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멍한 상태인지 새김이 있는 상태인지
지금 이 상태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잠이 덜 깬 상태일까? 정신이 멍한 상태일까? 혹시 무념무상(無念無想) 상태는 아닐까? 혹시 새김이 계속 유지되고 있는 상태는 아닐까? 대체 이것은 멍한 상태일까 새김이 있는 상태일까?
재가우안거 56일째이다. 오늘 아침은 특별했다. 아파트 동 현관문을 나서서 십여미터 가는 도중에 마음 상태가 달라진 것이다. 평소와는 달랐다.
길을 걸을 때 졸음이 있는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멍한 상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달랐다. 행선이나 좌선할 때 새김이 확립된 상태인 것처럼 보였다.
수행이라 하여 반드시 좌선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행선하는 것도 수행이다.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일상도 수행이라 말한다. 일상에서도 늘 새김(sati)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일상에서 어떻게 새김을 유지할 수 있을까? 세상에서 세상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 가는 사람은 일상에서 새김이 유지되기 힘들다. 말을 하면 새김은 깨져 버린다. 말을 하지 않고 일상을 살 수 없다.
말 없이 살고 있다. 집과 일터를 마치 시계추처럼 매일 왕래한다. 일인사업자에게는 타인과 말할 기회가 별로 없다. 어쩌다 전화가 걸려 오면 그때 말한다. 저녁에 가족과 말하는 것이 고작이다.
말 없는 생활의 연속이다. 혼자서 일하다 보니 말할 기회가 별로 없다. 우안거 기간에도 말이 없다. 자연스럽게 말 없는 일상이 되고 있다.
아파트 동 현관에서 백권당까지는 1.4키로의 거리이다. 매일 걸어 다닌다. 이마트 안양점을 돌아 비산사거리 대로를 건너서 ‘꿈에그린’아파트를 관통한 다음 안양천에 이른다.
안양천 징검다리를 건너면 5천세대가 되는 거대한 ‘메가트리아’ 아파트 단지에 이른다. 메가트리아를 관통하여 전철1호선을 관통하는 ‘주접지하차도’를 지나면 목적지가 가까이에 있다. 천천히 걸어서 삼십분 걸린다.
일터로 가는 길 삼십분은 발걸음이 가볍다. 컨디션이 좋을 때이다. 그러나 컨디션이 엉망일 때는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다. 오늘 아침은 저절로 가는 것 같았다.
대체 이런 기분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언어로 표현하기가 애매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저절로 가는 듯 했다. 더구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삼십분걸이가 지루하지 않은 것이다. 얼굴표정은 근엄한 것 같았다.
위빠사나수행을 하면 마음상태가 바뀐다. 똑 같은 행위를 반복하다 보면 마음상태가 바뀌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행선을 제대로 하면 마음상태가 바뀐다.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가지 동작을 끊임없이 반복했을 때 마음상태가 바뀐다. 또한 좌선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을 끊임없이 새겼을 때도 마음상태가 바뀐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마음상태가 바뀐 것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집을 나서기 전에 책을 보았기 때문이다. 샤워를 마친 다음에 옷을 입고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계란 찐 것이 다 익지 않았다. 에어프라이어에서는 감자와 고구마가 가열되고 있다. 팔분 정도 시간이 남았다. 그 시간을 활용하고자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펼친 것이다.
담마짝까법문을 거의 다 읽었다. 먼저 본 것을 열어 보았다. 새겨야 할 것에 대해서는 형광메모리펜 칠을 해 놓았다. 그 부분만 읽으면 복습이 되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니 빠져 들었다. 새기고 또 새기고 싶은 내용을 보다 보니 수십페이지 보게 되었다. 시간이 삼사십분 훌쩍 지나가 버렸다. 아침에 걸을 때 새김이 확립된 듯한 것은 이것 때문 아닐까?
무엇이든지 집중하면 마음상태가 바뀌어 진다. 산란했던 마음은 차분해진다. 더구나 책을 읽어서 새기고 또 새기고자 했다면 새김이 있는 상태와 같을 것이다. 아마 이런 것이 아파트 동 현관을 나가자마자 다른 마음상태가 된 것 같다.
위빠사나는 새김이 확립되어야 한다. 새김이 확립되어야 제대로 볼 수 없다. 새김이 확립되어 있지 않다면 마음은 산만해져 있어서 마음은 대상으로 달아나 버린다.
