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어떻게 해야 죽음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담마다사 이병욱 2024. 9. 15. 11:35

어떻게 해야 죽음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밝고 화창한 백권당의 일요일 아침이다. 이런 날에 죽음을 생각해 본다. 어떻게 하면 웰다잉(well dying)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오늘 재가우안거 58일째 되는 날이다. 어제는 슬픈 날이었다.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다. 같은 학과 동기가 암투병하다 죽은 것이다.
 
친구의 죽음
 
올해 나이 만으로 예순다섯, 짧지 않은 나이이다. 그러나 백세를 바라보는 시대에 아쉬운 나이이다.
 
친구는 해남에 살았다. 안양에서 살다가 해남으로 귀촌해서 농사지으며 산 것이다. 십년이 약간 넘었다. 작년에는 늦은 나이에 손해평가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벌이를 하기도 했다. 농작물 피해평가 일을 한 것이다.
 
친구는 올해 초에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는 중에 소장에 문제가 생겨서 또 수술을 받았다. 그러다 보니 장루를 두 개나 차게 되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 되었다. 병원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일주일 전 친구 처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오래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제까지 경과에 대해서 상세하게 들었다.
 
무력감을 느꼈다.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 친구 처에게 다음과 같이 카톡을 보냈다.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지난번 전화 주셨을 때 참으로 슬펐습니다. 그 동안의 과정에 대한 것을 들으니 두 사람 모두 엄청난 괴로움과 슬픔과 고통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듣고 제가 해 줄 수 없는 것에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다만 산 것에 후회가 없다면 잘 살았다고 봅니다. 농사짓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삶입니다.
 
여러 날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 이렇게 살아 있어도 언젠가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죽음명상 시에서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의 삶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만으로 살아갑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래서 건강의 자만, 젊음의 자만, 삶의 자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건강은 결국 질병에 종속되고,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고, 삶은 죽음에 종속되고 맙니다. 누구하나 예외 없습니다.
 
참으로 슬픈 세상입니다. 그러나 산 사람은 살아야겠지요. 오래오래 살아 다 죽고 없을 때 자신만 남아 있다면 더욱 더 슬플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도 어쩌면 행복일 것입니다.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다만 빨리 가고 늦게 가는 차이입니다. 저는 이렇게 오늘도 내일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친구 처는 친구의 고향친구이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동갑내기인 것이다. 둘 다 배우자를 떠난 보낸 상태에서 만났다. 친구가 고향 해남으로 낙향 했는데 그때 만난 것이다.
 
친구부부는 2014년 혼인서약을 했다. 초등학교 친구들, 중학교 친구들, 고등학교 친구들, 대학교 친구들을 불러서 목포 신안비치호텔에서 서약식을 한 것이다. 그때 대학친구 다섯 명이 참석했다.
 
친구부부는 해남에서 농사 지으며 살았다. 해남 특산품인 밤호박과 꿀고구마를 주로 생산했다. 이에 홍보 해 주었다. 매년 철마다 특산품이 출하되는 시기에 글을 써서 블로그, 페이스북, 카톡, 밴드에 알린 것이다.
 
장례식은 목포에서 치룰 줄 알았다. 그러나 광명에 있는 중앙대광명병원이 장례식장이 되었다. 아들이 사는 곳에서 치루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친구들이 멀리 가지 않게 되었다.
 
어제 저녁 일곱 시에 친구들이 모였다. 모두 다섯 명 모였다. 2014년 서약식 때 참석 했던 사람은 세 명이다. 오늘도 친구들이 올 것이다.
 
다음은 우리차례야.”
 
작년 연말에 동기 송년회가 있었다. 코로나 이후 처음 모였다. 그때 한 친구가 일어나서 “다음은 우리차례야.”라는 말을 했다.
 
동기모임에서 상조담당을 하고 있다. 상조통장을 만들어서 관리하는 역할이다. 자신의 부모나 처가의 부모의 상이 있을 때 동기깃발과 조화를 보내는 역할을 한 것이다. 거의 십 년 가까이 했다.
 
