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조건에 만족하는 삶
명색은 끊임없이 일어난다. 이 말은 명색은 끊임없이 사라진다는 말과 같다. 명색이 멈추는 일은 없을까?
재가우안거 62일째이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구월 중순임에도 삼십도가 넘는다. 너무 더워서 견딜 수 없다. 에어컨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앞으로도 계속 이런 해가 계속 될까?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한다. 백권당에서 행선과 좌선을 했다. 행선할 때 발바닥이 쩍쩍 달라 붙었다. 발을 뗄 때는 “쩍”하고 소리가 났다. 아직 중앙냉방장치가 가동되지 않은 이른 시간에 행선은 고역이 되었다.
행선에서 삼매가 생겨나기는 쉽지 않다. 오래 계속 하면 근접삼매와 같은 집중이 생겨날지 모른다. 그러나 행선과 좌선은 오전 아홉 시 이전에 끝내야 한다. 업체 담당자들이 출근하는 시간이다. 어떤 전화가 걸려 올지 모른다.
오전 8시 29분에 ‘금강좌’에 앉았다. 삼십분 달려 보는 것이다. 타이머를 30분에 세팅해 놓고 스타트버튼을 눌렀다. 시간은 사정없이 제로를 향해 카운트 되었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방법
오늘 좌선은 잘 할 수 있을까? 며칠 동안의 좌선에서 삼매의 맛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색계선정삼매나 무색계선정삼매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선정삼매 근처에서 형성되는 ‘근접삼매’ 비슷한 것을 말한다.
배의 부품과 꺼짐에 집중했다. 집중이 잘 되지 않으면 명칭을 붙여 한다. 배가 부풀때는 ‘부푼다’라고 명칭 붙이고, 배가 꺼질 때는 ‘꺼진다’라고 명칭 붙인다. 미얀마방식이다. 미얀마에서는 동사형 명칭을 붙인다.
오늘부터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읽기를 시작했다. 이미 한번 읽은 바 있지만 다시 읽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읽고 또 읽는 것은 수행이 아직 체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읽을 때마다 새롭다. 아마 경험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경험해서 체득된 것이라면 두 번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은 아직 수행이 덜된 것이다. 오늘 새벽에 읽은 것 중에 이런 대목이 와 닿았다.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모습에 대한 것이다.
“자신의 배를 마음으로 집중해서 관찰하고 있어 보라. 배가 부풀어 오는 것, 배가 꺼져 들어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부풀어 오는 것과 꺼져 들어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지 못할 경우에는 배에다 손을 대어 보라.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배가 부풀 때마다 꺼질 때마다 (움직임이) 분명하게 되면 숨을 들이쉴 때, 배가 부풀어 오는 움직임을 ‘부푼다’하며 새겨라. 숨을 내쉴 때, 배가 꺼져 가는 움직임을 ‘꺼진다’하며 새겨라. 배가 부풀어 올 때 배가 부풀어 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배가 꺼져갈 때 배가 꺼져 가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배의 형체라는 개념도 알게 되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며 의심하지 말라.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개념을 완전히 배제하고 수행할 수 없다. 개념과 함께 분명하게 알면서 관찰하고 새겨야 삼매와 새김, 지혜가 쉽게 성숙된다. 지혜가 성숙되었을 때 비로소 모든 개념대상이 무너지고 사라져 실재성품에만 지혜가 잘 머물 것이다.
그 밖에 여섯 문에서 분명하게 생겨나는 정신·물질 법들을 생겨나는 차례대로 새겨 아는 것만이 위빳사나 수행의 구족된 바른 성품이다. 하지만 수행을 처음 시작해서는 새김과 삼매의 힘이 아직 약하기 때문에 (현상들이) 생겨나는 대로 따라가며 관찰하고 새기는 것이 매우 어렵다. 새기지 못하기도 한다. 새길 대상을 찾아 생각하며 오래도록 시간을 보 낼 수도 있다. 그래서 항상 존재하기도 하고, 새겨 알기에도 매우 쉽고 분명한 배의 부품과 꺼짐을 먼저 기본으로 관찰하고 새기게 하기 위해 (그 방법을) 지금 설명하는 것이다. 지혜가 성숙해졌을 때 생겨나는 차례대로 따라서 새기는 모습은 나중에 경험하게 될 것이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62-63쪽)
배의 부품과 꺼짐을 새기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처음 수행하는 사람에게 필요로 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배를 주관찰대상으로 하여 새기는 것에 대하여 아직 삼매와 지혜가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행이라 하여 방석에 앉아 있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일상이 수행이 되어야 한다. 이는 본문에서 “여섯 문에서 분명하게 생겨나는 정신·물질 법들을 생겨나는 차례대로 새겨 아는 것만이 위빳사나 수행의 구족된 바른 성품이다.”라는 말로 알 수 있다. 눈이나 귀 등 여섯 감각의 문에서 생멸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을 새기는 것이다.
