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기고 또 새기고 되새김하며 읽은 담마짝까(初轉法輪經) 법문
눈을 감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무엇보다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오늘 아침 식사를 하면서 눈을 감고 먹었다. 눈 뜨고 먹을 때 보다는 맛을 알 수 있었다.
오늘 재가우안거 60일째이다. 오늘은 추석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올해 추석은 쉬어 가기로 했다. 한달전 부모님 기일이 있었는데 동생네와 합의 해서 패싱하기로 한 것이다. 설날 때 다시 만날 것이다.
수행이 늘 잘되는 것은 아니다. 잘 될 때보다 잘 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아주 잘 될 때는 드물다. 그럼에도 기억은 강렬하다. 이런 것도 싸띠(sati)에 해당될 것이다.
오늘 행선은 실패 했다. 고작 십분 하다가 그만 두었다. 도대체 삼매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었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여섯 단계 행선을 해보았지만 비틀거릴 뿐이었다.
행선에서 집중이 되지 않으면 좌선은 기대할 것이 없다. 오늘 좌선이 그랬다. 앉아 있었지만 좀처럼 집중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삼십분 끝나기 오분 전에 약한 삼매가 형성되었다.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회가 기회인줄 알아야 한다. 약한 삼매가 형성되자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지속적으로 새기고자 했다. 그런 한편 경전적 지식을 동원했다. 명색(名色)으로 보고자 한 것이다.
마음챙김이라 하지 않고 새김이라 하는 것은
흔히 싸띠(sati)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한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 용어를 니까야 번역용어로 사용했다. 이 용어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유튜브를 보면 ‘마음챙김명상’이라 하여 수행전문용어로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읽고 있다. 한국마하시선원에서 번역된 것이다. 일창스님은 싸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번역한 새김과 동일한 용어이다.
싸띠를 마음챙김이 아닌 새김이라고 번역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것은 ‘기억’이다. 싸띠라는 말의 제1의 의미는 기억(memory)의 뜻이기 때문이다.
수행에서 왜 기억이 중요한가? 이는 바로 이전 상태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을 아는데 있어서 매우 필요한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을 하고 있다. 위빠사나수행은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무엇을 분리해서 관찰하는가? 이는 명색, 즉 정신과 물질을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싸띠는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매우 빠른 동작을 의미한다. 자신의 상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즉 눈으로 보아서 아는 것, 귀로 들어서 아는 것, 닿아서 아는 것, 생각해서 아는 것도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파악해야 한다. 대단히 빠르게 알아야 한다.
새김이라는 용어는 속도가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는 것을 말한다. 행선에서 뒷쿰치를 먼저 들어 발을 뗄 때, 여기서 발을 떼는 것은 물질적 현상에 대한 것이다. 발을 떼는 것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이 두 과정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분리해서 또는 구분해서 관찰해야 한다. 속도가 있어야 한다. 새김보다 더 좋은 용어는 없을 것 같다.
싸띠의 갖가지 용어에 대하여 이런 생각을 해본다. 싸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했을 때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마음챙김한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는 발을 떼는 물질적 현상을 마음챙김하는 것이고, 발을 떼는 것을 아는 마음을 마음챙김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명색을 구분해서 정신 따로, 물질 따로 관찰하는데 있어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너무 늦다. 순간적으로 변하는 대상을 따라잡을 수 있는 술어가 아닌 것이다. 더구나 ‘마음을 마음챙김한다’라는 의미도 있다. 이중으로 마음챙겼을 때 스피드가 너무 늦다.
싸띠에 대하여 ‘알아차림’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말은 일상에서 사용하기에는 부담없지만 수행용어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발을 뗄 때 물질적 현상을 알아차림하고, 발을 떼는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마음챙김이라는 용어처럼 너무 늦다.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대상을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이다.
싸띠 번역어 가운데 ‘마음지킴’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에 있어서 매우 부적절한 용어이다. 발을 뗄 때 물질적 현상을 마음지킴하고, 발을 떼는 것을 아는 마음을 마음지킴한다는 의미가 된다. 감관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는 적절하지만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수행용어로서는 부적합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작년 우안거 때부터이다. 그때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수행방법론을 읽고 있었는데 명색새김이라는 말이 크게 와 닿았다. 위빠사나수행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다.
