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윤회에서 두려움을, 재가안거 80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19. 19:52

윤회에서 두려움을, 재가안거 80일차

 

 


"저도 이런 일이 일어날줄 몰랐어요." 강아지 주인은 망연자실한 듯 보였다. 유튜브에서 본 것이다. TV특종 프로에 대한 것이다.

강아지들은 무려 19마리이다. 어미 개는 두 마리이다. 주인은 암캐 두 마리를 키우면서 강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인의 꿈은 현실이 되었다. 개 두 마리가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한 개는 새끼를 10마리 낳았고, 또 한 개는 새끼를 9마리 낳았다.

평화롭던 시골 집에 온통 강아지들 뿐이다. 어미 개들까지 합하여 20마리가 되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집은 그야말로 개판이 되었다. 이 생명들을 어찌해야 할까?

 


오늘은 재가안거 80일째이다. 오전에 업체 납품 갔었다. 오후에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오후 4시 11분에 자리에 앉았다. 목표로 하는 한시간을 채웠다.

오전좌선과 오후좌선은 다르다. 오전에 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집중도 잘 되고 잡념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후 좌선은 이미 마음이 오염된 상태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효율이 떨어진다. 그럼에도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전천후 좌선이 되어야 한다. 어느 때이든지 앉아 있는 그 자리가 안락처가 되어야 한다. 시장바닥에 있어도 새김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을 읽고 있다. 어제와 오늘은 두려움의 지혜와 허물의 지혜와 염오의 지혜에 대한 것을 읽었다. 각각 위빠사나 5, 6, 7단계 지혜에 대한 것이다. 청정도론에 따르면, 이 세 지혜는 성품으로는 같은 것이라고 한다. 다만 표현만 다를뿐이라고 것이다.

세 지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두려움의 지혜, 허물의 지혜, 염오의 지혜, 이 세 가지 지혜는 여리고 중간이고 성숙된 것으로만 세 가지로 차이가 난다."(2권, 332쪽)라고 했다. 그래서 "형성들의 허물을 분명하게 알고 보는 성품이나 특성으로는 같은 종류의 지혜이다."라고 했다.

두려움의 지혜가 생겨나면 허물의 지혜, 염오의 지혜가 따라서 일어난다고 한다. 수행자들에 따라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나 두 가지만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책을 읽지 말라고 한다. 책을 읽으면 분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경전이나 논서도 읽지 말아야 할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니까야를 읽으면 수행에 도움이 된다. 청정도론이나 아비담마, 위빳사나 수행방법론과 같은 논서를 읽으면 수행에 매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마치 어둠 속에서 등불을 보는 것 같다. 다만 책에 있는 것을 자신의 경험처럼 착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두려움의 지혜를 읽고 있다. 그렇다고 두려움의 지혜에 이른 것은 아니다. 책이 있어서 읽는 것이다. "다음 단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호기심으로 읽는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허물의 지혜에 대한 것을 읽다가 마음이 끌렸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새겨 알아지는 정신·물질과 새겨 아는 위빳사나가 계속해서 사라지기만 하는 것을 직접 경험하고 보게 되어 '두려운 것들일 뿐이다'라고 이해한 수행자는 "그 물질과 정신들의 제일 처음 생겨남인 현재 생의 재생연결을 숙고해 보면" 그 제일 처음 생겨남을 '두려운 것이다'라고만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는 지혜가 두려움의 지혜, 허물의 지혜이다."(2권, 327쪽)

이 생에서 처음 일어나는 마음이 있다. 그것은 재생연결식이다. 임종순간에 업, 업의 표상, 태어날 곳의 표상을 대상으로 하여 마음이 일어나는데 바로 그 마음이 재생연결식이다.

재생연결식은 일생의 마음과 같다. 이를 바왕가의 마음이라고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존재를 지속하게 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면 일생을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개로 태어나면 일생을 개로 살아가게 된다.

사람이 도중에 개로 되는 일은 없다. 바왕가의 마음, 즉 존재지속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번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으로 일생을 살고, 한번 개로 태어나면 개로 일생을 살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중요하다. 결생할 때 개의 태에 들어가면 개로 일생을 살게 된다. 도중에 사람으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죽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는 "그 제일 처음 생겨남을 '두려운 것이다'라고만 생각한다."(2권, 327쪽)라고 했다.

