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선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라
인내가 열반으로 인도한다는 말이 있다.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이 있음을 말한다. 오늘 아침 행선이 그랬다. 무려 한시간 행선 했다. 이런 날은 없었다.
오늘은 재가우안거 55일째 되는 날이다. 오늘 날씨는 잔뜩 흐려 있다. 무더위는 가셨다. 간혹 비가 뿌리기도 했다. 우산을 쓰고 백권당으로 향했다. 오늘 해야 할 일은 잘 될 수 있을까?
늘 그렇듯이 백권당에 오면 아침을 먹는다. 집에서 준비한 감자와 고구마와 계란을 먹는다. 오늘은 특별히 밤호박을 가져 왔다. 이마트 안양점에서 할인 행사한 것을 두 박스 구입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커피를 마신다. 원두를 절구질하여 만든 절구커피이다. 요즘에는 얼음 세 조각을 넣는다. 뜨거운 것보다 뜨거운 것이 약간 가신 것이 맛이 좋다.
커피를 마셨으니 오늘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행선과 좌선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이 끝나면 후기를 쓴다. 삼십분 좌선하고 후기는 두세 시간 쓰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오전이 훌쩍 지나가 버린다.
오늘 행선은 7시 55분에 시작했다. 좌선에 임하기 전에 반드시 행선 먼저 하는 것이다. 백권당 행선대에서 눈을 감고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이다.
행선하기 전에 머리가 복잡했다.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이런 상태에서 명상을 하면 잘 되지 않는다.
행선 할 때는 발의 움직임에 집중해야 한다. 행선할 때는 육단계 행선을 한다. 발을 떼고, 올리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의 동작을 말한다. 이 과정을 모두 새겨야 한다.
머리가 복잡하면 행선이 잘 되지 않는다. 오늘 아침이 그랬다.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을 때 비틀비틀 했다.
행선이 잘 될 때와 잘 되지 않을 때가 있다. 행선이 잘 되면 비틀거리지 않는다. 똑바로 걷는 것이다. 그러나 머리가 복잡하여 번뇌가 가득할 때는 비틀거린다.
행선을 하다 보면 그날의 컨디션을 알 수 있다. 비틀거리면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이다. 하나의 생각에 지배 되었을 때도 비틀거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섯 단계 행선에 마음을 두었다.
오늘 행선은 틀린 것 같았다. 오분이 지나고 십분이 가까이 와도 비틀거렸다. 머리는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렇게 해서는 좌선도 잘 될 수가 없다. 오늘 행선과 좌선은 실패로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행선을 그만 두고 싶었다. 십분이 다 되어도 비틀거렸을 때 의미 없는 행위를 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조금 더 해보고자 했다. 그런데 행선을 시작한지 십분이 지나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마음 상태가 바뀐 것이다.
흔히 ‘극적전환’이라는 말을 한다. 오늘 아침 행선이 그랬다. 십분이 지나자 마음이 환해지면서 발의 움직임이 선명해진 것이다. 마치 영화에서 ‘반전’을 보는 것 같다.
마음상태가 바뀌었다.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마음상태가 되었다. 이른바 새김이 있게 된 것이다. 새김이 확립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또 다른 말로 근접삼매가 이루어졌다고도 볼 수 있다.
근접삼매라는 말은 선정용어이다. 본삼매에 들어가기 전에 형성되는 집중을 말한다. 행선에서 근접삼매는 있을 수 없다. 있다면 ‘찰나삼매’가 있다.
마하시 사야도에 따르면 찰마삼매는 근접삼매와 유사한 것이라고 했다. 또한 찰마삼매는 초선정과 같은 상태라고 했다. 찰나삼매에서 경험 되는 느낌이 초선정에서의 기쁨, 행복, 평온의 요소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반전이 일어 났을 때 기회라고 생각했다. 계속 밀고 나가자고 생각한 것이다. 발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눈을 감고 육단계 행선을 한 것이다.
행선을 할 때는 눈을 감고 한다. 눈을 뜨고 행선을 하면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눈을 감고 행선을 하면 발의 움직임을 더 잘 볼 수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 행선하는 것은 바람직할까?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눈을 감고 행선하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지침서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만 눈을 감고 행선하는 것일까?
빤냐와로 스님은 행선할 때 눈을 감고 행선한다고 했다. 담마와나선원 법회에서 들은 것이다. 눈을 감고 행선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 받는 것 같았다. 그런데 스님은 놀랍게도 눈을 감고 ‘뒤로도’ 행선한다고 말했다.
행선은 앞으로만 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뒤로도 행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놀라웠다. 아직까지 한번도 이런 말을 들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떤 지침서에서도 ‘후진행선하기’는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고 행선하면 여러 이점이 있다. 가장 큰 이점은 개념에서 자유로운 것이다. 눈을 뜨면 발모양을 보게 되는데 이는 발이라는 모양 또는 형태를 보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개념을 배제하는 수행이다.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실재를 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행선할 때 발모양을 보지 말고 발의 운동성만을 보라고 하는 것도 개념을 배제하고 실재를 보자고 하는 것이다.
