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선을 하면 겟투(Get Two)가 되어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오늘 아침 삼십분 좌선에서 생각한 것이다. 좌선 중에 여러 생각이 일어났는데 모두 법에 대한 것이다. 이를 통찰이라 말한다면 자만이 될 것이다.
오늘 재가우안거 50일째이다. 오늘은 토요일이다. 온도는 24도로 지낼 만 하다. 엊그제까지 뜨거운 날이었나 이제 계절이 바뀐 것 같다. 얇은 점퍼를 입고 백권당에 왔다.
이미우이 음악도 듣지 않고
우안거를 하면서 생활에 변화가 생겼다. 음악을 전혀 듣지 않는다. 전에는 일터에 가는 길에 이미우이 음악을 들었다. 아침 출근할 때는 ‘라따나경’을 듣고 오후에 퇴근할 때는 ‘자야망갈라가타’를 들었다. 이것도 큰 변화일 것이다.
저녁에 밥을 많이 먹지 않는다. 저녁에 많이 먹으면 불편하다. 가능하면 적게 먹으려고 한다. 이틀 동안 라면으로 때웠다. 이것도 변화라면 변화일 것이다.
아침을 적게 먹는다. 집에서 준비한 감자, 고구마, 계란을 꿀물과 함께 먹는다. 스스로 만들어 먹는다. 찜기나 물에 찌면 된다. 전자레인지나 에어프라이어를 이용하기도 한다. 조미료는 소금이 전부이다. 세상에 가장 간단한 식사이다.
먹는 것도 수행이다. 먹는 것은 식탐과 관련이 있다. 먹는 것에 탐욕이 있는 한 수행의 진척이 힘들다. 수행자는 먹는 것부터 자제해야 한다.
듣는 것도 수행이다. 듣는 것은 갈애와 관련이 있다. 아름다운 음악에 대한 갈애이다. 유행가를 듣는 것도 갈애이다.
종종 유행가를 듣는다. 들려서 듣는 것이다. 마치 우는 것처럼 느껴진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유행가를 듣지 않은지 몇 달 되었다.
스승 없이 안거를
우안거를 하면서 변화가 생겼다. 하루하루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고 후기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런 변화에 경전이나 논서도 한몫 한다.
수행한다고 하여 앉아 있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수행을 잘 하려면 스승이 있어야 한다. 먼저 경험한 사람이 알려 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 해야 할 것이다.
스승 없이 안거를 나고 있다. 경전과 논서를 스승으로 삼고 있다. 특히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스승으로 삼고 있다. 요즘은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읽고 있다. 초전법륜경에 대한 법문이다.
한시간 행선하라고 한 것은
오늘 행선에서 느낀 것이 있다. 그것은 행선시간에 대한 것이다. 행선을 한시간은 해야 맛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행선은 고작 일이십분한다. 단지 몸을 푸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좌선을 하기 위한 예비동작쯤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아침 행선하면서 달리 생각했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을 중시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행선을 한시간 하라고 한다. 좌선 한시간 하면 행선도 한시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원 시간표를 보면 짝수 시간은 좌선 시간이고 홀수 시간은 행선 시간이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왜 행선을 중시할까? 이는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보기에 좋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선 해 보면 알 수 있다.
발은 뗄 때 의도가 있어서 움직인다. 의도가 없으면 꼼짝도 할 수 없다. 의도가 없으면 손가락 하나 까닥 할 수 없다. 왜 그런가? 몸을 나무토막처럼, 푸대자루처럼, 시체처럼 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 몸과 마음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이는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신에 대해서는 웨다나(느낌), 산냐(지각), 쩨따나(의도), 마나씨까라(마음기울임)로 구분해서 설명했다. 물질에 대해서는 지, 수, 화, 풍, 사대와 그 파생물질로 설명했다.
