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한시간좌선 시작한지 백일 되었는데

담마다사 이병욱 2023. 11. 10. 12:04

한시간좌선 시작한지 백일 되었는데

 

 

좌선을 시작한지 백일이 되었다. 지난 731일 테라와다 재가 우안거가 시작했다. 118일까지 백일이 된 것이다.

 

백일기도를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마 그것은 몸과 마음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백일이 지나면 몸이 바뀐다고 한다. 세포가 바뀌는 것이다. 피도 바뀌고 살도 바뀌고 뼈도 바뀔 것이다. 백일 이전과는 다른 몸이 되는 것이다.

 

백일 동안 몸만 바뀌지 않는다. 마음도 바뀐다. 미쳐 날뛰는 듯한 마음은 백일이 지나면 제어될 것이다.

 

몸과 마음이 바뀌었을 때 새사람이 된다. 새로운 피가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새롭게 거듭 태어난 것 자체가 소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쯤되면 풀리지 않는 난제도 해결될 것이고 어떤 것을 해도 이루어질 것이다.

 

백일 동안 앉아 있었다. 매일 한시간 좌선을 목표로 했다. 재가 우안거 88일 동안 성과가 있었다면 앉아 있기 버릇이 든 것이다. 좌선을 생활화한 것이다.

 

 

오늘 나흘만에 앉았다. 나흘 만에 앉아 본다. 그동안 남도 여행을 23일 갔었다. 긴급하게 일감을 처리하느라 하루 앉아 있지 못했다.

 

나흘 공백은 컸다. 오늘 앉아 있어보니 집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한시간 동안 망상으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좌선 도중에 그만 두고 싶었다. 망상 때문에 좌선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심리적인 현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마음을 두면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린다.

 

무엇이든지 꾸준히 해야 한다. 공백기간이 있으면 연속성이 없어진다. 좌선도 그렀다. 나흘 공백을 가졌더니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거의 한시간 망상으로 보냈다. 그러나 이대로 갈 수 없었다. 끝나기 15분을 남겨 놓고 마음을 다시 잡았다. 자세를 바꾸고 다시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다.

 

초년운보다 말년운이라고 한다. 무엇이든지 마지막이 중요하다. 좌선도 그렇다. 대부분 시간을 망상으로 보냈을 때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단 오분이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다.

 

곧 알람이 울릴 것이다. 마치 생명이 끝나는 것처럼 울릴 것이다. 오분이라도 집중에서 성과를 낸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초반과 중반에 허송세월 했더라도 노년을 알차게 보낸다면 충분히 보상이 이루어지고도 남는다. 한시간 좌선에서 오분이라도 집중이 이루어지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시험 볼 때 초긴장상태가 된다. 시험시간이 끝나갈 때 더욱더 집중이 된다. 분치기, 초치기가 될 때 최고조가 된다. 마치 마라토너가 막판에 스퍼트 하는 것과 같다.

 

좌선 끝나기 오분전에 분치기, 초치기하는 심정으로 임했다. 마치 막판 스퍼트하듯이 내달렸다.

 

마침내 한시간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어쨌든 한시간 채웠으니 해야 할 바를 다한 것이다. 그러나 아쉬웠다. 한시간 대부분을 망상속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막판 분치기, 초치기, 스퍼트하듯이 오분 보냈는데 이것이 성과 있었다. 이런 페이스를 계속 유지 하고 싶었다. 알람이 울렸지만 계속 가고 싶었다. 요즘 속된 말로 알람 소리를 쌩깐 것이다.

 

여분의 좌선을 했다. 그러나 여분의 좌선은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다. 마치 해야 할 일을 마친 자가 언제든지 그만 두는 것과 같다. 도를 이룬 자가 언제든지 목숨을 내려 놓는 것과 같다.

 

여분의 죄선은 덤으로 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집중이 더 잘되었다. 이전에 한시간 동안 망상속에서 보낸 것과 대조적이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의도적으로 보고자 했다. 배의 부품을 새기고 배의 꺼짐을 새기고 엉덩이 닿음을 새기고자 했다. 이를 백 번이든 이백 번이든 반복해야 한다.

