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오늘 죽어도 좋다, 재가안거 51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19. 12:10

오늘 죽어도 좋다, 재가안거 51일차
 
 
피곤한 자에게 길은 멀다고 했다. 좌선하는 자에게 한시간은 아득하다. 피곤에 지친 나그네는 얼마를 더 가야 할 지 모른다.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자는 언제 알람이 울릴지 알 수 없다. 오늘 좌선이 그랬다.
 
재가안거 51일째이다. 오늘 좌선은 망상으로 보냈다. 도대체 집중이 되지 않는다. 호흡을 볼 수 없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고자 했으나 이내 망상의 드라마를 만들어내고 만다.
 
왜 이렇게 집중이 안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약인 것 같다. 어제 저녁에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를 먹은 것이 문제가 된 것 같다. 자정이 되기 전에 반개를 먹었다.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 깬 상태로 있었다. 새벽에 다시 반개를 먹었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자는 둥 마는 둥 했다고 보아야 한다. 꿈은 꾸었기 때문에 자긴 잔 것이다. 그러나 수면의 질은 좋지 않다.
 
몸에 한기가 있는 것 같다. 며칠 타이레놀을 계속 먹었다. 몸에 열이 있는 것 같다. 등짝에 한기가 있을 때 먹는다.
 
새벽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이러다가 죽는 것이 아닌가?’라는 두려움을 말한다. 한번 이런 생각이 들자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왔다. 어느 날 검진을 받았더니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선고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떠 올랐다.
 
한번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 오자 식은 땀이 나는 듯 했다. 두려움과 공포를 나의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자신은 있었다. 이번 안거 중에 통증의 실체를 보았기 때문이다. 통증을 남의 것 보듯이 보았는데 두려움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새벽에 일어났다. 자리에 앉아서 빠다나경(Sn3.2)을 암송했다. 부처님이 악마와 싸워 이긴 승리의 게송이다. 가장 인상적인 게송이 있다. 그것은 “나디나따삐 아양봐또 비쏘사예 낀짜 메  빠히빳따사 로이땅 누빠쑤싸예”라는 게송이다. 이 빠알리 게송은 “이러한 정진에서 오는 바람은 흐르는 강물조차 마르게 할 것이다.”(Stn.435)라는 뜻이다.
 
수행하다 죽으면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억지로 잠을 청할 필요가 없다.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의 정진을 생각하는 것이다.
 
빠다나경에 절정이 있다. 이는 “에사 문장 빠리하레 디랏뚜 마마 지비땅 상가메 메 따땅 쎄이요 양쩨 지베 빠라지또”라는 게송일 것이다. 이 말은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tn.442)라는 뜻이다.
 
감기몸살에 걸린 것 같다. 갑자기 수주 받은 것이 큰 이유가 된다. 계속 놀다가 무려 아홉 모델 일감을 받았다. 납기는 정해져 있다. 주말작업을 해야 한다. 밤낮없이 해야만 맞출 수 있다. 오죽 했으면 금요일 저녁 수련회 갔었을 때 심야에 귀가 해야 했을까?
 
지난주 심야에 귀가했을 때 죽을 뻔 했다. 차도를 역주행한 것이다. 나중에 잘못된 것을 알고 급히 차를 돌렸다. 한번 후진해서 정주행 한 것이다. 그때 바로 뒤에서 큰 탑차가 따라 붙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해 본다. 그때 내 차가 큰 차라면 어땠을까? 중형차 이상 대형차를 가지고 있었다면 살아 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해 본 것이다. 아마 두 번 후진해야 돌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했을 경우 뒤에서 오는 탑차와 부딪쳤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차의 길이가 작은 경차를 가진 것이 행운이었다. 한번 후진해서 돌린 것이다.
 
일은 어제 다 끝났다. 담당장에게 아홉 모델 파일을 발송했다. 이상 없음을 확인 받고 제작에 들어 갔다. 반달 이상 먹고 살 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몸이 혹사 당했다. 몸에 한기가 도는 등 열이 난 상태에서 이틀 동안 밤낮으로 일에 매진 했기 때문이다.
 