어느 스님은 개를 키운다. 암캐가 벌써 두 번 출산 했다. 한번 출산할 때마다 새끼를 4-5마리 낳았다. 이는 원치 않는 임신에 따른 것이다.

절에서 기르는 개는 중성화 수술을 해 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암캐가 그렇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 매번 임신하게 될 것이다. 그때 마다 절에는 새끼들로 가득할 것이다. 이 새끼 개들을 어찌할 것인가?

 


스님은 새끼를 난 암캐에 대하여 보살이라고 말한다. 어느날 임신한 개를 발견 했을 때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 마치 어머니가 출산을 앞둔 딸을 돌보듯 했다. 출산 했을 때는 미역국을 끓여 주었다. 이쯤 되면 개팔자는 상팔자가 된다.

스님은 에스엔에스에 출산한 강아지들을 올린다. 어미 젖을 빠는 모습도 올렸다. 이런 사진에 대해서 "불쌍한 중생들!"이라고 댓글을 달았다. 그러면 스님은 "인간도 불쌍한 중생이지요."라며 답글을 달았다.

개나 인간이나 똑같은 중생이다. 스님 말은 맞다. 그러나 개와 인간은 다른 존재이다. 개는 오로지 본능으로만 사는 축생이지만 인간은 이성이 있는 고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차이점은 사유능력이다.

개는 언어능력이 없다. 이는 사유능력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은 언어가 있어서 사유할 수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간은 깨달을 수 있는 존재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개와 인간이 같을 수 없다. 육도윤회에서도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아 간다. 그럼에도 스님은 개와 인간을 같은 중생으로 보아 인간도 개와 같은 불쌍한 중생이라고 했다.

스님은 새끼 개들이 귀여운 것 같다. 막 출산 했을 때 사진과 함께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라고 했다.

강아지들은 어디서 왔을까? 축생의 과보로 태어난 것임에 틀림없다. 유튜브에서 본 19마리의 강아지도 축생의 과보로 왔을 것이다.

요즘 아파트 단지에서 개를 자주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유모차에 넣어 끌고 다닌다. 통계에 따르면 반려동물이 800만이라고 한다. 대체 얘네들은 어디서 왔을까?

 


한적한 집에 갑자기 강아지가 19마리 태어났다. 집은 온통 개 천지가 되었다. 대체 그 생명들은 어디서 왔을까?

아기가 태어나면 축하해 준다. 강아지가 태어나도 축하해줄까? 그것도 한 배에서 9마리나 10마리  나왔을 때 축하할 일일까?

강아지들을 보면 윤회의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한번 강아지로 태어나면 죽을때까지 개로서 일생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애완견이면 상팔자가 된다. 그러나 식용으로 사육되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강아지들을 보고서 태어남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전에는 아기가 태어나는 것에 대하여 윤회의 두려움으로 보았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축복이다. 정법이 살아 있다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천상의 신들은 윤회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오로지 즐거움만 있는 세계에서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축복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축생으로 태어나면 비참한 운명이 될 것이기 때문에 불쌍해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이 올린 사진에 "불쌍한 중생들!"이라고 댓글을 단 것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 허물의 지혜는 윤회의 두려움에 대한 지혜로 보인다. 이는 "재생연결은, 즉 다음 생에 태어남은 두려운 것이다."(2권, 325쪽)라고 알고 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면 수행자가 된다. 청정도론에서 따르면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수행승이라고 한다. (Samsara bhayam ikkhati bhikkhu)”(Vism.1.7)라고 했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면 누구나 수행승(bhikkhu)이다. 반드시 머리깍고 가사를 걸쳤다고 해서 수행승이 아니다. 가정주부라도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았다면 빅쿠가 된다.

강아지들을 보면 측은하다. "어쩌다가 개의 태에 들어가 강아지로 태어났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번 개로 태어 났으면 개로 일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축생의 운명은 가혹하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모른다. 더구나 정법시대에 태어났다면 행운이 겹친 것이다.

강아지들을 보면 귀여운 것도 있지만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 "예네들은 어쩌다가 강아지로 태어났을까?"라고.

2023-10-19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