위빠사나수행은 명색을 구분해서 새기는 것이다. ‘명색을 구분해서 마음챙김한다’라는 말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명색을 구분해서 알아차림한다’라는 말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명색을 구분해서 마음지킨다’라는 말은 더욱더 적절치 않아 보인다.
명색을 구분해서 새긴다는 말이 자연스럽다. 그래서일까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은 싸띠에 대하여 ‘새김’으로 번역했을 것이다.
오취온(五取蘊)은 디폴트 값
작년 우안거 들어 갔을 때 명색이라는 말이 크게 다가왔다. 왜 명색인가? 이는 우리 몸과 마음을 명색으로 구분해서 관찰해야 집착의 무더기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흔히 오취온이라 한다. 이를 다섯 가지 집착다발이라고 한다. 오온의 집착다발인 것이다. 그래서 색취온, 수취온, 상취온, 행취온, 식취온이 있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집착의 다발로 살아간다. 몸에 대한 집착, 느낌에 대한 집착 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고성제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런 집착다발은 ‘디폴트’라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집착된 존재로 태어났다. 이는 부처님이 팔고를 설명할 때 결론적으로 다섯 가지 집착다발, 즉 오취온적 존재라고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인간은 오취온적 존재이다. 이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것을 의미한다. 즉 초기값이 오취온으로 세팅된 채로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오취온은 디폴트가 되는 것이다.
왜 수행하는가?
수행을 왜 하는가?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얻기를 바란다면 MBSR을 하면 될 것이다. 종교성이 철저하게 배제된 MBSR을 말한다. 불교가 배제된 것이다. 불교의 위빠사나에서 단지 싸띠라는 관찰기법만 가져 온 것이다.
명상을 강의하는 사람들이 많다. 놀랍게도 타종교인들도 명상을 강의한다. 기독교인들도 명상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스트레스완화기법에 초점을 맞춘 MBSR이나 기독교의 명상과 불교의 위빠사나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 이는 명색에 달려 있다.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하면 위빠사나가 된다. 불교라고 해도 명색을 관찰하는 것이 없으면 위빠사나가 아니다. 위빠사나가 아닌 것은 사마타이기 쉽다.
정신 따로 물질 따로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우안거를 하고 있다. 재가자의 우안거이다. 화두는 명색이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명색이 빠진 위빠사나는 상상할 수 없다.
왜 명색을 구분해서 관찰해야 하는가? 그렇게 해야 집착된 무더기(다발)을 해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빠사나수행은 정신과 물질 또는 물질과 정신으로 분리하여 관찰하는 수행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 자동차가 있다. 자동차 정비사는 부품을 분해해 놓았다. 이것을 자동차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라는 개념도 그렇다. 나를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의 무더기 또는 다발로 분리해 놓았을 때 이를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위빠사나수행은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즉 정신 따로 물질 따로 새기지 않으면 집착된 것을 떼어 낼 수 없다.
담마짝까법문을 오개월만에
마침내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다 읽었다. 올해 4월 27일 담마짝까법문 읽기 시동을 건 이래 거의 오개월만의 일이다.
담마짝까법문을 읽고 또 읽었다. 새기면서 읽었다. 그러다 보니 책은 온통 울긋불긋 형광메모리펜 칠로 가득하다. 여기에 연필로 밑줄도 그어져 있다. 보충설명을 써 놓기도 했다.
오늘 새벽 마지막으로 읽은 부분을 되새김 했다. 책을 보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떠올려 본 것이다. 마치 소가 먹은 것을 되새김하듯이 기억을 살려 본 것이다. 이렇게 기억을 살리는 것도 싸띠 하는 것이다. 경전이나 논서에서 읽은 것을 기억하여 떠올리는 것도 새김하는 것이 된다.
수다원의 오도송
담마짝까법문은 초전법륜경(S56.11)에 대한 해설서이다. 이런 초전법륜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운바 있다. 지금으로부터 11년전인 2013년의 일이다. 그때 한달보름에 걸쳐 외웠다.
어렵게 외운 것은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암송해야 한다. 거의 천수경 글자수만큼 되는 초전법륜경을 잊어 버리지 않기 위해 매일 암송했다. 그런데 암송하다보면 가슴 벅찰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꼰단냐 존자가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지기 마련이다.”라며 법안(法眼)이 생겼을 때이다.
