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더니

담마다사 이병욱 2024. 9. 8. 11:33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더니

 

 

일요일 아침햇살이 찬란하다. 막 좌선을 마쳐서일까 마음은 맑고 깨끗하고 밝았다. 오늘 아침은 평소와는 다르다. 이것저것 알게 된 것이 있다. 이것을 작은 깨달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침햇살 찬란한 백권당의 아침이다.

 

오늘 재가우안거 51일째이다. 일요일이라 해서 안거를 쉬는 일은 없다. 주말은 평일의 연장선상에 있다. 날씨와도 무관하다. 이렇게 후기를 쓰는 것도 거르는 일은 없다.

 

정신이 맑은 상태에서 하얀 여백을 대하고 있다. 막 좌선을 마쳤으므로 갖가지 견해에 영향 받지 않는다. 생각해 둔 것을 가능한 있는 그대로 쓰고자 한다.

 

먹는 꿈을 꾸었는데

 

오늘 새벽 꿈이 좋았다. 새벽 두 시에 깨어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보았다. 언제 읽어도 가슴을 울린다. 보고 또 본다.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싶다. 새기고 또 새긴다. 이런 영향이 있어서일까 새벽 세 시 이후에 잠들었는데 먹는 꿈을 꾸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꿈의 질도 좋지 않다. 그러나 몸 상태가 좋으면 꿈도 좋은 것 같다. 특히 경전을 읽거나 논서를 읽었을 때 그런 것 같다. 새기고 싶은 것을 마음에 품고 잠을 잤을 때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먹는 꿈을 꾸고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먹는 꿈이 좋은 꿈인지 알 수 없으나 쫓기는 꿈을 꾸는 것보다 백배, 천배 나은 것이다. 꿈에서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답답하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 꾼 꿈은 내 뜻대로 된 것이다.

 

백권당 테이블에서 찐계란을 먹다가

 

오늘 일요일 아침 날씨는 24도로 쾌적하다. 비산사거리 부근에 있는 안양천에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평일보다 두세 배 많다. 단체조끼를 입은 일단의 남녀 무리가 열을 지어서 달리고 있었다.

 

 

오늘 아침 백권당 테이블에서 아침을 먹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찐계란에 맛소금을 쳐서 한입 물다가 내가 먹는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내가 먹는다라고 한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내가 먹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먹는 나는 없기 때문이다.

 

 

계란을 먹을 때 먹을 때는 먹는다고 안다.”라는 말이 떠 올랐다. 이 말은 갈 때는 간다고 안다.”라는 말과 구조가 같다. 그러나 이 말은 초기경전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알아야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는 몸관찰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네 가 지행동양식, 즉 행, , , 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Puna capara, bhikkhave, bhikkhu gacchanto vā ‘gacchāmī’ ti pajānāti, hito vāhitomhī’ ti pajānāti, nisinno vā ‘nisinnomhī’ ti pajānāti, sayāno vā ‘sayānomhī’ ti pajānāti, yathā yathā vā panassa kāyo paihito hoti, tathā tathā na pajānāti.

 

또한 수행승들이여, 수행승이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거나, 서있으면 서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앉아있다면 앉아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누워있다면 누워있다고 분명히 알거나 신체적으로 어떠한 자세를 취하든지 그 자세를 그대로 분명히 안다.”(D22)

 

 

걷고, 서고, 앉고, 눕는 네 가지 행동양식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정신과 물질을 새기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집착된 것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에 대하여 환원하여 관찰하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쪼개어서 보는 것이다. 뭉텅이 진 것을 나누어 보는 것이다. 다섯 가지 존재의 집착다발(五取蘊)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에 대하여 물질과 정신으로 분석해서 보았을 때 나라는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부처님이 ()’라고 한 것은

 

부처님은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gacchanto vā ‘gacchāmī’ ti pajānāti)”라고 했다. 여기서 갓차미(gacchāmī)’는 일인칭 단수이다. 엄밀하게 번역하면 내가 간다.”가 된다. 그러나 어떤 번역에서도 라는 말은 빠져 있다. 왜 그런가? 나라는 말은 관용어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명칭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해야 할 것을 다 마치고 번뇌를 떠나

궁극의 몸을 이룬 거룩한 수행승이

나는 말한다.’고 하든가

사람들이 나에 관해 말한다.’고 하여도

세상에서 불리는 명칭을 잘 알아서

오로지 관례에 따라 부르는 것이네.”(S1.25)

 

수행자는 나라는 명칭을 붙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람들과 대화할 때는 나라는 명칭을 붙일 수밖에 없다. 부처님도 나라는 말을 했다. 초기경전에 수도 없이 나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무아의 성자에게 나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 단지 관례상 붙이는 것이다. 사람들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라고 하는 것이다.

