힘도 없었으나 한시간은 거뜬 했다. 아마도 그 동안 쌓인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운동을 하면 근력이 생긴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발달하여 근육의 힘이 생긴다. 근육이 생기면 겉으로 보기에도 표가 난다. 무거운 것을 들 때도 가볍게 들 수 있다. 수행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수행을 하면 수행의 힘이 생길 것이다. 마치 운동을 하면 근육이 생기듯이 수행의 근육이 생기는 것이다. 수행의 힘이 생기면 수행을 하지 않은 사람과 비교된다. 먼저 앉아 있는 것에서 차이가 날 것이다.
 
안거 초반에는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30분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 한시간은 더욱더 힘들었다. 그러나 이번 안거에서는 한시간 앉아 있기가 목표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라도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자세를 한 두 번 바꾸어 주어야 했다.
 
요즘 앉았다 하면 한시간 이상이다. 자세를 바꾸는 경우는 없다. 한시간을 앉아 있어도 통증이 없다. 안거 초반에는 다리저림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웠으나 이제 더 이상 통증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것도 아마 수행의 힘이 붙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새벽에 잠이 오지 않아 책을 보았다. 경전과 논서를 본 것이다. 논서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보고 있다. 한꺼번에 많이 보지 않는다. 하루에 고작 2-3페이지에 지나지 않는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 안거를 한다고는 하지만 스승이 없기 때문에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 크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 마하시 사야도에 의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또 읽고 있다. 빨강색 형광메모리 칠한 부위를 읽고 또 읽는다. 거꾸로도 읽는다. 오늘 새벽에도 그랬다.
 
오늘 새벽에 읽은 것은 무상, 고, 무아에 대한 것이다. 삼법인에 대하여 수행의 관점에서 설명한 것이다. 어떤 내용인가? 먼저 무상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상에 대한 명상)

"현재 생겨날 때 잘 따라 새길 수 있을 때 부푸는 물질, 꺼지는 물질, 앉는 물질, 굽히는 물질, 펴는 물질, 움직이는 물질 등을 “획, 획하며 생겨나서는 사라져 간다”라고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새겨 알게 된 그 물질들을 ‘항상하지 않은 것들일 뿐이다’라고 이해한다. 그때 ‘과거생 의 모든 물질들도 지금 새겨 알게 된 물질과 마찬가지이다. 이 (현재의) 물질들처럼 사라져 가는 것들일 뿐이다. 현재생으로 어느 하나도 이르러 올 수 없다. 생겨나는 그곳, 바로 그 과거생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 에 무상한 것들일 뿐이다’라고 구분하여 결정한다. 이것도 명상의 지혜중 하나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86-187)

 

 

 
이 무상에 대한 명상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마음에 대한 것은 별도로 설명되어 있을 것이다. 좌선 중에서나 행선 중에서나 일상에서나 물질에 대한 무상의 명상을 했을 때 “획, 획하며 생겨나서는 사라져 간다”라고 했다.
 
물질이 “획, 획”하며 생겨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매우 빨리 변화함을 말한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도 “획, 획”하며 생겨났다가 사라질 것이다. 이는 부품과 꺼짐이라는 두 단계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부의 부품을 관찰할 때 여러 단계가 있다. 마치 행선할 때 6단계가 있듯이 여러 단계가 있는 것이다. 행, 주, 좌, 와 중에서도 물질은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된다. 몸 속에서는 신진대사가 왕성하게 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이다. 생겨난 것이 그대로 있다면 영원주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도 매우 빠르게 사라진다. 지금 새기고 있는 순간까지 어느 것 하나도 그 상태에 머물지 못 한다. 그래서 “그 법들이 생겨나는 곳, 바로 그곳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무상한 것들일 뿐이다.”(2권, 187쪽)라고 했다. 이것을 ‘물질에 대한 무상의 지혜’라고 한다.
 