명색을 언어적 개념으로 보았을 때
어떤 불교학 교수는 명색에 대하여 명칭과 형태로 해석한다. 이는 자의적 해석이다. 부처님 가르침을 자신의 입맛대로 재단한 것이다. 명색에 대하여 언어적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명색에 대하여 언어적 개념으로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언어적 개념만 타파하면 깨닫는다고 말할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사실이 없다는 것을 알면 바로 깨달음이에요.”라고 말한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을 왜곡하는 궤변이다. 안타깝게도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다.
나마루빠, 즉 명색에 대한 정의가 바로 서야 한다. 명색을 정신과 물질로 볼 것인지 또는 명색을 명칭과 형태로 볼 것인지에 따라 천지차이가 난다. 한국불교 또는 중국불교, 동아시아불교는 후자인 것 같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알아야
행선을 할 때는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기 쉽다. 발을 떼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다. 발을 떼는 것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이러한 물질과 정신 과정을 새겨야 한다.
발을 뗄 때는 의도가 있어서 떼는 것이다. 이때 의도는 정신적 현상이다. 그리고 발을 떼는 동작은 물질적 현상이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이러한 정신과 물질을 새겨야 한다.
발을 한번 떼는 것에 두 가지 지혜가 생겨난다. 하나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nāmarūpa pariccheda ñāna)’이고, 또 하나는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paccaya pariggha ñāna)’이다. 이를 각각 위빠사나 1단계와 2단계 지혜라고 말한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가운데 1단계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다. 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라고 했을까? 이는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십이연기분석경에서 나마루빠(명색)에 대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 분명히 느낌, 지각, 의도, 작의라는 네 가지 정신적 요소와 지, 수, 화, 풍 사대라는 물질적 요소가 구분되어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념처경은 위빠사나 수행지침서와 같다. 행선과 관련된 것을 보면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gacchanto và gacchamiti pajanāti)”(D22)라는 말이 있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아는 것이다.
사람들은 갈 때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간다. 그러나 수행자는 갈 때는 간다고 알며 새기면서 간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가려고 하는 마음이 제일 먼저 생겨난다. 그 마음 때문에 특별하게 앞으로 밀어 주는 동작들과 함께 앞으로 향하는 단계적인 움직임들이 생겨난다. 그러한 움직임들이 전체에 퍼져 생기기 때문에 몸이라고 부르는 모든 물질들의 한 동작, 한 동작들이 움직이며, 생멸하며 가는 것을 ‘간다’라고 부른다.”(448쪽)라고 설명해 놓았다.
한걸음 떼는 것도 수행이다. 행선 할 때 발을 떼는 데는 정신과 물질, 그리고 물질과 정신이 작용한다. 수행자는 이를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발을 떼려는 것은 움직이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도가 있어서 움직인 것이다. 이런 의도는 내가 의도한 것일까?
위빠사나 수행에서 나(我)란 것은 없다.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새기다 보면 어떤 고정된 실체인 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발을 움직일 때 의도가 있어서 움직인다. 이때 의도는 정신에 대한 것이고, 움직임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발을 움직일 때 정신과 의도를 따로 따로 새겨야 한다. 사실 이것이 어렵다. 순간집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찰나삼매(khaṇikasamādhi)가 요구된다.
현명한 소비자는
요즘 유튜브를 보면 갖가지 수행에 대한 영상이 있다. 선불교 영향 받은 것을 보면 “이것”을 말한다. 때로 책상을 “탕, 탕”치며 이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론도 없고 수행도 없다. 언어적 개념만 타파하면 바로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라는 말은 없다.
MBSR에 대한 영상을 보았다. 마음챙김을 말한다. 영어 마인드풀니스를 번역한 말이라고 한다. 원어인 싸띠(sati)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단지 알아차림만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무리 들어도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마음의 안정과 평화만을 말하는 것 같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영상이나 마음챙김을 말하는 영상은 조회수가 많다. 언어적 개념을 타파하는 것이 주된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로써 설명한다. 이런 수행상품도 있는 것이다.