 

오온에 집착된 존재

 

계란을 입에 물었을 때 내가 먹는 것은 아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오온이 먹는다고 말해야 한다. 다섯 가지 다발이 먹는 것이다. 물질의 다발, 느낌의 다발, 지각의 다발, 형성의 다발, 의식의 다발이 먹는 것이다.

 

내가 간다고 할 때 수행자라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위빠사나에서는 나는 없기 때문에 오온이 간다.”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오온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오온에는 나와 너가 없다. 오온은 누구에게나 붙일 수 있는 말이다.

 

음식을 먹을 때 먹을 때는 먹는다고 분명히 안다.”라고 먹어야 한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오온이 먹는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라면 여기서 한발 더 들어가야 한다. 정신과 물질 또는 물질과 정신으로 먹는 것이다.

 

갈 때는 간다고 아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신과 물질, 물질과 정신 작용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나는 없다. 왜 그런가? 오온의 다발을 정신과 물질로 환원했기 때문이다. 오온이 식사한 것이다.

 

아직 깨닫지 못한 자의 오온은 집착된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오온에 집착된 존재들이다. 먹어도 내가 먹는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자는 오취온을 정신과 물질로 환원해서 먹기 때문에 오온으로 먹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으로 환원하여 새겼을 때

 

오늘 아침 행선을 십 여분 했다. 원래 이삼십분 하려 했으나 십 여분 하다 그만 두었다. 이는 갈 때는 간다고 아는 것과 먹을 때는 먹는 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일종의 작은 깨달음이라 볼 수 있다.

 

대념처경에 먹을 때는 먹는다고 분명히 안다.”라는 말은 없다. 그럼에도 갈 때는 간다고 분명히 안다.”라는 구조에 대입한 것은 공통적으로 환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집착의 다발(취온)을 정신과 물질로 환원시킨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단지 행선과 좌선만 해서는 진척이 없다. 스승이 있어서 알려 주어야 발전이 빠를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 스승이 없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세세히 알려 줄 수 있는 자비로운 스승은 기대하기 힘들다. 이럴 때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나 법문집 보다 더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 다섯 가지 집착다발(五取蘊)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법문이 있다.

 

 

“ ‘취착무더기(upādānakkhandhā)란 집착하고 거머쥐는 취착(upādāna)의 대상인 물질·정신 무더기들을 말합니다. ‘취착의 대상이라고 했기 때문에 취착이 집착하고 거머쥘 수 있는 물질과 정신입니다. 그것들은물질 취착무더기(rūpupādānakkhandhā), ② 느낌 취착무더기(vedanupädänakkhandhā), ③ 인식 취착무더기(saññupādānakkhandhā), ④ 형성 취착무더기(sańkhārupādānakkhandhā), ⑤ 의식 취착무더기(viññāņupādānakkhandhā)라는 다섯 무더기입니다. 중생들은 바로 이 다섯 취착무더기를 어떤 실체로 생각하고 지냅니다.

물질 무더기인 몸도나다. 나의 몸이다. 항상하다라는 등으로 집착 합니다. 그래서 물질 무더기, 몸 무더기를취착무더기라고 말하는 것 입니다. 아는 마음과 마음부수, 이러한 정신법들도나다. 나의 마음이다. 내가 생각한다. 이 마음은 항상하다라는 등으로 집착합니다. 그래서 마음과 마음부수라는 정신법들도 취착무더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질·정신 무더기를 모아서 집착하는 모습입니다.”(담마짝까법문, 250-251)

 

 

이런 글은 이미 읽었다. 또한 오취온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오늘 아침 계란을 먹었을 때 절절이 다가 온 것은 어떤 이유일까? 아마 그것은 이제까지 아무 생각 없이 살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먹을 때는 먹는다고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때 먹는 것은 물질에 대한 것이고, 먹는 것을 아는 것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에서는 분명히 안다는 뜻으로빠자나띠(pajānāti)’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는 물질 따로, 정신 따로 새기는 것이다. 먹는 것에 대하여 물질과 정신으로 환원하여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환원하여 새겼을 때 정신과 물질에 대한 집착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먹는다.”라는 관념은 생겨나지 않는다.

 

먹을 때는 먹는다고 분명히 알아야

 

초기경전에 먹을 때는 먹는다고 분명히 안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에서는 발견된다. 마하시 사야도는 여섯 문의 취착무더기에서 먹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먹을 때 다섯 취착무더기)

음식을 먹고서 맛을 알 때 깨끗한 혀도 분명합니다. 맛도 분명합니다. 맛을 아는 것도 분명합니다. 그 맛을 아는 것에 먹어서 좋고 나쁜 것도 포함됩니다. 맛을 인식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맛을 아는 작용이 성취되도록 의도하고 마음 기울이는 것도 포함됩니다. 단지 맛보아서 아는 것도 포함됩니다.

