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권 담마의 거울 2023,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지 않도록
칠월도 끝자락이다. 이렇게 또 한달이 지나간다. 일년 열두 달 가운데 일곱 달이 지나갔고 이제 다섯 달이 남았다. 남은 기간은 사십 프로에 해당된다. 인간 팔십 세를 기준으로 한다면 오십칠 세이다.
세월은 차츰 나를 밀어낸다. 청춘의 세월에서 밀린지는 아주 오래 되었다. 중년을 넘어 노년에 이르렀다. 그 동안 나는 무엇을 했던가?
흘러가는 세월을 그대로 놓아 둘 수 없다. 세월을 붙들어 매 두고자 한다. 글쓰기만한 것이 없는 것 같다.
오늘 132번째 책 만드는 날이다. 이 글은 132번째 책의 서문이다. 늘 현재형으로 쓴다.
이번에 만든 책 제목은 ‘132 담마의 거울 2023’이다. 총 132번째 책으로 2023년 1월부터 12월까지 경전을 근거로 하여 쓴 글이다. 모두 42개의 글에 353페이지이다. 참고로 목차는 다음과 같다.
(목차)
1. 지금 이순간에 최후를 맞이한다면
2. 확신에 찬 믿음으로 니까야를
3. 담마다사, 어떻게 가르침의 거울에 비추어 볼 것인가?
4. 스님의 권위와 학자의 권위
5. 앗따닷타 존자의 "뭣이 중헌디?"
6. 여인 대처법 네 가지
7. 오온이 윤회한다
8. 비린내 나는 세상에서
9. 코끼리 조련사가 되어야
10. 업자성정견과 중생중도
11. 법념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12. 법회 의식할 때 초전법륜경을 독송하자
13. 고락중도가 팔정도인 이유는
14. 맛의 갈애로 인한 불평등의 기원
15. 불교에서 신통의 기적이란?
16. 즐기는데 한계가 없는 도박
17. 디가니까야 대장정 7개월 보름
18. 자신을 어떻게 등불로 삼을 것인가?
19. 깨달음이 무엇인지 알고자 한다면
20. 마음은 영원한 청년인데
21. 스님 타이틀이 부끄럽다, 윤회를 부정하는 H스님
22. 세상의 흐름대로 살면 골로 간다
23. 망갈라경이 행복경이라고? 승가이기주의와 번역참사를 보고
24. 행복마저 초월하라 했거늘
25. 누가 깨달음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는가?
26. 머리맡에 상윳따니까야
27. 불교계의 미인도는?
28. 가르침의 도둑 위장출가자가 본 것은
29. 나는 그 길을 따라 갔다
30. 출가는 왜 하는가? 중학교 때 출가하려 했는데
31. 가죽끈에 묶인 삶
32. 똥강아지들를 보면
33. 법문을 하면 천신도 듣는다고 하는데
34. 축생도 하느님의 세계(色界)에
35. 왜 목숨 걸고 바라밀공덕을 쌓아야 하는가?
36. 왜 버림이 칠성재(七聖財) 중의 하나일까?
37. 자신이 수다원인지 아는 방법이 있는데
38. 사중축복과 오중축복의 차이는?
39. 진정으로 홀로 지내는 자는?
40. 열반체험 없이도 수다원이
41. 주체적인 삶을 살고자
42. 오온을 살인자로 보아야, 오온의 악마성
늘 현재를 살고자 한다. 목차에 있는 글은 그날 현재시점에서 작성된 글이다. 서문도 역시 현재시점에서 쓴다.
현재를 살면 영원히 살게 된다. 본래 불교에서는 영원이나 영혼과 같은 말을 쓰지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에서 이렇게 새김이 있다면 다른 곳에 있지 않아서 늘 지금 이순간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목차에서 1번 글은 ‘지금 이순간에 최후를 맞이한다면’(2023-01-03)라는 제목의 글이다. 디가니까야 23번경을 읽고서 느낀 것을 쓴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죽는다면 나는 어떠한 느낌이 들까? “해야 할 일이 있는데”라고 생각한다면 인생을 제대로 산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남들 해 보는 것 다 해보면 잘 사는 것일까? 원 없이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잘 사는 것일까?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삶이라고 볼 수 있을까?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친 사람이 있다.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다. 아라한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아라한송을 보면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M57)라고 분명히 아는 것이라고 했다.
