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불교 견성 (見性) 콘서트를 보고
차라리 눈을 감고 있는 것이 편하다. 눈 뜬 세상보다 눈 감은 세상이 더 안락하고 평온하다. 오늘 아침 행선에서도 그랬고 좌선에서도 그랬다.
재가우안거 65일째이다. 오늘 컨디션은 다른 날과 달랐다. 약간 흥분 되었다. 날씨가 좋은 이유가 크다. 하늘은 푸르고 뭉게구름이 가득하다. 아침 햇살이 세상 가득히 퍼진다. 비가 온 다음 날의 전형적인 날씨이다.
오늘도 터벅터벅 백권당으로 향했다. 배낭에는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이 들어 있다. 아침에 먹을 것으로 찐 계락 하나, 찐 고구마 하나, 찐 감자 하나를 준비 했다. 늘 하던 방식이다.
일요일이라 하여 쉬는 법이 없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하루도 빼지 않고 향하는 곳이 있다. 백권당 사무실이다. 2007년 입주이래 17년동안 변함없이 반복되는 일상이다.
달리 갈 곳이 없다. 열 평 가량 되는 작은 임대사무실을 직장 삼아 다니고 있다. 일인사업자에게는 이곳이 일터이고, 서재이고, 수행처이다.
백권당에서는 늘 혼자 있는다. 말할 상대가 없다. 뉴스도 보지 않는다. 스마트폰도 보지 않는다. 어제 올린 글에 대한 반응을 보고 싶지만 참는다. 다만 날씨정보만 접한다. 일체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안거기간동안 오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행선을 하고 좌선을 하는 것이 가장 큰 일과이다. 다음으로 후기를 써야 한다. 두세 시간 걸린다. 이렇게 하다 보면 오전일과가 훌쩍 지나가 버린다.
글을 쓸 때는 자동기술하는 것 같다. 일체 뉴스도 보지 않고 말도 하지 않기 때문에 영향 받지 않는다. 더구나 방금 좌선을 끝낸 상태에서 쓰다 보면 쓰고 싶은 것을 쓸 수 있다.
오늘 행선과 좌선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어느 정도 삼매가 형성되었다. 이런 날은 드물다. 혹시 잠이 덜 깨서 그런 것 아닐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행선 중에 마음이 특별한 상태로 변형 되었기 때문이다.
발의 모양이나 형태를 떠올리지 않고
행선을 할 때 눈을 감고 한다. 이런 일은 백권당이 처음이다. 선원에서 집중수행할 때나 외부에서 수행할 때는 눈을 뜨고 했었다. 그런데 눈을 감고 하다 보니 집중이 더 잘되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 다른 상태가 된 것을 알게 되기도 한다.
행선할 때는 가능한 발의 모양이나 형태를 보지 않고자 한다. 이는 언어적 개념을 배제하는 것이다. 발이라는 명칭을 떠 올렸을 때 발의 모양도 떠오른다. 이는 빤냣띠, 즉 개념인 것이다. 개념이 아니라 실재를 보아야 한다.
실재를 빠알리어로 빠라맛타라고 한다. 우리말로 ‘궁극적 실재’라고도 말한다.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원소 같은 것이다. 행선할 때 지, 수, 화, 풍, 사대가 이에 해당될 것이다.
개념으로 보면 피곤해진다. 그러나 실재를 보면 가벼워진다. 왜 그럴까? 그것은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행선을 하다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행선은 성공예감이 들었다. 행선을 시작한지 약 십분이 경과 되었을 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경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육단계 행선을 했다. 가능하면 발의 모양이나 형태를 떠올리지 않고 경쾌함이나 무거움, 단단함 등 느낌을 보고자 했다. 마음은 이미 어느 정도 삼매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새김은 분명했다.
행선할 때 새김이 분명하면 바닥 위에서 걷는 것 같다. 구름 위에서 걷는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런가? 언어적 개념이 배제 되었기 때문이다. 발을 들 때의 경쾌함, 발을 밀 때의 미끄러움, 발을 댈 때의 단단하고 차가움이 있을 때 다른 생각이 나지 않는다. 번뇌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 것이다.
행선할 때 집중이 잘되어서 행선이 스무스하게 진행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한시간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집중이 되지 않아 새김이 자꾸 끊어지면 행선이 지루하게 된다. 빨리 끝내고 싶어진다. 오분도 아득하게 느껴진다.