소리를 물질과 정신으로 환원해서 관찰하면
오랜만에 고요를 맛보았다. 이는 근접삼매 비슷한 것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태는 경험으로 알 수 있다. 이전에 체험 해 보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어느 순간 몸과 마음이 다른 상태로 변형되는데 특별한 상태로 바뀌는 것이다.
근접삼매가 형성되면 수행이 쉬워진다. 저절로 되는 것 같다. 크게 힘쓸 필요가 없다. 그저 지켜 보기만 하면 된다. 이미 토대는 단단히 형성되었기 때문에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 전화가 온다면 깨질 것이다. 전화가 외도 전화를 받지 말아야 한다. 오전 아홉 시 이전에 좌선을 끝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어느 정도 삼매가 형성되면 창 바깥에 나는 차 지나가는 소리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은 특별한 상태로 변형되어 있기 때문에 크게 거슬리지 않는 것이다.
오토바이 소음이 가장 문제가 된다. 마치 신경질 내듯이, 마치 버럭 화내듯이 파열음과 폭탄음을 내며 내달리는 오토바이 소음을 접하면 불선심이 절로 일어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새김이 확립되면 반감 된다.
가장 문제 되는 것은 소음이다. 눈을 감고 앉아 있어도 귀의 문만은 막지 못한다.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럴 때 명색으로 구분해서 관찰해야 한다. 물질과 정신으로 환원해서 새기는 것이다.
어떤 것이든지 명색으로 구분해서 관찰하고, 명색으로 환원해서 새기면 위빠사나 지혜가 성숙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마하시 사야도는 “지혜가 성숙해졌을 때 생겨나는 차례대로 따라서 새기는 모습은 나중에 경험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삼매가 형성되었다.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라면 몇 시간이고 앉아 있을 것 같다. 달리 할 것이 없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알기만 하면 된다. 망상이 일어나서 집을 지었을 때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생겨 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바깥 소음도 물질과 정신으로 환원해서 보는 것이다.
견성과 관련된 유튜브
유튜브를 보다 보면 갖가지 깨달음 관련 영상을 볼 수 있다. 이런 영상을 볼 때 자만이 생겨난다. 아마 책 몇 권 읽은 것에 대한 자만일 것이다.
어떤 유튜버는 관찰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느 정도 삼매가 형성되었을 때 관찰하는 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과 합일한다’라고 말했다.
어느 종교다원주의자가 있다. 캐나다에서 공부했다는 O선생은 참나와 하느님은 같은 개념이라고 했다. 마치 ‘등정론’을 말하는 것 같다. 산은 하나이지만 길은 여러 개인데 올라가다 보면 정상에서 만난다는 이론을 말한다.
어떤 스님은 신도에게 깨달음을 알려 주려고 애쓴다. 스님은 신도의 귀에 종소리를 들려 주었다. 마치 요령처럼 생긴 작은 손 종을 말한다. 스님은 “바로 이것입니다.”라며 이것을 계속 말한다.
자칭타칭 깨달음을 말하는 사람들은 견성에 대하여 말한다. 대체적으로 소리로 알려 주고자 한다. 종소리를 들려 주거나 책상을 탕탕치는 식이다. 왜 그럴까? 소리는 생멸이 있기 때문이다. 생겨남과 사라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마 ‘싱잉볼명상’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깨달음에는 기연(機緣)이
깨달음에는 기연(機緣)이 있다. 어떤 계기가 있어서 깨닫는다는 말이다. 혜월스님도 이에 해당될 것이다.
천장사에 자주 간다. 일년에 대여섯번 가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천장사신도라고 말할 수 있다.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는 것이다. 십년 이상 인연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간다.
천장사에 혜월동굴이 있다. 혜월스님이 수행했다는 작은 동굴을 말한다. 그런데 깨달음의 기연과 관련하여 안내판을 보면, 혜월스님은 경허스님의 짚신을 삼다가 깨달았다고 한다. 짚신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나무망치로 ‘탁탁’ 두드리다가 문득 깨달았다는 것이다. 소리를 인연으로 큰 깨침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법은 알 수 없다.
깨달음의 기연과 관련된 이야기는 부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테라가타와 테리가타에 실려 있는 제자들의 깨달음의 기연이 그것이다.
바구 장로는 경행처로 가다가 넘어졌다. 넘어진 것이 기연이 되었다. 이는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Thag.273)라는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여기서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란 무엇일까? 아마도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 제자들의 깨달음의 기연을 보면 갖가지가 있다. 그 가운데 자결하려다 이것을 기연으로 깨달은 이야기도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그때 나는 삭도를 들고
침상이 있는 곳으로 들어왔다.