한번 마음상태가 변환되자 계속 유지되었다. 마치 화면이 전환되는 것처럼, 마치 꿈에서 다른 꿈으로 전환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인내를 가지고 계속 갔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본다.
한번 마음의 전환이 이루어지면 여간해서는 깨지지 않는다. 이는 사띠가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근접삼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번 삼매가 형성되면 의도적으로 깨지 않는 한 계속 유지 된다.
행선을 시작한지 십분이 지났을 때 삼매가 형성되었다. 새김이 확립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새김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삼매의 토대가 마련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번 새김이 형성되면 계속 그 방향으로 가게 되어 있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여섯 단계 행선을 했을 때 시작과 끝은 분명했다. 중간의 과정도 분명했다. 또한 의도도 보였다.
행선이 잘 되면 마치 미끄러져 가는 것 같다. 바닥을 떠서 걷는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럴까? 개념이 배제된 것이 크다. 오로지 발의 움직임에만 마음이 가 있는 것이다.
육단계 행선을 하면 과정마다 독특한 느낌이 있다. 뒷쿰치를 들고 발을 뗄 때는 마음이 경쾌하다. 발을 들을 때는 가벼운 느낌이다. 발을 밀 때는 마치 미끄러져 나가는 것처럼 스무스하다. 발을 내릴 때는 약간 무거움을 느낀다. 발을 바닥에 디딜 때는 감촉을 느낀다. 발을 누를 때는 바닥의 차가움과 딱딱함을 느낀다.
위빠사나 수행은 개념을 배제하고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행선에서 실재를 보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천천히 해야 한다.
걷기명상이 있다. 걸으면서 마음챙김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는 명상이 아니다. 빠른 속도이든 느린 속도이든 바깥에서 걷는다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길 수 없을 것이다.
행선은 보통 여섯 단계로 나누어서 한다. 천천히 해야 지, 수, 화, 풍 사대를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풍대가 가장 크다.
발의 움직임은 풍대에 대한 것이다. 풍대는 운동성을 보기 위한 것이다. 또한 풍대는 움직임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행선을 하는 것은 지, 수, 화, 풍 사대 중에서도 풍대를 보기 위한 것이다.
풍대는 좌선중에서도 볼 수 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호흡을 보지 않고 배의 움직임을 보라는 것은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사마타 수행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의 대상에 몰입하는 사마타와는 달리 움직이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정확히 말하면 생멸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행선은 생멸하는 것을 대상으로 한다. 의도가 있어서 발을 옮길 때 이는 정신과 물질에 대한 것이다. 또한 발을 옮길 때 아는 마음이 있는 것은 물질과 정신에 대한 것이다.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이는 집착의 덩어리에 대하여 구분하여 새기는 것과 같다.
사람은 다섯 가지 집착의 덩어리로 되어 있다. 이를 한자어로 ‘오취온’이라고 한다. 물질에 대한 집착덩어리, 느낌에 대한 집착덩어리, 지각에 대한 집착덩어리, 형성에 대한 집착덩어리, 의식에 대한 집착덩어리로 되어 있다.
집착덩어리로 세상을 보면 나(我)가 개입된다. 형상을 보아도 내가 보는 것이고 소리를 들어도 내가 듣는 것이다. 그러나 집착덩어리를 분해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보면 나라는 개념은 사라진다. 명칭과 관련하여 이런 게송이 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명칭이 있을 뿐이다.”(S5.10)
여기 자동차가 있다. 자동차 정비사가 자동차를 수리하기 위해서 모든 부품을 분해 했을 때 이것을 자동차라고 볼 수 있을까? 수레를 분해 했을 때 부품만 있다면 이것을 수레라고 볼 수 있을까?
사람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루빠(色), 웨다나(受), 산냐(想), 상카라(行), 윈냐나(識)라고 크게 다섯 가지 다발 또는 무더기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가운데 물질의 다발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가운데 느낌의 다발을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밀린다팡하에 이름에 대한 질문이 있다. 밀린다 왕은 나가세나 존자에게 “존자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며 물어 본다. 이에 존자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대왕이여, 나는 나가세나라고 합니다. 대왕이여, 나를 나가세나라고 도반들이 부릅니다. 또한 부모가 나가세나 혹은 쑤라쎄나 혹은 비라세나 또는 씨하세나라고 이름을 짓든지 간에, 대왕이여, 명칭이고 통칭이고 개념이고 언설로서, 나가세나라는 것은 이름일 뿐이고 거기서 개아(個我)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Mil.25)
나가세나 존자는 나가세나라는 말은 이름일 뿐이고 거기서 개아는 발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명칭은 개념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실명칭에서 실체를 발견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인간은 오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취온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물질에 집착된 다발을 나라고 볼 수 있을까? 느낌에 집착된 다발을 나라고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은 몸을 나라고 여긴다. 얼굴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얼굴에 뽀드락지로 하나 나면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얼굴을 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몸을 내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느낌도, 지각도, 형성도, 의식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온을 내것으로 여기면 괴롭다.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도 내가 즐겁거나 괴로운 것이 된다. 그런데 그 어떤 느낌도 결국 괴로운 것으로 귀결되기 때문에 느낌을 내것으로 본다면 괴로움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오온은 내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몸,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대하여 내것으로 여긴다. 이는 오온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나는 없는 것이다. 단지 개념일 뿐이다. 그래서 나가세나 존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이 대왕이여, 나도 머리카락을 조건으로, 몸털 등을 비롯해서 뇌수를 조건으로, 물질을 조건으로, 느낌을 조건으로, 지각을 조건으로,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을 조건으로 나가세나 라는 명칭, 통칭, 개념, 언설, 이름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 의미로 본다면, 개인은 발견되지 않습니다.”(Mil.27-28)
이름은 시설된 것이다. 이름은 구별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명칭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름을 그 사람과 동일시 한다. 더구나 실체가 있다고 본다.