오늘 아침 아파트 동 현관문을 나설 때 멍한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왜 이런 마음상태가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서 졸리운 상태일 것이라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었다. 마치 멍한 상태가 되었을 때 발걸음만 보이는 것 같았다.
걷기명상이라는 것이 있다. 이는 경행이나 행선이라 불리우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 마음챙김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명상에 대하여 비판한 바 있다.
행선은 보통 ‘행선대’에서 걷는다. 이상적인 길이는 십미터 정도로 본다. 양곤에 있는 마하시 사야도의 거처에는 길이가 20미터가량 행선대를 보았다. 재질이 단단한 목재로 된 것이다.
백권당에 행선대가 있다. 사무실 출입문에서 벽측을 따라 만든 것이다. 길이는 5미터 가량 된다. 실제로 4미터 거리를 행선한다. 폭은 75센티이다. 비틀거리면 어깨가 닿는다.
걷기명상은 길을 가볍게 걷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그때 마음챙김한다고 말한다. 마음챙김은 싸띠를 말하는 것이다. 이를 새김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걷기마음챙김은 정말 가능한 것일까?
걷기명상이 제대로 되려면 새김이 확립되어야 할 것이다. 새김이 확립되지 않으면 마음은 산만해져 있어서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나 버린다. 그럼에도 “왼발, 오른발”하며 발에 집중한다면 걷기명상이 될 것이다.
오늘 백권당으로 가는 길에 걷기명상이 된 것 같았다. 이는 아파트를 출발하자마자 새김이 확립된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잠을 못자서 졸리운 상태라기 보다는 책을 봄으로 인하여 어느 정도 집중이 이루어진 상태가 아닌지 생각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마음이 좁혀져 있었고, 마음은 현재에 있었다는 것이다.
마음은 늘 대상에 가 있다. 감각대상을 말한다. 마음은 제어하지 않으면 늘 나쁜 대상에 가 있다.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마음은 산만해지기 쉽다. 법구경 ‘마음의 품(cittavagga)’에 이런 게송이 있다.
“흔들리고 동요하고 지키기 어렵고
제어하기 어려운 마음을
지혜로운 사람은 바로 잡는다.
마치 활제조공이 화살을 바로 잡듯.”(Dhp.33)
“물고기가 물에서 잡혀 나와
땅바닥에 던져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은 펄떡이고 있다.
악마의 영토는 벗어나야 하리.”(Dhp.34)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온다.”(Dhp.35)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지만,
지극히 보기 어렵고 미묘한 마음을
현명한 님은 수호해야 하리.
마음이 수호되면, 안락을 가져온다.”(Dhp.36)
마음을 다스리면 안락이 온다고 했다. 미쳐 날뛰는 듯한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야말로 수행이다. 현자는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 또한 현자는 다스린 마음을 지켜야 한다.
일터로 가는 길 삼십분 동안 발에 집중했다. 마음이 다른 데로 달아나지 않았다. 마음은 늘 현재에 있는 것 같았다. 이런 변화를 스마트폰 메모엡에 기록해 놓았다. 키워드만 쳐 놓은 것이다. 후기 쓸 때 활용하기 위한 것이다.
삼십분 동안 걷다 보면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이 난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발을 옮긴다. 우산을 썼는데 비 소리가 난다. 그러나 그때뿐이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얼굴에 스칠 때 부드러운 감촉을 느꼈다. 그때뿐이다.
새김이 확립되면 마음의 폭이 좁아지는 것 같다. 이를 고짜라(gocara), 즉 행경(行徑)이라 해야 할 것이다. 마치 송아지가 말뚝에서 목줄의 거리만큼 움직이는 행동반경과 같다.
행경이 넓으면 마음의 폭도 넓어진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오기 쉽다. 들어 와서 사념(思念)의 집을 지을 수 있다. 그러나 행경이 좁으면 잡념이 치고 들어오기 힘들다. 설령 용케 들어 왔다고 할지라도 금방 제압된다. 사념의 집을 짓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아침 마음상태가 바뀐 것은 아마도 새김의 확립이 형성되었기 때문으로 본다. 이런 것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마치 마음이 멍한 상태처럼, 잠이 덜 깬 상태처럼 된 것이다. 그러나 흐리멍덩한 상태는 아니다. 마음의 폭이 좁혀진 상태이다.
