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기

백권당 금강좌(金剛座)에 앉아 있으면

담마다사 이병욱 2024. 9. 24. 10:14

백권당 금강좌(金剛座)에 앉아 있으면
 
 
금강좌에 앉아 있으면 부처가 된 듯하다. 세상에 미천한 자도 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 거룩한 자가 된 것 같다. 어떤 땔감이든지 불꽃은 광채, 광명에 있어서 똑같다.
 
재가우안거 67일째이다.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오늘부터 여행이 시작되는 날이다. 오전 열 시에는 출발해야 한다. 세 시간 여가 남았다. 이 시간을 활용해야 한다. 평소와 같이 백권당으로 갔다.
 
여행은 삼박사일 일정이다. 월말이 끼여 있다. 주거래업체 월말정리를 해야 한다. 9월 마감내역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노트북을 가져가긴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여러모로 불편하다. 아침 일찍 나와서 가장 먼저 마감내역서 작성 작업을 했다.
 
마감내역서는 한시간 가량 걸렸다. 오전 여덟 시가 되었다. 우안거기간이므로 행선과 좌선을 했다. 행선을 오분하다 곧바로 좌선에 들어갔다. 삼십분 좌선하는 것이다.
 
좌선대를 금강좌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앉아 있던 그 자리를 말한다. 두께가 십센티 가량 되는 푹신한 방석 위에 두께가 이삼센티 되는 레자방석 네 개를 올려 놓은 것이 나의 금강좌이다.
 

 
금강좌에 앉았다. 자리에 앉으면 마음이 편안하다. 눈을 감는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관찰한다. 마하시 방식대로 하는 것이다.
 
오늘 좌선에서는 삼매가 형성되지 않았다. 삼매가 형성되면 명상하는 맛이 난다. 배의 부품과 꺼짐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저 지켜 보는 것 밖에 달리 할 것이 없다.
 
좌선 중에 이런저런 생각이 일어났다. 명상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 자리를 일어나고 싶을 정도의 생간은 아닌 것이다. 경전적 지식에 대한 것이 많다.
 
누구나 자리에 앉아 있으면 거룩해 보인다. 명상홀에서 방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습을 보면 모두 부처님처럼 보인다. 부처님도 저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백권당 금강좌는 4년 되었다. 2020년 1월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 사무실을 반으로 나누어 만들었다. 매일 앉아 있고자 한 것이다.
 
명상공간은 바로 옆에 있다. 책상과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언제라도 앉을 수 있다. 작년 우안거 때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앉기 시작했다. 올해 두 번째 안거에도 매일 앉는다.
 
 
“나는 곧바로 알아야 할 것을 곧바로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바라문이여, 나는 깨달은 님입니다.”(Stn.558)
 
 
부처님이 바라문 쎌라에게 말한 것이다. 깨달은 자, 즉 부처에 대한 설명이다. 정등각자를 말한다.
 
정등각자는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를 말한다. 그래서 청정도론에서는 여래십호에서의 정등각자에 대한 게송으로 소개 되어 있다.
 
알아야 할 것은 사성제를 말한다. 그런데 게송을 보면 닦아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이 나온다. 이는 도성제와 집성제를 말한다.
 
사성제는 인과의 구조로 되어 있다.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결과, 그리고 괴로움의 소멸방법과 괴로움의 소멸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결과부터 먼저 설했다.
 
여기 문제가 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문제의 원인을 알 수 있다. 괴로움은 어떠할까?
 
지금 괴로움에 당면해 있다. 삶 자체가 괴로움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를 풀려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는 것처럼 당연히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괴로움의 원인을 먼저 말하지 않고 괴로움을 먼저 말했다. 괴로움의 결과를 먼저 말한 것이다. 이것이 고성제이다.
 
부처님은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 하여 고성제를 가장 먼저 설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문제를 풀 수 없다.
 
지금 괴롭다면 먼저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이를 사고와 팔고로 설명했다. 결론적으로 오온에 대한 집착이 괴로움이라고 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면 문제를 풀 수 있다. 문제는 오온에 대한 집착이다. 오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괴로움이 발생된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갈애이다.
 
갈애로 인하여 괴로움이 발생되었다.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로 인하여 괴로움이 발생된 것이다.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세 가지 갈애로 인한 것이다.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 다음에는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시켜야 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시키는 방법도 알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멸성제와 도성제이다.
 
게송에서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았다’라는 것은 도성제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서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렸다’라는 것은 멸성제에 대한 것이다. 게송에서 도성제와 멸성제만 언급되어 있다. 이는 사성제에 있어서 도에 대한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출세간적인 도이다.
 