 

똑 같은 일을 반복할 때가 있다. 마치 시지프가 바위를 정상까지 굴려 올리기를 반복하는 것과 같다. 아무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떤 일이든지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면 고귀한 일이 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반복하다 보면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마치 등산할 때 정상을 향하여 한발 한발 옮기는 것과 같고 달리기 할 때 목적지를 향해 끊임 없이 반복적인 동작을 행하는 것과 같다.

 

이제 시간은 의미가 없다. 여분의 좌선에서는 언제든지 그만 둘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집중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순간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망상이 일어날 수 없다.

 

좌선을 하면 늘 주관찰대상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 집중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마하시방식에서는 명칭을 붙인다.

 

명칭을 붙이면 매우 효과적이다. 행선할 때도 처음에는 명칭을 붙인다. 발을 들 때 이라고 명칭 붙이고, 발일 내릴 때는 내림이라고 명칭 붙인다. 좌선할 때 배의 부품에 대해서는 부품이라고 명칭 붙이고, 꺼짐에 대해서는 꺼짐이라고 명칭 붙인다.

 

명칭 붙이면 어느 정도 집중이 된다. 이는 망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과 같다. 더 확실하게 하려면 닿음을 추가해야 한다. 엉덩이 닿음을 말한다. 그래서 부품, 꺼짐, 닿음, 부품, 꺼짐, 닿음,…”하며 새기는 것이다.

 

반복하는데 길이 있다. 부품과 꺼짐, 닿음을 새기다 보면 잡념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이렇게 백 번이든 이백 번이든 반복했을 때 변화가 있게 된다.

 

등산할 때 끊임없이 걷는다. 한발 한발 앞으로 하여 올라가는 것이다. 그런데 등산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잘못 디딜 때 넘어질 수 있다. 조심해서 한발 한발 내디뎌야 한다. 자연스럽게 집중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좌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집중이 이루어지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그리고 기쁨이 생겨난다. 순간적으로 환함이 있게 될 때 새김은 더욱더 선명해진다.

 

새김이 선명해질 때 어느 순간 멈춤이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약해지면서 미세하게 감지된다. 어느 순간 마치 정지된 듯한 때가 있다. 세상이 고요해지는 듯한 때가 있다. 동시에 눈앞이 훤해지는 것이다. 이런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은 멈추라고 했다. 부처님은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에게 앙굴리말라여, 나는 멈추었다. 너도 멈추어라.”(M86)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멈춘 사람이다. 모든 번뇌가 멈춘 사람이다. 그러나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멈춘 사람이 아니다. 부처님은 탐, , 치로 가득 찬 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앙굴리말라여, 나는 언제나

일체의 뭇삶에 폭력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그대는 살아 있는 생명에 자제함이 없다.

그러므로 나는 멈추었고 그대는 멈추지 않았다.”(M86)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말을 듣고 멈추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교단에 들어가 수행승이 되었다.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가 되었다. 어느 날 앙굴리말라는탁발 할 때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M86)라고 말했다.

 

앙굴리말라는 거듭 태어났다. 그것도 성자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이것은 멈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좌선 중에 멈춤의 순간이 있다. 마치 정지한 것 같다. 번뇌망상이 있을 수 없다. 오로지 평온만 있을 뿐이다. 이런 상태를 계속 지속하고 싶었다. 그런데 호흡이 점점 거칠어진다. 동시에 배의 부품과 꺼짐도 커진다.

 

멈춤의 순간이 있을 때 한단계 더 깊이 들어가는 것 같다. 이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전과 다른 새김이라는 것이다. 마치 자동적으로 새겨지는 것 같았다.

 

덤으로 사는 인생은 언제든지 삶을 놓아 버릴 수 있다. 여분으로 하는 좌선 역시 언제든지 놓아 버릴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집중이 잘 되는 것이었다. 마치 들어가고 또 들어가는 식으로 멈춤의 순간이 있을 때 마다 부품과 꺼짐을 새겼다.

 

어느 순간 부품과 꺼짐이 매우 약해 졌다. 느껴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마치 멈춘 것 같다. 이렇게 멈추어졌을 때 마음이 평온해졌다. 계속 이대로 있고 싶었다.

 

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다. 얼마나 지났을까? 스마트폰 진동을 느꼈다. 누군가 전화한 것이다. 이번에도 쌩까기로 했다. 이 평온을 계속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을 때 그만 두고 싶었다. 살 만큼 산 사람이 생을 놓고 싶듯이, 어느 정도 만족했을 때 내려 놓고자 했다. 그래서 다리를 풀었다.