마음의 폭이 좁혀진 상태에서는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만 보이는 것 같다. 길을 걷고 있다면 오로지 발의 움직임만 보이는 것이다. 바람이 불어 얼굴에 감촉을 느낀다면 오로지 느낌만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 이상 없다. 비소리가 우산에서 난다면 소리가 났다가 사라지는 것만 있게 된다. 그것 이상 없다. 소리로 인하여 꼬리를 물어 새끼 치는 일은 없는 것이다. 마음은 늘 현재에 있는 것이다.
백권당이 점차 다가왔다. 이런 상태에서 행선과 좌선을 한다면 보나마나 잘 될 것 같았다. 이미 새김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명상은 거저먹기나 다름 없는 것이다.
아침 일터로 가는 길에 형성된 새김은 계속 유지 되었다. 백권당에 도착하여 아침을 먹을 때도 유지 되었다. 마치 자석으로 인하여 몸과 마음이 곤두선 것 같았다.
모래놀이 할 때 자석을 대면 쇳가루가 모인다. 쇳가루를 모아 자석을 대면 쇳가루는 곤두선다. 오늘 아침 몸과 마음 상태가 이런 것 같았다.
몸과 마음 상태가 변했을 때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그러나 말을 하면 깨질 것 같다. 전화를 받을 때도 깨질 것 같다. 무언가 언어적 행위를 하면 좁혀졌던 마음이 산만해질 것 같다. 그래서 선원에서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아침을 먹었으니 오늘 하루일과를 시작해야 한다. 우안거 기간동안 하루일과는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오늘 행선과 좌선은 잘 될 것으로 예상했다. 오늘 행선과 좌선은 거저먹기로 생각되었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행선 했을 때 처음부터 움직임이 분명했다. 발의 움직임이 분명한 것이다. 처음과 시작이 분명하게 보인 것을 말한다. 또한 의도도 보였다.
행선할 때 의도를 보기가 쉽지 않다. 마음이 산만한 상태에서는 발의 움직임도 잘 보이지 않는다. 의도는 더욱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음이 좁혀진 상태, 즉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는 잘 보인다. 행경이 좁은 상태에서는 현미경을 보는 것처럼 잘 보인다.
행선 중에 메모 했다. 말을 하면 새김이 깨져 버리지만 스마트폰 메모앱에 키워드만 기록해 두는 것은 영향 주지 않는다. 행선하면서 느낀 것을 기록해 두었다. 좌선할 때도 기록해 둔다.
행선은 십분 했다. 집중이 잘 유지 되고 있었기 때문에 좌선도 문제 없을 것으로 보았다. 예상은 맞아 떨어졌다. 앉자마자 집중이 되었다.
오늘 아침에 비가 왔다. 비가 오는 날은 창 밖에 차 소리가 평소보다 크게 들린다. 그러나 오늘 아침 좌선에서는 차 소리가 반 밖에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또한 싫어하는 마음도 나지 않았다.
소리에 민감하다. 작년 우안거를 처음 시작했을 때 차 소리에 노이로제 걸릴 지경이었다. 전철 지나가는 소리는 요란했다. 오토바이 파열음과 폭탄음은 불선심을 자극했다. 소형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도 거슬렸다. 건물전체에서 나는 저주파의 작은 소리도 거슬렸다.
좌선할 때 눈을 감고 한다. 마음의 문 하나만 열어 놓자는 것이다. 그러나 귀의 문은 닫을 수 없다. 작년에 소리문제를 해결하고자 ‘산업용귀마개’를 구입했다. 그러마 무용지물이었다.
오늘 아침 좌선에서 소리가 거슬리지 않았다. 차 지나가는 소리, 오토바이 지나가는 소리, 전철 지나가는 소리가 평소보다 반 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리로 인한 스트레스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마음이 좁혀졌기 때문으로 본다.
마음이 산만하면 마음은 대상으로 달아나 버린다. 그러나 마음이 좁혀져 있으면 마음은 달아나지 않고 갇혀 있게 된다. 오늘 아침이 그랬다. 걸을 때는 걸을 때뿐이었다. 예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오늘 아침 특별한 경험을 했다. 멍한 상태가 된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무념무상 상태가 된 것 같았다. 마음이 좁혀진 상태에서 대상을 접했을 때 끄달리지 않았다. 마음이 늘 현재에 있는 것 같았다. 이것이 멍한 상태인지 새김이 있는 상태인지 알 수 없다.
2024-09-13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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