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길거리 노점트럭에서 양말구입하기

담마다사 이병욱 2024. 7. 5. 21:28

길거리 노점트럭에서 양말구입하기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길거리 노점상이다. 노점에서 파는 물건은 가능하면 팔아 주려고 한다. 지역에 사는 사람이 사주지 않으면 누가 사줄까?
 
오늘 저녁 대로를 건너다가 양말노점상을 발견했다. 트럭에서 물건을 파는 트럭노점이다. 잘 만났다. 지체 없이 다가갔다.
 
노점에 양말이 잔뜩 쌓여 있다. 어느 것을 사야 할까? 선택은 길지 않았다. 팔아 주고자 작정하고 다가 갔으므로 집으면 된다.
 

 
회색 양말 한뭉치를 들었다. 네 켤레이다. 가격은 놀랍게도 오천원에 지나지 않는다.
 
양말 가격이 얼마인지 모른다. 노점에서 오천원에 네 개이면 싸다고 생각한다. 브랜드는 ‘NIKE’이다. 나이키가 아닌 유사상표이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팔아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서민들의 삶이 갈수록 힘들어 지는 것 같다. 가게 간판이 자주 바뀌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곳저곳 어디를 보나 커피점이다. 안양로 만안사거리 부근에도 여러 개 있다. 구멍가게 보다 더 많은 곳이 커피점이다.
 
식당 간판도 자주 바뀐다. 터가 좋지 않은 것일까 일이년이 멀다하고 바뀌는 것 같다.
 
그 칼국수 집은 십년 이상 장사했다. 내가 이곳에 오기도 전에 장사했다. 어느날 내부수리 하는 것을 보았다. 업종이 바뀐 것이다. 왜 그만 두었을까? 그 집은 아마 17년 이상 영업 했던 것 같다.
 
생겨나는 것은 커피점과 식당이다. 이렇게 많은 가게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팔아주지 않으면 견디기 힘들 것이다.
 
아침 백권당으로 가는 길에 무인가게를 보았다. 놀랍게도 ‘무인옷가게’이다. 아이스크림이나 커피 무인가게는 보았지만 옷을 무인으로 파는 가게는 처음 본다.
 
무인가게의 확산은 상상을 초월한다. 편의점도 무인으로 하는 것을 보았다. 이는 키오스크(kiosk)라 불리우는 무인단말기의 보급과도 관련이 있다.
 
요즘 웬만한 식당은 무인단말기가 설치 되어 있다. 대면으로 주문하던 때와 비교된다. 처음에는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으나 자주 사용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아마트에 무인계산기가 등장 했을 때 기피 했었다. 그러나 한번, 두 번 사용하다 보니 익숙해졌다. 지금은 오로지 무인계산대로 향한다.
 
무인옷가게가 생겼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옷가게가 무인으로 되었다면 다른 것도 따라 갈 것이다.
 

 
무인시스템을 적용하면 인건비가 절감될 것이다. 집에서 모니터로 감시하면 되리라 본다. 처음에는 불편할지 모르지만 자주 사용하다 보면 적응된다.
 
무인시스템이 등장한 것은 살아 남기 위한 고육지책이라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인건비가 절감된다. 이렇게 되기까지 우리나라 인터넷과 정보통신기기의 발달이 크다고 본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어쩌면 불평등한 것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모두 다 똑같을 수 없다. 이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제도적인 모순도 있다.
 
폐지를 주어서 사는 사람도 있다. 주로 나이든 노인들이다. 잘 보이지 않지만 주변을 보면 발견할 수 있다.
 

 
처음부터 폐지를 줍지 않았을 것이다. 벌어 먹고 살 것이 폐지 줍는 것밖에 없어서 줍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어떻게 도와 주어야 할까?
 
보시전용통장을 만들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주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이를 ‘나눔통장’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이는 ‘준다’는 말보다 ‘나눈다’는 말이 더 좋기 때문이다.
 
A사로부터 돈이 입금 되었다. 지난 4월부터 5월까지 한달동안 작업한 금액이다. 부가세를 포함해서 254만원이다.
 
A사 수주를 받았을 때 보시통장에 넣기로 했다. 점심약속도 약속이고 자신과의 약속도 약속이다. 부가세 비용을 제외한 231만원을 보시전용통장으로 이체했다.
 