M선생의 견성콘서트
행선에서 형성된 집중을 좌선으로 가져 갈 수 있다. 이런 때 좌선은 거저먹기나 다름 없다. 삼매를 형성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좌선에서 형성된 삼매를 행선으로 가져 갈 수는 없다. 일어서는 순간 깨져 버린다.
재가우안거 2년째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매일 앉아 있는다. 이 정도 했으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뚜렷한 성과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생활태도에는 변화가 있다. 일체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이 가장 크다. TV를 보지 않은 지는 몇 해 되었다. 그러나 아직 유튜브는 끊지 못하고 있다.
하루일과 가운데 오전은 수행으로 보낸다. 오후가 되면 일을 한다. 일감이 있으면 일을 하고 일감이 없으면 유튜브 시청을 한다. 저녁도 마찬가지이다.
유튜브에서 종종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소위 견성채널이다. 자칭타칭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의 영상을 보는 것이다. 가장 주의깊게 보는 것은 M선생 유튜브이다.
M선생 유튜브를 오래 전부터 봤다. 중학교 국어교사출신이다. 퇴임한 이후 전국을 무대로 활약하고 있다. 유튜브를 보니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는 것 같다. 경상도의 절에서 법담하고 전라도의 절에서 법담한다. 이번주 토요일에는 서울이다. 수백명 들어 갈 수 있는 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법담하는 것을 보았다. 이를 ‘견성콘서트’라고 말할 수 있다.
M선생은 법담에서 “이것”을 강조한다. 지금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몇 년 전 들었을 때는 무슨 말 하는지 잘 몰랐다. 똑 같은 말만 반복하는 것 같았다. 마치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이것타령”만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근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 보니 ‘빤냣띠’와 ‘빠라맛타’에 대한 것임을 알았다.
부산 M선원 K선원장의 수행무용론
유튜브를 보면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속된말로 개나 소나 이것타령하는 것이다. 어떤 젊은 사람도 이것타령하는 것을 보고서 놀랐다. 손짓으로 이것을 알려 주고자 하는 노력이 누구를 닮아 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류에 아류가 출현하는 것처럼 보였다.
부산에 M선원이 있다. K선원장은 “이 일 하나밖에 없거든”이라고 말한다. 이것이라는 말 대신에 이 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전혀 필요없고 오직 이 일 하나다. 뭘 하든지 언제든지 이 일 하나밖에 없는 거거든. 하여튼 이거 하나 명확하게 하는 거 이게 공부니까.”라고 말한다.
부산 M선원 K선원장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답답했다.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거기에는 이론체계도 없고 수행체계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자주 듣다 보면 언젠가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 약장수가 있다. 약장수는 약을 팔 때 허벌난 소리를 한다. 이 약만 먹으면 다 낫는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런데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렇다는 것이다. K선원장은 “이것이 한번 확인 되버리면 하는 일 마다 걸림이 없고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아무 일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K선원장의 이것타령은 2014년에 들었다. 마치 만병통치약처럼 들렸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수행무용론이다. K선원장은 “설법을 듣는 것으로 공부합니다. 따로 좌선이라든가 화두참구 한다든지 그런 것을 요구 하지 않고 들으시고 선체험을 할 수 있도록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별도로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때 수행은 방편이 된다. 수행은 해도 그만이고 하지 않아도 그만이 되는 것이다. 오로지 자신의 입만 쳐다 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닫게 됨을 말한다. 이른바 ‘언하대오’이다.
이제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다. 언어적 개념을 타파하는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 수행에서 빤냣띠와 빠라맛타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실재를 보는 수행이다. 실재를 보기 위해서는 개념을 해체해야 한다. 개념을 해체하고 실재를 보기 위한 이론체계와 수행체계가 있는 것이다.
이것타령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론체계와 수행체계는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세 치 혀로 “이것뿐입니다. 이것뿐이라니까요. 지금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나 보이지 않습니까?”라며 책상을 탕탕 칠 뿐이다.
빤냣띠(槪念)에 대하여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개념과 실재를 구분하여 파악한다. 이는 이론과 수행이 체계화 되어 있어서 가능한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의 ‘위빳사나 수행방법론’에서 빤냣띠(槪念)에 대한 설명을 보면 다음과 같다.
