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십 분만 더 조금만 더, 재가안거 39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7. 11:17

십 분만 더 조금만 더, 재가안거 39일차
 
 
일어나는 것이 아쉬웠다. 조금만 더 앉아 있기로 했다. 오늘은 10분만 더 앉아 있기로 했다. 아침부터 할 일이 많다. 오랜만에 일감을 수주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로서 재가안거 39일차이다. 날이 갈수록 탄력이 붙는 것 같다. 이제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리 통증도 없다. 좌선이 끝났을 때 거뜬히 일어났다. 오늘은 1시간 14분 앉아 있었다.
 
오늘은 8시 40분에 앉았다. 핸드폰 타이머를 한시간으로 세팅해 놓았다. 한시간 후에 “삐리릭~, 삐리릭~”하며 울릴 것이다. 그런데 좌선을 하다 보면 알람 울릴 때 더욱 탄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데 종이 울리는 것과 같다.
 
10분만 더 앉아 있기로 했다. 이제까지 만들어 온 것이 아쉬웠던 것이다. 처음에 자리에 앉으면 자리가 잘 잡히지 않는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한다. 최소한 이삼십분은 흘러야 어느 정도 적응되는 것 같다. 사오십분정도 되면 맛을 알 수 있다. 호흡을 보기 때문이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아침에 졸았다. 일터에 나와서 방아를 찧은 것이다. 아침을 만들어 먹고 이태리커피를 마시는 도중에 속된 말로 방아를 찧었기 때문이다.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머리가 자꾸 아래로 내려 가는 것이었다. 이런 날은 흔치 않다. 아마 피로가 누적된 것 같다.
 
오늘 아침에는 늦게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반이 다 되어 있었다. 이런 날은 흔치 않다. 새벽 네 시대나 다섯 시대에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다.
 
오늘 늦게 일어난 것은 새벽 두 시에 잠에서 깨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일찍 잠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 두 시에 깨서 할 것이 없었다. 잠도 오지 않았다. 머리맡에 있는 상윳따니까야를 보았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자 걸었다. 방에서 한시간 동안 경행을 했다.
 
경행이 끝나고 다시 잠들고자 했다. 그러나 잠은 잠이 와야 잠이 드는 것이다. 잠을 자고 싶다고 자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깨닫고 싶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올 수 있다.
 
어제 유튜브에서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거의 8년전에 법문 한 것이다. 경행에 대한 법문이다. 법문을 들어 보니 놀랍게도 경행 중에 깨달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좌선 중에 깨달은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경행 중에 깨달은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난다 존자일 것이다. 아난다 존자는 결집을 앞두고 밤새도록 경행했다. 아라한이 되어야만 결집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아난다 존자는 쉬고자 했다. 그래서 침상에 눕기 위해서 한쪽 발을 떼고 누우려고 하는 찰나에 깨달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디가니까야 주석에서는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머리가 베개에 닿기 직전에 집착없이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 (Smv.10)라 되어 있다.
 
아난다 존자의 깨달음을 보면 깨달음에는 기연(機緣)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연한 기회에 깨달음이 찾아옴을 말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테라가타를 보면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혼침에 정복되어
나는 정사를 나왔다.
경행처로 올라가다
거기서 땅에 넘어졌다.”(Thag.271)

“사지를 주무르고,
다시 경행처로 올라가서
안으로 잘 집중하여
경행처에서 경행을 했다.” (Thag.272)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 (Thag.273)

“나의 마음은 그래서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했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274)

 
 
바구 장로의 깨달음의 기연을 '문지방 깨달음'의 기연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는 율장 대품 주석을 보면 알 수 있다. 주석에 따르면, “바구는 싸끼야족의 출신으로 아누룻다와 낌발라와 함께 출가했다. 어는 날 그는 졸음을 쫓아 내기 위해서 방사를 나섰는데, 현관에 발을 내딛다가 넘어졌다가 일어서려고 애쓰다가 깨달음을 얻어 거룩한 님이 되었다.”(1343번 각주) 라고 설명 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구 장로는 무엇을 깨달았을까? 이는 게송에 힌트가 있다. 이는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274)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여 깨달은 것이다.

 
빤냐와로 스님의 법문에 따르면, 깨달음의 기연은 움직이는 도중에 올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선사들의 기연에서도 알 수 있다. 세수할 때 코를 만지다가 몰록 깨달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새벽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선사도 있고, 어떤 사람이 이야기하는 것을 듣다가 문득 깨달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부처님이 새벽별을 보다가 깨달았다는 말도 있다. 니까야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느 순간에 어떤 계기가 되어 문득 깨닫게 됨을 말한다. 그런데 빤냐와로 스님에 따르면 좌선 중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행을 할 때, 떨어지는 낙엽을 볼 때, 종소리를 들을 때 등 움직이는 대상과 접촉이 일어났을 때 문득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빤나와로 스님은 “언제 어디서 깨달음이 올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잠과 깨달음은 유사성이 있다. 잠은 잠이 와야 잠을 자듯이, 깨달음 역시 깨달음이 와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잠을 자려고 억지로 노력해서는 안된다. 잠을 자려고 하면 할수록 잠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이럴 때는 잠 자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잠이 오면 자지”라고 생각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깨달음 역시 기연이 되어야 깨닫는다고 말할 수 있다.
 