무상의 지혜는 사실상 ‘찰나멸’에 대한 지혜와 같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기 마련인데 그것도 생겨나자 마자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찰나멸이라고 한다. 그래서 “숨을 내쉴 때, 담배 연기를 내뿜을 때, 침을 뱉을 때, 대변보거나 소변 볼 때 등에 그것을 관찰하면서 ‘각각의 바로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라고 이해하게 되면 ‘내부의 모든 물질은 외부에 이르지 못한 채 바로 그 내부에서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무상하다’라고 구분하여 결정한다.”(2권, 187쪽)라고 했다.
 
물질이 무상한 것은 발생한 그 순간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물질은 찰나멸하기 때문에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번 일어난 마음은 생겨난 순간에 사라지기 때문에 다음 마음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생겨난 순간에 사라지고 다음 순간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다.
 
 
(괴로움에 대한 명상)
 
물질에 대한 명상에서 괴로움은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이는 ‘물질도 괴로워한다’라고 말한다. 니까야를 번역하는 어느 스님은 유튜브에서 “스마트폰, 목탁도 괴로움이다”이라고 했다. 정말 물질도 괴로움을 느끼는 것일까?
 
부처님의 제자 중에 찬나가 있다. 찬나는 부처님의 마부로서 부처님의 유성출가를 도왔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했다. 심지어 부처님의 상수제자인 사리뿟따와 목갈라나 존자에게도 “내가 누군데!”라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는 열등에 따른 자만일 것이다.
 
승가의 찬나의 행위는 화합을 해치는 것에 해당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아무도 상대하지 말하는 범벌을 내렸다. 이는 율장에서 말하는 ‘권리정지조치’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찬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찬나는 투명인간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찬나는 말이 통할 것 같은 아난다에게 찾아 갔다. 찾아가서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훈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게 교시를 베풀어 주십시오. 장로이신 존자들께서는 제가 진리를 볼 수 있도록 설법을 해주십시오.”(S22.90)라며 간청했다. 이에 아난다는 자비와 연민의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알려 주었다.
 
 
“벗이여, 찬나여, 물질도 무상하고 느낌도 무상하고 지각도 무상하고 형성도 무상하고 의식도 무상합니다. 물질도 실체가 없고 느낌도 실체가 없고 지각도 실체가 없고 형성도 실체가 없고 의식도 실체가 없습니다.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하고 모든 사실은 실체가 없습니다.”(S22.90)
 
 
아난다의 말을 보면 무상과 무아에 대한 것만 있다. 고에 대한 것이 없는 것이다. 아난다는 왜 삼법인 중에서 고만 빼고 알려 주었을까?
 
아난다가 찬나에게 고를 알려주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왜냐하면 괴로움의 특징이 시설되면 이와 같이 이 수행승은 물질도 괴롭고 의식도 괴롭고 길[道]도 괴롭고 경지[果]도 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Srp.II.181)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찬나는 가르침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수해승에게 일체개고를 알려 주었을 때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준비안된 수행승에게 “일체의 형성된 것은 괴롭다.”라고 알려 주었을 때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체라고 하여 책상도 일체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서 “책상도 괴로움을 느낀다.”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법인에서 일체개고는 어떤 것일까? 일체개고라 하여 모든 것을 괴로운 것이라고 여긴다면 책상도 괴로워할 것이고 스마트폰도 괴로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부처님이 일체개고라고 했을 때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한정해야 한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일체개고인 것이다. 그렇다면 일체개고에 대하여 수행의 관점으로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젊을 때는 괴로운 것을 잘 모른다. 이 젊음과 건강이 천년만년 영원할 것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몸의 기능이 쇠약해질 때 괴롭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물질의 괴로움에 해당되는 것이다.
 