 

시계를 보았다. 거의 두 시간 앉아 있었다. 아침 729분에 시작해서 923분에 다리를 풀었으니 1시간 54분 내달린 것이다.

 

좌선을 시작한지 102일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초보수행자이다. 처음 위빠사나를 접했을 때인 2009년에도 초보이었고 지금도 초보이다.

 

수행을 본격적으로 해 본 것은 이번 테라와다 우안거가 처음이다. 스승없이 매일 백권당에서 한시간 앉아 있기 한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지식 없이 앉은 것은 아니다.

 

위빠사나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이는 2009년 묘원선생으로부터 1년 동안 들은 것이 있고, 2017년 김도이 선생으로부터 세 달 동안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이 밖에도 20181월에 미얀마에서 2주간 집중수행 했었고, 7월에는 직지사에서 1주일 동안 역시 집중수행 했었다.

 

기도는 골방에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수행도 골방에서 해야 할 것이다. 수행을 보여주기로 한다면 진척이 더딜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백권당의 명상공간은 훌륭한 수행처가 된다.

 

백권당 명상공간에서 홀로 좌선했다. 우안거 88일 동안 좌선하면서 이런저런 체험 했다. 이를 모두 기록해 놓았다. 어느 스님은 이런 기록을 책으로 내는 것이 어떤지 물어 보았다.

 

스님의 제안에 동의 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우안거 88일 동안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고자 합니다. pdf로 만들어서 블로그에 올려 놓겠습니다. 누구나 가져 갈 수 있습니다.”라고 답글을 달았다.

 

만년 초보수행자가 우안거를 보냈다. 그리고 좌선을 시작한지 백일이 지났다. 그러나 대단한 것은 아니다. 안거를 보내면서 경험한 것을 있는 그대로 쓴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오늘 거의 두 시간 앉아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는 망상으로 보냈으나 알람 이후에는 심기일전하여 만족할만한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런 것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왜 그런가? 선정삼매는 그 어떤 것이라도 조작이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경전적 근거가 있다.

 

 

장자여여기 수행승이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여의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난 뒤사유와 숙고를 갖추고 멀리 여읨에서 생겨나는 희열과 행복을 갖춘 첫 번째 선정에 듭니다그는 이와 같이이 첫 번째 선정도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다그런데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압니다그는 그것에 입각해서 번뇌의 부숨을 성취합니다.”(A11.16)

 

 

선정은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또한 의도된 것이라고 했다. 이는 조작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선정수행과는 다르다. 선정 수행은 대상에 몰입되는 것을 말한다. 대상과 하나가 되었을 때 이는 만들어진 것이고 의도된 것이고 조작된 것이다.

 

이미지나 언어를 대상으로 하여 집중했을 때 이는 빤냣띠(개념)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은 선정으로는 무상, , 무아라는 법의 성품을 알 수 없다.

 

법의 성품을 보려거든 위빠사나 수행을 해여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어떠한 것이든 만들어지고 의도된 것은 무상하고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A11.16)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빤냣띠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빠라맛타(실재)를 보라는 것이다.

 

수행중에 빛을 볼 수 있다. 수행중에 평온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나에게 이러한 빛이 생겨났다그러나 이것은 무상한 것이고유위적인 것이고조건적으로 생겨난 것이고파괴되기 마련이고괴멸되기 마련이고사라지기 마련이고소멸되기 마련이다.”(Vism.20.126)라고 지혜로서 판별하고 고찰하라고 했다.

 

오늘 100일 좌선에서 평온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는 만들어진 것이다. 부서지고 소멸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실재를 보아야 한다. 모든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일상에서 현상을 무상, , 무아로 보고자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띠가 있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삼빠자나도 있어야 할 것이다. 마치 탁발하는 수행승이 맨발에 가시가 찔릴까 봐 조심하며 걷는 것과 같다. 산행에서 하산 하는 자가 한발한발 아래로 내디딜 때 주의하며 딛는 것과 같다.

 

일상에서 사띠와 삼빠자나가 있어야 한다. 단지 새김만 있어서는 안된다. 지혜로운 주의기울임도 있어야 한다. 나는 언제나 새김(사띠)과 올바른 알아차림(삼빠자나)이 있는 삶이 일상이 될까?

 

 

2023-11-10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