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이 저절로 되었을 때
몸과 마음이 편안하다. 이를 지극히 편안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단잠을 자고 난 후의 상태와 같다. 막 잠들려는 상태와도 같다. 좌선 중에 일어난 것이다.
재가우안거 53일째이다. 오늘은 다른 날보다 특별했다. 행선과 좌선을 하는데 집중이 잘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저절로 되는 것 같다. 이런 날은 드물다.
행선과 좌선이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날은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 애쓰다가 시간만 지나간다. 이럴 경우 잡념에 지배 받는다. 빨리 끝내고 싶어 진다.
하루에 두 번 좌선하고 있다. 오전과 오후에 각각 한번씩 좌선한다. 그런데 오전과 오후는 천지차이라는 것이다. 오후에는 오전과 달리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졸립기도 하다.
오후 좌선은 실익이 없다. 그래서일까 선원에서도 오후에는 좌선보다는 법문을 하거나 경전을 보거나 수행점검하는 시간을 갖는 것 같다.
오전 좌선은 최상의 조건에서 하는 것이다. 잠에서 깨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라서 거저 먹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조건이 있다. 일체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뉴스나 음악은 당연히 듣지 말아야 한다. 일체 언어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우안거 기간 내내 아침에 샤워를 한다. 뜨거운 물에 머리를 감고 몸에 물을 뿌리는 것이다. 이렇게 샤워를 하고 나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진다.
아침에는 적게 먹는다.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 음식이나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을 파한다. 그대신 고구마와 감자, 계란를 쪄서 먹는다. 그것도 허기만 면할 정도로 조금 먹는다.
아침은 백권당에서 먹는다. 집에서 준비해 온 것을 테이블에 앉아 먹는 것이다. 꿀물도 곁들인다. 아침을 먹고 나면 커피를 마신다. 절구질한 절구커피이다.
커피를 마시고 나면 본격적인 하루일과가 시작된다. 먼저 행선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백권당 행선대에서 눈을 감고 왔다리 갔다리 한다.
오늘 행선은 자동적으로 되는 것 같았다. 이런 날은 드물다. 오늘은 명상을 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진 날 같다.
명상에서 ‘자동적으로’라는 말이 쓰일 때가 있다. ‘저절로’라는 말과 동의어가 된다. 행선할 때 저절로 의도가 보이는 것 같았다. 저절로 발의 움직임이 새겨졌다.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한다. 행선할 때 저절로 새김이 있게 되었을 때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었다. 행선이 재미있어졌다.
무엇이든지 재미 있으면 계속하게 된다. 행선에 재미를 붙이자 언제까지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시간 행선은 문제없을 것 같았다.
언젠가 유튜브에서 일묵스님의 영상을 보았다. 일묵스님은 싸띠(sati)에 대하여 ‘기억’이라고 말했다. 이전에는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렇게 용어를 바꾸어 사용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는 좋은 기억에 대한 것이다.
좋은 추억이 있으면 언제나 기억하고 싶어진다. 명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명상에서 최상의 경험을 했다면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싶어진다. 일묵스님에 따르면, 명상에서 좋은 체험을 기억하는 것도 싸띠라고 했다.
행선이 자동으로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발을 움직이려는 의도는 분명했다. 의도대로 발이 움직였는데 이를 아는 마음도 보였다. 새김이 분명하다 보니 다른 것은 들어 오지 않았다. 창 밖으로 차 지나가는 소리, 불쾌를 야기하는 오토바이 소음소리, 천둥 같은 전철 지나가는 소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새김의 힘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백권당 행선대에서 이십여분 왕래했다.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왕이 부럽지 않았다. 어느 왕, 어느 재벌이 이런 맛을 볼 수 있을까?

오늘 행선이 잘 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어느 정도 집중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몸과 마음 상태가 바뀐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분명히 이전과는 다른 상태가 된 것이다. 이를 근접삼매와 유사한 것이라고 보면 지나친 것일까?
삼매는 집중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몰입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어떤 대상에 몰입 되었을 때 무아지경에 이른다. 마치 저절로 자동으로 하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오늘 아침 행선이 그랬다.
오늘 아침 행선 할 때 몰입이 되어서 언제까지나 계속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항상 그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다. 조금만 방심해도 흐트러진다. 그럼에도 몰입 강도가 세면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행선할 때 집중이 잘 되면 좌선도 집중이 잘 된다.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그대로 좌선으로 가져 갈 수도 있다. 마치 이 기분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같다.
이십여분 행선을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오늘 좌선은 잘 될 것 같았다. 자리에 앉자 마자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잘 잡히지 않는다. 이럴 때는 억지로라도 집중하고자 한다. 때로 “부푼다, 꺼진다”라며 명칭을 붙이기도 한다.