보시전용통장 잔고를 확인해 보았다. 369만원이 찍혀 있다. 처음 4월 23일 288만원부터 시작해서 잔고가 137만원까지 줄었으나 231만원을 채워 넣어서 369만원이 되었다.
 
통장에 돈이 있으면 든든하다. 보시전용통장도 그렇다. 마음 놓고 나눔 해도 될 것 같다.
 
양말은 꼭 사고 싶었다. 며칠전 양말트럭을 발견 했을 때 사진만 찍어 두었다. 몰래 찍은 것이 미안했다. 그때 팔아 주어야 했다.
 
오늘 저녁 양말트럭을 발견했을 때 반가웠다. 며칠전 사지 못한 것을 사고자 했다.
 

 
집에 양말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또 샀다. 양말은 많이 사도 괜찮다. 이왕이면 또 같은 색깔, 똑 같은 사이즈로 사야 한다. 품질은 따지지 않는다. 팔아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길거리 노점에서 물건을 즐겨 산다. 버스정류장 한켠에 있는 길거리 노점상이 대상이다. 호박, 상추 등 야채를 파는 좌판에서 주로 산다. 밤이나 대추 등을 파는 트럭노점에서 물건을 사기도 한다. 건빵 등을 파는 트럭 노점에서 사기도 한다. 이번에는 양말트럭노점에서 샀다.
 
사람 사는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불평등한 것이다. 그렇다고 불공정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각자 지은 업이 있어서 공평하지 않고 불평등한 것이다.
 
길거리에서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단지 연민으로 본다면 상대방은 불쾌해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으로 보아야 할까?
 
부처님 가르침에 답이 있다.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는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S15.11)라고 보는 것이다.
 
이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무명과 갈애 때문에 윤회한다.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속박되어 사는 한 유전하고 윤회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한때 저와 같던 때가 있었다.”라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공평하고 평등한 마음이다.
 
흔히 자애의 마음을 내라고 한다. 연민의 마음을 내라고 한다. 합하여 자비의 마음을 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자칫 하면 자만에 빠질 수 있다. 우월적 자만에 따른 자비의 마음이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을 보았을 때 평등의 마음, 평정의 마음을 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는 업자성정견에 따른 것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이고 나는 업의 상속자이다.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을 보았을 때 “나도 한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마음을 낸다면 이는 업자성정견으로 본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주변에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은 많다. 부처님 당시 끼싸 고따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부처님 당시 끼싸 고따미는 죽은 아기를 살리고자 했다. 그러나 살지 못했다. 그녀는 부처님에게 찾아 갔다. 부처님은 “아들이나 딸이나 다른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흰 겨자씨를 구해 오면 살려 주겠다.”(DhpA.II.270-275)라고 했다.
 
끼싸 고따미는 죽은 아이를 등에 업고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아들이나 딸이나 다른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집집마다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다는 것과 마을마다 산 자 들보다 죽은 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사람이 죽지 않은 집에서 흰 겨자씨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인 것을 알았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그녀에게 생자필멸의 도리를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서 “불사의 진리를 보지 못하고 백 년을 사는 것 보다 불사의 진리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것이 낫다.(Dhp114)”고 가르쳐 주었다.
 
주변에 끼싸 고따미와 같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누구나 다 겪는 것이다. 끼싸 고따미만 특별한 일을 겪은 것이 아니다.
 
불행은 누구나 겪는 것이다. 어느 가정이든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듯이, 어느 집이든지 불행에 처하지 않은 집은 없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지 모르지만 한 꺼풀만 벗겨 보면 불행한 것 한두 가지쯤은 가지고 있다.
 
세상은 돌고 돈다. 개인도 돌고 돈다. 지금 이 행복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언제 불행이 닥칠지 모른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았던 것이 나에게 현실이 될 수 있다. 
 
길거리 노점을 만나면 적극적으로 사주고자 한다. 돈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후원하는 것보다 더 낫다. 무상으로 주는 것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 정당하게 거래하는 것이다. 사는 사람은 팔아 주어서 좋고 파는 사람은 팔아서 좋은 것이다.
 
길거리에서 물건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서민이다. 길거리 물건은 서민이 팔아 준다. 지역에 사는 사람이 팔아 주지 않으면 누가 팔아 줄까? 양말을 들고 오는 내내 마음은 충만 되었다.
 
 
2024-07-0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