“분명하게 설명하겠다. 명칭 빤냣띠, 뜻 빤냣띠라고 하는 모든 빤냣띠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머무는 것도 아니고, 무너지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분명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서 생각하고 숙고하는 마음에 드러나 는 것만으로 생겨나는 대상들이다.
어떤 사람들의 이름을 생각해 보라. 그러한 이름이 언제 생겨났는가? 머리 위에 있는가? 몸 안에 있는가?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가? 언제 사라져 가는가? 바르게 말하자면 그러 한 이름들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어느 곳에 머무는 것도 아니고 무너 지는 것도 아니다. 생각하고 숙고할 때만 마음에 드러나는 것일 뿐인 대상 아닌가?
사람들 모두가 기억하지 않고 잊어버리면 그러한 이름은 사라져 버린 것처럼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4아승기와 10만 대겁 전에 분명히 존재했던 수메다 (Sumedha) 수행자라는 명칭 빤냣띠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속에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것이다. 여자, 남자, 항아리, 옷 등의 모든 명칭 빤냣띠도 사람의 이름과 마찬가지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270-271쪽)
빤냣띠를 개념이라고 말한다. 언어적 개념을 빤냣띠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개념에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생멸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 모른다. 개념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생멸이 없는 것이다.
실재하는 것은 생멸이 있다. 눈으로 보는 형상, 귀로 듣는 소리 등 여섯 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생멸이 있다. 이는 실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실재하는 것에 대하여 빠라맛타라고 하는 것이다.
빤냣띠와 빠라맛타의 차이는 생멸에 달려 있다. 생멸하지 않고 영원한 것은 빤냣띠이이다. 오로지 명칭이나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나, 너, 남자, 여자, 관찰자, 주재자, 참나, 하느님과 같은 개념을 말한다.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언어적 개념에 지배되어
사람들은 언어적 개념에 지배된다. 나가 없음에도 나가 있다고 보는 것은 언어적 개념에 속고 있는 것이다. 언어적 개념에는 생겨나고 머물고 사라짐이 없다. 그럼에도 나가 있다고 보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다음과 같은 비유로 알 수 있다.
“마치 모든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존재의 다발에 의해
뭇삶이란 거짓이름이 있네.”(S5.10)
수행녀 바지라 장로니가 읊은 것이다. 악마 빠삐만이 “누가 이 뭇삶(衆生)을 만들었는가? 뭇삶을 만든 자는 어디에 있는가? 뭇삶은 어디에서 생겨나고 뭇삶은 어디로 사라지는가?”(S5.10)라는 질문에 답송한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악마는 언제나 부처님 가르침과 반대편에 서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분명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악마가 출현하기도 한다.
악마는 “누가 이 뭇삶(중생)을 만들었는가?”라고 물었다. 여기서 중생이라는 말은 개념이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수레는 여러 부품이 결합되어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부품으로 분해해서 펼쳐 놓았을 때 수레는 없다. 수레는 단지 명칭으로만 있는 것이다. 수레라는 실체는 없다. 마찬가지로 이 몸과 마음을 오온으로 분해해 놓으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나는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적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빤냣띠이다.
빠라맛타(實在)에 대하여
빤냣띠가 있으면 빠라맛타도 있다는 것이다. 이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다. 빤냣띠와 같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다. 순간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빠라맛타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실재하는 물질과 정신들은 그것들처럼 실재하지 않으면서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법들이 아니다. 진실로,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존재하는 것에 따라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에 따라서 여겨지고 알 수 있는 성품들이다. 그러므로 그 실재하는 물질과 정신들을 실재의(bhūtaṭṭha 實在義) = 진실의(saccikaṭṭha 眞實義) = 옳은 의미라고 한다. ‘틀리지 않고 옳은 성품들’이라는 뜻이다. 옳은 모습은 다음과 같다.
눈으로 형색물질을 보는 이는 ‘모양을 본다’, 혹은 ‘보이는 형색이 있다’라고 안다. 이렇게 알 수 있는 형색물질은 금, 은, 루비라고 생각되는 환술로 만들어 낸 것, 물이라고 생각되는 신기루처럼 옳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는 그대로 옳기도 하다. 실제로 존재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보이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보는 것이 생 겨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눈으로 보이는 형색물질은 실재의 (bhūtaṭṭha 實在義) = 진실의(saccikaṭṭha 眞實義)이다. 진실의(saccikaṭṭha 眞實義)라면 수승의 (paramattha 殊勝義)라고도 할 수 있다.”(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 253-254쪽)
실재하는 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눈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귀로 분명히 듣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진실된 것이다. 그래서 실재로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 궁극적 실재, 빠라맛타(paramattha: 殊勝義)라고 하는 것이다.