상조통장의 잔고가 거의 바닥 났었다. 동기들의 모연으로 만들어진 통장이다. 이에 더 이상 모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상당수가 돌아 가셨기 때문에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랬더니 한 친구가 일어서서 “다음은 우리 차례야.”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말은 현실이 되었다. 동기 가운데 죽은 자가 생긴 것이다. 수십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다. 동기들의 죽음이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이제 스타트를 끊은 것일까?
 
움직일 힘만 있어도 축복
 
안양에서 중앙대광명병원까지는 가깝다. 시내버스를 타고서도 갈 수 있다. 차를 가져 가지 않은 것이다.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었다.
 
장례식장에서 소주와 맥주를 마셨다. 안거기간 중임에도 마신 것이다. 그렇다고 인사불성이 되도록 마신 것은 아니다. 목만 축이는 정도였다.
 
몸은 민감한 것 같다. 조금 마셨을 뿐인데 아침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빈속에 마셨기 때문일까? 가슴에 약간 통증이 왔다.
 
몸에 어떤 병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설령 병이 있다고 할지라도 수술은 받지 않으려 한다. 친구가 장루를 두 개나 달고 고통스럽게 떠난 것을 보면 몸에 칼을 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친구의 죽음에 마음이 우울했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웰다잉’에 대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을까?
 
며칠전 후기를 쓴 후 명학공원에 산책 나갔다. 그때 만안구청사거리에서 리어카에 폐지를 끌고 가는 노인을 보았다. 허리가 굽은 할머니이다. 무엇이 그토록 모진 삶을 살게 하는 것일까?
 

 
폐지 줍는 노인을 보면 동정심이 일어난다. 하나 같이 등이 굽고 힘이 없는 노인들이다. 리어카에 폐지를 잔뜩 싣고 힘겹게 끌고 가는 것을 보았을 때 병자를 떠올렸다.
 
중병에 걸린 사람은 움직일 힘도 없다. 누워서 지내다시피 하는 병자에게 폐지 줍는 노인을 보면 “움직일 힘만 있어도 축복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다.
 
가슴통증은 사라졌다. 행선할 때도 좌선할 때도 미세한 통증이 있었으나 지금은 느끼지 못한다. 아프다고 하여 병원에 가면 이것 저것 꼽게 되는데 그 순간부터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친구 처는 친구를 병원에서 탈출하게 한 것에 대하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세 가지 만용으로 살아가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만용으로 살아간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의 자만으로 살아가고, 젊은 사람은 젊음의 자만으로 살아가고, 행복한 사람은 삶의 자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자만하는 삶은 괴로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나는 늙음에 종속되었으며 늙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자주 관찰해야 한다.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나는 질병에 종속되었으며 질병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자주 관찰해야 한다.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나는 죽음에 종속되었으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다.’라고 자주 관찰해야 한다.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나는 모든 사랑하는 것과 마음에 드는 것과 헤어지고 이별해야 한다.’라고 자주 관찰해야 한다. 여자나 남자나 집에 있는 자나 출가한 자나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의 원인자이고 업의 친연자이고 업의 의지처이고 내가 선이나 악을 지으면 그 상속자가 될 것이다.’라고 자주 관찰해야 한다.”(A5.57)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고,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고, 삶은 죽음에 종속된다. 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괴로움의 진리를 설했다. 여기서 멈추었다면 염세주의자로 몰렸을 것이다. 법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지 못했을 것이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과 해법까지 말했다.
 
지금 건강하다고 하여 이 건강이 천년만년 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젊음 역시 천년만년 가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행복 또한 천년만년 가지 않는다. 반드시 건강은 질병에 종속되고, 젊음은 늙음에 종속되고, 삶은 죽음에 종속된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자만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자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까? 부처님은 “나는 모든 사랑하는 것과 마음에 드는 것과 헤어지고 이별해야 한다.”(A5.57)라고 자주 관찰할 것을 말했다. 또한 “나는 업의 소유자이고 업의 상속자이고 업의 원인자이고 업의 친연자이고 업의 의지처이고 내가 선이나 악을 지으면 그 상속자가 될 것이다.”(A5.57)라고 자주 관찰해야 할 것을 말했다.
 
