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복부 새김의 달인이 되고자, 재가안거 62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9. 30. 11:48

복부 새김의 달인이 되고자, 재가안거 62일차
 
 
한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이런 날은 없었다. 좌복에 앉은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한시간 지났음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오늘 좌선은 잘 된 것일까?
 
테라와다불교 재가안거 62일째이다. 추석 연휴를 맞이하여 오늘도 백권당에 나와 앉아 있었다. 안거에 들어간 수행자에게 휴일은 없다.
 
오늘은 백권당에 6시 45분에 도착했다. 잠을 잘 자야 했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6시까지 누워 있고자 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다. 5시 45분에 일어났다. 평소와 같이 샤워를 하고 먹을 것을 준비 했다.
 
오늘 먹을 것은 밤호박과 감자와 고구마와 포도를 준비 했다. 백권당 사무실에서 꿀물과 함께 먹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좌선에 들어가지 않는다. 절구질한 커피를 마셨다. 마치 숭늉마시듯이 옅게 타 마셨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행선이다. 행선을 하고 좌선에 임하면 효과적이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가져 가기 때문이다.
 
처음 행선을 할 때 비틀거린다. 눈을 감고 하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이는 몸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덜 집중 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경을 암송하면 효과적이다.
 
빠다나경을 암송했다. 행선하다가 멈추어 서서 빠른 속도로 암송했다. 속으로 암송한 것이다. 게송이 25개나 된다. 하나하나 뜻을 새겨 가며 암송했다. 그러나 잘 기억 나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런 경우 패스 한다.
 
경을 암송하고 나면 확실히 다른 상태가 된다. 몸과 마음에 변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집중이 된 상태임을 말한다. 이 상태에서 행선을 하면 발이 “짝, 짝”하며 달라 붙는 것 같다.
 
행선이 잘 되면 황홀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여섯 단계 행선을 했을 때 새김이 분명하면 번뇌와 망상이 있을 수 없다. 일 없이 생활의 달인처럼 똑 같은 행위를 반복했을 때 황홀감을 느낄 때가 있다.
 
행선에서 황홀은 좌선에서 느끼는 황홀보다 십육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 여기서 십육분의 일은 경전에 있는 표현이다. 매우 작은 것을 의미할 때 이런 정형구가 사용된다.
 
좌선에서 황홀을 맛 보았다면 이를 잊지 못한다. 다시 그 상태로 되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런 것도 어쩌면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건전한 것이다. 아꿀살라(不善)가 아니라 꾸살라(善)인 것이다.
 
자리에 앉은 시각은 7시 45분이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암송도 했고 행선도 십여분 했다. 이제 앉아서 황홀감을 맛보면 되는 것이다.
 
자리에 앉아서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졸리는 것이었다. 마치 고속도로 타고 가다가 졸리는 것과 같다. 억지로 졸음을 쫓아 내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누워 버렸다.
 
좌선을 시작한지 21분만에 누웠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잠은 오지 않았다. 그냥 누운 상태에서 26분을 보냈다. 이렇게 자세히 시간을 표현 하는 것은 스마트폰 앱에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다시 해야 했다.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난에 물주기를 했다.
 
난에 물주는 요령이 있다. 화원 주인이 알려 준 것이다. 그것은 동이에 물을 넣어 난화분을 담궈 놓는 것이다. 그것도 여러 시간 담궈 놓아야 한다. 난에 물주기는 20여분 진행되었다.
 

 
졸릴 때는 기분 전환을 해야 한다. 난에 물을 주는 등 행위를 했더니 졸음은 가셨다. 처음부터 다시 하고자 했기 때문에 행선부터 다시 했다.
 
행선은 20분 가량 했다. 육단계 행선을 할 때는 눈을 감고 한다. 발을 떼서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동작을 반복한다. 발을 뗄 떼는 뒷꿈치부터 뗀다. 발을 디딜 때는 수평으로 해서 딛는다. 이런 차이가 있다.
 
다시 자리에 앉았다. 시계를 보니 9시 18분이다. 이전에 앉아 있었던 21분은 없던 것으로 했다. 혼침으로 보낸 시간은 좌선이라 볼 수 없다.
 
두 번째로 자리에 앉았을 때는 첫 번째로 앉았을 때와는 달랐다. 처음부터 집중이 잘 되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선명하게 보였다.
 
좌선 할 때 처음부터 잘 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준비 기간을 갖는다. 앉은지 20분 정도 지나면 집중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오늘은 10분 정도 지났을 때 부품과 꺼짐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복부의 움직임에 집중하면 몸이 사라지는 것 같다. 오로지 마음을 배의 부품과 꺼짐에 두면 몸은 있는지 모른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행선할 때 서 있을 때가 있다. 방향 전환하기 위해서 서 있는 것이다. 이때 위빠사나 스승들은 몸을 스캔하라고 한다. 머리 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마음을 훝어 내리라는 것이다.
 