체계화 되어 있는 부처님의 수행법
위빠사나수행은 체계화되어 있다. 이는 초기경전 자체가 수행지침서나 다름 없다. 쌍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는 56가지 주제가 사실상 수행지침서나 다름 없다. 거기에는 십이연기, 오온, 육처 등 갖가지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이 있다.
논서는 니까야(초기경전)의 참고서와 같은 것이다. 아비담마논장과 청정도론이 대표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켜 놓은 것이기도 하고 또한 수행방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논서이기도 하다. 특히 청정도론이 그렇다.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머리맡에 두고 읽는다. 현재까지 읽은 것은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 그리고 아리야와사법문과 담마짝까법문이다. 한국마하시선원의 일창스님이 주어서 읽고 있다. 모두 다 읽었다. 특히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1권과 2권은 두 번째 읽고 있다.
부처님의 수행법은 체계화 되어 있다. 초기경전과 논서를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위빠사나 기초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과정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 방법대로만 수행하면 스승이 없어도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다.
물질법과 정신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 견성
이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불교에서 볼 수 있다. 선불교 전통이 있는 한국불교에서 “이것타령”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어떤 이는 선원을 열어서 자신의 입만 바라보면 언젠가는 깨달을 것이라고 말한다. 부산 M선원의 K원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존 보고 듣고 배운 지식들 그걸 가지고 들으면 자기가 알고 있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어요. 자기의 견해와 생각과 관념들이 공부를 가로 막는 큰 장애물이거든요. 그거만 내려 놓으시면. 그걸 내려 놓고 설법하는 사람의 설법만. ‘도대체 무슨 얘기 할려고 하는가? 뭘 가르켜 하는가?’ 거기에만 관심을 집중해서 들으시면 인제 자기 한계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부산 M선원 K선원장 대담, 불교TV)
K선원장은 자신의 말만 들으면 깨달을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이론체계도 없고 수행도 없다. 그래서일까 법문을 들어 보면 “오로지 이것뿐입니다. 지금 이렇게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 외에 다른 것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유튜브에는 수많은 견성채널이 있다. 이구동성으로 책상을 탕탕치며 이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법사의 말을 경청하지만 답답한 질문한다. 법사는 책상을 탕탕치며 “이것입니다.”라고 말한다.
M선생은 전국을 돌며 견성콘서트를 하고 있다. 유심히 들어 보니 별다른 것이 아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명색에 대한 것이다. 또한 빤냣띠와 빠라맛타에 대한 것이다. 위빠사나 1단계 지혜에 해당되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같은 말이라도 쉽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는 경험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말을 돌려 말한다. 이론적으로만 아는 사람이다. 머리로만 파악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것타령 하는 사람중에는 아류도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젊은이가 손짓을 하면 이것타령 하는 것을 보았는데 부산 M선원 K원장의 흉내를 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타령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위빠사나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또한 칠청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견해청정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는 언어적 개념, 즉 빤냣띠를 타파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매일 행선과 좌선을 하고 있다. 스승이 없어서 마하시 사야도의 논서를 스승으로 하고 있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것이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파악하는 것이다.
나라는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환원해서 관찰해야 한다. 물질과 정신을 따로따로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구분해서 새기고 환원해서 새기면 나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실재를 보는 것이기 때문에 무상, 고, 무아가 드러난다. 물질법과 정신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다. 이른바 견성이다.
밥 먹을 때도 새기라고
위빠사나 수행처에서는 행선과 좌선을 한다. 또한 일상에서도 새김을 유지하라고 말한다. 심지어 밥 먹을 때 새기라고 말한다. 어떻게 하는가? 이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알 수 있다.