노화에 따라 육체적 괴로움이 진행될 때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두려운 마음 자체가 괴로운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물질적 괴로움은 수행 중에서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수행중에 물질을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면 생멸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일어난다. 이는 나이가 들어 노화 되어서 죽음에 이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도 같은 것이다.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이를 수행중에 파악할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했을 때 생멸하는 것을 보고서 “생기기만, 소멸하기만 하여 계속해서 머물지 못하고 계속해서 죽어가기만 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2권 190쪽)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마음이 불편하다. 자신의 처지를 이에 대입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기기만 하고 소멸하기만 하여 끊임 없이 괴롭히고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혐오스러운 것이다. 좋지 않은 것일 뿐이다. 괴로운 것일 뿐이다.”(2권 190쪽)라고 쉽게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괴로움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고고성, 괴고성, 행고성을 말한다. 고고성은 고통 그 자체를 말한다. 괴고성은 변화에 따른 괴로움을 말한다. 행고성은 형성된 것 그 자체에 대한 괴로움을 말한다. 이 중에서 행고성을 잘못 이해하면 책상도 괴로워하고, 스마트폰도 괴로워하고,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오온이었다. 오온을 떠나서 삼라만상 우주에까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부처님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우리 몸과 마음에 한정되었다. 부처님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에 대하여 설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체개고에 대하여 삼라만상 산천초목에까지 확장하면 빗나가 버린다. 책상도 괴로워하고, 핸드폰도 괴로워하고, 도와 과도 괴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아에 대한 명상)
 
물질에 대한 명상에서 무아에 대한 명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한마디로 자아에 집착을 경계하는 것이다. 오온을 자아라고 여긴다든가 자아가 실재한다고 여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무아를 설했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만약 이 물질이 나라면 이 물질에 질병이 들 수가 없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물질은 내가 아니므로 수행승들 이여, 이 물질이 질병이 들 수 있고 이 물질에 대하여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라. 나의 물질은 이렇게 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S22.59)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면 오온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내 뜻대로 되는 것은 없다. 몸은 내 뜻과 무관하게 늙고 병들어 간다. 몸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다. 이런 이유로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래서 무아라고 한다.
 
오늘날 불교를 제외한 대부분 종교는 자아를 인정한다.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외도의 종교에서는 “자아라고 하는 것은 행위자이다.”라고 하기도 한다. 이는 몸과 말, 마음을 행하게 하는 것이 자아임을 말한다. 그래서 갈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도 “자아가 간다”라거나, “자아가 앉는다”라거나, “자아가 눕는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말을 부정된다.
 
불교는 무아의 종교이다. 자아라는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대념처경의 주석을 인용하여 “안목 없는 범부는 나아감 등에 대해서 ‘자아가 나아간다. 자아에 의해서 나아감이 이 생겼다’라고 미혹한다. 그러나 여기 비구는 나아가거나 물러날 때에 안목 없는 범부처럼 미혹하지 않는다.”(MA.i265)라고 했다.
 
불교에서는 가도 ‘내가 간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차라리 ‘오온이 간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나를 가게 하는 자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했을 때 “끊임없이 생멸하고 있는 연속만 존재한다. 원하는 대로 성취할 수 있는 나는 없다.”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아를 알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면 무아가 드러난다. 정신과 물질을 새기며 순간순간 끊임없이 생멸하는 현상을 관찰하면 나라고 부를만한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물질들은 생겨나게 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다. 조건이 형성되면 생겨나기 마련이다. 사라지지 않게 할 수도 없다. 시간이 되면 사라질 뿐 이다. 이렇게 생멸하고 있는 물질법들에 나라고 부를 만한, 주재하는 실체라는 것은 없다. 항상 머물 수 있는 실체도 없다. 바라는 대로 성취하게 할 수 있는 실체도 없다. 또한 그 물질법들은 나라고 불릴 만한, 주재 하는 실체가 아니다. 항상 머물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바라는 대로 성취하게 할 수 있는 실체가 아니다. 따라서 ‘주재할 수 없다.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가 아니다. 무아의 성품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198쪽)
 
 
무아의 성품에 대한 설명이다. 여기서 “이 물질들은 생겨나게 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 호흡이 대표적일 것이다. 호흡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하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신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신진대사도 해당될 것이다.
 
