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재가 우안거 88일차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0. 28. 10:44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재가 우안거 88일차
 
 
명상중에 일시적으로 밝아질 때가 있다. 이럴 때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M86.29)이라는 게송이 떠오른다. 앙굴리말라 장로가 읊은 것이다.
 
앙굴리말라 장로는 예전에 연쇄살인자였다. 장로는 부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장로는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M86.25)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범부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뀌었음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면 계보가 바뀐다. 전에는 탐, 진, 치에 찌든 범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가르침을 실천하면 많이 잡아 일곱 생 이내에 윤회가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앙굴리말라 장로는 이렇게 게송을 읊었다.
 
 
예전에는 방일하여도
지금은 방일하지 않는 자,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Thag.871)
 
저질러진 악한 일을
선한 일로 덮으니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Thag.872)
 
참으로 젊은 수행승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면
그는 세상을 비추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Thag.873)
 

 
앙굴리말라 장로는 예전에는 방일했었다. 이는 보시, 수행, 경전독송 등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방일하지 않는다. 이는 “길과 경지의 행복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길에서 얻어진 지혜로, 달이 구름에서 벗어나 허공을 밝히듯, 존재의 다발(五蘊)의 이 세계를 밝힌다.”(DhpA.III.169)라는 뜻이다.
 
반야심경에 “조견오온개공”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비추어 보니 오온이 모두 공하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구절은 법구경 주석에 실려 있는 “달이 구름에서 벗어나 허공을 밝히듯, 존재의 다발(五蘊)의 이 세계를 밝힌다.”(DhpA.III.169)라는 말과 너무나 유사하다.
 
오늘은 재가 우안거 88일째이다. 내일은 음력 칠월보름으로 회향하는 날이다. 오늘 낮 12시에는 담마와나선원 수행자들과 함께 북콘서트가 있다.
 
이제 하루 남았다. 그 동안 줄기차게 달려왔다. 오전에 한시간 동안 눈을 감고 꼼짝하지 않은 상태에서 달려 온 것이다. 이제 종착지에 이른 것 같다. 그렇다고 멈추지는 않는다. 우안거가 끝나도 한시간 좌선은 계속된다.
 
수행 초보자이다. 그런데 십년전이나 지금이나 늘 초보자라는 것이다. 위빠사나를 접한 것은 2008년 12월의 일이다. 다음해 2009년 1년 동안 한국명상원에 다녔다. 묘원선생으로부터 법문을 듣고 한시간 좌선을 했다. 50회 가량 했다. 그때도 초보였다.
 
항상 초보이다. 지금으로부터 15년전에도 초보였고, 10년전에도 초보였다. 지금도 초보단계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중에서 1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의 단계와 2단계인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의 단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 나는 언제나 초보 딱지를 뗄 수 있을까?
 
시지프 이야기가 있다. 시지프는 제우스로부터 끔찍한 형벌을 받았다. 커다란 바위를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인데, 문제는 바위를 간신히 산 정상에 올려놓으면 다시 산 밑으로 저절로 굴로 떨어진다는 것이다. 유튜브 ‘5분 뚝딱 철학’에서 본 것이다.
 
시지프는 산 밑으로 내려와 다시 바위를 산 정상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바위를 밀어 올려 놓으면 굴러 떨어지고, 올려 놓으면 굴러 떨어지고, 이러한 과정은 영원히 반복된다. 시지프가 하는 일은 무의미한 노동이다. 바로 이것이 시지프가 받은 형벌이다.
 
시지프가 하는 일과 우리가 하는 일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에 대하여 “우리가 바로 시지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시지프의 삶과 우리의 삶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시지프과 받은 형벌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매일 똑 같은 일을 반복하는것이다. 그리고 똑 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무의미한 일을 무한반복하는 것이다. 윤회하는 삶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지프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 갈까?
 
시지프는 바위가 정상에서 결국 굴러 떨어질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산 정상까지 밀어 올려야 하는 것은 시지프의 운명이다. 이는 우리가 윤회하는 삶에서 나고 죽는 일을 반복하는 것과 같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이다. 마치 군인이 삽질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무의미한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내가 무의미한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현타’가 올 것이다. 이럴 때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이는 불합리한 세계이다.
 
누가 이 불합리한 세상을 아름답다고 했을까? 부처님은 이 세상은 괴로움으로 가득한 세상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이 세상을 떠나갈 수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 어쨌든 살아 가야 한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것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인생 별거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 술이나 마시자.”라며 막걸리를 마시자고 말한다. 그렇다고 무의미한 삶이 유의미한 삶이 되는 것은 아니다.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설령 그런 행위가 자기기만일지라도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 청소부가 있다. 청소부는 거리를 비로 쓸고 있다. 비록 지위가 낮고 돈도 많이 벌지 못하지만 “이 세상을 깨끗이 쓸고 있다.”라며 의미를 부여하면 고귀한 행위가 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이 어제와 같은 삶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다. 마치 시지프가 바위를 끊임없이 굴리는 것과 같다. 군인이 형벌로 삽질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희망을 가져야 한다. 아무런 의미 없는 나날이지만 의미를 부여하면 고귀한 삶이 된다.
 
