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자애명상을 해 보았더니, 재가안거 45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13. 11:39

자애명상을 해 보았더니, 재가안거 45일차
 
 
그 사람 표정이 밝고 맑다. 더구나 미소를 띠고 있다. 행복한 모습이다. 나에 대하여 우호적인 사람이다. 나의 말에, 나의 글에 공감해 주는 사람이다. 자애의 마음을 보냈다.
 

 
오늘은 재가안거 45일째이다. 안거기간이 90일가량이므로 딱 절반이 된 것이다. 이를 ‘반철’이라 해야 할 것이다.
 
반철법회가 있다. 작년 천장사 갔었을 때 참석했었다. 그때 천장사 회주 웅산스님이 법문했었다. 천장사에서 하안거를 나고 있는 대중스님들이 참석했다.
 
안거에서 반철은 딱 절반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천장사에서 반철법회를 한 것은 이유가 분명하다. 반철이 되었을 때 수행점검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대중스님들의 마음을 다잡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테라와다불교 안거 45일째이다. 10월 29일 해제가 되기 때문에 7주 남았다. 정확하게 48일 남았다. 거의 반이나 다름 없다.
 
반철동안 나는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었는가? 누군가 점검해주는 사람이 없다. 스승이 없이 수행하다 보니 어느 정도 진전을 이루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댓글로서 격려해 주는 사람들은 있다.
 
나홀로 수행하고 있다. 이 길이 올바로 가는 길인지 알 수 없다. 잘못된 길로 가면 엉뚱한 곳에서 헤맬 것이다. 경전과 논서를 등불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코멘트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격려의 메세지이다. 자신의 경험을 실어서 예측하는 글도 많다. 이미 가 본 길일 것이다. 다 경험해 본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지 지켜만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오늘 좌선은 8시 15분에 시작했다. 암송과 행선없이 막바로 자리에 앉았다. 오늘은 해야 할 일이 많다. 딱 한시간만 앉아 있기로 했다.
 
한시간은 소중한 시간이다. 한시간 동안 일을 하면 진척이 있다. 빨리 좌선하고 빨리 후기를 작성해야 한다. 수행도 속도전으로 할 수 있을까?
 
흔히 수행은 욕망으로 하지 말라고 한다. 욕망을 내려 놓는 것이 수행이라고 한다. 빨리 밥 먹고 마당을 쓸듯이, 빨리 자리에 앉아 좌선하고 후기를 작성하고 난 다음 밀린 일을 하는 것이 바림직한 것일까?
 
수행은 일없이 해야 한다. 수행은 하는 듯 하지 않는 듯 해야 한다. 수행은 무의미해 보이는 듯하게 해야 한다.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것처럼 일없이 해야 하는 것이 수행이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편안하다. 자리에 앉기 전과 앉고 난 후는 다르다. 앉기 전에는 속세에 있는 것이라면, 자리에 앉고 난 다음에는 속세를 떠난 것과 같다. 비록 차량 지나다니는 소리와 전철 지나다니는 굉음에 시달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다.
 
반철이 되다 보니 점차 자리가 잡혀 가는 것 같다. 마치 서정주의 시 거울 앞에 앉아 있는 누님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홀로 명상홀에 차분히 앉아 있을 때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명상홀에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이 세상에 나홀로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했을 때 나는 사라진다. 오로지 부품과 새김, 꺼짐과 새김만 있을 뿐이다. 이 우주공간에 물질과 정신만 있는 것 같다.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는 것이 있다. 니밋따를 한번 보는 것이다. 빛을 보는 것이 소원이 되었다. 어제는 태양을 보고서 표상을 취했다. 좌선에서는 닮은 표상을 취했다. 그 닮은 표상을 대상으로 마음을 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니밋따가 뜰 줄 알았다.
 
오늘도 니밋따가 뜨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난망이다. 어떤 이는 과거에 다 경험해 보았던 것 같다. 아마 이런 행위를 하수로 볼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 경험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제 겨우 45일 되었다. 그것도 오전만 하는 수행이다. 오전에 고작 한시간 앉아 있는 것이다. 이정도 가지고 무언가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원하는 만큼 성과를 내려면 선원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한철 살면 결실을 얻을지 모른다. 아니 몇 년 살아야 할지 모른다.


찬먜 센터의 우 자나까 사야도의 법문집이 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위빳사나 수행 28일’을 말한다. 사야도에 따르면, 사마타 수행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깊은 집중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마타 수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나 선정에 들어갈 없음을 말한다. 그래서 사야도는“사마타 수행에 대한 여러분의 과거 경험이 매우 형편없으면 깊은 집중을 얻는데 일 년이나 이 년이 걸릴지 모릅니다.”(411쪽)라고 했다.
 