나를 오온으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그 어디에도 나라는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나는 자동차나 수레차럼 부르는 명칭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궁극적 의미로 본다면, 개인은 발견되지 않습니다.”(Mil.27-28)라고 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분리해서 관찰하는 수행이다. 이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구분’하는 것이다. 이는 해체해서 보는 것과 같다.
자동차를 수리하기 위해서 해체해 놓으면 더 이상 자동차라는 명칭을 붙일 수 없다. 사람을 오온으로 구분해 놓으면 더 이상 그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고정불변한 실체가 발견되지 않음을 말한다. 나라든가 자아, 영혼은 발견되지 않는 것이다.
오늘 행선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십여분 행선하다 좌선하려 했으나 그만 두었다. 오늘은 한시간 달려 보기로 한 것이다.
행선이 잘 되면 마치 미끄러져 나가는 것 같다. 발이 바닥을 떠서 가는 것 같다. 어떤 이는 구름을 걷는 것 같다고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빤냣띠(槪念)을 제거하고 빠라맛타(實在)를 보기 때문이다.
행선할 때 개념으로 한다면 행선이 힘들어진다. 발모양이 떠오르는 것은 개념에 의한 것이다. 생각의 머리가 복잡한 것도 개념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개념을 걷어 내면 행선이 힘들지 않는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행선 하면서 느낌을 노트해 두었다. 행선대 옆에 노트를 두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어 두었다. 후기 쓸 때 참고하기 위한 것이다. 사띠가 확립된 상태이기 때문에 필기해도 지장 없다.
행선 하면서 차 소리를 들었다. 창 바깥에서 나는 차 지나가는 소리이다. 전철 1호선 지나는 소리도 크게 들린다. 오토바이 소음도 들린다. 전에는 거슬렸으나 아제 견딜만하다. 왜 그런가? 개념이 아닌 실재로 보기 때문이다.
창 밖에 소음은 견딜 수 없다. 특히 오토바이 파열음이나 폭탄음은 불선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럴 때 마음에서 욕이 튀어 나온다. 그러나 이를 물질과 정신으로 환원하여 새기면 달라진다.
소음이 들렸을 때 이는 물질적 현상이다. 소음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소음에 대하여 어떤 차량의 소음인지 파악하려 한다면 개념이 개입된 것이다. 이럴 때는 단지 소리로만 파악해야 한다. 소리라는 물질로만 보는 것이다.
부부싸움 할 때 위빠사나로 관찰하면 효과적일 것 같다. 아내나 남편이 잔소리할 때 단지 소리로 인식하는 것이다. 소리를 개념으로 들으면 내용이 들어 와서 괴롭지만, 소리를 단지 물질로 파악하면 무슨 소리하는지 모를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무더기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개념을 보지 않고 실재를 보는 것이다. 이렇게 집착의 무더기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파악하면 텅 빈 것이 될 것이다.
오늘 행선을 한시간 했다. 위빠사나 수행하면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것도 집중이 된 상태에서 한시간 보냈다. 이런 일은 없었다. 오늘 좌선은 생략했다.
처음으로 한시간 행선을 했다.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 육단계행선을 했더니 미끄러져 가는 것 같았다. 하면 할수록 재미가 났다. 이럴 때 “행선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 같다.
한시간 행선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행선 도중에 허기가 졌다. 불과 한시간 반전에 먹었는데 배가 고픈 것이다.
인내가 열반으로 이끈다는 말이 있다. 무엇이든지 꾸준히 하면 성과가 나게 되어 있다. 처음에는 힘이 들고 잘 되지 않지만 계속 밀고 가다 보면 되는 것 같다.
행선이나 좌선을 하다 보면 의미 없는 일을 무한반복하는 것 같다. 그런데 무의미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일이라면 개념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를 볼 수 없다.
행선은 남들 보기에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일을 무한반복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에 진리가 있다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을 반복했을 때 개념은 사라지고 실재만 남는다. 오늘 아침 행선이 그랬다. 행선하는 재미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2024-09-12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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