물질은 내 것이 아니다. 물질이 내것이라면 나는 호흡도 통제해야 하고 신진대사도 통제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다. 다만 지켜 볼 뿐이다. 이렇게 신체에 대하여 통제권이 없을 때 이 물질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흔히 내가 간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잘못된 말이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다. 이는 주석에서 “법의 성품을 떠난 어떠한 행위자는 없다.”(AsVT,74)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내가 가는 것이 아니라 법의 성품이 가는 것이다.
 
흔히 내가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말은 잘못된 말이다. 이에 대하여 복주석에서는 “오직 느낌이 느낀다.”(MAT.i.368)라고 했다. 이는 행위자라서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말이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것은 없다.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성품일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법의 성품이 느끼는 것이다. 이를 무아에 대한 명상이라고 한다.
 
오늘 한시간 좌선을 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좌선을 했다. 그럼에도 한시간을 버텼다. 아마도 수행의 힘일 것이다. 한달이상 앉아 있다 보니 힘이 붙은 것 같다.
 
한시간 좌선에서 주로 사유를 했다. 망상이 아닌 사유를 한 것이다. 이렇게 좌선에서 사유를 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보아야 할까?
 
좌선하면서 생각할 수 있다. 호흡을 관찰하면서 사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사유는 선법에 해당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치고 들어오는 망념과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좌선 중에 사유하는 것에 대하여 ‘반조’라는 말을 해 보았다. 더 좋은 말은 아마도 ‘삼빠자나(sampajāna)’가 될 것 같다. 왜 그런가 수행중에 삼빠자나는 항상 사띠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니까야를 보면 사띠와 삼빠자나가 함께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대념처경에서는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른 알아차림을 갖추고 새김을 확립하여 세상의 탐욕과 근심을 제거하며, 몸에 대해 몸을 관찰한다.”(D22.2)라고 했다. 여기서 올바른 알아차림은 삼빠자나를 말하고 새김은 사띠를 말한다. 삼빠자나가 앞에 나와 있음을 알 수 있다.
 
삼빠자나가 사띠 앞에 있는 경우도 있고 사띠 뒤에 있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하여 빤냐와로 스님은 사띠에 대하여 페이스메이커로 비유했고, 삼빠자나에 대하여 주자로 비유했다.
 
마라톤에서 페이스메이커는 앞서거니 뒷서거니 한다. 주자를 끌어 주기도 하고 주자를 밀어 주기도 하는 것이다. 수행에서 사띠가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하는 것이다.
 
수행에서 삼빠자나는 마라톤에서 주자와도 같다. 이는 수행을 하는 목적이 올바른 알아차림, 즉 삼빠자나를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념처 수행에서 삼빠자나 하는 목적은 집착하지 않는 것에 있다. 이는 ‘몸에 대한 올바른 알아차림’ 항목에서 “그는 세상의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상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D22.6)라는 가르침으로도 알 수 있다.
 
사띠와 삼빠자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번역 용어가 다 말해 주는 것 같다. 사띠는 ‘새김’으로, 삼빠자나는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에 따른다.
 
삼빠자나에 대하여 올바른 알아차림으로 번역한 것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어떤 지혜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위빠사나 지혜를 말한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삼법인의 지혜이다. 무상, 고, 무아의 지혜인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스트레스 완화를 위해서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교인들이 수행하는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삼법인의 지혜, 즉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게 되면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기지 않는 지혜가 가장 크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해야 한다.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해서 그것이 무상한 것이고, 그것이 괴로운 것이고, 그것이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았을 때 더 이상 오온에 대하여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삼빠자나 하는 목적이 아닐까?
 
 
2023-09-0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