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을 탕탕치며 “이것”타령하는 사람을 보면
가슴에 땀이 주르륵 흘러 내린다. 밀폐된 공간의 온도는 아마 삼십도가 훌쩍 넘는 것 같다. 습도도 또한 높아서 앉아 있기가 고역이다. 그럼에도 삼십분 버텼다.
오늘 재가우안거 61일째 되는 날이다. 추석연휴 마지막날이기도 하다. 자영업자에게는 휴일이 없다. 당연이 추석연휴도 없다. 오늘도 백권당에 나와 행선과 좌선 했다.
현재시각 오전 8시 32분이다. 오전 10에는 나가야 한다. 창동에 가야 한다. 홀로 사는 장모댁에 가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속도전 해야 한다. 한시간 반이내에 글을 끝내는 것이다.
페이스북에 어떤 사람이 글을 남겼다. 수행은 방편이라고 했다. 이는 수행이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임을 말한다. 더 나아가 수행무용론이라고 볼 수 있다.
우안거기간을 맞이하여 매일 삼십분 앉아 있는다. 생업이 있는 재가자에게 삼십분은 귀중한 시간이다. 한시간 앉아 있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재가의 삶을 살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무실에 수행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명상공간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마치 도피처처럼 보인다. 마음이 심란할 때 앉아 있는다.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 앉는다. 삼십분 가량 앉아 있다 보면 다른 마음이 된다.
수행은 좌선과 동의어가 되었다. 명상하는 것이 수행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위빠사나 수행센터에 가면 커다란 명상홀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다.
나는 왜 수행을 하는가?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기 위한 것인가? 이런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읽고 나서 크게 바뀌었다. 그것은 빤냣띠(槪念)가 아닌 빠라맛타(實在)를 보기 위함이다.
그 사람은 왜 수행방편론 또는 수행무용론을 말했을까? 글을 읽어 보니 간화선을 하는 것 같다. 그리고 대승불교를 신봉하는 것 같다. 방향도 다르고 길도 다르다. 당연히 이견이 나올 수 밖에 없다.
그 사람은 나에게 무언가 알려 주고자 했다.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기면서 통화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응하지 않았다. 평행선만 달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서로간에 감정만 상할 것이 분명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세상과 싸우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싸운다. 수행승들이여,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의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S22.94)
부처님은 세상사람들과 싸우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사람들이 싸움을 걸어 온다고 했다. 왜 그런가?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시비를 걸어 오는 것이다.
현자들은 진실만을 말한다. 현자들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세상사람들은 ‘이다’라고 말한다. 현자들이 ‘이다’라고 말하면 세상사람들은 ‘아니다’라고 거꾸로 말한다. 현자들은 세상사람들과 거꾸로 간다.
부처님은 ‘역류도’를 설했다. 이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에 “흐름을 거슬러가는,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미묘한 진리를 어둠에 뒤덮이고 탐욕에 불붙은 자들은 보지 못하네.”(S6.1)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진리에 대하여 “흐름을 거슬러 간다. (paṭisotagāmī) ”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세상사람들과 반대로 감을 말한다. 탐욕으로 사는 세상사람들과 달리 무탐으로 살 때 세상을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느 경우에서나 역류도이다. 세상사람들이 탐, 진, 치로 살 때 부처님은 무탐, 무진, 무치로 살라고 했다. 이것이 세상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세상의 흐름을 거스르면 저항이 있기 마련이다. 모함도 있다. 그래서일까 “세상에서 비난 받지 않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고 했다. 세상사람들이 시비를 걸고 싸움을 걸어 오는 것이다.
진리의 길을 가는 자는 양보와 타협이 있을 수 없다. 진리는 양보와 타협의 대상이 아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자는 항상 최선을 추구한다. 진리를 설하는 자는 세상사람들과 싸우는 것으로 보인다.
어제 밤에 유튜브에서 “이것”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재가불자인 M선생이 질의응답식으로 법담한 것이다. 이번 법담을 보니 그 동안 궁금했던 것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것 같았다.
한국은 선불교의 전통이 있다. 임제선사의 가르침을 따르는 불교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르다. 초기불교의 경전과 미얀마의 위빠사나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불교이다.
수년전에 M선생의 법담을 들은 적이 있다. 한시간 내내 “이것”을 말했다. 답답한 듯이 책상을 “탕, 탕” 치며 “이것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라고 말했다. 대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한국불교에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것을 말한다. 그러나 누구하나 속시원히 이것이 어떤 것인지 말해 주지 않는다. 부산 M선원의 재가법사도 “바로 이것입니다. 오로지 이 일뿐입니다. 지금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어제 M선생의 이것법담을 듣고 의문이 어느 정도 풀렸다. 이는 M선생이 쓰는 용어로 파악되었다. M선생은 “이것뿐입니다. 볼 때는 보여지는 것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서는 “모양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마하시 사야도 법문집에서 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보는 것’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을 말하는 한국불교의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사람들의 법담을 들어보면 하나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론과 수행이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도 마치 코 만지듯이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깨닫고 나면 “이런 거였어?”라며 실망할 정도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실체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빤냣띠(槪念)와 빠라맛타(實在)에 대한 것이다. 이것타령은 개념으로 보지 말자는 말과 같다.
이것타령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론이 없다. 이론체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마치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이것뿐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 이것 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라며 이것타령하는 것이다.
이것타령하는 사람들의 법담을 들어보면 수행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고 있으면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른바 언하대오(言下大悟)이다. 말을 듣고서 크게 깨우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행선이나 좌선 같은 수행이 필요없는 것이다. 수행무용론이다.