좌선을 하다 보면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게 된다. 이런 행위는 백 번이든, 이백 번이든, 오백 번이든 반복된다. 마치 시지프가 바위를 굴러 올리는 것 같다. 무의미해 보이는 일이다. 그러나 의미를 부여하면 달라진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에 대하여 “청정한 삶으로 인도하리.”라고 말할 수 있다. 설령 이런 생각이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자신을 기만하는 것일지라도 애써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명상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일지 모른다. 어떤 사람들의 눈에는 한시간 동안 꼼짝도 않고 앉아 있는 것 자체가 쓸데 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의미를 부여하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일이 된다.
 
고귀한 행위를 하면 고귀한 사람이 된다. 명상을 하고 있을 때 고귀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이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마치 산 정상에 서 있는 사람과 같다.
 
어떤 게으른 자는 산행하는 사람을 폄하한다. 그는 “올라 갔다가 내려 올것을 뭐하러 올라 가나?”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게으른 자는 올라 가보지 않아서 그 맛을 모른다.
 
산행하는 것은 마치 시지프처럼 아무런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산행하다 보면 재미를 느끼게 된다. 한발한발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쾌감이 찾아 온다. 산 정상에 섰을 때는 세상이 아래에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호연지기도 느낄 수 있다.
 
명상하는 것도 산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명상을 하다 보면 이 감각적인 세상에서 경험하는 거친 행복과 비할 바 없는 잔잔한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은 7시 49분에 좌선을 시작했다. 알람이 울릴 때까지 한시간 앉아 있었다. 늘 그렇듯이 배를 주관찰대상으로 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일 없이 새기는 것이다. 이런 행위가 의미 없어 보일지 모른다.
 
의미 없는 행위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의미 없는 행위를 무한반복 할 때 기쁨과 희열과 환희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등산하는 것과 같고 마라톤하는 것과 같다.
 
좌선 한시간은 늘 같은 상태는 아니다. 마치 날씨처럼 변화무쌍하다. 그런데 배의 부품과 꺼짐을 무한반복하듯이 새길 때 분명히 변화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환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좌선 중에 마치 전구를 켠 것처럼 일시적으로 환해질 때가 있다. 이럴 때는 잘 보인다. 마치 캄캄한 방에 불을 켠 것과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분명한 것이다. 그에 따라 기쁨과 행복도 있게 된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어떤 길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위빠사나 수행지침서를 보고 갈 뿐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은 등불 같은 것이다. 그런데 2권 생멸의 지혜에 대한 설명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물질과 정신이 생멸할 때마다 그것을 새겨 알면서 무상-고-무아의 특성들이 분명하게 드러난 수행자에게 생멸의 지혜가 완전히 구족되고 무르익게 되면 새겨 아는 것이 빠르고 예리하게 생겨난다. 저절로 계속해서 알면서 나아가는 듯이 생겨난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305-306쪽)
 
 
수행자가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런 말에 희망을 갖는다. 나도 생멸의 지혜에 이르면 저절로 그 다음 단계인 무너짐의 지혜 등이 저절로 일어날 것이라는 말이다.
 
위빠사나 수행 초보자이다. 지금으로부터 13년전에도 초보였고 지금도 초보이다. 마치 시지프처럼 바위를 계속 산 정상까지 굴렸다가 또 다시 굴리는 것 같다. 군인이 형벌로 삽질하는 것과 같다.
 
이번에 재가안거라 하여 세 달 앉아 있어 보았다. 오늘까지 88일 앉아 있어 본 것이다. 매일 오전 한시간 앉아 있었다. 후기를 두 시간 작성하면 세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오전은 수행으로 다 보내는 것이다.
 
지난 88일은 시지프의 바위굴리기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삽질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한시간 앉아 있었다. 앉아 있다 보면 “무언가 있겠지” “무언가 보이겠지”라는 심정으로 앉아 있어 본 것이다.
 
성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통증에 대한 것을 보았을 때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앉아 있다 보니 때로 일시적으로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밝음도 보았다는 것이다. 마치 반야심경에서 조견오온개공을 연상케 하듯이 배의 부품과 꺼짐, 그리고 엉덩이 닿음에 대한 새김도 분명하게 보았다는 것이다.
 
의미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의미 없는 일을 하는 것이고 돈이 되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돈이 되는 일을 한다면 세속적인 일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아마 생업이 될 것이다. 그러나 명상은 의미 없어 보이는 일을 의미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 외 다른 것 없다. 끊임 없이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저절로 될 것이라고 한다. 지혜가 인도하는 것이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
 
 
2023-10-28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