꼰단냐 존자는 부처님의 설법에 법안이 열렸다. 다섯 명의 수행승 가운데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고 아라한의 깨달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이는 ‘수다원의 깨달음’이다. 그래서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지기 마련이다.”라는 말에 대하여 ‘수다원의 오도송’이라고 말한다.
우주적 사건
꼰단냐에게 법안이 생겨 났을 때 이는 우주적 사건이 되었다. 초전법륜경에서는 “세존께서 이와 같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실 때에 땅위의 신들은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S56.11)라고 표현되어 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것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던 것 같다. 타인에게 알려서 똑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보편적인 진리가 된다. 그런데 다섯 명의 수행자에게 적용해 보았는데 그 가운데 꼰단냐 존자에게 먼저 법의 눈이 생겼다는 것이다. 마침내 부처님의 깨달음이 증명된 순간이다.
꼰단냐에게 법안이 생겨 났을 때 이 사실을 가장 먼저 땅의 신이 알았다. 땅의 신은 이런 사실을 온 우주에 알렸다. 가슴 벅차 알린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는 불사(不死)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죽고 사는 문제, 생사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후진불가 수레바퀴
땅의 신은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라고 외쳤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 즉 불사의 진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이 바라문 셀라에게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Stn.554)라고 말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여기 바퀴가 있다. 그런데 이 바퀴는 ‘후진불가’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리의 수레바퀴가 그렇다. 마치 소가 수레바퀴를 끄는 것과 같다.
법구경 1번 게송에 “수레바퀴가 황소의 발굽을 따르듯.”(Dhp.1)이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황소는 수레를 거꾸로 돌리거나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왜 그런가? 앞으로 벗어나려 하면 멍에가 황소의 목을 조른다. 뒤로 벗어나려 하면, 바퀴가 황소의 엉덩이 살을 도려 낸다. 황소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법의 수레바퀴는 오로지 전진만 있다. 후진도 없고 옆으로 가는 것도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수레바퀴는 후진불가이다. 그래서 “결코 거꾸로 되돌릴 수 없는 바퀴를 굴립니다.”(Stn.554)라고 한 것이다.
전륜왕이 사군(四軍)을 동원하여 진격해 들어 갈 때
법륜은 후진불가이고 오로지 직진만 있을 뿐이다. 이는 전륜왕의 수레바퀴와도 같다. 전륜왕이 코끼리부대, 기마부대, 전차부대, 그리고 보병부대로 이루어진 사군으로 적의 성문으로 진격하는 것과 같다.
전륜왕이 사군을 동원하여 진격해 들어 갈 때 성문을 열어주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며 사성제를 설했을 때 이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자 없을 것이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이다.”라 하여 괴로움의 진리를 설했다. 누군가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라고 부정할 수 있을까? 사고와 팔고에 대하여 자신의 처지에 대입해 보면 틀림 없는 사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 부처님의 사성제의 진리를 듣는다면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마치 전륜왕이 사군을 대동하여 진격하여 들어가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말한 네 가지 괴로움의 진리를 이해한다면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만세계의 진동과 무량하고 광대한 빛
부처님이 설법 했을 때 꼰단냐에게 법안이 생겼다. 이는 우주적 사건이 되었다. 땅의 신은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S56.11)라고 소리쳤다. 땅의 신의 바로 위에 있는 사대왕천이 이를 듣고 똑같이 알렸다. 마침내 소식은 하느님의 세계(범천)에 이르렀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입증되는 순간 천지는 진동했다. 이 순간에 대하여 경에서는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S56.110라고 묘사 되어 있다.
경에서는 일만세계의 진동과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있다. 이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앙굿따라니까야 ‘아주놀라움의 경(Acchariya Sutta)’(A4.127)에 따르면 네 번 있다. 이는 1)보살이 입태할 때, 2)보살이 태어날 때, 3)보살이 정각을 이룰 때, 그리고 4)보살이 처음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릴 때를 말한다.