“식사를 할 때 (음식을) 보면 ‘본다, 보인다’하며 새겨라. 밥 덩어리를 만드는 내내 손의 여러 동작들을 ‘만든다, 만든다’하며 새겨라. 밥 덩어리를 가져오면 ‘가져옴, 가져옴’하며 새겨라, 고개를 숙이면 ‘숙인다’하며 새겨라. 입술에 닿으면 ‘닿음’하며 새겨라. 입술을 열면 ‘연다’하며 새겨라. 먹으면 ‘먹는다, 먹는다’하며 새겨라, 입술을 다시 닫으면 ‘닫는다’하며 새겨라. 손을 아래로 내리면 ‘내린다. 내린다’하며 새겨라. 접시에 닿으면 ‘닿는다’하며 새겨라, 고개를 다시 들면 ‘든다’하며 새겨라. 그 다음 계속해서 씹을 때마다 ‘씹는다, 씹는다’하며 새기면서 먹으라. 맛을 알면 ‘안다, 안다’하며 새겨라. 삼키면 ‘삼킨다’하며 새겨라. 목구멍 속, 장 속에 닿으며 내려가는 것을 ‘닿는다, 닿는다’하며 새겨라. 이러한 방법으로 밥을 한 숟갈씩 먹을 때마다, 반찬이나 국을 먹을 때마다 자세하게 새겨라.”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3쪽)
밥 먹는 것도 수행이다. 일상에서 수행 아닌 것이 없다. 이는 늘 새김이 유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정말 이렇게 먹는 것이 가능할까? 이에 대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수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생겨나는) 차례에 따라 새기지 못하기 때문에 놓치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바꾸려고 하는 여러 마음들도 가끔씩은 새기지 못하고 알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실망하지 말라. ‘자세하게 새길 것이다’라고 마음을 두고 정성을 기울여 집중하여 새기면 새길 수 있는 것이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리하여] 지혜가 성숙해 지면 비로소 이곳에서 설명한 것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도 쉽게 새길수 있을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3쪽)
마하시 사야도는 실망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 잘 새겨지지 않다고 하더라도 노력하다 보면 더 많이 새길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낮이나 밤이나 끊임없이 새기다 보면
행선과 좌선 할 때 새김이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새김이 힘들다. 천천히 하지 않는 한 새김을 유지하기 힘들다. 몸과 마음이 특별한 상태로 변형되어 있지 않는 한 일상에서 하루종일 새김이 있기 힘들 것 같다. 선원에서 집중수행하며 살면 가능할지 모른다.
일상에서 새김을 유지하고자 한다. 걸을 때 “왼발, 오른발” 하며 걷는 것도 새김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무언가 행위를 할 때 정신과 물질로 구분하여 따로따로 새기고자 노력한다.
노력하면 성과가 있을 것이다. 마하시 사야도는 “이러한 방법으로 잠들어 있을 때를 제외하고 낮이나 밤이나 하나의 새김으로 새기며 지내면 머지않아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물질과 정신을 바로 그 순간에 새겨 알 수가 있게 되어 ‘생멸의 지혜’등 특별한 위빳사나 지혜들이 차례대로 생기는 것을 직접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위빳사나 수행방법론 2권, 77쪽)라고 말했다.
유튜브 견성채널을 보면 이제 그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이것만 알면 깨닫는다고 하는데 이를 견성이라고 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견성이다. 그런데 이런 견성은 칠청정에서 견해청정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위빠사나 16단계에서 1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수행을 매일 하고 있다.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늘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나라고 여기고 있는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면 나라는 것은 없게 된다. 언어적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빤냣띠가 사라지면 빠라맛타가 드러난다. 이는 실재에 대한 것이다.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조건에 따라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이다. 낮이나 밤이나 끊임없이 새기다 보면 무상, 고, 무아의 성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견성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깨달은 자일까?
이것을 말하는 자들은 견성하기는 코로 손만지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를 듣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듣는 것 같다. 초기경전과 아비담마 논서를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이다.
청정도론에 견해청정이라 하여 견성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이는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불교에서 견성, 즉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칠정정에서 ‘견해청정’에 대한 것이고 또한 위빠사나 16단계 지혜 중에서는 1단계인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매일 행선과 좌선을 하면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여 새기고 있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관찰하고 새기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법의 성품을 볼 수 있다. 선불교의 견성은 위빠사나 1단계에 해당된다. 나는 매일 견성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깨달은 자일까?
2024-09-22
담마다사 이병욱
'수행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백권당 금강좌(金剛座)에 앉아 있으면 (2) | 2024.09.24 |
---|---|
참을 수 없는 오토바이 소음 (3) | 2024.09.23 |
이번 생에 수행자로 사는 사람은 (6) | 2024.09.21 |
서쪽하늘을 벌겋게 달군 노을처럼 (3) | 2024.09.20 |
현재 조건에 만족하는 삶 (10) | 2024.09.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