이것타령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이론체계도 없고 수행체계도 없다. 오로지 말로만 하는 것이다. 과연 말만 듣고 깨달을 수 있을까?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을 다 읽었다. 머리맡에 놓고서 오개월 걸려 읽은 것이다. 그런데 초전법륜경에서 마지막 장면을 보면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S56.11)라며 법안이 생기는 장면이 있다. 꼰단냐 존자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중에, 또는 듣고 난 후에 깨달은 것이다. 수다원의 깨달음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법문을 듣고 깨달았다는 말이 있다. 인연담에 수도 없이 언급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는 수행자였기 때문이다. 수행이 깊은 자가 말 한마디에 깨달은 것이다. 또한 전생에도 수행자로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말한마디에 깨달음을 이룬 자에 대하여 ‘약설지자(略設知者: ugghaṭitaññū)’라고 한다.
초기경전에 약설지자에 대한 경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욱가띠딴뉴경 ugghaṭitaññū sutta)’이 바로 그것이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네 종류의 사람을 말했다.
“수행승들이여, 간략한 언급으로 아는 자, 상세한 설명으로 아는 자, 지도를 필요로 하는 자, 말만을 최상으로 하는 자가 있다.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발견되는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A4.134)
마하시 사야도는 앙굿따라니까야 간략한 언급으로 아는 자의 경을 근거로 해서 법문 했다. 여기서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한 주석을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간략한 언급으로 아는 자는 변죽만 울려도 즉시 원리를 꿰뚫어 아는 자를 말한다. 상세한 설명으로 아는 자는 상세하게 의미를 분석을 할 때에 원리를 꿰뚫어 아는 자를 말하고, 지도를 필요로 하는 자는 설명하고 질문 하고 이치에 맞게 정신활동을 일으키고 선지식에 의지하고 섬기고 공경하여 점차적으로 아는 자를 말하고, 말만을 최상으로 하는 자는 말만을 많이 배우고 많이 기억하고 많이 말하더라도 태생적으로 원리를 꿰뚫지 못하는 자를 말한다.”(Mrp. III. 131)
약설지자는 간략한 언급으로 아는 자를 말한다. 이에 대하여 “변죽만 울려도 즉시 원리를 꿰뚫어 아는 자”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즉시 깨달은 꼰단냐 존자는 약설지자라고 말할 수 있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 담마짝까법문에는 네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약설지자(ugghațitaññū 略說知者): 설명하는 즉시 법을 관통하는 사람, 즉 간단한 게송만을 듣고 위빳사나 수행이 진전되어 도와 과를 증득할 수 있는 사람.
2) 상설지자(vipañcitaññū 詳說知者):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할 때 법을 관통하는 사람. 즉 조금 긴 게송이나 법문을 듣고 위빳사나 수행이 진전되어 도와 과를 증득할 수 있는 사람.
3) 제도가능자(neyya 濟度可能者): 설명하고 질문하고 바르게 마음기울이고 선지식을 의지하고 섬기고 공경하며 점차적으로 법을 관통하는 사람.
4) 선업토대자(padaparama 善業土臺者): 많이 듣고 많이 읊고 많이 수지하고 많이 말하더라도 태생적으로 법을 관통하지 못하는 사람.”(담마짝까법문, 117쪽, 154번 각주)
네 종류의 사람을 보면 3번 ‘제도가능자’까지가 관심대상이다. 수행을 해서 도와 과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4번 선업토대자는 이번 생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도와 과를 이룰 수 없는 사람이다. 단지 이번 생에서 선업토대만 쌓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꼰단냐 존자는 부처님이 사성제를 설할 때 법안이 열렸다. 약설지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이는 “설명하는 즉시 법을 관통하는 사람, 즉 간단한 게송만을 듣고 위빳사나 수행이 진전되어 도와 과를 증득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꼰단냐 존자와 함께 법문을 들었던 다른 네 명의 수행자는 법안이 열리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정도 더 걸렸다. 이는 상설지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상세하게 그 뜻을 분석할 때 법을 관통하는 사람. 즉 조금 긴 게송이나 법문을 듣고 위빳사나 수행이 진전되어 도와 과를 증득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설명된다.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일까? 아무리 경전과 논서를 많이 보고 수행한다고 오랜 세월 앉아 있어도 진척이 없다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할지 모른다. 이번 생에서 다음 생을 위한 공덕 쌓는 삶을 사는 것이다. 보시공덕, 지계공덕, 수행공덕 쌓는 삶이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법담을 들어 보았다. 법담을 듣고 있는 사람들의 질문을 보면 답답한 것 같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볼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해 하는 것 같다. 그때마다 법사는 책상을 탕탕치며 “이것입니다. 이것뿐입니다. 이것 밖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한다.
어제 M선생의 이것법담을 유튜브로 들었다. 이제야 알 것 같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보니 문제가 다 풀린 것 같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눈으로 보아서 아는 것, 귀로 들어서 들리는 것 등 육문을 통해서 일어나는 물질적 정신적 현상에 대하여 구분하여 관찰하는 것이다.
현재시각 9시 53분이다. 1시간 20여분 글을 썼다. 마치 오토바이타고 전속력으로 질주하듯이 속도전했다. 이제 글을 마쳐야 한다. 일어설 시간이다. 이제 이것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해서 관찰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 해당된다.
자칭타칭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책상을 탕탕치며 이것타령을 하지만 이를 듣는 사람들은 여전히 의문인 것 같다. 그 법사 입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문득 깨달음이 오는 것일까? 아마 약설지자, 상설지자, 제도가능자라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선업토대자라면 이번 생에서는 힘들 것이다. 나는 이것을 정말 알고 있는 것일까?
2024-09-18
담마다사 이병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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