하루에 한번 시장에 간다. 아파트 바로 옆에 이마트 안양점이 있어서 수시로 간다. 살 것이 없어도 한번 둘러 보기 위해서도 간다. 지하에 있는 식품관에 주로 간다. 그날 세일 하는 것이 있으면 구입한다.
시장에서 소비자는 저렴한 가격에 품질 좋은 물건을 발견하면 즐겁다. 매일 한 가지 이상 세일이 있는 마트에서 장보는 것도 커다란 즐거움이다. 주로 고구마, 감자, 밤호박과 같은 아침에 먹을 거리를 산다.
시장에 가면 수천, 수만 가지 상품을 볼 수 있다. 모두 팔릴 수 있는 물건이다. 그런데 소비자는 불량품을 사지 않는 다는 사실이다. 현명한 소비자라면 누구도 불량품을 사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는 갖가지 명상프로그램이 있다. 유튜브를 보면 갖가지 수행방법이 있다. 그러나 마하시 방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채택할 수 없는 것이다. 현명한 소비자가 불량품을 사지 않듯이, 현명한 수행자라면 해탈과 열반에 도움이 되지 않는 수행방식을 채택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강은 바다로 향하게 되어 있다. 수행방법은 열반이라는 바다를 지향해야 한다. 그럼에도 단지 마음의 안정이나 평화, 스트레스 감소에 그치는 수행방법에 지나지 않는다면 불량상품이나 다름 없다. 현명한 소비자는 불량상품을 사지 않는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관찰해야 하는 이유
위빠사나 수행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수행하는 방식을 말한다. 그 첫 번째 단계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인 것은 위빠사나가 무엇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말해 주는 것과 같다.
어떤 이는 위빠사나에 대하여 ‘분리하여 관찰한다’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친다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정신과 물질, 또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관찰한다.”라고 말하면 제대로 말한 것이다.
위빠사나는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구분해서 관찰해야 할까? 이는 열반의 길로 가기 위한 것이다.
동아시아불교, 즉 중국불교에서는 열반이라는 말이 없다. 해탈이라는 말은 있어도 열반이라는 말은 없는 힌두교와 비슷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선불교에서는 왜 열반을 말하지 않는 것일까?
여기 빨래 줄이 있다. 빨래 줄은 주욱 이어져 있다. 동아시아불교, 중국불교는 선(線)불교 같은 것이다. 선이 주욱 연결되어 있는 불교 같은 것이다. 이런 불교에 열반이 있을 수 없다.
열반을 이루려면 끊어져야 한다. 끊어짐이 있으면 열반을 이룰 수 있다. 초기불교, 즉 부처님의 불교는 끊어져 있다. 이는 마음이 찰나생찰나멸하여 끊임이 있는 것과 같다. 반면에 중국 선불교는 마음이 끊임이 없어서 주욱 연결되어 있는 것과 같다.
마음에 끊임이 있어야 열반을 이룰 수 있다. 끊임이 없는 마음에서는 열반을 이룰 수 없다. 끊임 있는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몸과 마음, 즉 물질과 정신을 분리해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행선을 하면 겟투(Get Two)가 되어
위빠사나는 문자 그대로 분리해서(vi) 관찰하는(passana)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다.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가운데 1단계가 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인 것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행선을 하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생겨난다. 또한 행선을 하면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가 생겨난다. 발을 뗄 때 이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의도가 없다면 한발자국도 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의도는 정신이고 발을 떼는 것은 물질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아는 정신을 따로 새기고, 알아지는 물질을 따로 새기는 것이다. 이는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가 되고 동시에 2단계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가 된다.
‘겟투’라는 담배가 있다. 한번에 두 개를 잡는다는 뜻을 가진 담배이름이다. 행선을 하면 두 개를 동시에 이룰 수 있다. 정신과 물질을 아는 지혜(1단계)와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2단계, 또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말한다.