선정 체험하는 것은 쉽지 않다. 과거 경험이 없으면 선정에 들기 힘듦을 말한다. 여기서 과거는 전생도 해당된다. 전생에 수행자로 살았다면 쉽게 선정에 들어갈지 모른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계행을 확립하고
지혜를 갖춘 사람이
선정과 지혜를 닦네.
열심히 노력하고 슬기로운 수행승이라면,
이 얽힌 매듭을 풀 수 있으리.”(S1.23)
 
 
이 게송은 청정도론 오프닝 테마와 같다. 마치 연속극 주제가와 같은 것이다. 청정도론 제1장 제1절에도 나오고 도중에도 나오고 청정도론을 마칠 때도 나온다.
 
청정도론은 계, 정, 혜 삼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장 먼저 계청정이 이루어져야 하고, 다음으로 마음청정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 두 가지 청정의 바탕에서 지혜청정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먼저 계행과 지혜를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를 갖춘 사람’이다.
 
지혜를 갖춘 사람은 어떤 사람을 말할까? 이는 준비된 수행자를 말한다.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 자의 의미도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생에 수행했던 자가 이 생에서도 수행자로 살게 됨을 말한다. 이는 청정도론에서 “지혜를 갖춘 자는 세 가지 원인에 의해 의한 업생적 결생의 지혜로 지혜를 갖춘 자이다.”(Vism.1.7)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현재 수행자로 살고 있는 사람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과거부터 수행했었기 때문에 지금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니까야에서는 ‘지혜를 갖춘 사람(naro sapañño)’이라고 했다. 이미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 자라는 뜻이다.
 
나로 사빤냐에서 나로(naro)가 ‘a man’을 뜻하고, 사빤냐(sapañña)가  ‘有智慧者, 具有智慧的’를 뜻한다. 따라서 나로 사빤냐는 지혜를 갖춘 자,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 자가 된다. 이는 다름 아닌 생이지자(生而知者)를 말한다.
 
이번 생에서 수행하려면 지혜를 갖추고 태어나야 한다. 수행과 인연이 없는 사람은 선정에 드는 등 수행하기 힘듦을 말한다. 이는 ‘업생적 결생의 지혜로 지혜를 갖춘 자(kamajatihetukapaisandhipañña)’로 말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선업의 과보로 생겨난 이숙식을 뜻한다.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원인을 가지고 태어난 자가 이에 해당된다.
 
선정에 쉽게 드는 자는 전생에 수행을 해 보았을 것이다. 무탐, 무진, 무치를 원인으로 해서 재생연결이 일어나 태어난 자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마치 타고난 재능을 가진 자가 능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다. 악기를 잘 다룬다든가 노래를 잘 하는 신동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청정도론 오프닝 테마와도 같은 게송을 보면 절망하게 된다. 과연 나는 무탐, 무진, 무치라는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 태어 났는가에 대한 의문이다. 이는 이번 생에 수행할 조건을 가지고 태어났는지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출가한 수행자가 있다. 아마 그들은 전생에서부터 수행자로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악기 신동이나 노래 신동이 출현하는 것과 같다. 나로 사빤냐, 즉 지혜를 갖추고 태어난 자, 유구족지혜자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자가 이번 생에서 한 수행할 것이다.
 
사마타 수행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집중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니맛타를 보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니밋따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어느 수행자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미얀마에 자나 사마디와 더불어 신통력의 성취에 관심이 많은 마하테라가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열심히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 숲속에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 세월은 무려 십오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끝내 자나 사마디를 얻지 못한 채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웃음)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것은 그 분의 과거 생에서의 수행 경험이 빈약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쩌면 그 분은 생각하고, 분석하고, 비평 하고, 합리화하는 경향이 심한 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웃음)

여러분이 사마타 수행의 대상으로 호흡을 취할 경우 그것은 주의기울임 타입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주의기울임에는 생각함, 분석함, 비평함, 합리화가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수행에 대해 생각하거나 분석하거나 경험을 비평한다면, 여러분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습니다. 그 경우 여러분에게 큰 희망이 없습니다. 비록 여러분이 죽을 때까지 수행할지라도 어떤 집중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웃음)”(위빳사나 수행 28일, 411쪽)

 
 
이 예에서는 두 가지를 말하고 있다. 전생에 수행해 보지 않은 자는 이번 생에 선정에 들기 힘듦을 말한다. 또 하나는 비평에 능한 자이다. 분석적 성향이 심한 자는 선정에 들기 힘듦을 말한다.
 