초기경전에서 자주 접하는 말은 ‘아라한송’이다. 아라한이 되었을 때 스스로 선언하는 게송을 말한다. 핵심은 해야 할 일을 다 마친 것이다. 어떤 해야 할 일인가? 그것은 ‘청정한 삶(brahmacariya)’을 말한다.
청정한 삶을 살면 해야 할 일을 다해 마치는 것이 된다. 번뇌의 소멸에 이른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더 이상 윤회하지 않을 것도 스스로 알게 된다. 불사(不死)가 되는 것이다.
불사는 죽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그렇다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자아가 사라졌으니 불사가 되는 것이다. 무아의 성자에게 불사이면 불생이 된다. 모든 불교도들이 바라는 것이다.
요즘 안거를 하고 있다. 이름하여 ‘재가우안거’이다. 재가자가 일상에서 안거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재가우안거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주 다니면 길이 된다. 재가우안거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규칙이 생겨날 것이다. 선원에 모여서 안거한다면 매일 새벽예불시간에 팔계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재가자가 삶의 현장에서 생업에 종사하면서 안거를 한다면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재가우안거 기간 동안 매일 삼십분 좌선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누구나 지킬 수 있는 평범한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한다. 늘 새김을 유지하는 것이다.
한걸음도 무심코 걷지 말라고 했다. 일거수일투족에 대하여 새김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일상에서의 새김은 행선과 좌선에서의 새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전과 논서를 보는 것도 새김에 해당된다.
매일 경전과 논서를 보고 있다. 머리맡에 놓고 본다. 매일 조금씩 본다. 매일 꾸준히 자기 전과 잠에서 깨어나서 본다.
여기 낙숫물이 있다. 똑똑 떨어지는 낙수는 세월이 흐르면 바위를 뚫을 것이다. 매일 조금씩 읽는 경전과 논서는 어느 때 다 읽었음을 알게 된다. 목차 17번에 있는 ‘디가니까야 대장정 7개월 보름’(2023-06-01)도 이에 해당된다.
디가니까야읽기에 도전했다. 마치 디가니까야라는 대륙을 횡단하듯이 읽은 것이다. 방대한 경전도 매일 머리맡에 놓고 조금씩 읽다 보니 다 읽게 된 것이다. 7개월 보름 걸렸다.
매일 하루를 일생처럼 살아간다. 매일 잠에서 깨는 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 하루의 일생이 시작되는 것이다.
하루를 보람 있게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길이 남을 일을 해야 한다. 나에게는 있어서는 글쓰기가 이에 해당된다.
매일 오전에 글을 쓴다. 정신이 맑을 때 쓰는 것이다. 오후나 저녁에는 잘 써지지가 않는다. 마음이 혼탁되어 있기 때문에 쓸 마음이 나지 않는 것이다.
공부는 젊었을 때 해야 한다. 수행도 젊었을 때 해야 한다. 힘이 있을 때 학업을 이루어야 하고 힘이 있을 때 도와 과를 이루어야 한다.
나이 들면 학업도 수행도 힘들어진다. 노년수행이 어려운 것은 힘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한시간 앉아 있어야 하나 자꾸 자세를 바꾸면 법의 성품을 보기 힘들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 버렸을까? “젊었을 때 불교를 만났더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이삼십대 때의 한국에는 불교가 없었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부재하던 시기였다.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이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오래 되지 않는다. 위빠사나수행의 경우 팔십년대 후반부터 알려 졌다. 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오게 된 것은 2000년 이후의 일이다.
위빠사나수행을 하고 있다. 빠알리삼장을 읽고 있다. 나에게 이런 것이 가능한 것은 십여년 밖에 되지 않는다. 한국적 현실에서 크게 늦은 것은 아니다.
요즘은 마하시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읽고 있다. 마하시사야도가 1962년에 법문한 것을 책으로 만든 것이다. 논서를 읽다가 ‘7일 일찍 죽어서 도과를 놓쳐버리다’라는 말에 크게 공감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7일 일찍 죽어서 도과를 놓쳐버리다)
“Mahājāniyo kho āļāro kālāmo.”
“Kālāmo깔라마 가문의 ālāro알라라는 mahājāniyo크게 잃었구나: 크게 손해를 보았구나.”