발을 발바닥에 두면 눈이나 코나 입이 있는지 모른다. 마음은 오로지 발바닥에 가 있다. 마음을 코에 두면 발바닥이 있는지 모른다. 좌선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좌선할 때 마음을 복부에 두라고 한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했을 때 몸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가 된다.
 
좌선할 때 다짐하는 것이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복부의 움직임을 관찰 했을 때 집중이 된다. 그에 따라 몸도 마음도 편안해진다.
 
몸과 마음이 편안해진 상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는 집중 된 상태로 보아야 한다.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 했을 때 편안해 지는 것이다. 더욱더 집중이 되면 황홀한 상태가 되는 것 같다.
 
명상에서 황홀한 상태라는 표현은 자제 되어야 한다. 평안함이 더 강화 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새김이 분명해졌을 때 마음이 황홀한 상태가 되는 것 같다.
 
황홀경을 맛 보려면 조건이 있다. 그것은 새김이 분명해졌을 때이다. 복부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다 보면 새김이 분명해질 때가 있는데 그때 몸의 변화가 있게 된다. 몸이 나른해지는 것이다.
 
몸이 나른해 지면 마음도 나른해 진다. 이는 마음의 황홀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최상의 황홀은 어떤 것일까?
 
연탄가스를 마셔 본 적이 있다. 아마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 산동네달동네에서 살았다. 연탄으로 아궁이 불을 피던 시절이다. 부엌에서 목욕하다가 연탄가스를 마신 것이다.
 
연탄가스를 처음 마셨을 때를 기억한다. 밀폐된 공간에서 가스가 코에 들어 왔을 때 매캐한 냄새가 불쾌 했다. 점점 시간이 지나지 의식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문을 밀치고 나와야 하는데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 하나 없었다.
 
연탄가스를 흡입 했을 때 마치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이 지나자 편안해졌다. 머리 속은 총천연색이 되었다. 몸은 나른 해졌다. 황홀한 느낌이었다. 세상에 이런 황홀은 없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깨어 났을 때는 병원이었다. 호흡기를 대자마자 의식이 돌아 온 것이다. 그러나 의식을 잃고 난 이후는 기억 나지 않는다. 다만 의식을 잃기 전에 지극한 황홀을 체험했다는 것이다.
 
좌선에서도 황홀을 일부 느낀다. 단지 평안함이 더 강화된 것이다. 몸이 나른해 졌을 때 느낀다. 그러나 연탄가스 마셨을 때와 비교하면 십육분의 일도 안되게 약한 것이다.
 
오늘 좌선을 두 번 했다. 한번은 혼침이 와서 21분만에 그만 두었다. 두 번째 좌선은 한시간을 채웠다. 아쉬워서 9분 더 달렸다. 1시간 9분 좌선 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간이 금방 갔다는 것이다.
 
좌선할 때 시간이 빨리 간 것은 그만큼 새김 상태가 유지 되었기 때문이다. 새김이 없는 상태라면 번뇌망상으로 5분 앉아 있기도 힘들다. 또한 다리저림이 생겨서 통증이 생긴다.
 
좌선을 하면서 ‘생활의 달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TV프로에 나오는 생활의 달인을 말한다. 그들은 보지 않고 던져도 들어 간다. 저울을 달지 않아도 무게가 똑 같다.
 
안양 중앙시장에 가면 생활의 달인들을 볼 수 있다. 김을 굽고 있는 여인은 하루종일 김만 굽는다. 김굽기 달인이라 볼 수 있다. 호떡 만드는 남자도 있다. 하루종일 호떡만 만들다 보면 눈 감고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호떡만들기 달인이라고 볼 수 있다.
 
새김의 달인이 되고자 한다. 복부새김의 달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복부의 움직임을 보기 때문에 복부새김의 달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 좌선은 잘 되었다. 복부의 새김을 관찰 했을 때 새김이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복부가 어떤 때는 “뽈록뽈록”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천천히 부품과 꺼짐이 있기도 했다. 이런 때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본다.
 
배의 부품과 꺼짐은 모양이나 모습으로 보는 것은 아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느낌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부품과 꺼짐은 운동성이 있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풍대에 대한 것이다.
 
복부의 움직임은 마음으로 느낌으로 운동성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부품과 꺼짐을 새기다 보면 어떤 때는 인위적인 것이 아닌지 생각 들 때가 있다. 이런 때는 새김을 멈춘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새김을 하다가 새김을 멈추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저절로 새김이 있는 것 같다. 복부도 저절로 움직이고 새김도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마음이 온통 복부에 가 있을 때 몸은 사라진 것 같다. 이 상태가 되면 이 공간에서 오로지 부품과 꺼짐, 그리고 이를 새기는 마음만 남은 것 같다. 이런 상태가 가장 평안한 상태이다. 이런 상태를 황홀한 상태라고 말하면 지나칠까?
 
 
2023-09-3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