사이지옥(lokantarika)에 빛이 들어 올 때
꼰단냐에게 법안이 생겼을 때 경천동지할 사건이 일어났다. 부처님이 처음으로 법의 수레바퀴를 굴린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 입증된 순간이다. 이때의 순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또한 보살이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올바로 완전히 깨달았을 때에 신들의 세계, 악마들의 세계, 하느님들의 세계,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측량할 수 없는 광휘로운 빛이 출현한다. 무시무시하고 바닥이 없고 암흑으로 덮여있고 칠흑같이 어두운 사이지옥에는 큰 신력과 큰 위력을 지닌 해와 달도 비추지 못하는데 , 그곳에도 측량할 수 없는 광희로운 빛이 출현한다. 그곳에 태어난 뭇삶들은 그 빛으로 서로를 알아보고 ‘여기에 태어난 다른 뭇삶들도 있구나!’라고 부르짓는다. 이렇게 오신 님, 거룩한 님, 올바로 완전히 깨달은 님이 출현할 때에 이와 같은 세 번째 아주 놀랍고 예전에 없었던 것이 출현한다.(A4.127)
경에서 ‘사이지옥(lokantarika)’이 나온다. 이 지옥은 부모를 살해하는 등 무간업을 지은 지들이 가는 무간지옥이다. 우주가 성주괴공하는 일겁 동안 거기에 갇혀 지내게 된다. 그런데 일겁동안 빛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사이지옥에서는 빛을 볼 수 없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빛이 미치지 않는 ‘빛의 사각지대’와도 같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하면 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무간업을 지은 중생들은 “여기에 태어난 다른 뭇삶들도 있구나!”라며 서로 얼굴을 알아 보는 것이다.
부처님의 감로법
부처님오신날 행사를 할 때 법문에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로깐따리까, 즉 사이지옥에까지 미치는 것임을 말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생노병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희망이다. 이는 다름아닌 불사(不死: amata)에 대한 것이다.
흔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감로법이라고 한다. 이때 감로법은 불사의 진리를 번역한 말이다. 이는 영원히 죽지 않는 가르침이다. 죽지 않기 때문에 태어남도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불생불사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희망이 있다. 그것은 불사가 되기 때문이다. 죽는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누구나 죽어야 하지만 불사의 가르침에 죽음은 없다. 누구나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 하지만 부처님의 불사의 진리에는 다시 태어남도 없다. 어찌 땅의 신부터 하느님의 세계(梵天)에 이르기까지 온우주에서 환희하지 않겠는가?
누구나 죽음으로 가는 절망열차를
불사의 진리를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성제의 진리를 알아야 한다. 특히 고성제의 진리부터 파악해야 한다. 어떻게 파악하는가?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담마짝까법문에서“괴로움의 진리법들을 구분해서 알도록 노력하라고 지도하신 것으로 파악해야 합니다.”(441쪽)라고 말했다.
괴로움의 진리는 구분해서 파악해야 한다. 구분해서 파악하지 않으면 괴로움의 진리를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왜 그럴까? 인간은 오취온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오취온적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오취온적 존재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이 없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라한이 되어서 불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물질, 느낌, 지각, 형성, 의식에 집착되었기 때문에 오온에 집착된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오취온적 존재는 근본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오온에 집착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온에 집착하는 한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십이연기 정형구에서 말미는 항상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S12.2)라고 했다.
오취온적 존재는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다. 이는 결국 절망으로 귀결된다. 죽음은 절망이다. 누구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구나 죽음으로 가는 절망열차를 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고성제의 핵심은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
부처님은 불사의 진리를 설했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사성제이다.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가 핵심이다. 그래서 고성제를 알면 나머지 진리도 알게 될 것이라고 했다.
고성제에서 핵심은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 빠알리어 빠린네이야(pariññeyya)를 사용했다. 이는 고성제를 세 번 굴릴 때 “둑캉 아리야삿짱 빠린네이얀띠(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eyyanti)”와 “둑캉 아리야삿짱 빠린냐딴띠(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ātanti)”(S56.11)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구분해서 알아야 한다. 괴로움의 진리는 구분해서 아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한 것이다. 정신과 물질을 따로 따로 새기는 것이다.