업자산정견
 
괴로움의 진리를 알게 되면 자만하지 않게 된다. 팔고 중에서 ‘사랑하는 것과 헤어짐에 따른 괴로움(愛別離苦)’과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남에 따른 괴로움(怨憎會苦)’, 이 두 가지만 알아도 덜 자만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업자산정견을 아는 것만 못하다.
 
업자성정견이 있다. 업이 자신의 주임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를 빠알리어로 깜맛싸까딧티(kammassakadiṭṭhi)라고 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에서는 ‘업자산정견’이라고 했다.
 
마하시 사야도는 업자산정견에 대하여 풀이 했다. 이는 ‘깜맛까싸따 삼마딧티 (kammassakatā sammadiṭṭhi)’를 번역한 말이다. 빠알리 대역한 것을 보면 “‘kamma   업만이’ + ‘saka 자신의 진정한 재산인’ +  ‘tā 상태를’ + ‘samma 바르게’ + ‘diṭṭhi 알고 봄’”라고 풀이 했다. 그래서 ‘깜맛까싸따 삼마딧티(kammassakatā sammadiṭṭhi)’에 대하여  “업만이 자기 재산인 상태를 바르게 알고 보는 지혜= 업자산정견”(담마짝까법문, 205쪽)이라고 했다.
 
부처님은 자만을 극복하는 최종방법으로서 업자산정견을 말했다. 그런데 업자산정견은 위빠사나 수행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는 것이다.
 
업자산정견은 위빠사나 지혜는 아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갖추는 정견이다. 이런 정견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수행을 할 수가 없다. 왜 그런가? 업자산정견은 모든 선업의 기초이자 뿌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정견이 있어야 불선업도 삼가고 보시와 지계 등 일반선업도 행할 수 있습니다.”(담마짝까법문, 206쪽)라고 했다.
 
출세간적 정견과 세간적 정견
 
불교인은 업과 업의 과보를 믿는다. 업과 업과보를 믿는다면 당연히 내세와 윤회를 믿는다. 이는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알기 때문이다. 또한 업이 자신의 자산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업자산정견은 수행에서도 요청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 나아가 사마타와 위빳사나라는 수행선업도 닦을 수 있습니다.”(담마짝까법문, 206쪽)라고 말했다.
 
팔정도에 정견이 있다. 팔정도분석경(S45.8)에 실려 있는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수행의 관점에서 본다면 정견은 사성제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 정견을 말했다.
 
 
“1) 깜맛사까따 삼마딧티kammassakatā sammādiṭṭhi 업 자산 정견
2) 자나 삼마딧티jh
āna sammādiṭṭhi 선정 정견
3) 위빳사나 삼마딧티vipassan
ā sammādiṭṭhi 위빳사나 정견
4) 막가 삼마딧티magga samm
ādiṭṭhi 도 정견
5) 팔라 삼마딧티phala samm
ādiṭṭhi과 정견
6) 빳짜웩카나 삼마딧티paccavekkha
ņā sammādiṭṭhi 반조 정견”
(담마짝까법문, 203쪽)
 
 
여섯 가지 정견을 보면 세 번째 ‘위빳사나 삼마딧티vipassanā sammādiṭṭhi 위빳사나 정견’이 핵심이다. 그런데 먼저 갖추어야 할 정견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첫번째의 ‘깜맛사까따 삼마딧티kammassakatā sammādiṭṭhi 업 자산 정견’과 두번쨰의 ‘자나 삼마딧티jhāna sammādiṭṭhi 선정 정견’을 말한다. 이 두 가지가 구족되어야 위빠사나 통찰지혜를 증득할 수 있음을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 이는 세 번째 ‘위빳사나 삼마딧티vipassanā sammādiṭṭhi 위빳사나 정견’을 갖추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네번째의 도 정견과 다섯 번째의 과 정견에 대해서는 저절로 얻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위빠사나 정견을 갖추어 수행하게 되면 도와 과는 자동적으로 얻게 됨을 말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뜀뛰기의 비유’를 들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따라서 제일 마지막 목표인 성스러운 도를 얻고자 한다면, 앞부분 도인 위빳사나 도를 닦아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성스러운 도가 저절로 생겨날 것입니다.
 