먹어서 알 때 관찰하지 못해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 맛을 알 때 분명한 것들을나다. 나의 것이다라는 등으로 집착합니다. 그렇게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혀와 맛, 먹어서 아는 것들을 취착무더기라고 말합니다.”(담마짝까법문, 256)

 

 

음식을 먹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먹는다.’라고 한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는 잘못 된 것이다. 음식을 먹는 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것은 단지 물질과 정신의 작용일 뿐이다.

 

위빠사나수행은 환원수행

 

음식을 보고서 먹고 싶은 마음이 생겼을 때 이는 의도가 일어난다. 이런 의도는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조건에 따른 것이다. 음식을 본 것이 조건이 된다. 여기서 의도는 정신에 대한 것이다.

 

의도가 일어나면 몸이 반응한다. 먼저 손을 움직이게 하는 몸의 암시가 일어난다. 여기서 몸의 암시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아비담마에 따르면 28가지 물질이 있는데 그 가운데 암시도 있다. 암시도 물질인 것이다. 아비담마에서는 몸의 암시에 대하여 추상물질이라고 한다.

 

찐계란을 집은 것은 내가 집은 것이 아니다. 정신과 물질의 작용에 따른 것이다. 이는 집착된 다섯 가지 다발(五取蘊)을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새겼기 때문에 내가 사라진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환원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오취온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질 따로, 정신 따로 새긴다. 이것이 빠자나띠이다.

 

오온에 집착된 채로 산다면 내가 사는 것이 된다. 걸어도 내가 걷는 것이 되고 먹어도 내가 먹는 것이 된다. 항상 내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살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처님은 괴로움의 진리에 대하여 다섯 가지 취착무더기라고 했다. 이는 초전법륜경에서 부처님이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sa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S56.11)라고 선언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인간은 오취온적 존재이다. 이는 존재자체가 괴로운 것임을 말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왜 부처님이 사성제에서 고성제를 가장 먼저 설했는지 이유가 된다.

 

인간은 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없다. 그런데 부처님은 괴로움을 말했지만 괴로움의 원인과, 소멸, 방법에 대해서도 말했다는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를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관찰하면 내가 사라진다. 육문에서 발생 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정신 따로, 물질 따로 새기면 내가 있을 수 없다. 무상, , 무아의 통찰이 생겨났을 때 이것을 대상으로 도를 닦으면 괴로움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우주에 오로지 몸의 움직임과 아는 마음만 있는 듯

 

행선을 할 때 마음이 맑아졌다. 발의 움직임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따로따로 새기면 이 세상에 움직임과 아는 마음만 있게 되는 것 같다. 나는 없는 것이다.

 

좌선 할 때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한다. 배가 부풀 때, 부푸는 것은 물질에 대한 것이다. 부푸는 것을 아는 것은 정신에 대한 것이다. 물질과 정신을 따로따로 새겼을 때 이 세상에 움직이는 물질과 이를 아는 마음만 있는 것 같다. 여기에 나는 없는 것이다.

 

어떤 이는 명상할 때 지켜 보는 나가 있다고 말한다. 아마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그대로 둔 것이다.

 

부처님 가르침은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 이는 몸과 마음을 다섯 가지로 분해하여 설명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집착된 오온의 다발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쪼개고 또 쪼개었을 때 남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상, , 무아이다.

 

행선할 때나 좌선할 때는 정신과 물질을 새긴다. 이렇게 새겼을 때 세상에, 이 우주에 정신과 물질만 있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관찰하는 마음은 없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찰나생찰나멸이기 때문이다. 조건발생하기 때문에 찰나생찰나멸이다. 생겨나서는 즉시 사라지는 것이다. 여기에 지켜 보는 하나의 마음은 있을 수 없다. 이 우주에 오로지 몸의 움직임과 아는 마음만 있는 듯한 것이다.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attavādupādāna)

 

초기경전을 접하면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이는 일반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정반대의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일반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대하여 괴롭다고 보는 것이 대표적이다. 왜 그런가? 내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보면 괴롭다. 세상 사람들은 보아도 내가 본다고 생각하고 들어도 내가 듣는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먹어도 내가 먹는다고 생각한다. 걸어도 내가 걷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오온에 집착된 것이다.

 

오온을 자신의 것으로 보았을 때 네 가지 집착으로 살아 간다. 어떤 것인가?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네 가지 집착, 즉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집착, 견해에 대한 집착,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집착이라고 한다.”(S12.2)로 알 수 있다.

 

네 가지 집착 가운데 가장 끊기 어려운 것이 아마도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이다. 오온에 대하여 자신의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이를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attavādupādāna)’이라고 말한다.

 

자아이론에 대한 집착은 나의 것이라고 고집하는 견해를 말한다. 유신견과 동의어이다. 이런 견해는 분리해서 관찰하면 깨진다.