보살은 출세간적 도를 닦아 부처가 되었다. 세간적 도를 닦아 부처가 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간적 도와 출세간 도는 어떻게 구분되는가? 마하시 사야도의 담마짝까법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 정견으로 구분했다.
 
 
1) 업자산정견
2) 선정 정견
3) 위빳사나 정견
4) 도 정견
5) 과 정견
 
 
다섯 가지 정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업자산정견, 선정정견, 위빳사나 정견은 세간적인 정견이다. 이는 사성제에서 고성제에 집성제에 해당된다. 도 정견과 과 정견은 출세간적 정견이다. 이는 사성제에서 멸성제와 도성제에 해당된다.
 
위빠사나 수행은 도와 과를 이루기 위한 수행이다. 도와 과를 이루어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하고 열반에 들어 윤회를 끝내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도와 과는 출세적 것이기 때문에 세간적 지혜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는 출세적 지혜로 이룰 수 있음을 말한다.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집을 읽다 보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많다. 다섯 가지 정견에 대하여 “성스러운 도 네 가지를 얻으면 과의 지혜 네 가지도 저절로 얻게 됩니다.”(203쪽)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과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 특별히 노력해야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앞의 정견 네 가지, 즉 업자산정견, 선정정견, 위빠사나 정견, 도 정견, 이렇게 네 가지만 얻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가지 도 구성요소는 크게 근본 도 구성요소, 위빠사나 도 구성요소, 성스러운 도 구성요소로 나뉜다. 여기서 수행자가 애써 해야 할 일은 위빠사나 도 구성요소까지이다.
 
성스러운 도 구성요소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스러운 도 구성요소를 처음부터 생겨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앞부분 도라는 위빳사나 도 구성요소들이 생겨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208쪽)라고 말한다.
 
금강좌에 앉아 있으면 삼매가 형성된다. 이는 노력에 따른 것이다. 배의 부품과 꺼짐을 지속적으로 관찰하면 삼매가 형성된다. 이는 마하시 사야도가 “물질-정신의 바른 성품을 알도록 집중해서 관찰하고 있으면 위빳사나 삼매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209쪽)라고 말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근접삼매와 유사한 찰나삼매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집중해서 관찰하면 마음의 집중됨인 특별한 삼매가 생겨나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그때 거듭 관찰할 때마다 관찰해서 알아지는 물질이 따로, 관찰해서 아는 정신이 따로 구분되어 분명할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집중됨인 삼매를 의지해서 물질과 정신을 구별 하여 아는 특별한 위빳사나 지혜가 생겨난 것입니다.”(담마짝까법문, 210쪽)
 
 
여기서 위빠사나 지혜는 16단계 지혜라고 볼 수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1단계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에 대하 것이기도 하다.
 
위빠사나수행은 해체해서 보는 것이기도 하다. 집착된 무더기를 정신과 물질로 구분해서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정신따로 물질따로 새기다 보면 오로지 정신과 물질만 남게 되어서 텅 빈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무상, 고, 무아로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를 특별한 위빳사나 지혜라고 했다.
 
도는 단계적으로 완성된다. 도는 위빠사나 수행으로 완성된다. 먼저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지혜(1단계)’, ‘조건을 파악하는 지혜(2단계)’와 같은 위빠사나 지혜 등을 얻어 단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거듭거듭 관찰하면서 위빳사나 도 구성요소들이 성숙되고 무르익어서 머지않아 성스러운 도로 열반을 직접 실현할 수 있습니다.”(213쪽)라고 말하는 것이다.
 
알아야 할 것을 아는 자는 부처이다. 사성제를 아는 자는 부처인 것이다. 그런데 부처는 닦아야 할 것을 이미 닦은 자이고, 또한 버려야 할 것을 이미 버린 자이기도 하다. 이는 사성제에서 도와 관련된 것이다. 사성제에서 도성제와 멸성제는 도에 대한 것이다. 이는 출세간의 도를 말한다.
 
부처는 도를 이룬 자이다. 그런데 부처가 되기 전에는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행과 관련된 것은 고성제와 집성제이다. 이는 세간 적인 도에 대한 것이다.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출세간적 도가 성취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출세간의 도가 성취되면 세간의 도는 이미 성취된 것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게송에서는 고성제와 집성제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첫 구절에서 알아야 할 것을 아는 것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오늘도 백권당 금강좌에 앉았다. 작은 사무실 공간이지만 부처님이 앉았던 보리수 나무 아래 금강좌 못지 않다. 누구나 금강좌에 앉아 있으면 부처가 된다.
 
지금 여기서 앉아 있는 자리가 금강좌이다. 금강좌에 앉아 있으면 스스로 거룩한 자가 되는 것 같다. 스스로 대견해 보이고 스스로 존경스러워 보인다.
 
 
2024-09-24
담마다사 이병욱