목의 정맥을 자르기 위해
삭도를 가져다 그 곳에 대었다.” (Thag.408)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고
위험이 분명하게 보였고
싫어하여 떠남이 정립되었다.” (Thag.409)
“그 때문에 나의 마음이 해탈되었다.
여법하고 훌륭한 가르침을 보라.
세 가지 명지를 성취했으니
깨달은 님의 교법이 나에게 실현되었다.” (Thag.410)
쌉빠다싸 장로는 출가한지 이십오 년이 되었다. 그때 까지도 깨달음을 이루지 못했다. 장로는 더 이상 살려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칼을 들어 자결해 버릴까?”라고 생각했다.
장로에게 목숨은 의미가 없었다. 출가 이십오 년에 이룬 것이 없었다. 장로는 삭도를 목에 대었다. 그런데 그때 깨달음의 기연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장로는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그 때문에 나에게 일어났다.”라고 했다.
게송에서 이치에 맞는 성찰은 무엇일까? 주석에서는 “파괴되지 않고 균열되지 않은 청정한 계행을 보고 기쁨이 생겨나고 기쁨이 마음에서 몸이 경안해지고 몸의 경안에서 자양없는 행복을 경험하면서 삼매가 일어났기 때문에 마음의 통찰을 통해서 이치에 맞는 정신활동이 일어났다.”(Thag.A.II.173) 라고 설명되어 있다.
깨달음에는 기연이 있다. 마치 응축되어 있던 것이 어떤 계기로 터지는 것과 같다. 대체로 소리로 인하여 깨달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일까 유튜브 영상을 보면 법담할 때 책상을 탕탕치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다.
오토바이소음 스트레스
일상에서 소리로 인하여 스트레스 받는다. 특히 오토바이소음 스트레스가 심하다. 어떻게 해야 오토바이 스트레스소음 스트레스를 극복할 수 있을까?
소음은 물질적 현상이다. 이를 아는 것은 정신적 현상이다. 그런데 물질과 정신은 동시에 일어나서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다. 남는 것은 ‘불선심’뿐이다.
오토바이소음으로 인하여 불선심이 일어났다면 나의 문제가 된다. 오토바이를 탄 자는 이미 멀리 도망가버리고 없다. 나에게는 분노하는 마음만 남아 있다.
오토바이소음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나만 손해이다. 이를 수행의 관점으로 풀어야 한다. 소음 난 것을 듣는 것은 물질적 현상이다. 이는 들어서 아는 것이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소리로서 보아야 한다. 이는 소리라는 물질로 환원해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부부싸움은 자존심 싸움이 되기 쉽다. 상대방이 비난할 때 받아 치면 큰 싸움이 된다. 이럴 때는 상대방의 말을 단지 소리로만 받아 들여야 한다. 소리라는 물질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상대방의 말의 의미는 들어 오지 않는다. 상대방의 말은 단지 소리라는 파동으로 들릴 뿐이다. 소리라는 물질로 구분해서, 소리라는 물질로 환원해서 듣는 것이다.
오토바이 소음문제에 대한 해법은 있다. 불쾌를 야기하는 소음을 단지 파동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폭탄음을 폭탄음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 것이다. 폭탄음이라는 개념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소리라는 물질로 구분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어떤 선사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고 한다. 소리가 기연이 된 것이다.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기연이 된 것이 많다. 왜 그럴까? 보는 것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상이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저 집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 바위산은 십년전이나 이십년전이나 변함 없다. 그러나 소리는 생겨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그것도 즉시 사라져 버린다. 생멸을 보는데 있어서 소리만한 대상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는 세 가지 지만이 없어서 다행
유튜브를 볼 때 자만이 일어난다. 견성과 관련된 영상을 볼 때 ‘엉터리’라는 생각이 일어난다. 아마도 초기경전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논서를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프라이드로 살아간다. 세 가지 자만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부자의 자만, 배운자의 자만, 태생의 자만이다.
세 가지 자만 가운데 하나도 만족하지 못한다. 이런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세 가지 자만 가운데 하나만 있어도 거기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재산이 많은 자는 가난한 자를 경멸하기 쉽다. 게을러서 가난한 것으로 보기 쉽다. 제도의 불합리와 불공정한 사회로 보기 보다는 개인의 무능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학위가 있는 자는 우월적 자만에 빠지기 쉽다. 공부를 오래 해서 박사학위가 있는 자는 평생 박사라는 호칭이 따른다. 도의 길에 장애가 될 것이다.
가문 있는 집에 태어나면 가문의 영광에 힘 입는다. 의사출신 가문, 판검사출신의 가문에 태어나면 프라이드가 높을 수밖에 없다.