개울을 뛰어넘으려면 멀리서 힘차게 달려온 뒤 뛰어넘어야 합니다. 뛰어넘은 뒤에는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저절로 반대편 둑에 도달하게 됩니다.
 
위빳사나 도를 닦는 것은 힘차게 달려온 뒤 뛰어넘는 것과 같습니다. 뛰어넘은 뒤에 신경 쓰지 않고서 반대편에 저절로 도착하는 것은 위빳사나의 힘 때문에 성스러운 도가 생겨나는 것과 같습니다.”(담마짝까법문, 221-222쪽)
 
 
편의상 문단을 나눈 것이다. 참으로 통쾌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애써서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도와 과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위빠사나 수행을 힘껏 닦으면 도와 과는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를 뜀뛰기 비유를 들었다.
 
업자산정견은 기본이다.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반조하는 것, 업이 자신의 자산임을 반조하는 것에 대하여 정견이라고 했다. 사성제도 정견이지만 업과 업보를 아는 것도 이에 못지 않게 정견임을 말한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두 가지 정견이 있다. 하나는 출세간적 정견이고 또 하나는 세적적 정견이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올바른 견해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일정한 공덕이 있어도 집착의 결과가 따르는 올바른 견해가 있고, 수행승들이여,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뛰어넘고, 고귀한 길의 경지에 드는 올바른 견해가 있다.”(M117)라는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출세간적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것이고, 세간적 정견은 업과 업보에 대한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번뇌에 달려 있다. 번뇌를 소멸시키는 삶을 사는 자에게는 사성제라는 출세간적 정견이 필요로 된다. 반면 번뇌와 함께 사는 자는 업이 자신의 자산임을 아는 세간적 정견을 필요로 한다.
 
스승 없이 수행하다 보니
 
오늘 행선과 좌선은 각각 십여분 하다가 말았다. 새김은 형성되었다. 그러나 몸 상태가 받쳐 주지 않아서 더 이상 진행할 수 없었다. 노년에 수행하기 어렵고 몸이 아프면 수행하기 어려움을 말하는 것 같다.
 
스승 없이 수행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리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길잡이로 삼아서 하루하루 나아가고 있다.
 
행선과 좌선 할 때 집중이 형성된다. 행선할 때 여섯 단계로 나누어서 새기다 보면 어느 때 몰입 상태가 된다. 또한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할 때 이전과 다른 마음상태가 된다. 이를 새김의 확립, 새김의 토대, 더 나아가 찰나삼매인것 같다고 보는데 맞는 것일까?
 
스승이 없는 자는 책이 스승이 된다. 행선과 좌선에서 형성된 집중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찾아 보았다. 마하시 사야도는 찰나삼매에 대하여 주석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찰나의 마음 하나됨(khanikacittekaggatā)이라는 것은 생겨나는 순간, 그 찰 나 정도에만 머무는 <위빳사나> 삼매이다. 맞다. 그 위빳사나 찰나삼매는 관찰하여 알아지는 물질·정신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한 종류의 집중된 모습으로 계속 이어져 생겨나면서 반대되는 번뇌들이 뒤덮을 수 없게 되어 마치 몰입선정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마음을 동요하지 않도록 둘 수 있다.”(Pm.i.342, 담마짝까법문 200쪽)
 
 
찰나삼매는 근접삼매와 몰입삼매(본삼매)와 함께 세 가지 삼매 가운데 하나이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데 필요로 한다. 이는 대상과 관련이 있다.
 