인간은 집착된 존재이다. 집착을 떼어 내야만 불사가 된다. 집착을 떼어 내려면 구분해서 관찰해야 한다. 집착의 무더기에 대하여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정신과 물질로 환원해서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새기는 것에 대하여 “볼 때 등에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취착무더기, 괴로움의 진리법들을 계속해서 그 법들이 생겨날 때마다 끊임 없이 무상 등으로 구분하여 알아야 한다.”(담마짝까법문, 397쪽)라고 했다.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는 방법
위빠사나수행은 분리해서 관찰하는 수행이다. 이는 명색으로 분리해서 관찰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정신과 물질을 따로따로 새기다 보면 무상, 고, 무아를 통찰하게 되어 자아라는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무아가 되었을 때 더 이상 괴롭지 않다. 오온에서 집착이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불사가 되기 위해서는 도와 과의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은 불사의 경지, 즉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는 방법도 알려 준다. 어떤 것인가? 이는 “형성평온의 지혜가 무르익어 구족 됐을 때 그 순간에 생멸하는 어느 하나의 성품법을 빠르게 계속 알아 나가다가 관찰하여 알아지는 형성 대상이나, 관찰하여 아는 것이나 모든 형성,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성품에 도달하여 직접 경험하여 알게 되면 갈애도 소멸하는 것입니다.”(414쪽)라는 말로 알 수 있다.
형성평온의 지혜는 범부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지혜를 말한다. 위빠사나수행 16단계에서 11단계에 해당된다. 그런데 이 단계에 이르면 도와 과는 저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혜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 멈추면 보살로 살게 된다. 세세생생 보살행을 하며 사는 것이다. 부처님이 보살로 살 때에 이 단계에서 머물렀다.
일창스님 번역후기를 보니
2013년 초전법륜경을 빠알리원문으로 모두 외웠을 때 감격했다. 특히 꼰단냐에게 법안이 생겼을 때 “양 낀찌 사무다야담망 삽반땅 니로다담만띠(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S56.11)라는 말에 이르렀을 때 고조 되었다. 이 말은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담마짝까법문을 읽어 보니 이 말에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초전법륜경에 두 번 감동이 왔다. 한번은 2013년 초전법륜경을 빠알리 원문으로 외웠을 때이고, 또 한번은 이번에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읽었을 때이다.
오늘 새벽 세시에 담마짝까법문을 되새김 했다. 특히 꼰단냐의 깨달음 부분에 대한 것을 눈을 감고 떠 올렸다. 새긴 것을 또 새기고자 한 것이다. 되새김한 것이다.
담마짝까법문을 오개월에 걸쳐서 다 읽었다. 이를 번역한 일창스님은 후기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역자는 책을 읽을 때 새롭거나 중요한 내용이 나오면 강조를 하면서 읽는데,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 법문의 경우, 거의 페이지마다 강조 표시를 해야 했습니다. 또 번역을 하면서 읽어 나가는데 그런 내용과 만날 때마다 환희에 넘쳤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교정을 하면서 다시 읽을 때도 믿음이 북받쳤습니다. 이런 감동이 여러분에게도 전해지길 기원합니다.”(담마짝까법문 역자후기, 521쪽)
일창스님은 미얀마어로 된 담마짝까법문을 우리말로 번역했다. 미얀마어가 유창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한국마하시선원에서 ‘우 소다나 사야도’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일창스님이 번역한 담마짝까법문은 2018년 출간 되었다. 미얀마어로 된 것은 1962년에 출간되었다. 그런데 2011년 영역으로 된 담마짝까법문이 우리말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이다. 김한상 선생이 영역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한국명상원의 ‘행복한 숲’에서 출간되었다.
김한상 선생이 번역한 초전법륜경 피디에프(pdf)를 가지고 있다. 이를 한번 읽어 보았다. 그러나 컴퓨터에서 읽은 것이라 그다지 와 닿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 일창스님의 책을 밑줄 치고 형광메모리칠 하며 읽게 되었다. 이는 일창스님이 “거의 페이지마다 강조 표시를 해야 했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참고로 담마짝까법문은 2022년 붓다의 날에 일창스님에게 받은 것이다.
새기면서 읽은 것을 되새김하고
일창스님은 번역후기에서 거의 페이지마다 강조 표시를 했다고 한다. 이는 나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책이 온통 울긋불긋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읽고 또 읽었다. 새기면서 읽었다. 오늘 새벽에는 새기면서 읽은 것을 눈을 감고 되새김했다.
담마짝까법문은 감동적이다. 이는 일창스님이 번역후기에 “이런 감동이 여러분에게도 전해지길 기원합니다.”라는 말로도 알 수 있다. 지난 오개월동안 머리맡에 놓고 주로 새벽에 읽었다. 읽을 때마다 한줄한줄이 와 닿았다. 새기고 또 새기고 싶었다. 아마 그것은 아직 체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2024-09-17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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