행선을 하면 겟투가 된다. 마치 임종할 때 ‘사마시시(samasisi)’와 같은 것이 된다. 임종시 생멸을 새기면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한번에 두 가지 일이 성취되는 것을 사마시시라고 한다.
수행은 실재를 보기 위한 것
행선을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까? 발 모양이나 형태를 보아서는 안된다. 발을 개념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오로지 실재만을 보아야 한다. 오로지 풍대라는 움직임만 보는 것이다.
수행은 실재를 보기 위한 것이다. 이를 있는 그대로 본다고 말한다. 야타부따냐나닷사나(yathābhūtañāṇadassana),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을 말한다. 이를 ‘여실지견’이라고 말한다.
여실지견하기 위해서는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언어적 개념이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구분해서 보아야 한다. 정신과 물질, 또는 물질과 정신을 구분해서 실재를 보는 것이다.
사성제를 세 번 굴려서
요즘 머리맡에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읽고 있다. 현재 사성제의 삼전십이행상에 대해서 읽고 있다. 사성제를 세 번 굴리는 것이 핵심이다.
불교의 핵심은 사성제이다. 누구든지 사성제를 말하지 않는다면 사이비불교라고 말할 수 있다.
MBSR에서는 사성제를 말하지 않는다. 오로지 스트레스완화 기법에 대한 것이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라 하여 ‘마음챙김’을 말하지만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구분하지 않기 때문에 열반이 있을 수 없다. 불교가 배제된 위빠사나 테크닉만 가져간 것이다.
사성제에 삼전이 있다. 시전은 가장 처음 굴린 것이다. 고성제의 경우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여 선언적 의미가 있다. 이런 선언이 없으면 그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없다.
인간은 괴로운 존재이다. 인간이 괴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아는 것이 고성제에서 시전에 해당된다. 중전은 괴로움을 구분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이는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해서, 분별해서, 분석해서 파악하지 않으면 결코 끊어질 수 없다. 끊임이 없으면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고성제를 알면 나머지는 다 아는 것이라고 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면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면 괴로움은 해결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관찰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고성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세 번 굴렸다.
1)초전: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 (Idaṃ dukkhaṃ ariyasaccanti)”
2)중전: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 (Taṃ kho pan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eyyanti)”
3)말전: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 (Taṃ kho pan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ātanti”
여기서 중전에 ‘빠린네이얀띠(pariññeyyanti)’와 말전에 ‘빠린냐딴띠(pariññātanti)’가 있다. 두 말은 구분하여 안다는 뜻을 가진 시전의‘빠린네이야(pariññeyya)’에 대한 진행형과 완료형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빠린네이야(pariññeyya)’에 대해서는 ‘진리지혜(saccañāṇa)’라고 했고, ‘빠린네이얀띠(pariññeyyanti)’에 대해서는 ‘역할지혜(kiccañāṇa)’라고 했고, ‘빠린냐딴띠(pariññātanti)’에 대해서는 ‘완수지혜(katañāṇa)’라고 설명했다.
마하시 사야도는 고성제를 세 번 굴린 것에 대하여 설명했다. 경전에 있는 것을 위빠사나 수행관점에서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봄이나 들음 등 취착무더기라는 괴로움의 진리법들을 관찰하여 무상·고·무아라고 계속해서 알고 있는 것이 위빳사나 지혜입니다. 그 위빳사나 지혜로 아는 것 정도로는 구분하여 아는 역할(pariññākicca)이 완전히 성취되지 않습니다.
관찰하지 못한 대상에 대해 항상하다고, 행복하다고, 자아라고 생각할 여지가 아직 있습니다. 관찰하는 위빳사나 지혜가 무르익고 구족됐을 때 성스러운 도의 지혜로 열반이라는 적정의 요소를 경험하여 보게 됩니다.