 

위빠사나수행은 정신과 물질로 환원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정신 따로, 물질 따로 새기면 나의 것이라는 환상은 깨진다. 오로지 생멸하는 정신과 물질만 있는 것이다. 여기에 라든가 주재자라든가 창조주와 같은 개념은 들어갈 여지가 없다.

 

육문과 오온의 입체적 설명

 

오온에 대한 집착은 매순간 일어난다. 여섯 문에서 들어 오는 대상에 대하여 다섯 가지 집착의 다발이 있을 때 괴로움이 발생된다. 눈에 대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위빳사나 관찰을 하지 않는 이들, 또는 관찰하더라도 생멸이나 무 상··무아를 아직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렇게 볼 때 분명한 눈이나 형색 등을라거나나의 것등으로 집착합니다. 집착하는 모습은 다음 과 같습니다.

 

깨끗한 눈이 나다. 내 눈이다. 항상 유지되고 있다라고 눈 물질에 집착합니다. 자신의 손 등을 볼 때내 몸을 내가 본다. 내 손이다. 항상 유지되고 있다라는 등으로 집착합니다. 다른 이를 볼 때도 영혼이 있는 어떤 개인이나 중생, 항상 존재하는 것 등으로 집착합니다. 그렇게 집착하기 때문에 눈과 형색 물질을 물질 취착무더기라고 말합니다.

 

보아서 좋고 나쁜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지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중간의 평온한 느낌도 있습니다. 여기선 좋은 것과 나쁜 것 두 가지만 설명하겠습니다. 중간의 평온한 느낌의 경우, 선업의 결과와 관련 된 것은 좋은 느낌에 포함시키고 불선업의 결과와 관련된 것은 나쁜 느낌에 포함시키면 됩니다. 그렇게 보아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라고 도 집착합니다. ‘나의 느낌이라고도 집착합니다. 항상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도 집착합니다. ‘내가 좋다. 내가 괴롭다라고도 집착합니다. 그렇게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보아서 좋고 나쁜 느낌을 느낌 취착무더기 라고 합니다.

보이는 형색을 인식하는 것도내가 인식한다. 나는 잊지 않는다라 는 등으로 집착합니다. 그렇게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보아서 인식하는 것을 인식 취착무더기라고 합니다.

보도록 애쓰는 것이란 의도(cetan
ā)를 말합니다. 문헌의 표현으로는격려한다. 자극한다. 북돋는다라고 말합니다. 애쓰는 성품으로 분명 합니다.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란 말 그대로 마음기울임(manasikāra)입니다. 그 밖에 접촉 등도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분명한 의도와 마음기울임만 드러내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의도하는 것과 마음 기울 이는 것도라거나항상하다라는 등으로 집착합니다. 그렇게 집착 할 수 있기 때문에 보도록 의도하고 마음 기울이는 것을 형성 취착무더기라고 말합니다. ‘형성(sakhāra)’이라는 것은 형성시켜 주는 성품입니다. 볼 때 보는 작용이 성취되도록 형성시켜 주는 성품을 말합니다.

단지 보아서 아는 성품이란 마음의식입니다. 그 마음의식도내가 본다. 내가 안다. 보는 것은 나다. 항상하다라는 등으로 집착합니다. 그렇게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보아서 아는 마음의식을 의식 취착무더기라고 말합니다.”(담마짝까법문, 251-252)

 

 

 

여섯 문 중에서 안문에 대한 것이다. 안문에 대하여 색취온, 수취온, 상취온, 행취온, 식취온에 대하여 설명했다. 이후 이문, 비문 등도 똑같이 적용된다. 이는 입체적 설명이다. 경전에도 이런 입체적 가르침이 실려 있다. 경전에 근거한 법문이다.

 

여섯 문 가운데 보는 것이 사람을 속이기 쉽다. 왜 그런가? 저 바위산은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듣는 것은 시간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냄새도, 맛도, 접촉도 시간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그럼에도 저 산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 시각이 나를 속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법문에서 자신의 손 등을 볼 때내 몸을 내가 본다. 내 손이다. 항상 유지되고 있다라는 등으로 집착합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더니

 

이번 우안거 기간 동안 매일 행선을 하고 매일 좌선을 하고 있다. 일요일이라고 해서 쉬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일요일 아침은 좀 특별했다. 그 동안 보아 왔던 것이 이해 되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계란을 먹다가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길을 걸을 때 내가 걷지 않는다. 오취온을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따로따로 새기면 걷는 나는 없다. 밥을 먹을 때 정신과 물질로 따로따로 새기면 먹는 나는 없다. 오늘 아침 이런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 했을 때 마음이 가벼웠다. 무언가 큰 것을 깨달은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나를 정신과 물질로 환원하여 세상을 바라보았더니 세상이 밝아진 것이다.

 

 

2024-09-0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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