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일과 수행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아, 재가안거 77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16. 18:09

일과 수행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아, 재가안거 77일차

 

 

좌선 중에 다른 생각을 했다. 이는 망상과는 다르다. 명상하면서 일을 생각한 것이다.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하여 계획을 세웠다. 수행과 일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재가안거 77일째이다. 자리에 앉아 있어 보지만 마음은 다른 데에 가 있다. 일에 가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명상보다 일이 우선이다.

 

모처럼 일감을 하나 맡았다. 계속 놀다가 갑자기 일감이 들어 왔을 때 일에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다. 고객은 늘 급하기 때문이다. 오늘 일감을 주고서 내일 결과를 내놓으라는 식이다. 오늘도 그랬다.

 

주말작업한 것이 오늘 오전에 끝났다. 지금은 재가안거기간이라서 오전에는 어떤 일이 있어도 한시간 좌선을 해야 한다. 그리고 후기를 써야 한다. 그러나 오늘은 예외가 되었다. 납기를 지켜 주어야 되기 때문이다.

 

 

오늘 일터에 오자마자 일부터 시작했다. 오늘 오전 꼬박 해야 담당에게 파일을 넘길 수 있다. 좌선부터 하고 일을 하면 늦다. 처음으로 오전에 좌선을 할 수 없었다.

 

오전에 일을 마무리 했다. 오후에는 느긋한 마음으로 한시간 좌선하고자 했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난 다음 급변했다. 고객사 팀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오늘 중으로 꼭 한모델 설계를 해달라고 주문했다. 무리한 요구이다.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로 하다. 내일까지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수행자는 먼저 주변정리부터 하라고 했다. 수행에 방해 되는 것을 먼저 해결하고 수행에 임하라는 것이다. 제대로 수행하려면 선원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재가자는 어떻게 수행해야 할까? 직장 다니는 사람은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 없다. 개인사업자 역시 선원에 들어가는 등으로 장기간 자리를 비울 수 없다. 선원에서 한철 안거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재가자가 수행하는 방법도 있다. 그것은 명상공간을 만들어 놓고 선원에서 앉아 있는 것처럼 수행하는 것이다.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열 평 가량 되는 사무실을 칸막이로 반을 막았다. 바닥에 매트를 깔아 놓으니 세 평 공간이 확보 되었다. 이것이 명상공간이다.

 

 

재가안거 77일째이다. 회향일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는 1029일이 회향일이다. 그날은 음력으로 915일이다. 테라와다불교 안거기간이 끝나는 날이다.

 

일과 수행을 함께 하기가 쉽지 않다. 일이 없을 때는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 그러나 일감이 있으면 수행을 할 수 없다. 일감이 들어 오면 만사 제쳐 놓고 일에 몰두 해야 한다. 생계유지가 먼저이다. 무엇보다 납기를 지켜야 한다.

 

오늘 좌선을 하기는 했다. 짧게 10여분 앉아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마음은 일에 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한 것이다.

 

앉아 있다 보니 일과 관련하여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눈을 감고 가만 있다 보니 좋은 아이디어가 떠 오른 것이다. 그리고 일의 우선순위가 떠 올랐다. 현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명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재가안거가 쉽지 않다. 일과 명상을 병행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납기가 급한 일의 경우 좌선한다고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일은 곧 끝난다.

 

일도 수행하듯이 느긋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 절대적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에는 일없이 해야 한다. 마치 생활의 달인이 무한반복하듯이, 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다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일하는 것도 수행인지 모른다. 대상에 몰두하고 있는 것 자체가 비슷한 것이다. 일을 붙잡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데서 나온다.

 

농부는 호미를 들고 밭을 간다. 수행자 역시 밭을 간다. 어떤 밭을 가는가?

 

어떤 바라문이 부처님을 비난했다. 일을 하지 않고 수행만 하는 것을 비난한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깃날과 몰이막대입니다.”(Stn.77)라고 말했다.

 

부처님도 일을 했다. 부처님은 마음의 밭을 간 것이다. 쟁기를 들지는 않았지만 매사에 새김(사띠)하는 것이 밭을 가는 것과 같다고 했다.

 

농부는 밭에서 호미를 들고 밭을 맨다. 저 너른 밭을 언제 다 맬까? 그러나 한땀한땀 호미질 하다 보면 진도가 꽤 나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일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형 모니터 앞에 앉아 수천, 수만 번 클릭하다 보면 어느새 진척이 많이 되어 있다.

 

농부가 밭에서 호미질 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설계자가 모니터 앞에서 마우스로 수천, 수만 번 클릭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수행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행자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수백, 수천 번 새긴다. 새기면 역시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무엇인가 집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것이다. 요즘 일과 수행을 병행하는 나날이다.

 

 

2023-10-1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