오늘 좌선은 금방 들어간 것 같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조금 새겼을 뿐인데 다른 상태가 되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몸 전체로 확장되었다. 이는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길 때 배의 모양이나 형태를 떠올리지 않고 단지 운동성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좌선할 때 코를 보지 않는다. 코의 호흡에 마음을 두지 않는 것이다. 코의 호흡에 집중하면 사마타가 된다. 그러나 코의 바람에 집중하면 위빠사나가 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배를 보라고 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것이다. 배가 부푸는 것은 물질이고, 배가 부푸는 것을 아는 것은 정신이다. 위빠사나는 물질과 정신을 새기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을 따로 새기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긴다고 말한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은 위빠사나 지혜를 얻기 위한 것이다. 단지 호흡만 새긴다면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길 수 없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겨야 조건발생하는 것을 알게 된다. 정신과 물질이 조건발생하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생멸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이는 무더기를 잘게 쪼개서 관찰하는 것과 같다.
물질을 잘게 쪼개고 또 쪼개면 무엇이 보일까? 아마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를 보게 될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텅 빈 것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공(空)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은 집착된 무더기를 쪼개서 보는 것과 같다.물질의 무더기, 느낌의 무더기로 관찰하면 내가 개입되어서 ‘내몸’이라거나 ‘내가 느낀다’고 말한다. 그러나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나(我)라는 개념이 들어갈 수 없다.
이 몸과 이 마음은 집착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집착된 이 몸과 마음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마치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서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 몸과 마음을 쪼개고 또 쪼개서 보면 운동성만 있고 생멸만 있을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겼을 때 일어남과 사라짐만 있게 된다. 이는 생멸에 대한 것이다.
생멸은 항상하지 않다. 항상하지 않은 것이어서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을 수 없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면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생겨남을 말한다.
단지 호흡만 관찰한다면 고요와 평화를 갖게 될 것이다. 명상에서 벗어나면 예전 마음으로 돌아 온다. 그러나 배의 운동성을 새겨서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생겨난다면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행선도 저절로 되고 좌선도 저절로 되는 것 같았다. 이는 명상을 잘하기 위한 조건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몸과 마음 상태, 그리고 주변환경의 조건이 받쳐 준 것이다.
배의 움직임을 관찰할 때 처음에는 배 주위에만 한정되었다. 배 모양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운동성만 관찰했을 때 몸 전체에 퍼져 나갔다. 몸 전체가 부풀고 꺼지는 운동성이 있게 된 것이다.
호흡이라 하여 반드시 코로 하는 것은 아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본다고 하여 반드시 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집중이 잘되어서 새김이 좋으면 배의 부품과 꺼짐은 몸 전체로 확대 된다. 마치 몸으로 호흡하는 것 같은 상태가 되는 것이다.
좌선할 때 처음에는 의도적으로라도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자동으로 부품과 꺼짐이 일어나는 것 같다. 이럴 때 개입하지 않는다. 내버려 두는 것이다.
배의 움직임을 내버려 두었다. 그저 지켜만 보았다. 배의 움직임은 몸으로 확대되었다. 몸이 호흡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다음 번에는 공간이 호흡하는 것 같았다. 마치 ‘자발공’을 보는 것 같았다.
자발공이라는 말이 있다. 기수련 할 때 쓰는 용어이다. 기수련할 때 몸이 자신의의도와는 무관하게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이럴 때 “자발공이 터졌다.”라고 말한다.
자발공이 터졌던 때가 있다. 작년 기수련할 때 팔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마치 춤을 추듯이 팔이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어서 다른 팔도 올라갔다.
팔은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리고 내려왔다. 그리고는 또다시 올라갔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나도 놀랐다. 이에 대하여 ‘팔이 서서히 저절로 위로, 마하무드라 기공춤을 추다’(2023-06-30)라는 제목으로 글을 남겼다.

자발공 동영상은 컴퓨터에 보관하고 있다. 기수련 지도한 김준호 선생이 찍어 준 것이다. 처음 겪어 보는 현상에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했다. 분명한 사실은 자발공니 터지면 팔이 스스로 움직인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나무토막과도 같은 팔이 스스로 움직일 때 ‘자발공이 터졌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늘 아침 좌선 하면서 몸이 호흡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또한 허공이 호흡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럴 때 자발공을 떠 올렸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의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나는 단지 지켜만 보고 있었을 뿐이다.
몸이 호흡하고 허공이 호흡하는 것 같았을 때 몸과 마음이 지극히 평안했다. 이대로 그냥 계속 있고 싶었다. 호흡의 움직임도 분명히 보였다. 호흡의 처음과 끝도 보였다. 여기에 마음의 개입은 없었다. 그저 지켜만 보았다. 마치 남 보듯이 본 것이다.
오늘 좌선은 삼십분 했다. 저절로 자동으로 호흡이 있는 것이 기수련에서 자발공이 터진 것 같았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몸 전체가 숨을 쉬는 것 같았다. 허공이 숨쉬는 것 같았다.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창 밖의 소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삼십분이 금방 지나간 것 같았다.
오늘 행선과 좌선은 성공적이었다. 아마 이런 날은 드물 것이다. 위빠사나에서 싸띠에 대하여 마음챙김, 알아차림, 새김 등 여러 용어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기억이다. 수행에서 기억할 만한 체험을 기억하는 것도 싸띠에 해당된다고 했다. 앞으로 수행에서 오늘 행선과 좌선에서 체험한 것은 기억될만한 것이다.
2024-09-10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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