부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내가 종부세를 내는 수십억 자산가라면 애써 노력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설령 부가 불로소득에 의해서 형성된 것일지라도 자신의 실력으로 볼 것이다. 부자의 자만이 형성되었을 때 감각을 즐기는 삶이 되기 쉽다.
박사학위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학위가 있다면 평생 “박사님”또는 “교수님”이라는 명칭이 따라 다닐 것이다. 평생 명예와 칭송으로 사는 것이다. 정신적 향상의 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문 있는 집안에 태어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의사나 판검사 가문에 태어났다면 가문의 프라이드로 살 것이다. 또한 의사나 판검사와 같은 타이틀로 살 것이다. 정신적으로 성장하는데 장애가 된다.
가진 것이 별로 없다. 육십 넘도록 아파트 스물두 평에 산다. 차는 구백구십 씨씨짜리 경차이다. 학사학위를 가진 것이 전부이다. 명예와 칭송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이런 삶이 좋다. 무엇보다 우월적 자만을 낼 수 없다.
부자는 부자의 자만으로 산다. 박사는 박사의 자만으로 산다. 의사나 판검사는 지위의 자만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자만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 따르기 때문에 도의 길에 가는데 있어서 장애가 된다.
부자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때 90년대 강남에 아파트를 구입했더라면 지금은 수십억 자산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불로소득으로 형성된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며 살 것이다. 강남에 사는 법우들에게서 볼 수 있다.
박사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박사 타이틀을 가졌다면 평생 박사소리 들으며 살 것이다. 박사라는 명예로 인하여 더 높은 정신적인 향상과 성장을 바라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다.
좋은 가문에 태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다. 가문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면 평생 우월적 자만으로 살아 갈 것이다. 현재의 삶에 안주하는 삶이 될 것이다.
나의 정신적 재산은 얼마나
사람들은 재산으로 사람을 파악하는 경향이 있다. 재산이 없으면 실속 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이렇게 본다면 소형아파트에 살며 소형차를 가진 사람은 무능력자가 된다.
사람들 눈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질까? 재산으로 본다면 하위 계층에 해당된다. 그러나 사람을 재산으로만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재산도 있기 때문이다.
나의 정신적 재산은 얼마나 될까? 겉으로 드러난 것이 있다. 그것은 백권이 넘는 책이다. 직접 쓴 것이다. 백권당에 백권이 넘는 책을 보면 세상 부럽지 않다.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하는 말이 있다. 나에게는 아파트 135채가 있다고 말한다. 책 한권을 아파트 한채의 가치로 보는 것이다.
아파트 한채의 가격은 얼마일까? 강남에서는 한평에 일억이 넘는다고 한다. 수도권에서 아파트 한채를 오억원으로 잡는다면 나는 675억원의 재산가가 된다.
책을 보면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 같다. 누가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이런 자만에 빠지면 세상의 부자가 부럽지 않다. 더 나아가 박사가 부럽지 않고 가문이 부럽지 않다.
현재 조건에 만족하는 삶을
정신적 재산도 재산이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재산이다. 사람이 죽으면 모두 놓고 가야 한다. 재산을 이룬 과정에서 형성된 업만 가져 간다. 사람이 죽으면 박사타이틀이나 가문의 영광은 가져가지 못한다. 오로지 업만 가져 간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계급장 떼고 붙어 보자는 것이다. 부자, 박사, 가문이 있는 사람과 발가벗고 목욕탕에 들어 갔을 때를 말한다.
이득과 명예와 칭송은 그때뿐이다. 종부세를 내는 백억 가까이 되는 강남아파트를 가진 자는 죽을 때 가져 가지 못한다. 박사타이틀을 가진 자는 죽을 때 타이틀을 가져 가지 못한다. 의사나 판검사였던 사람이 죽어서도 판검사는 아니다.
부자가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부자였다면 부자의 자만으로 살 것이다. 애써 노력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이다. 학위가 높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박사학위를 가졌다면 박사학위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의사나 판검사가 아닌 것이 다행이다. 지위가 높은 자로 산다면 그 이상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다.
부자의 자만, 배운 자의 자만, 가문의 자만, 이렇게 세 가지 자만 없음에 감사한다. 현재 조건에 만족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빚 없는 삶이 최상이다. 오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정신적 향상과 성장을 위한 삶이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정신적 재산이다.
“믿음의 재물, 계행의 재물,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아는 재물,
배움의 재물, 보시의 재물,
일곱 번째로 지혜의 재물이 있네.
여인이나 남자에게
이러한 재물이 있다면,
그는 빈궁하지 않은 자이고
그 생활은 공허하지 않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믿음과 계행,
청정한 신뢰와 진리에 대한 봄,
부처님의 가르침에 새김을 확립한다네.”(A7.6)
2024-09-19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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