전생에 수행자가 아니었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최소한 석 달 이상 집중수행하면 선정에 들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단기간에 효과를 보고자 한다면 위빠사나를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찬먜의 우 자나까 사야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순수 위빳사나 수행으로 곧장 들어갈 경우 한 달, 또 는 두 달만에 정신적·육체적 과정을 약간이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석 달 후에 적어도 열한 번째의 꿰뚫어보는 지혜의 단계에 도달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석 달간의 수행으로 그 단계의 통찰지혜를 얻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기 때문입니다.” (위빳사나 수행 28일, 412쪽)
 
 
이 법문을 보면 희망이 보인다. 선정체험 없이도 지혜를 증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삼매가 없이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배우 부품과 꺼짐에 집중하면 삼매가 있게 되는데 이를 순간삼매라고 한다. 순간삼매는 선정삼매와는 달리 움직이는 대상을 한 것이다. 순간집중으로 대상을 포착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근접삼매에 해당된다.
 
본삼매에 앞서 집중이 일어나는 것을 근접삼매라고 한다. 이 근접삼매는 위빠사나 수행의 토대가 된다. 순간 집중을 해서 발의 움직임이나 배의 움직임을 관찰했을 때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초기 단계 위빠사나를 말한다. 그런데 순간삼매도 예리해지면 선정에서의 삼매와 같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이다. 지혜를 완성하려면 계행과 선정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순수 위빠사나를 닦는 사람은 네 가지 선정이나 신통을 얻지 않아도 지혜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순간삼매 또는 찰나집중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순수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얻는 이익은 무엇일까? 다음과 같은찬먜 사야도의 법문으로 알 수 있다.
 
 
여러분이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여러분의 마음은 이미 잘 집중 되어 있어서 정신적 오염원이나 장애들로부터 청정합니다. 그 결과 깊은 집중과 함께 일어나는 꿰뚫어보는 지혜가 예리해져서 일련의 불러오는 움직임과 꺼지는 움직임을 하나씩 차례대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시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여러분은 불러오는 움직임인 육체적 과정과, 그것을 관찰하는 마음인 정신적 과정을 구별합니다. 또한 여러분은 정신적 과정을 여러분 자신, 여러분의 사람, 자아, 영혼으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육체적 과정에 대해서도 그것을 여러분의 사람, 존재, 자아, 영혼으로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여러분은 사람, 존재의 개념을 제거합니다. 이 두 과정과 관련해서 삭까야딧티가 제거되어진다는 말입니다.”(위빳사나 수행 28일, 410쪽)
 
 
이 법문은 유신견 제거에 대한 것이다. 순간집중으로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면 위빠사나 지혜가 있게 된다. 오로지 부품과 꺼짐을 면밀히 관찰 했을 때, 부품과 새김, 꺼짐과 새김만 있게 되는데 이는 물질적 정신적 과정에 대한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사마타 수행을 하여 선정에 들었을 때 지혜는 생겨나지 않는다. 번뇌만 제거된다. 그러나 선정에서 나오면 다시 번뇌에 지배 받게 된다. 대개 ‘나’라는 번뇌에 지배 받게 된다. 오온을 내것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정신-물질 과정을 보게 된다면 오온에 대하여 집착할 것이 없다. 왜 그런가? 오로지 정신적-물질적 과정만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품이라는 물질적 과정, 이를 새기는 정신적 과정만 있게 되는 것이다.
 
부품과 꺼짐을 관찰하면 자아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그래서 나, 자아, 중생, 여자, 남자라는 언어적 개념에 따른 빤냣띠가 발을 붙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삭까야딧티(sakkāya-diṭṭhi), 즉 내가 있다는 견해, 유신견(有身見)이 제거 된다. 그래서 유신견이 제거 되어야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좌선 중에 빛을 보고자 했다. 그러나 도중에 그만 두었다. 그 대신에 할 수 있는 것을 해 보고자 했다. 그것은 자애명상이다.
 
자애명상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청정도론에 자애수행하는 방법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방법은 “삽베삿따 바완뚜 수키탓따(sabbe sattā bhavantu sukhitattā)”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중생이 행복하기를!”(Stn.145)라고 바라는 것이다.
 
자애명상을 해 보았다. 가장 먼저 자신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먼 사람까지 확장해야 한다. 심지어 원한 맺힌 자에게도 자애의 마음을 낼 수 있다.
 
가까운 사람을 떠 올려 보았다. 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다. 나를 지지하고 격려해주는 사람들이다. 나의 글이나 말에 공감해주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떠 올리자 그들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모두 행복한 모습이다.
 
자애는 원한 맺힌 자에게도 낼 수 있다. 그런데 원한 맺힌 자는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애니메이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던 ‘가오나시’같다. 얼굴 없는 사람을 말한다.
 
원한 맺힌 자에게는 자애의 마음을 보내기 힘들다. 그 대신 연민의 마음을 보낼 수 있다. 어떻게 보내는가? 업이 그 사람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했더니 마음이 편해졌다.
 
오늘 한시간 앉아 있었다. 일감이 있어서 일을 해야 한다. 납기는 지켜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기를 쓰다 보니 두 시간 넘게 쓰게 되었다. 좌선한 시간 보다 배나 많다. 이제 멈추어야 한다.
 
 
2023-09-13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