그렇게 성스러운 도의 지혜가 생겨 나 열반이라는 적정한 요소를 경험하여 보아야 무상·고·무야라는 앎이 구족되고 확고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괴로움의 진리를 구분하여 앎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다원도의 지혜 정도로는 아직 완벽 하게 성취된 것이 아닙니다. 아라한도의 지혜로 경험하여 보아야 괴로움을 구분하여 앎이 남김없이 완전히 성취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라한 도과에 이르시고 나서 부처님이 되신 때부터 괴로움의 진리를 구분 하여 삶이 남김없이 완전히 성취됐습니다. 그래서 “ ‘pariññātanti 구분 하여 알았다; 구분하여 아는 역할과 작용이 완전히 성취됐다’라고 아는 지혜의 눈 등이 생겨났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담마짝까법문, 394-395쪽)
편의상 문단을 나누어 놓았다. 핵심은 구분해서 아는 것이다. 이를 빠린네이야라고 한다.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는 것이다. 이런 구분이 없으면 위빠사나가 될 수 없다. 열반도 있을 수 없다.
진리지혜, 역할지혜, 완수지혜
마하시 사야도는 고성제에서 세 번 굴린 것에 대하여 진리지혜, 역할지혜, 완수지혜로 설명했다. 이에 대한 설명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괴로움의 진리와 관련해 진리지혜(saccañāna), 역할지혜(kiccañāna), 완수지혜(katañāņa)라는 세 가지 지혜에 대한 설명이 끝났습니다. 요약하자면, 볼 때 등에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는 성품법 모두를 괴로움의 진리(dukkhasacca)라고 아는 것이 진리지혜이고, 그 괴로움의 진리법들을 관찰해서 구분하여 알아야 한다고 아는 것이 역할지혜이고, 구분하여 아는 역할이 성취됐다고 숙고해서 아는 것이 완수지혜입니다.”(담마짝까법문, 395-396쪽)
세상에 이런 법문을 들어 보지 못했다. 한국불교 어느 스님에게서 이런 법문을 들어 보지 못했다. 유튜브에서도 보지 못했다. 오로지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집에서 본다. 1962년에 법문한 것이다. 더 이전에도 법문했었다.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로 포섭
사성제는 불교의 핵심이다. 이는 코끼리 발자국이 모든 동물의 발자국에 포섭되듯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은 사성제로 포섭된다. 사성제를 말하지 않는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사성제가 없으면 불교가 없다. 사성제가 없으면 열반도 없다. 열반은 명색, 즉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파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것이 고성제에서 구분해서 알아야 하는 역할지혜라는 것이다. 고성제의 중전에 해당되는 것이다.
한시간 행선을 강조하는 마하시 전통
오늘도 긴 글을 썼다. 이런 것이 매일 가능한 것은 아침에 좌선을 했기 때문이다. 좌선한 직후 청정한 마음에서 쓰는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혼탁해지지 않는 것이다. 아침에 뉴스를 보았다거나 페이스북과 같은 에스엔에스를 했다면 영향을 줄 것이다.
오늘 아침 행선과 좌선을 하면서 정신과 물질을 왜 새겨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본래 배의 부품과 꺼짐만을 새겨야 하나 읽었던 논서와 경서의 말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는 잡념과 다른 것이다. 새김이 확립된 상태에서 경전적 지식에 대한 것은 법념처라고 본다.
행선을 하면서 행선을 한시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발을 움직일 때 발의 모양을 보지 말고 운동성만 보아야 하는데 일이십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임을 알았다. 한시간은 지속적으로 끊임 없이, 마치 아무 의미 없는 것처럼 관찰해야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볼 수 있는 힘이 생겨날 수 있음을 어렴풋하게 알게 된 것이다.
행선을 한시간 해야 한다. 일이십분 하다 앉아서는 법의 성품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최소한 삼십분 이상 집중해서 새겨야 한다. 남이 보기에 아무 의미 없는 행위를 하는 것처럼 정신과 물질을 새겨야 한다. 왜 마하시 전통에서 한시간 행선을 강조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2024-09-0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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