새벽에 경행을 하고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있었다. 요에 편안 자세로 있는 것을 말한다. 머리에 베개를 두 개 대고 벽에 기대어 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 자세로 머리맡에 있는 경전과 논서를 본다. 불경한 자세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자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이다. 이 자세로 그냥 있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을 1시간 이상 잤다. 이렇게 오래 잔 것은 좀처럼 있을 수 없다. 그것도 죽은 듯이 잠을 잔 것이다. 꿈을 꾸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 스펙터클했다. 여행을 떠났는데 갖가지 장쾌한 경치를 감상하고 우여곡절을 겪은 후에 본래 출발했던 자리로 돌아온 꿈이었다.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을 때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한참 집중이 되어서 호흡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을 때였다. 크게 “삐리릭~, 삐리릭~”하며 울리는 알람소리가 거슬리지 않았던 것이다. 전철 지나는 큰 소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는 좌선을 막 시작했을 때와 비교하면 확실히 다른 것이다.
 
좌선이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앉아 있는다고 해서 좌선이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다. 좌선을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노력해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끈질기게 관찰해야 한다. 고양이가 쥐구멍을 노려 보고 있는 것과 같다.
 
호흡의 처음과 마지막을 분명하게 보게 되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번 물면 놓치지 않는 것과 같다. 끝까지 추적하여 낚아 채는 것과 같다.
 
한번 호흡을 보았으면 계속 봐야 한다. 호흡의 처음부터 끝까지 보게 되면 전과정을 보는 것과 같다. 이를 계속 관찰해야 한다.
 
호흡은 조금만 방심하면 마음이 달아나 버린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기둥에 묶어 두어야 한다. 사띠라는 밧줄로 꽁꽁 묶어 두어야 마음이 달아나지 않는다.
 
호흡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과정을 지켜 보면 집중이 잘 된 상태이다. 이런 상태가 되면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상태가 된다. 오로지 호흡과 이를 새기는 마음만 있게 된다. 이런 상태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상태는 오래가지 않는다. 마치 날씨 같다.
 
맑은 하늘은 삼일 가지 못하는 것 같다. 공기가 탁해져서 구름이 끼게 된다. 구름이 끼면 비가 오게 된다. 좌선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좌선 중에 호흡을 지속적으로 지켜 보기 힘들다. 조금만 방심해도 잡념이 치고 들어 온다. 잡념이 망상이 되면 새김을 잊어 버린다. 망상에 지배당하는 것이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다. 무의식의 세계에 있는 것과 같다.
 
좌선 중에 생각을 할 수 있다. 호흡을 새기고 있는 중에 생각은 자각과 같은 것이다. 이런 생각은 삼빠자나와 같은 것이다. 사띠와 삼빠자나가 함께 있는 것과 같다.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생각을 하는 것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언어적 행위를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다. 이런 논리라면 말을 할 때에도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할 것이다. 그러나 망상은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나중에 그것이 망상인 것을 알게 된다.
 
망상과 자각은 다른 것이다. 똑같은 생각이지만 망상은 새김이 없는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고, 자각은 새김이 있는 상태에서 일어난 것이다. 이럴 때 망상은 불선법에 해당되고 자각은 선법에 해당된다.
 
좌선 중에는 새김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띠가 있어야 함을 말한다. 그 사띠의 대상은 호흡이다. 마음을 호흡이라는 대상에 사띠의 밧줄로 묶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도망가지 않는다. 마음이 사띠의 밧줄만큼 움직이는 것이다. 이를 고짜라(gocara), 즉 행경(行徑)이라고 한다. 마음이 노니는 범위를 말한다.
 
오늘은 할 일이 많다. 모처럼 일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거래 업체에서 오랜만에 일감을 주었다. 버리지 않고 잊지 않고 찾아 준 것에 감사 드린다. 실수하지 않고 잘 해야 한다. 일을 할 때도 새김이 있어야 한다.
 
세 가지 일을 하고 있다. 하나는 업무와 관련된 일이고, 또 하나는 글 쓰는 일이이고, 마지막으로 좌선하는 일이다. 세 가지 일은 모두 중요하다.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다.
 
업무와 관련된 일은 생계와 관련된 일이다. 실수가 없어야 한다. 실수가 발생하면 곧바로 손실로 이어진다. 이번에도 그랬다. 도면을 자세히 보지 않아서 실수가 발생했다. 다시 만들어 주어야 했다. 그 결과 손실 비용이 발생했다.
 
가장 뼈아픈 것은 신뢰를 잃는 것이다. 실수가 반복되다 보면 믿지 못할 것이다. 업체 교체할지 모른다. 그럴 경우 큰 고객이 떨어져 나간다 눈에 불을 켜고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일을 할 때는 집중해야 한다. 집중하지 않으면 실수가 발생된다.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업무를 할 때도, 글을 쓸 때도, 좌선을 할 때도 집중을 해야 한다.
 
오늘은 좋은 날이다. 일감이 있어서 좋은 날이다. 일주일 일할 일감이 생겼으니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 같다.
 
 
2023-09-0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