 
다시 평온한 상태가 되었다. 오늘 좌선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잠을 잘 못 잤기 때문이다. 수면제 약기운도 있다. 그래서일까 앉아 있는데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평소 평좌한 다리에 통증 때문에 고생했는데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꿈꾸듯이 망상만 연속해서 일어났다.
 
지금은 몸이 정상으로 돌아 왔다. 더 이상 등짝에 한기도 느끼지 않는다. 수행과 일을 동시에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왔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새벽에 공포를 느꼈다.
 
빠다나경에 따르면, 공포도 악마의 군대에 해당된다. 빠다나경에서는 여덟 악마의 군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비루(bhīrū), 즉 공포의 군대인 것이다.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공포를 나의 것으로 여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통증을 나의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번 안거에서 하나의 성과가 있었다면 그것은 통증을 남의 것처럼 보았다는 것이다.
 
좌선 중에 오른쪽 다리 통증이 자주 왔다. 자주 앉아 있지 않아서 생긴 현상이라고 본다. 그래서 몸을 만들고자 했다. 하루 한시간씩 앉아 있다 보면 다리 통증 같은 것은 없어질 것이라고 보았다.
 
평좌한 자세에서 다리 통증이 오면 거의 백프로 오른쪽 다리이다. 처음에는 공포를 느꼈다. 다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팠다. 다리가 불구가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심리적 요인이 컸다.
 
다리에 통증이 왔을 때 남의 다리 보듯 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본 것이다. 다리에 생긴 통증과 이를 새기는 마음을 따로 본 것이다. 이렇게 되자 통증은 통증이고, 새기는 마음은 새기는 마음이 되었다. 그 결과 통증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 공포를 느낀 것은 내가 죽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공포였다. 어찌하여 진단을 받았는데 3개월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는 선고를 받았을 때를 생각한 것이다. 아마 이런 이야기를 유튜브에서 많이 보아서일 것이다. 특히 능행스님이 조현기자와 대담한 것을 보았는데 이것이 영향을 준 것 같다.
 
지나온 삶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나는 잘 산 것일까?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나 최근 십여년 동안은 열심히 살고자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 것이다. 그 결과 매일 글을 쓰게 되었고, 경전을 읽었고, 경과 게송을 외웠고, 외운 것을 암송하는 삶을 살았다. 최근에는 재가안거라고 스스로 이름 붙여 좌선을 하고 있다.
 
크게 이루어 놓은 것은 없다. 크게 벌어 놓은 것도 없다. 어쩌면 날개 부러진 늙은 왜가리 같을 수도 있고, 또한 쏘아져 버려진 화살 같은 신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현재 이렇게 글을 쓰고 수행한다고 애를 쓰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새벽 두려움과 공포에 떨었다. 그러나 두려움과 공포는 심리적 현상에 지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을 말한다. 통증과도 같은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의 공포에 매여 있다면 갈애에 묶여 있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몸이 불편하면 만사가 귀찮다. 나이 들어 수행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감한다. 감기몸살이 있으면 앉아 있는 것 자체가 힘들고 만사가 고통스럽다. 이럴 때 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수행은 조금이라도 젊을 때 해야 한다. 한살이라도 젊을 때 하는 것이다. 수행은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해야 한다. 몸이 건강한 상태에 있을 때 하는 것이다.
 
수행을 해서 세상의 이치를 알게 되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다. 죽음의 공포도 극복될 수 있다. 그래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못보고 백년을 사는 것보다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3)라고 했다. 오늘 죽어도 좋은 것이다.
 
차라리 나는 문자 풀을 걸치겠다.
이 세상의 삶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가!
내게는 패해서 사는 것보다는
싸워서 죽는 편이 오히려 낫다.”(Stn.442)
 
 
2023-09-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