무엇 때문에 안타까워하셨는가 하면, 만약 알라라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된다면 즉시 법을 알고 보아 아라한과를 얻어 아라한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특별한 자질이 있음에도 7일 일찍 죽어버려서 어떠한 특별한 법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가 도달한 무소유처 탄생지에는 물질은 없고 마음과 마음부수라는 정신법만 있습니다. 물질이 없어 들을 수 있는 귀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서 법을 설한다 해도 들을 수 없습니다. 그 탄생지는 수명도 6만 겁이나 됩니다. 그 수명이 다 하면 인간의 생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렇게 인간으로 태어나도 부처 님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범부로만 업에 따라 윤회해 야 합니다. 사악처에 떨어져 여러 괴로움과 고통도 수없이 겪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알라라가 7일 일찍 죽어서 매우 크게 잃었다고 마음으로 안타까워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본 승이 설하는 새김확립 수행법을 듣지 못한 채, 혹은 들었어도 수행하지 않은 채 죽는 이들 중에 이러한 특별한 법을 얻을 만한 바라밀을 가지고 있었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회를 놓쳐버리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법을 듣는 참사람들은 그렇게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담마짝까법문, 91-92쪽)
보살은 정각을 이루어 부처가 되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실험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여러 가지로 검증을 거쳐서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는 진리임을 선언했지만 타인을 상대로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제품을 개발할 때 하나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서라도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결과가 나왔을 때 ‘양산성’이 있다고 말한다. 의사가 새로운 치료 방법을 발견했다. 보편적인 치료방법이 되려면 동일한 결과가 나와야 한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렸다. 사성제는 고, 집, 멸, 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세 번 굴리면 총 열두 번 굴리는 것이 된다. 이를 ‘삼전십이행상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검증했다. 그래서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S56.11)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빠르게 이해할 사람이 필요 했다. 가장 먼저 알라라 깔라마가 떠올랐다. 그러나 일주일 전에 죽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알라라 깔라마는 그 성품이 위대했다. 만약 그가 가르침을 들었다면, 신속하게 이해 했을 것이다.”(M26)라고 말했다.
알라라 깔라마는 7일 먼저 죽어서 부처님 가르침을 들을 수 없었다. 부처님 가르침을 들었다면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가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최상의 진리와 인연이 없었다.
수행을 해서 높은 선정의 경지에 올라 갔다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을 접하지 못하면 어떤 운명이 될지 모른다. 무소유처천에서 6만겁을 살아도 복과 수명이 다하면 어떤 세계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미얀마 속담에 “빛나던 범천도 돼지우리속에서는 꿀꿀거리네.”라는 말이 있다.
우따까 라마뿟따는 하루 전에 죽었다. 하루 전에 죽어 비상비비상처천에 태어났다. 수명이 무려 8만4천대겁의 천상이다. 우주가 8만4천번 성주괴공할 동안 천상에서 보내는 것이다. 복과 수명이 다하면 어떤 세계에 떨어질지 모른다.
기회 있을 때 잡아야 한다. 기회는 늘 오지 않는다. 부처님의 정법은 살아 있다. 빠알리삼장이 전승되어 왔고, 팔정도 수행이 있고, 팔정도 수행으로 도와 과를 이룬 성자가 있다면 정법시대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에 푹 빠져 있다. 어떤 이는 이런 것을 폄하할지 모른다. 선불교 전통이 있는 한국불교에서는 패싱할지 모른다. 그러나 짧은 기간 동안 이것저것 겪어 보았지만 마하시사야도의 법문만한 것이 없다.
마하시 사야도는 철저하게 경전을 근거로 하여 법문한다. 또한 논서와 주석에 근거한다. 그런데 이론으로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행과 관련하여 말한다.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한 법문을 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을 접한다는 것은 행운이다. 그래서일까 사야도는 “지금도 본 승이 설하는 새김확립 수행법을 듣지 못한 채, 혹은 들었어도 수행하지 않은 채 죽는 이들 중에 이러한 특별한 법을 얻을 만한 바라밀을 가지고 있었어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기회를 놓쳐버리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92쪽)라고 말했다.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한다. 늦은 나이에 불교를 만난 것도 기회이다. 초기불교를 만난 것은 좋은 기회이다. 그런데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을 만난 것은 기회중의 기회라는 것이다. 사야도는 “지금 법을 듣는 참사람들은 그렇게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쳐버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92쪽)라고 말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나이를 먹어도 두렵지 않다. 가르침과 늘 함께 할 수 있다면 공덕 짓는 삶이 된다. 오래 살면 살수록 공덕이 쌓이는 삶이 된다. 지금 죽어도 좋은 것이다.
2024-07-31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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