사마타 선정에서는 하나의 대상에 몰입된다. 또한 개념을 대상으로 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다 보니 육문으로 들어 온 것이나 행, 주, 좌, 와도 관찰 대상이 된다. 이런 대상을 새기기 위해서는 찰나삼매가 요청된다.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찰나삼매에 대하여 근접삼매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근접삼매만 이루어져도 번뇌는 일어나지 않는다. 발의 움직임이나 배의 움직임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새기고 있다 보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데 이와 같은 찰나삼매에 대하여 근접삼매와 같은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찰나삼매는 더 나아가 초선정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장애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초선정과 같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사유, 고찰, 희열, 행복, 하나됨이라는 다섯 가지 선정 구성요소가 있는 것으로도 같습니다.”(담마짝까법문, 199쪽)라고 말한 것으로 알 수 있다.
 
지금 우안거기간이다. 재가자가 우안거한다고 하여 스승도 없이 매일 행선과 좌선을 하고 있다. 그런데 행선과 좌선 과정에서 집중된 상태를 체험한다는 것이다.
 
새김이 확립되면 일어남과 사라짐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음의 기쁨, 행복, 평온을 느낀다. 이런 것도 어쩌면 찰나삼매인지 모른다. 이는 주석에서 “관찰하여 알아지는 물질·정신 대상에 대해 끊임없이 한 종류의 집중된 모습으로 계속 이어져 생겨나면서 반대되는 번뇌들이 뒤덮을 수 없게 되어 마치 몰입선정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마음을 동요하지 않도록 둘 수 있다.”(Pm.i.342)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내가 오래 살아야 하는 이유
 
오늘 화창한 가을날 오전에 긴 글을 썼다. 어제 친구 장례식장에 다녀온 소감을 비롯하여 수행에서 경험한 것에서도 썼다. 스승이 없어서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등불로 삼아 점검하고 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지금 이 건강, 지금 이 젊음, 지금 이 행복은 천년만년 지속될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천년, 만년 살 것처럼 하루를 헛되이 보내고 있다. 누구도 나의 안전을 지켜 주지 않는다. 오늘밤에 죽을지 어떻게 알 것인가?
 
잘 사는 것도 좋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 오래 산다고 하여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오래 살아서 악업만 증장되는 삶을 산다면 잘 죽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일까?
 
장로는 보시를 하면 축원을 해준다. 법구경에서는 “아유 완노 수캉 발랑”이라고 축원을 해 준다. 이는 “장수하고, 아름답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라.”라는 말이다. 특히 장수하라는 말을 새겨야 한다.
 
누구나 오래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른에게 “오래 오래 즐기며 행복하게 사십시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주문은 악업을 많이 지으라는 말과 같다. 즐긴다는 것은 욕망과 관련된 것이다. 탐욕은 십악업 가운데 하나이다.
 
오래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이는 다름 아닌 공덕 있는 삶이다. 이는 “왕자여, 계행을 갖추고 선한 원리를 갖춘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오랜 세월 머무르면 머물수록, 많은 공덕을 낳습니다.”(D23)라는 경전적 근거에 따른다. 오래 살면 살수록 선업 공덕이 쌓이는 것이다.
 
오래오래 살고자 한다. 즐기면서 사는 것이 아니다. 감각을 즐기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을 쌓으면서 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잘 사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죽음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잘 살면 잘 죽게 된다. 그렇다면 최상의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불사(不死: amata)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에 “그들에게 불사의 문은 열렸다. (apāruta tesa amatassa dvāra)”(S6.1)라며 진리를 설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죽음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잘 살면 잘 죽는다. 최상의 죽음은 죽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은 불사의 진리를 설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열반이다. 열반이 되면 불사가 되는데 이는 불생이 되기도 한다.
 
삶과 죽음은 항상 함께 한다. 잘 살면 잘 죽게 되고, 잘 살지 못하면 비참한 죽음이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라면 잘 살아야 한다. 오래오래 살아서 공덕을 지어야 한다. 특히 수행공덕을 쌓아서 불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글을 쓰는 도중에 가슴통증은 다 나아 버렸다.
 
 
2024-09-1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